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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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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근혜 . . . . 78회 일치
         |퇴임일 = 2017년 3월 10일
         2017년 3월 10일 [[대한민국 헌법재판소|헌법재판소]]에서 만장일치로 [[박근혜 대통령 탄핵|탄핵 소추안을 인용]]하면서 박근혜는 대통령직에서 파면, 헌정 사상 최초로 탄핵된 대통령이라는 불명예를 안았다.<ref>{{웹 인용|url=https://www.ccourt.go.kr/cckhome/kor/event/adjuList.do|제목=선고목록 및 결정문 - 헌법재판소|확인날짜=2018-12-13}}</ref><ref>{{뉴스 인용|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0&oid=056&aid=0010429073|제목=[영상]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언어=한국어|확인날짜=2017-03-10}}</ref> 탄핵 후에는 곧바로 3월 21일 검찰에 소환되어 대한민국의 전직 대통령 중 [[전두환]], [[노태우]], [[노무현]]에 이어 네 번째로 검찰 수사를 받았고,<ref>{{뉴스 인용 |title=[박근혜 검찰 출석] 최순실 ‘곰탕’·이재용 ‘자장면’…박근혜는? 미리 준비한 ‘도시락’ |url=http://news.donga.com/3/all/20170321/83428508/2 |work=동아일보 |date=2017-03-21 |accessdate=2017-05-18}}</ref> 3월 31일에는 [[구속영장]]이 발부되어 [[서울구치소]]에 수감되면서 전두환, 노태우에 이어 세 번째로 구속된 전직 대통령이 되었다.<ref>{{뉴스 인용 |title='최순실 국정농단 공범' 박근혜 구속…"혐의소명·증거인멸"(종합) |url=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03/30/0200000000AKR20170330171251004.HTML |work=연합뉴스 |date=2017-03-31}}</ref> 구속된 상태에서 수사와 재판을 진행하던 중에 2017년 10월 16일 6개월인 1심 구속기간이 만료되었으나 검사가 앞선 구속영장에 적시하지 않은 뇌물 공소사실에 대하여 다시 구속영장이 발부되어 구속기간이 최대 6개월 연장되었다. 이에 대하여 박 전 대통령 측은 반발하였고 모든 변호인단이 사임하였다.<ref>[http://biz.heraldcorp.com/culture/view.php?ud=201710171022138598395_1
         1961년 5월 15일 오후 10시 경, 거사를 위해 집을 나서려던 육군 제2군 부사령관 [[박정희]] 소장에게 부인 육영수가 "근혜 숙제 좀 봐주세요."라며 가족간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면담을 에둘러 요구하였다. 이에 박 소장은 잠시 방에 들러 숙제를 하고 있던 초등학교 5학년생 박근혜와 곁에서 잠든 장모 [[이경령]]과 3녀 근영, 장남 지만을 훑어본 뒤에 집을 나선다. 이 때 "무슨 숙제입니까?"라는 거사 동지 [[장태화]]의 물음에 박정희는 "어, 뭐 그림 그리는 거야!"라고 답한다. 하지만 박근혜는 아버지의 기척은 알았으나 자신이 무슨 숙제를 하고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후술하였다.
         박근혜는 [[1997년]] [[12월 2일]] 사촌 오빠 [[박재홍 (1941년)|박재홍]]의 소개로 [[한나라당]]의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선거|제15대 대통령 선거]] 후보였던 [[이회창]]과 만났다. 이후 [[1997년]] [[12월 10일]]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선거|제15대 대통령 선거]] 이회창 지지를 선언하며 한나라당에 입당하였다. 이후 이회창의 권유로 [[1998년]] [[4월 2일]] 한나라당의 후보로 [[대구광역시]] [[달성군]]의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당선되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라는 점과 미혼 여성 정치인이라는 점 등으로 많은 주목을 받았다. 출신 성분은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보수 진영 및 영남, 어머니인 [[육영수]]의 고향인 충청 지역의 지지를 얻는 데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이후 [[2000년]] 한나라당의 부총재로 선출되었지만 [[2002년]] 2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회창]]을 비판하며 한나라당에서 탈당하였다. 이후 [[한국미래연합]]을 창당<ref>[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158351&ctg=10 한국미래연합 창당…대표 박근혜의원 - 2002-05-17 중앙일보]</ref> 하였으나 대선 전에 복귀하였다. [[2002년]] [[5월 12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 [[5월 13일]]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만나 회담을 하고<ref name="visit_NK">{{웹 인용 |url=http://www.voanews.com/Korean/archive/2002-05/a-2002-05-14-12-1.cfm |제목=박근혜 의원, 북한방문 마치고 서울로 귀환 - 2002-05-14<!-- 봇이 붙인 제목 --> |확인날짜=2009-02-10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60722010557/http://www.voanews.com/Korean/archive/2002-05/a-2002-05-14-12-1.cfm |보존날짜=2006-07-22 |깨진링크=예 }}</ref> [[5월 14일]] 서울특별시로 돌아왔다.<ref name="visit_NK"/>
         [[2006년]] 5월 20일 지방 선거 유세 중 [[지충호]]가 휘두른 문구용 칼에 피습당하여 안면에 깊은 자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당원들에게 선거 판세를 물어보는 모습을 보여 오히려 당 안팎에서 높은 지지를 얻는 계기가 되었다. [[지충호]]는 이 사건으로 구속되었다. 이 사건은 [[2006년]] [[5월 20일]] 박근혜가 [[경기도]] [[군포]]와 [[인천]] 지원 유세를 마치고 [[오세훈]] 서울시장 후보 지원유세에 참가하던 중 19시 20분쯤 신촌 현대백화점 앞에서 지방선거 지원유세를 벌이다 지충호에게 피습당해 얼굴을 크게 다친 사건이다. 지충호가 휘두른 흉기는 10 cm 가량의 커터칼이다. 당시 지충호는 인천에서 버스를 타고 신촌까지 온 뒤 범행을 위해 4시간을 기다린 후 오세훈 서울시장 지원연설을 위해 단상에 박근혜가 오르는 찰나 지충호는 자신이 가진 커터칼로 11센티미터의 길이에 걸쳐 박근혜의 턱을 그었다.<ref>이상윤, 《안철수 등의 한판승부 - 박근혜 벗기기》, 높은새, 2011, p.19-24</ref> 당시 [[대전광역시장]] 선거에서 한나라당의 박성효 후보는 열린우리당의 염홍철 후보에게 지지도에서 뒤지고 있었다. 그런데 병원에서 수술을 받은 직후 박근혜가 '대전은요?'라고 선거 판세를 물어본 것이 알려지면서 판세가 역전되었고 이후 지방 선거에서 박성효 후보는 염홍철 후보에게 근소하게 승리하였다.
         이명박이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한나라당에는 친이명박 계열과 친박근혜 계열의 갈등이 있었다. 한나라당 내에서 친박계 의원들의 숫자는 2008년 5월 18대 총선 직후에는 당내외를 합쳐 50여명 정도였고, 2011년 6월 비공식적으로 90 ~ 100명 정도 되는 것으로 추산되었다.<ref>[http://www.sisapress.com/news/articleView.html?idxno=55182 '월박' 바람, 수도권까지 흔든다] 시사저널</ref>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이명박의 대통령 선거를 직접적으로 도와준 [[이재오]], [[이방호]] 등이 한나라당의 주요 직책을 맡았으며, 상대적으로 박근혜 계열의 정치인들은 홀대를 받았다.
         미국산 쇠고기 반대 촛불 시위가 있었던 2008년 6월 박근혜는 "근본 대책이 나와야 한다"는 원론적인 얘기만 한 차례 한 뒤 줄곧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촛불집회가 본격적인 거리 투쟁으로 비화된 5월에도 그는 당을 떠난 친박 측근들의 복당 문제 얘기를 주로 했다. 이후 계속되는 복당 요구에 네티즌들의 의해 '복당녀'라는 별명이 생기며 비판받기도 하였다.
         2010년 7월 10일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 선거]] 출마를 공식 선언하였다. 2012년 7월 5일 [[이상일]] 캠프 대변인은 오전 10시에 영등포 타임스퀘어 광장에서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하기로 정하였다고 브리핑을 통하여 밝혔다. 이 대변인은 "각계각층 국민들이 다니는 열린 공간이라는 점이 고려되었다"고 설명하였다. 캠프명은 '국민행복캠프'로 정하였다고 이 대변인은 덧붙였다.<ref>[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2/07/05/0200000000AKR20120705160300001.HTML?sns 박근혜 10일 영등포 타임스퀘어서 대선출마 선언] 연합뉴스 2012년 7월 5일</ref>
         한편 선거 기간 중이던 2012년 11월 22일 무소속 이건개 후보가 박근혜에 대한 지지를 선언, 사퇴하였다. 이튿날 무소속 [[안철수]] 후보 역시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며 사퇴, 단일화를 이뤄냈다. 이후 후보로 등록하였으며 기호 1번을 차지하게 되었다. [[2012년]] [[11월 25일]] 국회의원직 사퇴 기자회견을 갖고 사직서를 제출하였다. 이후 [[2012년]] [[12월 10일]] 박근혜는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하면 정계를 은퇴하겠다고 선언하였고, 국회의원직 사직서를 [[강창희 (1946년)|강창희]] [[국회의장]]이 수리함에 따라 박근혜 후보는 15년간의 의정 활동을 마치게 되었다.
         박근혜 후보는 중앙선관위 주최의 대통령선거 후보자 TV토론회에 민주통합당 문재인, 통합진보당 [[이정희 (1969년)|이정희]] 후보와 함께 참석하였다. 당시 이정희 후보는 "박근혜 떨어뜨리려 나왔다" 등의 발언을 하는 등, 박근혜 후보에 대하여 노골적인 공격을 하였고, 시청자들의 눈쌀을 찌푸리게 하였다. 이로 인하여 대선 후보 토론회에 지지율 1% 후보(이정희)가 참여하는 것이 적합한지에 대한 논란이 빚어지기도 했다. 1차, 2차 TV 토론회에는 박근혜·문재인·이정희 후보가 참여해 치열한 공방을 주고받았다, 선거 막판인 12월 16일 [[이정희 (1969년)|이정희]]가 후보 사퇴함에 따라 같은 날 오후 시행된 토론회에는 박근혜, 문재인 후보가 참석하였고, 양자토론을 가졌다. 이후 박근혜는 [[2012년]] [[12월 19일]]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 선거|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1577만 3128표를 득표하여 문재인을 누르고 당선되었다.<ref>[http://news.chosun.com/choice1219/choice1219_now.html 제18대 대통령 선거]</ref> 박근혜의 임기는 원래 [[2013년]] [[2월 25일]]부터 [[2018년]] [[2월 24일]]까지였으나, [[2017년]] [[3월 10일]] [[대한민국 헌법재판소|헌법재판소]]의 [[박근혜 대통령 탄핵 소추|탄핵소추안]] 인용 결정에 따라 대통령직에서 파면되어 임기를 못 채우고 물러나게 되었다.
         한편 박근혜는 2013년 5월 미국을 방문하였다. 이후 박근혜는 북한 문제 등에 관한 내용에 대해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회담을 하였고, 한미 동맹을 글로벌 동맹으로 발전시키는 '한미동맹 60주년 선언'등에 대하여 합의하였다.
         [[2008년]] [[2월]] [[숭례문 방화사건|방화 사건]]으로 소실된 숭례문이 복원되었다. [[2013년]] [[5월 4일]], 숭례문 복원 기념식이 열렸다.<ref name="news.chosun.com">{{웹 인용 |url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5/04/2013050400736.html|제목 = 숭례문 다시 우뚝…박근혜 대통령 "희망의 문, 새 시대의 문"|저자 = 이지은|날짜 = 2013-05-04|확인날짜 = 2013-05-04}}</ref> 박근혜는 이 행사에 참석해 "숭례문 복구가 우리 문화의 저력과 우리 것에 대한 자부심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라고 연설했으며 "한류가 전 세계 이목을 집중시키고 새로운 지구촌 문화의 흐름으로 자리 잡은 지금, 대한민국이 진정한 문화강국으로 우뚝 서기 위해서는 우리 문화의 뿌리인 전통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계승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라고 강조했다.<ref name="news.chosun.com"/> 또"기와 한 장, 단청 하나에도 혼신의 노력을 담아 땀 흘려주신 수많은 장인 여러분의 노고와 대를 이어 길러온 소나무를 아낌없이 기증해주시고 7억원이 넘는 성금을 모아 보내주신 국민 여러분의 사랑이 깃들어 있다"며 국민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ref name="news.chosun.com"/>
         2013년 5월 7일 밤(미국 기준시) 홍보수석비서관실의 [[윤창중]] 대변인이 박근혜 대통령의 첫 해외 순방인 미국 방문 중 술을 마시고, 주 미국 한국대사관에서 지원한 인턴 여성의 둔부 근처에 손을 댄 행동과 다음 날 새벽 호텔에서 과도하게 노출된 상태로 해당 여성을 마주했다는 의혹이 발생, [[윤창중]]은 바로 성추행으로 미국 경찰에 신고되었으며, 이러한 사실이 윗선에 보고되어 경질되었다는 내용이 언론에 유포되었다.<ref>[http://www.yonhapnews.co.kr/politics/2013/05/12/0501000000AKR20130512057900001.HTML "윤창중, 靑진술서 '엉덩이 터치·본인 노팬티' 시인"]《연합뉴스》2013년 5월 12일 신지홍 기자</ref><ref>[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16433 윤창중의 출국 누가 도와줬나?]《시사인》2013년 5월 11일 김영미 국제문제전문 편집위원</ref> 이 사건으로 직속 상급자인 [[이남기]] 홍보수석비서관(차관급)이 사과발표를 하였으며, 사의를 표명하였다. [[이남기]]의 사직서는 5월 중순 수리되었다.<ref>[http://news1.kr/articles/1129691 靑 "윤창중 사건, 美측에 조속한 수사 진행 요청"]《뉴스1》2013년 5월 12일 장용석 기자</ref><ref>[http://www.hani.co.kr/arti/politics/bluehouse/586998.html 이남기 홍보수석 사의…허태열 "책임 피하지 않을 것"]《한겨레》2013년 5월 12일</ref> 또한, 이남기 홍보수석비서관과 윤창중 전 수석대변인 간의 진술 차이, 대통령에 대한 사과 표현 등이 문제시되어 [[허태열]] 대통령비서실장(장관급)이 공식사과를 발표하였다.<ref>[http://imnews.imbc.com/replay/newsflash/3281506_7612.html 靑 허태열 공식 사과…이남기 홍보수석 사의]《MBC》2013년 5월 12일</ref>
         세월호 사고의 파동이 계속되고 있던 5월 초 석가탄신일을 맞아 박근혜는 조계사를 직접 방문하여 석가탄신일 법요식에 참석하였다. 그녀는 석가탄신일 축하메시지에서 세월호 사고에 대하여 거듭 사과하였다.
         5월 19일, 박근혜는 TV와 라디오로 전국에 중계된 대국민담화를 통해 세월호 사고에 대하여 다시 사과하였다. 박근혜는 ‘세월호 사고의 모든 책임은 대통령인 저에게 있다’고 밝혔다. 그는 재발 방지 대책으로서 구조 및 사고대처 미흡을 책임을 물어 해양경찰청을 해체하고, 안전정책을 총괄하는 안전행정부 역시 해체에 가깝게 개혁하며, 안전정책 및 구조를 담당하는 [[대한민국 국민안전처|국민안전처]]를 신설하는 등의 방안을 제시하였다.
         한편, 세월호 사고 수습 방안의 하나로 청와대와 내각의 인적쇄신이 단행되었는데, 이는 후보자의 잇따른 낙마로 인하여 인사 파동이라는 말까지 발생하게 하였다. 5월 19일 대국민담화 이후 5월 22일 내정한 안대희 국무총리 후보자가 과다 수임료 논란으로 일주일 만에 사퇴하였고, 6월 10일 내정한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는 부적절한 교회 강연 발언 논란으로 2주일 만에 사퇴하였다. 박근혜는 결국 6월 28일 정홍원 국무총리를 유임하겠다고 대변인을 통하여 발표하였다. 잇따른 총리 후보자의 낙마는 큰 논란이 되었으며, 매스컴의 많은 문제제기 및 여론의 강한 비판을 불러왔다. 또한, 6월 13일 개각에서 내정한 7명의 장관 내정자 중 2명이 7월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제기된 각종 의혹 등으로 인하여 사퇴하였다.
         [[2015년]] [[5월 20일]] 이후 [[중동호흡기증후군]](MERS) 환자가 국내에서 처음으로 발생, 급속히 확산되자 정부의 초기 대응이 부실했다는 지적이 쏟아졌다.<ref>{{뉴스 인용|저자=고성호·배혜림·이재명 기자 |제목=“메르스 컨트롤타워 있나” 여야, 정부 대응혼선 질타 |url=http://news.donga.com/3/all/20150610/71737244/1 |뉴스=동아일보 |날짜=2015-06-10 |확인날짜=2016-10-25}}</ref> 박근혜 대통령은 방미 일정을 연기하며 메르스 총력 대응에 나서겠다고 밝혔지만,<ref>{{뉴스 인용 |제목=박근혜 대통령 방미 연기, 메르스 총력 대응 나선다 |url=http://dkbnews.donga.com/3/all/20150610/71751926/3? |뉴스=도깨비뉴스 |날짜=2015-06-10 |확인날짜=2016-10-25}}</ref>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은 지속적으로 하락하여 2015년 6월 3주 기준(95% 신뢰수준, ±3.5%) 긍정평가 29%, 부정평가 61%로 나타났다.<ref>{{뉴스 인용|저자=장예진 기자 |제목=<그래픽> 박근혜 대통령 지지율 추이 |url=http://www.yonhapnews.co.kr/photos/1991000000.html?cid=GYH20150619001000044 |뉴스=연합뉴스 |날짜=2015-06-19 |확인날짜=2016-10-25}}</ref>
         2016년 12월 3일 오전 4시10분,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 정의당과 무소속 의원등 171명이 헌법과 법률 위반으로 인하여 "대통령(박근혜) 탄핵소추안"을 국회에 발의했다.<ref name="impeachment">{{뉴스 인용|저자=송수경·서혜림|제목='야3당+무소속' 의원 171명, 朴대통령 탄핵소추안 발의|url=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6/12/03/0200000000AKR20161203006600001.HTML|뉴스=[[연합뉴스]]|날짜=2016/12/03 04:10}}</ref> 그리고 12월 9일 가결됨에 따라 권한이 정지되었으며,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가 탄핵소추안을 인용하였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연말정산 5월 재정산 소식, 이석기 전 의원 내란선동 유죄 확정 판결, 국무총리·청와대 인사개편
  • 송병구 . . . . 43회 일치
         둘의 첫 만남은 2007년 5월 14일 [[신한은행 프로리그 2007]]이지만, 실질적인 라이벌 관계는 두 번째로 만난 [[곰TV MSL 시즌2]] 결승전에서부터 시작된다. 당시까지 동일한 종족 간의 결승은 왠만해선 흥행이 힘들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두 선수는 5경기까지 가는 모든 경기를 명승부로 만들며 우승자 [[김택용]]도, 준우승자 송병구도 박수를 받는다. 이후 두 선수 모두 전성기를 이루면서 역대 [[스타크래프트]] 리그 판도에 전혀 없던 [[프로토스]]의 전성기를 만들고, [[김택용]]과 송병구의 '택뱅시대'를 만들게 된다.
         이후 프로리그 1라운드 포스트시즌에서는 [[원이삭]]을 상대로 승리하기도 했으며 2라운드에서 김준호와 이영호를 꺾는 등 2014년 2월 프로리그 3연승을 기록, 좋은 분위기를 이끌어내고 있다. 2014년 첫 GSL 예선전도 통과하며, 송병구의 2014년은 난관없이 잘 풀려가고 있다. 특히 5월에 들어 ESTV CUP 에서 우승을 하였으며 프로리그 3라운드 SK텔레콤과의 경기에서 2승을 거두며 3라운드 SK텔레콤의 전승을 막았다.
         * 2009년 6월 10일 신한은행 프로리그 08~09 5R SKT vs 삼성전자 4세트 송병구 승
         * 2008년 10월 10일 인크루트 2008 8강 D조 3경기 송병구 승
         * 2008년 10월 10일 인크루트 2008 8강 D조 2경기 김택용 승
         * 2007년 5월 21일 신한은행 프로리그 2007 전기리그 삼성 VS MBC게임 2세트 송병구 승
         * 2009년 5월 18일 신한은행 프로리그 08-09 4라운드 KTF vs 삼성전자 3세트 송병구 승
         * 2011년 5월 8일 신한은행 프로리그 10~11 5R SK텔레콤 vs 삼성전자 7세트 정명훈 승
         * 2009년 7월 10일 박카스 스타리그 2009 16강 B조 6경기 정명훈 승
         * 2004년 12월 10일 사이온 2004 3차 챌린지 D조 9강 1경기 송병구 승
         * 2004년 12월 10일 사이온 2004 3차 챌린지 D조 9강 2경기 송병구 승
         * 2005년 5월 23일 SKY 프로리그 2005 전기리그 1라운드 KOR vs 삼성전자 3세트 송병구 승
         * 2005년 5월 15일 에버 스타리그 2005 16강 D조 재경기 3경기 서지훈 승
         * 2006년 5월 10일 신한은행 스타리그 2006 시즌1 24강 F조 재경기 1경기 송병구 승
         * 2010년 5월 25일 신한은행 프로리그 09-10 4라운드 삼성전자 vs 위메이드 3세트 송병구 승
         * 2010년 6월 10일 Bigfile MSL 서바이버 토너먼트 2010 5조 3경기 염보성 승
         * 2009년 5월 9일 신한은행 프로리그 08~09 4R MBC게임 vs 삼성 3세트 송병구 승
         * 2008년 5월 11일 신한은행 프로리그 2008 삼성전자 vs MBC게임 4세트 송병구 승
         * 2007년 5월 19일 곰TV 2007 2nd 32강 E조 3경기 송병구 승
         * 2005년 12월 10일 MBC Movies배 서바이버 조별최종전 3경기 송병구 승
  • 허정숙 . . . . 35회 일치
         [[일본]]과 [[중국]]에서 유학생활을 하다 귀국, [[여성주의]]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하였으며 [[1924년]] [[조선여성동우회]], [[1924년]] [[5월]]의 [[조선여성해방동맹]] 등 여성단체를 조직하여 활동했다. [[조선공산당]] 조직에도 참여하여 [[1925년]] [[11월]]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의 관련자로 지목되어 체포되었다가 풀려났고, [[신간회]]와 [[근우회]] 등의 조직에도 참여하였다. 또한 [[동아일보]]의 기자와 논설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26년]] [[5월]] 도미했으나 이듬해 귀국, [[1929년]] [[광주 학생 항일 운동]] 때 여학생들 선동을 이유로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1936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중국]]으로 망명, [[민족혁명당]], [[조선독립동맹]] 등에서 활동하였다.
         [[1920년]] [[4월 14일]] [[차미리사]]의 [[조선여자교육회]]에 참여하고, [[여자교육회]] 여자교육선전강연대에 참여하여 [[1921년]] [[6월 10일]]부터 [[10월 10일]]까지 4개월간 전국 13도를 순회하면서 계몽강연회를 개최하였다. [[1821년]]부터 그는 [[동아일보]]의 객원논설위원이었고, [[동아일보]] 외에도 [[조선일보]], [[매일신보]]와 각종 잡지에 칼럼을 발표하였다.
         [[1925년]] 허정숙은 '[[화요회|신사상 연구회]]'(후일의 [[화요회]]로 개명)에 가입하였고, [[1925년]] [[4월]]에는 [[경성]]에서 [[사회주의]] 활동가인 [[박헌영]]등과 [[안티 기독교]] 공개 강연회를 개최하였다가,[[기독교인]]들이 이들의 강연회를 [[조선총독부]] 경무국에 신고하여 일본 경찰을 피해 한동안 은신하기도 했다. [[1926년]] 5월[[미국]]으로 유학할 때까지 그는 각종 [[안티 기독교]] 강연에 참여하였다. 그 뒤 [[송봉우]]와 한때 동거하기도 했다.
         [[1924년]] [[1월]]부터 그는 여성 해방 사상을 국내에 소개하는 한편 YMCA청년회와 [[사회주의]] 모임, 여성 계몽 강연에 나가 여성해방론을 소개하였다. 그리고 국내의 여성 지식인들의 참여와 자각을 호소하였다. [[1924년]] [[5월]] [[주세죽]]·허정숙·[[박원희]] 등 [[사회주의]]운동에 참여했던 여성운동가들이 [[조선여성동우회]]를 만들었다.<ref name="yeosong182">역사학연구소, 《함께 보는 한국근현대사》(서해문집, 2004) 182페이지</ref> [[1924년]] [[5월 23일]] 허정숙은 [[조선여성동우회]] 결성에 참여하고 집행위원이 되는 등 본격적인 [[사회주의]] 운동을 시작하였다. 그가 작성한 [[조선여성동우회]]의 강령 초안에는 '사회진화의 법칙', '신사회 개척', '조선여성해방운동' 등이 있었다. 또한 그는 [[동아일보]] 등에도 글과 컬럼을 기고했는데 이때 그는 '수가이'라는 필명을 사용하였고<ref>영어 sky를 한글 음운으로 순화한 것이다.</ref>, 한자로는 '秀嘉伊'라 하였다.
         [[1924년]] [[5월 4일]] 허정숙은 [[경성부]] 제동 [[조선여자강습원]]에서 [[박원희]], [[정종명]], 김필애, [[정칠성]], [[주세죽]] 등과 함께 [[조선여성동우회]] 발기총회를 열었다. [[1924년]] [[5월 10일]] [[경성부]] 종로방 간동(諫洞)의 [[능인강습소]]에서 허정숙은 김필애, [[박원희]], [[주세죽]] 등과 함께 [[조선여성동우회|여성동우회]](女性同友會)를 창립,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우리 [[조선]]의 무산여성은 현재의 이중노예의 상태에서 벗어나자”는 강령을 채택하고, [[박원희]], [[주세죽]] 등과 함께 [[조선여성동우회|여성동우회 공동 집행위원]]의 한사람으로 선출되었다. [[여성동우회]] 창립발대식부터 이후 [[종로경찰서]]의 형사들이 와서 그를 감시하였다. [[조선여성동우회|여성동우회]]는 경찰의 간섭으로 적극적인 활동을 할 수 없었으나, 여러 여성 식자들의 공감을 얻어 전국에 70개 이상의 지부를 조직하고 서울 회의에도 참여케 했다.
         [[1925년]] [[5월]] [[박헌영]] 등과 함께 '[[철필구락부]]' 의 [[임금 (경제학)|임금 인상 투쟁]]에 가담하면서 [[1925년]] [[5월]] [[박헌영]]과 함께 기자직을 그만두었다. 그 뒤에도 [[1932년]]까지 그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논설위원으로 칼럼을 송고하였다. 20년대 중반 그는 여성동우회·근우회·화요회·여자청년동맹 등의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서 [[사회주의]][[여성운동]]과 반일운동에 참여하였다.
         당시 [[조선]]사회는 '(사회)주의자'나 '기생'의 단발에 호의적이지 않았다.<ref name="chossdd"/> "…이 댐에 출가한 후에 남편이 술먹고 주정하면서 머리채 끄들며 때릴가 하야 예방주사로 깍어버렸소. …끌채를 안 잽히려거든 빤빤히 삭발하시야…"처럼 빈정거리거나(조선일보 1925년 11월 7일자), '단발하면 후년(後年) 대머리(禿頭)가 된다'는 외신기사가 소개됐다.(조선일보 1927년 5월 3일자) 허정숙은 이러한 단발 반대 기사를 근거없는 편견이라며 서양 여성들의 단발한 사진을 공개하기도 했다.
         [[1926년]] [[5월]] 아버지 [[허헌]]은 [[미국]]으로 가는데, 딸 허정숙을 데리고 떠난다. 미국 유학을 생각하던 아버지 허헌은 유럽까지 돌아보고 세계일주를 하거나 미국에 체류하면서 학업을 더 하거나 두가지 복안을 마련해놓고 있었다. 아버지 [[허헌]]은 허정숙에게 가해지는 비판도 막을 겸, 자신의 학업도 계속할 겸 떠나면서 그에게 함께 [[미국]] 여행을 가자고 권고했다. 허정숙은 어머니에게 아들을 맡기고 [[허헌]]을 따라 구미로 외유한다.<ref name="shinyoung138">신영숙, 〈일제시기 여성운동가의 삶과 그 특성 연구:조신성과 허정숙을 중심으로〉역사학회, 《역사학보 150호 (1996년 6월호)》 (역사학회, 1996) 138페이지</ref> 그러나 [[미국]] 체류 중에도 허정숙은 국내의 [[사회주의]]인사 및 여성운동가들과 연락하며 활동 소식을 접하였다.
         [[1928년]] [[2월]] [[근우회]] [[경성부|경성지회]] 창립에 참여하였고, [[5월 1일]] [[경성청년총동맹]] 상임위원에 피선되었으며, 근우회 경성지회 중앙위원에 선출됐다. [[5월 10일]]부터는 근우회의 기관지 [[근우]]의 편집, 발간에도 참여하였다. [[1928년]] [[7월]] [[경성]]에서 [[근우회]] 임시전국대회가 개최되자 [[근우회]] 전형위원과 중앙집행위원의 한 사람에 선출되었다. 근우회 임시전국대회에서 전형위원,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된 그는 바로 박호진, [[정칠성]], 심은숙 등과 지방순회강연을 정기적으로 하기도 하였다.<ref name="shinyoung152">신영숙, 〈일제시기 여성운동가의 삶과 그 특성 연구:조신성과 허정숙을 중심으로〉역사학회, 《역사학보 150호 (1996년 6월호)》 (역사학회, 1996) 152페이지</ref>
         [[1929년]] [[5월]]에는 [[근우회]]의 강령과 비전을 제시한 [[근우회 선언]]과 [[근우회 운동의 역사적 지위와 당면임무]]를 작성하였다.
         체포 당시 허정숙은 [[임신]] 중이었다. 그러나 임신을 핑계로 회피하지 않고, 나는 감옥에서 죽어서 나갈 것이라며 투옥된다. [[1930년]] [[5월]]에 감옥에서 아이를 출산하였지만, [[출산 후유증]]으로 [[간성 늑막염]]과 [[신경통]] 등이 발생했고, 몸에 심한 부기와 열이 났다. 출산 후유증으로 결국 [[보석]]되었지만 [[1931년]] 재수감된다.
         한편 그의 [[콜론타이]]식 연애론과 자유 연애론, 연애 유희론에 대해 [[김옥엽]]은 [[1931년]] [[11월]] [[신여성]]지에 '청산할 연애론'을 발표, 일시적인 성 결합은 [[프롤레타리아]] 계층에게 부정적인 효과를 준다며 비판했고, 안회남은 [[1933년]] [[5월]] [[신여성]]지에 청춘과 연애를 발표하여 연애를 가벼운 것으로 취급한다며 비판하기도 했다. 허정숙은 이들과도 토론, 논쟁을 벌이며 사랑이라는 개념이 항구적이고 영원한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 하에 전향을 강요받는 국내 사정을 감안<ref name="shinyoung138"/>, 그는 망명을 결심한다. 병원 운영 외에도 그는 틈틈이 주말에 시간을 내어 [[명천군]]과 [[북청군]], [[원산]] 등지로 계몽 강연 활동을 다니기도 했다. [[1933년]] [[3월]]에는 잠시 병원을 다른 한의사에게 맡기고 [[경상남도]] [[동래군]]으로 내려갔다. 부당한 월급 미지급과 적은 월급, 해고가 자행되는 곳이 있다는 소문을 들은 그는 [[동래군]]으로 내려가 (주)[[율전고무]]에 위장 취업하였다. [[4월 30일]]부터 그는 [[율전고무]]의 휴직을 주도하였다.<ref name="maeills19330505">매일신보 1933년 05월 05일자 7면</ref>
         [[1933년]] [[5월 5일]]에는 [[동래군]] [[율전고무공장]] 여공 파업을 주도하였다.<ref name="maeills19330505"/> 월급을 올려주지 않으며, 작은 월급을 미지급하는 일이 잦자 결국 그는 휴직과 파업을 주도한다. [[4월 30일]]부터 [[율전고무]]의 파업을 주도하였으나 월급이 지급되지 않자, [[5월 5일]] 총파업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공장장 [[강원길]]이 그를 강제로 끌어내자마자 갑자기 기절하였고 시위는 각지로 보도되었다. 이때 총파업을 유도하기 위해 파견된 남성 운동가 2명이 체포되었으나<ref name="maeills19330505"/>, 그는 실신을 이유로 체포를 모면하였다. 그는 정숙, 정자라는 이름을 병행하여 사용하였고, 얼마 뒤 감시망을 피해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1945년]] [[12월 27일]] 신탁통치가 발표되자 처음에는 [[박헌영]] 등과 함께 반탁을 선언했다가 찬탁이 결정되자 결국 찬탁으로 돌아섰다. 해방 직후 그는 남북을 자유로이 오고 갔으나 [[1946년]] [[5월]] 이후 테러를 두려워하여 남한 지역에 다시는 내려오지 않았다. 북한으로 올라가면서 남쪽은 이상하게도 애국심, 민족, 가족 등의 명분만 있으면 범죄도 정당화되는 이상한 사회라는 한탄을 남기고 월북했다. [[3.8선]] 이북에서 그는 아버지 [[허헌]]에게 새로 [[호적신고]]를 해달라 하여 [[1908년]]생으로 하고 새로 호적신고를 했다. 이때 이름은 정자에서 필명이자 가명으로 써오던 정숙(貞淑)으로 정식 개명하였다.
         북한에 정착한 [[1946년]] [[5월]]부터 허정숙은 38선 이북 각지를 찾아다니며 인재를 영입하여 정권에 참여시키려 노력하였다. 평양교원대, 평양의학전문학교에 동시 출강하며 후학을 양성하던 [[박봉조]] 역시 허정숙의 스카우트 대상이 되었다.<ref name="chyangss">[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4/01/2011040101287.html <nowiki>[</nowiki>Why<nowiki>]</nowiki><nowiki>[</nowiki>문갑식의 하드보일드<nowiki>]</nowiki> 박준영 을지대 총장이 말하는 '을지 3代'] 조선일보 2011년 04월 02일자</ref> 박봉조를 찾아간 허정숙은 참여해줄 것을 요청한다. "박 교수, 학생 가르치는 것도 좋지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이 더 중요한 과업 아니오?<ref name="chyangss"/>" 박봉조가 거절하자 허정숙의 눈빛이 벌겋게 변했다. 말투도 거칠어졌다 한다.<ref name="chyangss"/> 박봉조는 허정숙 등의 거듭된 부탁에 못이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 후 외무성 관리가 되었다가<ref name="chyangss"/>, 월남한다. 한편 [[중국]]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과 그 가족들의 취직을 적극 주선하기도 했다. 이때 그는 사람됨됨이나 능력을 보고 그에 맞는 일자리를 주선해 준다.
         [[1948년]] [[3월]] 북조선로동당 제2차 당 대회에서 당 중앙위원회 위원에 재선되었다. [[1948년]] [[4월]]부터 [[5월]]에는 [[평양시|평양]]에서 열린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남북협상)에 연안파의 한 사람이자 38선 이북 측 여성단체 대표자의 한사람으로 참여하였다. 그해 [[6월]] [[황해남도]] [[해주]]에서 열린 제2차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도 참석하였다.
         한편 화가 [[김관호]] 일가의 생계를 지원하고, [[김일성]]에게 그를 소개하기도 했다. 전쟁 이후 살림이 어려워진 화가 [[김관호]] 일가는 제자 최연해의 소개로 당시 선전상이던 허정숙을 만났고, 허정숙의 주선으로 55년 [[5월]]께 [[김관호]]는 김일성 주석을 보게 된다.<ref name="kimkwanho">[http://legacy.www.hani.co.kr/section-009100010/2001/10/009100010200110242043011.html 김관호, 천재화가는 불운했다] 한겨레 2001.10.24</ref> 그를 `민족주의자'라 부르며 조선을 위해 많은 그림을 그려달라는 김 주석의 부탁을 받은 김관호는 다시 붓을 들었다.<ref name="kimkwanho"/> 그는 [[인천 상륙 작전]] 이후 퇴각하는 북한군을 따라 다시 북으로 되돌아갔다.
         1956년 4월의 [[조선로동당]] 당대회에서 당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57년]] 5월 대외문화연락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1957년]] [[8월 3일]] [[사법부|사법성상]]에 임명되고 같은 달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에 재선되었다. 12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에 선출되고, [[1958년]] 5월 [[평화옹호 전국민족위원회]] 중앙위원회 상무위원에 선출되었다.
         1958년 5월에는 제1차 5개년 인민경제계획이 추진되자 원조 요청차 파견된 [[최고인민회의|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조선인민대표단]] 단장에 임명되어 [[동독]], [[폴란드]], [[헝가리]], 소련을 방문하고 이듬해 귀국했다. [[1958년]] 10월 동구 방문 중 조중친선협회 중앙위원회 상무위원에 임명되고, [[1959년]] 12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 헌법 재판소장에 임명되었다.
  • 황교안 . . . . 30회 일치
         |퇴임일 = [[2017년]] [[5월 11일]]
         '''황교안'''(黃敎安, [[1957년]] [[4월 15일]] ~ )은 [[대한민국]]의 제63대 [[대한민국의 법무부 장관|법무부 장관]]을 지낸 [[법조인]]으로 제44대 [[대한민국의 국무총리|국무총리]]에 올랐고 [[2016년]] [[12월 9일]]부터 [[2017년]] [[5월 10일]]까지 [[대한민국 대통령]] 권한대행직을 수행했다.
         2015년 5월 제44대 [[대한민국의 국무총리|국무총리]] 후보로 지명되어, 2015년 6월 18일 취임하였다.<ref>[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arcid=0009465457&code=41111111&cp=nv 새 총리 후보자 황교안은…朴정부 초대 내각 멤버, 외유내강형 ‘공안통’]《국민일보》2015년 5월 21일 김현섭 기자</ref> 2016년 12월 9일 [[박근혜 대통령 탄핵]] 소추가 가결되어 [[2017년]] [[5월 9일]]까지 [[대한민국의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다.
         2017년 5월 5일, 대선 후 바로 사임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되자마자 사표를 제출하였고 5월 11일에 사표가 수리되었다.
         한때 그는 서울중앙지검 검사장의 물망에 오르기도 했으나 탈락했다.<ref>[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93507.html?_fr=st1 황교안의 검사장 탈락, 밉보였나 무능했나] 한겨레신문 2015년 05월 29일자</ref> 이후 [[2006년]] [[수원지방검찰청]] 성남지청장, 2007년 [[서울고검]] 검사 등을 역임했다. [[2007년]] [[10월 21일]] 그는 당시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자인 [[이명박]]을 비판하는 글을 써서 문제가 되기도 했다.<ref name="giriss">[http://www.mediatoday.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123318 황교안, 2007년 한나라당 경선 때 “이명박 추한 모습”] 미디어오늘 2015.05.28.</ref> 당시 황교안은 <하느님 편에서 보기>라는 제목의 글을 썼는데, 글에서 "요즘 한나라당에서는 경선후보들 사이에 검증공방이 한창이고, 그 과정에서 소위 네거티브 전술도 종종 등장하여 사회적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며 "유력한 경선후보 중의 한 분은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선 경쟁은 몹시 추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아직까지는 세상 사람들이 크리스천이 왜 그런 모습을 보이느냐고 질책하지 않고 있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라고 썼다.<ref name="giriss"/>
         서울중앙지검 2차장이던 [[김은성 (1945년)|김은성]]이 2005년 7월 국가정보원 도청 자료를 통해 폭로된 이른바 ‘삼성 X파일 사건’ 특별수사팀의 지휘를 맡았다. '[[삼성 X파일 사건]]'은 1997년 이학수 전 삼성 부회장과 중앙일보 [[홍석현]] 회장이 검찰 간부들에게 '떡값'을 줄 계획에 대해 논의하는 내용 등을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가 불법 도청한 사건으로, 안기부 도청 조직 '미림' 팀장이 면직 후 X파일을 외부로 유출해 2005년 7월 언론을 통해 세상에 공개됐다. 횡령과 뇌물공여 혐의를 받던 [[이건희]] 삼성 회장을 서면조사만 하고 수사를 마무리하는 등 삼성 쪽 인사 모두를 불기소 처분했다. 반면 X파일 내용을 보도한 [[이상호]] <문화방송>(MBC) 기자와 녹취록 전문을 실은 김연광 <월간조선> 편집장, ‘떡값 검사’의 실명을 공개한 [[노회찬]] 의원을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기소함으로써 '삼성 X파일 사건'을 '불법 도청 사건'으로 몰고 가는 식으로 '재벌 봐주기'를 했다는 비판을 받았다.<ref>[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692233.html 황교안 누구?…‘삼성 X파일’ 때 삼성쪽 인사 모두 불기소]《한겨레》2015년 5월 21일 김원철·정환봉 기자</ref> 2005년 국정원·안기부 도청사건 수사를 지휘했고, 같은 해 국가보안법과 사상의 자유 사이의 논란이 컸던 강정구 교수 사건 때 구속수사를 추진했다. 당시 [[천정배]] 법무부장관이 지휘권을 발동해 불구속 기소처리해, 그는 [[천정배]]와 갈등하였다.<ref name="rigi"/> 결국 [[김종빈]] 검찰총장이 물러나기도 했다.<ref name="rigi"/>
         청와대는 대한민국 44대 국무총리로 황교안 법무부장관을 내정하였다.<ref>[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arcid=0009465457&code=41111111&cp=nv 새 총리 후보자 황교안은…朴정부 초대 내각 멤버, 외유내강형 ‘공안통’]《국민일보》2015년 5월 21일 김현섭 기자</ref>
         청와대는 21일 오전 10시 국무총리 내정자를 발표하겠다고 했으나 10시 5분 전, 돌연 '총리 발표'를 연기했다. 청와대 민경욱 대변인이 청와대 춘추관으로 급하게 뛰어와 보도를 늦춰달라고 하는 과정에서 기자들 사이에 '후보자 교체, 무기한 연기'라는 소문이 돌았다. 다시 10시 5분경, 민경욱 대변인이 춘추관을 방문하여 "10시 15분에 발표가 있을 예정"이라고 한 후, '황교안 법무부장관의 국무총리 후보자 내정'을 발표하였다. 이런 해프닝에 대하여, '새누리당이 ''공안 총리'' 에 대한 야당 반대를 우려하여 박근혜 대통령에게 재고하라'고 제동을 걸었기 때문이라며 당-청 갈등이 원인이라는 논란이 일었다.<ref>[http://www.ilyoseoul.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3031 <공지→연기→재공지> 황교안 총리 후보자 지명 둘러싼 ‘미스터리’]《일요서울》2015년 5월 26일 박형남 기자</ref>
         [[박근혜 대통령 탄핵]] 소추가 가결된 [[2016년]] [[12월 9일]]부터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2017년]] [[5월 10일]]까지 [[대한민국의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다.
         2017년 5월 11일, [[문재인]] 대통령은 황교안 국무총리의 사표를 수리했고, 당분간 [[유일호]] 경제부총리가 국무총리 권한대행을 맡았다.<ref>{{뉴스 인용|url=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05/11/0200000000AKR20170511123900001.HTML|제목=文 대통령, 황교안 총리·박승춘 보훈처장 사표 수리|성=강병철|이름=|날짜=2017-05-11|뉴스=연합뉴스|출판사=}}</ref>
         황교안은 1977년부터 1979년까지 3차례 징병검사를 연기하다가 1980년 징병 검사 때 ‘만성 담마진’(두드러기 질환)이란 피부병으로 징집 면제 처분을 받았다. <ref name="고발뉴스">[http://www.goba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23 황교안, ‘두드러기’ 병역면제…공안통 ‘Mr 국보법] 《고발뉴스》 2013년 2월 14일</ref> 황교안은 징병검사에서 면제판정을 받은 이듬해인 81년 사법시험에 합격한 점 때문에 잇단 징병검사 연기와 면제 판정 사이의 연관성을 의심받는 상황에서, 황교안이 두드러기 질환 판정을 받기도 전에 징집을 면제 판정을 받은 것이 밝혀져 논란이 되었다. 즉 황교안은 1980년 7월 10일 병원으로부터 두드러기 질환 판정을 받았는데 이미 7월 4일 병무청으로부터 징집 면제 판정을 받은 것이다. 김광진 의원실은 인사청문회 전 "병무청과 병원측에서도 질병에 대한 정밀검사 등을 모두 받은 후 징집면제 판정을 받은 것이 순서인데 황교안은 반대로 병징집제 판정을 받아놓고서 정밀검사를 진행하는 것은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비정상적인 상황이라고 하였다."고 주장하였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6041539241&code=910402 새정치 김광진 “황교안 두드러기 판정 받기도 전에 이미 병역면제 결정 받아”] 《경향신문》 2015년 6월 5일</ref> 그리고 군 면제 판정을 받을 정도의 질병을 갖고 사법시험에 합격했다는 점도 의문이라는 지적도 받았는데, 황교안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고시공부를 하는데) 지장을 주는 그런 질환은 아니다"고 해명했다.<ref>[http://www.yonhapnews.co.kr/society/2013/02/13/0702000000AKR20130213208400004.HTML?template=2087 황교안, 3차례 징병검사 연기 후에 '두드러기'로 병역면제 쟁점] 《한국일보》 2013년 2월 15일</ref> 당시 군의관이었던 손광식은 "7월 4일 날 정밀검사 보낼 때는 ‘이상’을 찍고, 이 두 칸은 비워 둔 채 정밀검사로 갑니다. 갔다가 정밀검사가 7월 10일 날 결과가 나오면 그다음에 여기 비워 둔, 7월 4일 자에 비워 둔 두 칸에 그 판정을 기록합니다."라고 증언하여 7월 4일 병무청 병징집면제 판정을 받은 것처럼 기재되어 있는 이유에 대하여 설명하였고, "징병검사할 때 일반 신체검사 환자가 거의 대부분이고 이 후보자처럼 면제받는 사람은 극소수라서 그런지 그런 오해를 받도록 이렇게 일반 신체검사용으로 한 라인에다가 좍 써 놨기 때문에 그런 오해가 나옵니다."라고 증언하여 위와 같은 의혹 제기는 오해에 불과하다고 증언하였다.<ref>http://likms.assembly.go.kr/record/mhs-10-050.do</ref>
         2004년, 당시 부산지검 동부지청 차장검사이던 황교안은 기독교 신자인 기자들과의 간담회에서 '가정폭력의 원인'에 대하여“사실 부산 여자들이 드센 이유도 있다. 반면 남자들은 말싸움이 안되니까 손이 먼저 올라가는 것이고…”라고 했다.<ref>[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692233.html "부산 여자가 드세서".. 황교안, 이번엔 '여성 비하' 논란]《오마이뉴스》2015년 5월 26일 강민수 기자</ref>
         현대사나 정치 현실에 대한 황 후보자의 '인식'도 논란이 됐다. 황교안은 2009년에 쓴 집회시위법 해설서에서 4·19 혁명을 ‘혼란’으로, 5·16 군사쿠데타를 ‘혁명’으로 표현한 바 있다. 2009년 용산참사를 두고는 농성자들의 불법·폭력성이 원인이었다고 서술하기도 했다.<ref>[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92323.html 황교안, ‘대선 댓글’ 원세훈 영장 청구 막고…채동욱 솎아내고…]《한겨레》2015년 5월 21일 노현웅·이승준 기자</ref>
         황교안이 인사청문회를 위해 국회에 제출한 자료 중 변호사 시절 사건 수임내용 관련 자료 중 19건이 화이트칠을 해서 제출한 것을 두고 고의적인 인사청문회 방해 행위라는 논란과 함께 '전화변론' 의혹을 받았다. <ref>[http://news.jtbc.joins.com/html/180/NB10908180.html "황교안 과거 수임내역 19건 삭제" 청문회 뇌관 부상]《JTBC》2015년 6월 1일 안의근 기자</ref> 위 19건은 법조윤리협의회이 법무법인 태평양에 재직중이던 황교안으로부터 담당사건 자료로 신고된 자료 중 19건을 신고 대상이 아닌 자문 사건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국회에 제출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었는데, 이홍훈 법조윤리협회회 이사증은 2015년 6월 10일 인사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하여 "이게 왜 이렇게 됐는가는 과거에, 전에도 국회 인사청문회에 제출할 때 자료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 원칙적으로 89조의9제2항1호의 규정상은 관련 시행령, 변호사법 시행령이라든지 또 변협회에서 수임사건 제출규정 여러 가지를 고려하고 변호사법 3조라든지 여러 가지 규정을 관련해서 봤을 때 이 수임사건을 뭐로 볼 것이냐에 대해서 지금 말씀하신 대로 자문도 포함된다고 하는 그런 논의도 있었지만 법의 규정상 엄격하게 해석해야 한다…… 왜냐하면 비밀유지 의무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넓게 해석했다 자칫 잘못해서 이것이 아니다 할 때는 법조윤리위원 전체가, 위원이라든지 직원이라든지 비밀유지 의무가 있어서 형사 처벌 대상이 되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엄격하게 해석해야 하고 또 이 입법 취지를 저희가, 2013년도에 법을 개정할 때 충분히, 입법을 할 때 과정을 저희가 회의록을 조사해 보고 그 뒤에 우리 법조윤리협의회에서도 ‘이 법은 좀 문제다’ 작년에 세미나에서도 이 부분을 지적했던 부분입니다. 그래서 이미 종전 인사청문회 때 이 법이 저희 법조윤리협의회에서는 정리가 됐기 때문에 이 경우는 수임 사건에 한하자…… 그리고 지금 자문 사건에 대해서는 저희 윤리협의회에 신고하는 변호사가 거의 없는 상황인데 이 사건에 대해서 자문하고 수임사건하고를 같이 해서, 그렇다면 법의 해석에 따라서 수임사건만 국회에 자료 제출해 주는 것이 맞다 해 가지고 그것을 사후에, 지난번에 지금 말씀하신 대로 그날 일요일이 돼 가지고 다 비상임들이라 서면으로 결의를 할 때도 그것에 대한 내용은 충분히 설명을 해 드렸습니다, 수임사건의 범위에 대해서. 그래서 다른 위원들도 대다수가 다 동의를 했고 그래서 국회에 그런 의견을 보냈던 겁니다."라고 증언하였다<ref>http://likms.assembly.go.kr/record/mhs-60-010.do#none</ref>.
         2013년,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 수사를 진행중이던 채동욱 검찰총장과 서울중앙지검 특별수사팀은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2012년 대선 당시 댓글 등을 통해 정치에 관여했다고 판단해 구속영장을 청구하려 했으나, 황교안이 “증거가 충분치 않다”며 보류했다. 당시 수사팀장이던 윤석열 부장검사가 직속상관인 조영곤 당시 서울중앙지검장에게 항명하는 사태가 전개됐다. 황교안은 윤석열 부장검사와 박형철 검사에게 징계를 내린 후 각각 대구고검과 대전고검으로 좌천시켰다. 그리고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게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를 적용하는 걸 끝까지 반대했다.<ref>[http://www.segye.com/content/html/2015/05/24/20150524001836.html?OutUrl=naver 황교안 후보자, 검사·법무장관 시절 맡은 주요사건]《세계일보》2015년 5월 24일 김태훈 기자</ref> 그러나 2015년 2월 서울고등법원은 황교안의 판단과는 달리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대선 개입을 유죄로 인정해 징역 3년을 선고하고 법정구속했다.
         한편 2013년 9월, 채동욱 당시 검찰총장이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 수사를 지휘하던 중 ‘혼외자’ 의혹이 불거지자 황교안 장관은 채동욱 총장 감찰을 지시했는데, 이는 법무부 장관이 검찰총장 감찰을 지시한 첫 사례다. <ref>[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92323.html 황교안, ‘대선 댓글’ 원세훈 영장 청구 막고…채동욱 솎아내고…]《한겨레》2015년 5월 21일 노현웅·이승준 기자</ref>
         황교안은 국무총리 인사청문회를 앞두고 본인과 아내, 최근 결혼한 딸 한명(아들 재산은 공개 거부)의 재산으로 모두 22억9835만원을 신고했다. 2013년 법무부 장관 후보자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전관예우로 번 돈을 기부하겠다"고 약속했던 황교안은 2013년에 낸 법정기부금 1억110만여원, 지정기부금 1568만여원을 기부하였고 2014년에는 법정기부금 305만여원과 지정기부금 1036만여원을 기부했다. 독실한 개신교 신자인 황 후보자가 전관예우로 수익의 ‘십일조’에도 못미치는 액수인 1억3000여만원 정도만 기부한 것을 두고 '찔끔 기부'라는 비판을 받으며 기부약속을 지킨것인지 안 지킨것인지 논란이 일었다.<ref>[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93089.html ‘수임료 16억’ 황교안 1억만 기부…시늉만 낸 ‘찔끔 기부’]《한겨레》2015년 5월 27일 김성환 기자</ref>
         황교안의 아내 최지영의 금융자산이 최근 6년간 6억 원 이상 늘어난 것으로 확인되면서 재산신고 누락 의혹이 제기됐다. 황교안이 창원지검장으로 재직하던 2009년 최 모 씨의 금융자산은 2,325만 원이었지만 2014년 12월 31일 기준 금융자산은 6억 5153만 원으로 신고되었다. 황교안의 인사청문회를 돕고 있는 국무총리실은 “대학에서 일하는 후보자 아내의 급여와 저축 등으로 금융자산이 증가한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최지영의 소득은 6년간 연평균 5,000여만원이고 최씨 소유의 경기도 용인 아파트 전세보증금은 6년 동안 1억 8900만 원 올랐을 뿐이라, 불투명한 소득이 있었거나 황교안이 이전에 소득 신고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ref>[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50528004010 黃 부인 금융자산 6년새 6억원↑…野 “재테크의 달인… 해명하라”]《서울신문》2015년 5월 28일 임일영 기자</ref>
         법무부가 황교안 총리후보자 청문회 지원을 위해 정수봉 부산지검 동부지청 형사1부장과 권순정 의정부지검 형사5부장 등 현역 부장검사 두 명을 포함한 지원팀을 꾸려 국무총리실 청문회 지원단에 파견하기로 해 논란이 일었다.<ref>[http://www.viewsnnews.com/article/view.jsp?seq=121192 현역 부장검사 2명, 황교안 인사청문회 지원 논란]《뷰스앤뉴스》2015년 5월 24일 최병성 기자</ref>
         |임기 = [[2016년]] [[12월 9일]] ~ [[2017년]] [[5월 10일]] (권한대행)
  • 정형돈 . . . . 27회 일치
         * [[KBS]] 《스펀지 26회 (5월 1일) : 게스트》
         * [[MBC]] 《일밤 813, 814. 815회 - 브레인 서바이버 (4월 3일, 10일, 17일) : 게스트》
         * [[KBS]] 《해피투게더 프렌즈 53회 (5월 4일) : 게스트》
         * [[KBS]] 《해피투게더 프렌즈 108회 (5월 24일) : 게스트》
         * [[KBS]] 《스타골든벨 134회 (5월 26일) : 게스트》
         * [[MBC]] 《황금어장 - 라디오스타 1회 (5월 30일) : 게스트》
         * [[Mnet]] 《M Super Concert - CMB 대전시민 화합 한마당 (5월 31일) : MC》
         * [[MBC]] 《일밤 958회 - 넌센스왕 : 파일럿 프로그램 (2월 10일) : 게스트》
         * [[KBS]] 《샴페인 4회 (5월 17일) : 게스트》
         * [[MBC 에브리원|MBC Every1]] 《복불복쇼 33회 (12월 10일) : 게스트》
         * [[KBS]] 《미녀들의 수다 127회 (5월 11일) : 게스트》
         * [[KBS]] 《해피투게더 - 시즌3 148회 (5월 27일) : 게스트》
         * [[KBS]] 《해피버스데이 4회 (5월 31일) : 게스트》
         * [[KBS]] 《스타골든벨 - 시즌2 9회 (7월 10일) : 게스트》
         * [[MBC]] 《2011 MBC 어린이에게 새 생명을 - 1부 (5월 5일) : 내레이션》
         * [[MBC]] 《웃고 또 웃고 14회 (5월 18일) : 꽁트 - 버스정류장 3, 위대한 법정》
         * [[MBC]] 《뽀뽀뽀 7439회 (5월 25일) : 30주년 - 무한도전 축하인사》
         * [[tvN]] 《현장토크쇼 택시 193회 - 포미닛편 (5월 26일) : 전화통화》
         * [[MBC]] 《섹션TV연예통신 725회 (5월 25일) : 무한도전 선택2014》
         * [[KBS Cool FM]] 《최강희의 볼륨을 높여요 - 상상마이너스 (5월 31일) : 게스트》
  • 김형준(배우,가수) . . . . 24회 일치
          * 2010년 3월 10일 [[SS501김형준 프로게이머되다]] 마지막 방송에서도 울었다.
          * 7월 10일 SS501 전원과 함께 자유선언 주먹이 운다에 출연했다.
          * 3월 10일 박정민과 함께 놀러와에 출연했다.
          * 5월 1일부터 6월 5일까지 Hello 쳇 MC를 진행했다.
          * 5월 21일, 28일 김현중과 함께 X맨에 출연했다.
          * 6월 10일 김규종, 박정민과 함께 스타 골든벨에 출연했다.
          * 2월 10일 허영생과 함께 쇼! 뮤직탱크 MC를 진행했다.
          * 5월 29일 SS501 전원과 함께 만원의 행복에 출연했다.
          * 3월 16일부터 5월 31일까지 Ch27. 알부라리를 진행했다.
          * 5월 3일 김규종과 함께 놀라운 대회 스타킹에 출연했다.
          * 5월 8일 SS501 전원과 함께 엠카운트다운 스페셜 MC를 진행했다.
          * 5월 10일 SS501 전원과 함께 쇼! 음악중심에서 단체로 MC를 진행했다.
          * 5월 24일 김규종과 함께 [[스펀지(KBS)|스펀지]]에 출연했다.
          * 5월 24일 SS501 전원과 함께 스타 골든벨에 출연했다.
          * 12월 10일 허영생, 김규종과 함께 안성종합고등학교를 찾아가 스쿨 오브락에 출연했다.
          * 5월 21일 [[허영생]]과 함께 세바퀴에 출연했다.
          * 7월 10일, 17일 더블에스301 멤버들과 함께 [[판타스틱 듀오]]에 패널로 출연했다.
          * 12월 10일 더블에스301 멤버들과 함께 [[불후의 명곡 전설을 노래하다]]에 출연했다. 오프닝 멘트에서 자기 목소리가 저음 이라고 하자 어떨결에 성악가랑 바이톤 대결을 했는데 성악가도 김형준의 실력을 인정했다. 허영생이 [[김현성(가수)|김현성]]과 [[김경호]]의 성대모사를 보여주자 뒤이여 자신도 [[이정재]]가 출연한 영화 [[암살(영화)|암살]] 명대사 재판장님 성대모사로 출연진 들에게 웃음을 자아냈다. 이어서 [[하동균]] 성대모사도 할줄 안다고 하자 했는데 [[문희준]]한테 이정재씨 잖아요 하고 디스 당했다. [[http://tvcast.naver.com/v/1298762|영상]]
          * 1월 10일 [[구준엽]], [[김대희]], [[강태오]], [[B.A.P]] [[대현]]과 함께 [[비디오스타]]에 출연했다. 글로버 프린스 특집답게 스페인어로 인사후 해외에서 인기와 다녀온 해외[* 볼리비아, 페루, 칠레, 아르헨티나, 아부다비, 중국, 일본,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태국]도 밝혔다. 자신이 찍은 드라마가 일본쪽으로 드라마 판권이 잘 팔려서 2013년 당시 드라마 [[금 나와라, 뚝딱!]]에 출연했던 [[박서준]], [[백진희]]랑 [[사랑은 노래를 타고]]에서 [[씨스타]]의 [[다솜(배우)|다솜]]이가 한류스타를 이끈건 자신 덕분이라고 자랑을 했다.
          * 2010년 5월 18일 김창렬의 올드스쿨 출연
  • 배두나 . . . . 24회 일치
         * 1999년 5월 15일~1999년 10월 16일 [[MBC]] 《[[생방송 음악캠프]]》 - 진행
         * 2012년 5월 10일 [[tvN]] 《[[현장토크쇼 택시]]》 238회 - 게스트 출연
         * 2012년 5월 12일 [[KBS2]] 《[[이야기쇼 두드림]]》 24회 - 게스트 출연
         * 2012년 5월 14일 [[SBSE!]] 《[[컬투쇼]]》 668회 - 게스트 출연
         * 2012년 5월 3일 《[[푸른밤|푸른밤, 정엽입니다]]》 - 게스트 출연
         * 2012년 5월 3일 《[[씨네타운|공형진의 씨네타운]]》 - 게스트 출연
         * 2012년 5월 4일 《[[가요 광장|전현무의 가요광장]]》 - 게스트 출연
         * 2012년 5월 5일 《[[두시탈출 컬투쇼]]》 -스타와 토킹 어바웃 - 게스트 출연
         * 2014년 5월 15일 《[[씨네타운|공형진의 씨네타운]]》 - 게스트 출연
         * 2005년 5월 Harper's BAZAAR KOREA
         * 2006년 5월 anan
         * 2006년 5월 Harper's BAZAAR KOREA
         * 2010년 5월 Harper's BAZAAR KOREA
         * 2010년 5월 NYLON
         * 2010년 5월 CeCi
         * 2011년 5월 allure
         * 2012년 5월 씨네21 No.852
         * 2012년 5월 씨네21 No.854
         * 2012년 5월 무비위크 No.527
         * 2014년 5월 Harper's BAZAAR KOREA
  • 현이와 덕이 . . . . 22회 일치
         1975년 [[미8군부대]]에서 데뷔한 [[장현 (1955년)|장현]](1956~1990)과 [[장덕]](1961~1990)은 이듬해인 1976년 현이와 덕이를 결성하고 한국 가요계에 데뷔한다.<ref>{{뉴스 인용 |제목 = 두엣 현이와 덕이 순진한 아이 취입|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8052300329208014&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8-05-23&officeId=00032&pageNo=8&printNo=10044&publishType=00020|출판사 = 경향신문|날짜 = 1978년 5월 23일}}</ref> 이들은 《선생님 안녕》, 《우리들의 고교시대》, 《내마음 나도몰라》, 《꿈초올 둘이서》등과 같은 영화에도 출연하였다.(이들 남매는 10여편의 영화에 주연 또는 조연으로 출연하여 하이틴스타로서 많은 인기를 누렸다.) 특히 [[장덕]]은 작사,작곡 능력이 뛰어나 싱어송라이터로 입지를 굳히게 되었다.
         <ref>{{뉴스 인용 |제목 = 듀엣 현이와 덕이 순진한 아이 취입|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8052300329208014&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8-05-23&officeId=00032&pageNo=8&printNo=10044&publishType=00020|출판사 = 경향신문|날짜 = 1978년 5월 23일}}</ref> 1978년 현이와 덕이는 그들의 첫 공식 레코드 모음집인 《꼬마인형》, 《소녀와 가로등》, 《일기장》, 《순진한 아이》, 《작은소녀의 사랑이야기》등이 담긴 정규1집을 취입, 출반하였으며, 이 음반은 대중들에게 많은 인기를 받게 된다.<ref>{{뉴스 인용 |제목 = 두엣 현이와 덕이 순진한 아이 취입|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8052300329208014&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8-05-23&officeId=00032&pageNo=8&printNo=10044&publishType=00020|출판사 = 경향신문|날짜 = 1978년 5월 23일}}</ref>
         * 2004년 5월 10일 [[JK 김동욱]] 정규 2.5집 《Memories In Heaven》 발표 : 장덕 작곡 · [[이은하]] 노래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 [[리메이크]] 수록
         * 2009년 9월 10일 [[플레이걸 (가수)|플레이걸]] EP 1집 《플레이걸의 24時》 발표 : 장덕 작사 · 장덕 노래 《얘얘》 [[리메이크]] 수록
         * 2012년 5월 27일 <[[MBC]] [[TV]] [[나는 가수다]]> : [[김연우]] - 장덕 작곡 · [[이은하]] 노래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 [[리메이크]]
         * 2015년 5월 28일 <오마주 현이와 덕이 [[문화콘텐츠]] 사업 발표, 출범> ([[리메이크]] [[음원]], [[영화]], [[뮤지컬]], [[출판]] 등)
         * 2018년 5월예정 <싱어송라이터 장덕 스패셜패키지 발표> - 비트볼뮤직
         '''장덕'''(張德, Chang Deok, [[1961년]] [[4월 21일]] ~ [[1990년]] [[2월 4일]])은 [[대한민국]]의 여성 [[싱어송라이터]]다. 그녀는 싱어송라이터로서 [[진미령]] · [[이은하]] · 양하영 · [[임병수]] · [[김범룡]] · 국보자매 등 많은 다른 가수들의 음반에 참여하며 [[작사가]] · [[작곡가]]로 활동하였고, [[음반 프로듀서]]로도 활동을 하였다. 그녀는 친오빠 [[장현]]과 함께 현이와 덕이를 결성, 만 14세의 최연소 [[싱어송라이터]]로 가요계에 데뷔하여 화제를 모은 바 있으며, 만 15세([[고등학교]] 1학년) 때 [[MBC 서울국제가요제|서울국제가요제]]에서 최연소 [[작사]] · [[작곡가]]로 출전하여 입상하는 등 [[천재]]소녀라는 별칭을 얻기도 하였다. 또한 그녀는 예쁘장한 외모로 [[배우]]로도 활동, 10여 편의 [[영화]]에 [[주연]] 또는 [[조연]]으로 출연하며 하이틴 [[스타]]로도 거듭났다. 그리고 솔로로 독립해 성인이 된 후에도 더욱 많은 연예활동을 하여 [[스타]]의 자리를 지켰다. [[한국음악저작권협회]]에 등록된 장덕 [[작사]] · [[작곡]]의 [[작품]] 개수는 총 129개(2015년 6월 기준: 신탁자코드 W0138300)이며, 생전 남긴 창작작품은 [[록]] · [[포크]] · [[리듬 앤 블루스]](R&B) · [[컨트리]] · [[댄스]] · [[펑키]] · [[트로트]] · [[발라드]] · [[융합]](복합) 등 다양한 [[장르]]의 300여개 정도이다.<ref>이은정. [http://entertain.naver.com/read?oid=001&aid=0007623003 요절가수 장덕·장현 남매 25주기…음원 등으로 재조명]. 연합뉴스. 2015년 5월 28일.</ref>
         1974년 서울 사범대학 부속중학교에 입학한 장덕은 사춘기를 겪으면서 '나는 왜 남들처럼 행복하게 살수 없는가?'라는 생각에 우울해 하다가 그 해 가을 메모도 남기지 않고 무작정 친구집인 대구로 내려가 10일간 보내게 된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온 장덕은 이내 수면제 10알을 먹고 음독 자살을 기도한다. 이에 충격을 받은 장덕의 어머니는 장덕의 음악적 재능을 살려주고 외로움을 이겨낼 수 있도록 당시 인기를 끌던 미국의 남매듀엣 [[카펜터스]]처럼 맏이 장현과 함께 남매 듀엣을 결성시켜 준다.
         1975년 4월 만 14세(중학교 2학년)가 된 장덕은 오빠 [[장현]]과 함께 [[드래곤 래츠]]라는 듀엣명으로 [[통기타]]를 메고 아메리칸 엠버시 클럽에서 열린 [[미8군]] 주최의 파티 무대에서 <To Be A Child Again>라는 곡으로 데뷔한다. <To Be A Child Again>는 장덕 작곡의 첫 발표곡으로 영어가사는 [[미8군]] 관계자이자 [[드래곤 래츠]]를 초청한 엘 클리나드가 붙인 것이다([[드래곤 래츠]]라는 듀엣명 또한 엘 클리나드가 붙였다.). 장현 · 장덕 남매는 이 공연을 통해 출연료도 제대로 받았고 아메리칸 엠버시 클럽의 쇼 매니저로부터 [[드래곤 래츠]]의 노래와 미모에 반했다는 찬사를 들으며 엘 클리나드를 통해 출연계약까지 정식으로 요청받는다. 그리고 이 무대에서 장현 · 장덕 남매는 곧바로 [[방송국]] [[PD]]들의 눈에 띄어 스카우트 되었고 1개월 뒤(5월) TBC TV의 청소년과 젋은이들을 위한 프로그램 오라오라에 출연해 장덕이 [[작사]] · [[작곡]]한 <꼬마인형>, <일기장>을 부르며 최연소 남매 듀엣으로 일반 무대에 데뷔하게 된다. 이 때부터 장덕은 [[작사]] · [[작곡]]에 능한 [[천재]][[소녀]]로 평가 받게 된다.
         1977년 4월 고등학교 1학년의 장덕은 명보극장에서 개봉된 임원식 [[감독]]의 [[영화]] <[[내 마음 나도 몰라]]>에서 [[주연]]으로 출연한다. 장덕은 몇몇 영화에서 단역을 맡아 본 적은 있었지만 주연으로 출연한 것은 이 영화가 처음이었다. 한달 뒤(5월) 장덕이 어머니와 함께 살던 때 이사로 인해 집들이에 참석한 가수 [[송창식 (가수)|송창식]]은 장덕이 중학교 2학년(만 14세) 때 작사 · 작곡한 <[[소녀와 가로등]]> 을 [[장현]]이 기타 연주와 함께 노래를 불러주자 감탄을 하며 이후 서울국제가요제에 출품할 것을 적극 권한다. 결국 [[송창식]]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장덕은 <[[소녀와 가로등]]>을 곧 데뷔하게 되는 신인가수 [[진미령]]에게 주며 [[작사]] · [[작곡가]]로서 제1회 [[MBC]] [[MBC 서울국제가요제|서울가요제]](제 2회 대회부터는 [[MBC 서울국제가요제|서울가요제]]에서 [[MBC 서울국제가요제|서울국제가요제]]로 이름이 바뀐다.)에 출전한다. 당시 가요제 규정상 작곡가도 가수가 함께 무대를 꾸며야 했기 때문에 장덕은 빵모자를 눌러 쓴 깜찍한 모습으로 나와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진풍경을 연출하였고 많은 사랑을 받게 된다(입상). 같은 해 7월 명보극장에서 개봉한 박태원 [[감독]]의 [[영화]] <[[선생님 안녕]]>에서 [[장현]]은 [[임예진]]과 함께 주연으로 출연하였다. 이 영화는 삼각관계가 얽힌 영화로 비록 단역이지만 장덕 또한 [[장현]]의 동생 역으로 출연하였다. 현이와 덕이는 이 영화에서 [[사운드트랙]] <정말>도 싣게 된다.
         1980년 5월 제3회 [[MBC]] [[MBC 서울국제가요제|서울국제가요제]]에서 [[최병걸 (가수)|최병걸]]의 <[[사랑은 떠나도 (노래)|사랑은 떠나도]]>가 입상하며 장덕은 작사/작곡가로서 4년 연속 입상하는 기록을 세운다(이것은 확실하지 않다. 1977년 · 1978년 · 1979년 3년 연속 입상한 사실은 맞지만 서울국제가요제 관련 정보를 찾아봐도 1980년 입상한 기록은 없다.). 6월 그녀는 타이틀곡 <순정>을 비롯 <진실한 사랑이라면>, <만날 수 없는 사람> 등 신곡 5곡과 현이와 덕이 정규 1집, 그리고 그녀의 첫 컴필레이션 음반 《[[첫사랑 (장덕의 음반)|첫사랑]]》의 수록곡들 중 몇 곡을 골라 그대로 수록한 컴필레이션 음반 《순정》을 발표한다. 10월 미군과 결혼하며 [[미국]]으로 [[이민]]가 살고 있던 그녀의 친어머니는 한국식품점에 갔다가 우연히 1년이 지난 1979년 9월 9일자 선데이서울 주간지를 통해 장덕의 자살 소송 기사를 접하게 된다. 어머니는 충격을 받고 장덕을 간곡히 불렀고 장덕은 아무 반응이 없다가 결국 어머니가 결혼해 살고 있는 테네시 주의 [[내쉬빌]]로 들어가게 된다. [[내쉬빌]]은 컨트리 뮤직의 메카로 일컬어지는 곳으로 장덕은 이 곳에서 벨몬트 칼리지 음악과에 입학, 대학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어머니는 오빠 장현 또한 불러서 대학 공부를 시키려 했지만 설득시키지 못했다.). 12월 내쉬빌 한인회가 주최하는 송년파티가 있었다. 장덕과 어머니도 참석했는데, 한인회 회장이 찾아와 장덕에게 밴드를 도와 달라고 한다. 한인사회에는 밴드가 딱 하나 있었는데, 형제들이 조직하여 만든 가족밴드 리 패밀리였다. 실력들이 부족했기에 장덕에게 부탁을 한 것이었다. 장덕은 처음엔 거절했지만 어머니가 금년만 해 보라고 해서 결국은 승낙을 한다. 이후 장덕은 형제들 중 한명인 이승언이라는 남자와 점점 가까워 지게 된다.
         1983년 10월 이혼을 하게 된 장덕은 가수 생활의 추억, 그리고 아버지 · 오빠 · 친구에 대한 그리움 등으로 고국에 대한 향수병에 걸려서 어머니에게 말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메모 한장만을 남기고 한국으로 귀국해 한남동에서 자취생활을 시작한다. <ref>[http://www.mbn.co.kr/pages/vod/programContents.php?progCode=613&menuCode=3439 아궁이 65회 - 파란만장 가족사] "MBN 2014년 7월 11일 방송 참조"</ref> 그리고 한달 뒤(11월) 그녀는 어렵게 서라벌레코드와 3년간 1000만원이라는 금액에 전속계약을 맺고(그녀는 오랫동안 공백을 가진 스타였기 때문에 좋은 조건으로는 계약이 쉽지 않았다.) 타이틀곡 <날 찾지 말아요>를 비롯 <안녕히 계세요>, <가을에 만난 소녀>, <철없는 안녕> 등의 곡들이 수록된 정규 1집 《[[날 찾지 말아요]]》를 발표한다. 그리고 이 앨범에서 <날 찾지 말아요>가 발표한 지 6달 만에 PCI(인기가요순위 조사연구소) 집계 한 달(1984년 5월) 동안 방송을 가장 많이 탄 노래 부문 3까지 오른다. 많은 방송활동을 하지 않는 장덕으로서는 좋은 결과였다. 하지만 그녀 본인이 당시 방송을 꺼려한 탓인 지는 몰라도 방송을 가장 많이 탄 가수 부문에서는 순위에 오르지 못하게 된다. 이사이(1984년 2월) 장덕은 새 음반을 내는 자매듀엣 국보자매에게 <백치미>, <사랑하고 있나봐요>를 작사/작곡하여 주기도 한다. 그리고 국보자매는 현이와 덕이, 그리고 장덕에 의해 각각 발표된 바 있는 <끝없는 마음이야>, <첫사랑>까지도 리메이크 하여 자신들의 새 음반에 수록한다.
         1986년 5월 장덕은 훗날 수많은 가수들에 의해 리메이크 되고, 또 그녀가 작곡한 가장 훌륭한 곡 중 하나로 평가받게 되는 리듬앤블루스 스타일의 곡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모습처럼>을 작곡, 동료가수인 [[이은하]]에게 주어 빅히트를 안겨준다. 그리고 6월 오빠 장현과 추구하는 음악세계가 달랐던 장덕은 솔로로서의 욕심으로 인해 더 이상 듀엣 활동을 이어나가지 않고 타이틀곡 <님 떠난 후>를 비롯 <어른이 된 후에 사랑은 너무 어려워>, <사랑해줘요>, <소외> 등이 수록된 솔로 정규 3집 《[[님 떠난 후]]》를 발표한다. 그리고 이 앨범에서 [[포크뮤직]]에 [[디스코]]가 섞인 타이틀곡 <[[님 떠난 후]]>가 [[KBS]] [[가요톱10]]에서 5주(1987년 2월 18일 ~ 1987년 3월 18일) 연속 1위를 차지, 골든컵을 수상하였고 MBC 라디오 인기가요, KBS 2FM 인기가요 광장, PCI(인기가요순위 조사연구소), 뮤직박스(도서출판), 전국 DJ 연합회 등 각종 인기 순위 차트에서 정상을 차지하게된다. 1986~87년 장덕은 제 2의 전성기를 보냈으며 가장 [[성공]]한 [[여성]][[스타]]로 인정받았다.
         * 2004년 5월 10일 [[JK 김동욱]] 정규 2.5집 《Memories In Heaven》 발표 : 장덕 작곡 · [[이은하]] 노래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 [[리메이크]] 수록
         * 2009년 9월 10일 [[플레이걸 (가수)|플레이걸]] EP 1집 《플레이걸의 24時》 발표 : 장덕 작사 · 장덕 노래 《얘얘》 [[리메이크]] 수록
         * 2012년 5월 27일 <[[MBC]] [[TV]] [[나는 가수다]]> : [[김연우]] - 장덕 작곡 · [[이은하]] 노래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 [[리메이크]]
         * 2015년 5월 28일 <오마주 현이와 덕이 [[문화콘텐츠]] 사업 발표, 출범> ([[리메이크]] [[음원]], [[영화]], [[뮤지컬]], [[출판]] 등)
         * 2018년 5월예정 <싱어송라이터 장덕 스패셜패키지 발표> - 비트볼뮤직
  • 정용화 . . . . 21회 일치
         * [[2010년]] [[1월 14일]] 락밴드 씨엔블루(CNBLUE)의 리더로 팀 안에서 보컬과 기타와 랩을 맡아, [[bluetory]]<ref name="album1">[http://starin.edaily.co.kr/news/NewsRead.edySCD=EA31&newsid=01315286592871176&DCD=A10102 씨엔블루, '씨엔블루토리'서 1집 전곡 첫 라이브 연주]{{깨진 링크|url=http://starin.edaily.co.kr/news/NewsRead.edySCD%3DEA31%26newsid%3D01315286592871176%26DCD%3DA10102 }}《이데일리스타in》, 2010년 2월 16일 작성.</ref> 음반 발매와 함께 가수 활동을 시작하였다. 수건남 효과에 힘입어 첫 방송후 각종 차트를 올킬하였으며,<ref name="all">[http://news.jkn.co.kr/article/news/20100117/6857237.htm “블루돌풍” CNBLUE, 첫 방송후 각종 차트 ‘올킬’]《재경일보》2010.01.17 작성.</ref> 한국 가요계에서 신인이 데뷔 후 14일만에 1위를 하는 기록을 세웠다.<ref name="chleks">[http://news.jkn.co.kr/article/news/20100129/7708991.htm 씨엔블루, 최단기간 1위 기록 세우며 정상 등극! ]《재경일보》2010.01.29 작성.</ref> 이는 지상파 데뷔 최단 기간 1위 기록이었지만 위너 이후에 기록이 깨졌다.* [[2010년]] [[5월 19일]], 씨엔블루는 두 번째 미니 앨범 《[[Bluelove]]》를 발매하였다.<ref>{{뉴스 인용
         |url=http://www.todaykorea.co.kr/news/contents.php?idxno=109805|출판사 = 투데이코리아 |날짜 = [[2010년]] [[5월 19일]]}}</ref> [[5월 20일]], [[Mnet]] 《[[엠카운트다운]]》을 통해 컴백하였는데,역시 큰 인기를 얻으며 각종 음원차트에서 1위는 물론, 음악프로그램에서도 1위를 차지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 = 씨엔블루 ‘Love’, 포털사이트 점령… ‘올킬’ 시동|url=http://breaknews.com/sub_read.html?uid=133629§ion=sc4|출판사 = 프레이크뉴스 |날짜 = [[2010년]] [[5월 19일]]}}</ref><ref>{{뉴스 인용|제목 = 씨엔블루, ‘LOVE’ M카운트다운 1위 수상!
         |url=http://www.hg-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15717|출판사 = 한강타임즈 |날짜 = [[2010년]] [[6월 10일]]}}</ref>
         * [[2011년]] [[1월 9일]], 일본에서 세 번째 싱글 ''[[RE-MAINTENANCE]]''를 발매하였다. 타이틀 "Try again, Smile again"을 작곡 및 작사하였고 오리콘 싱글차트 데일리 2위에 올랐다.<ref>{{뉴스 인용 |제목 = '씨엔블루' 日 투어 전석 매진 신기록…오리콘 챠트 2위 겹경사 |url = http://mystar.mdtoday.co.kr/mystar/index.html?no=426803 |출판사 = 마이스타뉴스 |날짜 = [[2011년]] [[1월 10일]] |확인날짜 = 2012년 8월 19일 |보존url = https://archive.today/20130111191550/http://mystar.mdtoday.co.kr/mystar/index.html?no=426803 |보존날짜 = 2013년 1월 11일 |깨진링크 = 예 }}</ref>
         * [[2011년]] [[9월 1일]]에 일본에서 인디즈 마지막 앨범인 《[[392(Thank you too(much))]]》를 발매하여 오리콘 데일리 앨범 3위와 인디즈 위클리 1위를 차지 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 = 씨엔블루 日 앨범 ‘392’, 오리콘 데일리 앨범 차트 3위 |url=http://www.maxmovie.com/movie_info/ent_news_view.asp?mi_id=MI0093705691|출판사 = 맥스뉴스 |날짜 = [[2011년]] [[9월 2일]]}}</ref> 또한, [[2011년]][[9월 10일]]에 일본에서 열린 일본 마쿠하리 멧세(MAKUHARI MESSE)에서 열리는 [[린킨파크]](Linkin Park) 단독 공연의 오프닝 무대에 서게 됐다.<ref>{{뉴스 인용|제목= 씨엔블루(CNBLUE), 린킨파크(Linkin Park)와 '오프닝 무대' 가져|url= http://www.topstarnews.net/n_news/news/view.html?no=3065|출판사= 톱스타뉴스|날짜= [[2011년]] [[9월 9일]]|확인날짜= 2012년 8월 19일|보존url= https://web.archive.org/web/20130120220518/http://topstarnews.net/n_news/news/view.html?no=3065|보존날짜= 2013년 1월 20일|깨진링크= 예}}</ref>[[9월 17일]]~[[9월 18일]]에는 서울에서 열린 콘서트 "BLUE STORM"을 이틀에 걸쳐 진행하고,<ref>{{뉴스 인용|제목 = 씨엔블루, 아시아투어 콘서트…9월 제주에서 출발한다.|url=http://sportsworldi.segye.com/Articles/EntCulture/Article.asp?aid=20110801001713&subctg1=10&subctg2=00|출판사 = 스포츠월드 |날짜 = [[2011년]] [[8월 1일]]}}</ref> [[9월 25일]]에는 인디즈그룹으로는 유례없이 1만 5천석의 Yokohama Arena에서 인디즈 마지막 콘서트를 진행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 = 씨엔블루 단독 콘서트, 요코하마의 밤을 불태운 ‘열정의 무대’|url=http://sstv.tvreport.co.kr/index.html?page=news/flypage&cid=24&nid=119144|출판사 = SSTV |날짜 = [[2011년]] [[9월 26일]]}}</ref><ref>{{뉴스 인용|제목 = 이것이 밴드다…'씨엔블루' 日콘서트,1만 5천 팬 열광 |url=http://www.nocutnews.co.kr/Show.asp?IDX=1927290|출판사 = 노컷뉴스 |날짜 = [[2011년]] [[9월 26일]]}}</ref>
         * 오리콘 싱글 위클리 차트에 일주일 만에 7만 1200장을 팔아 치우고 일본 메이저 데뷔를 했다.<ref>{{뉴스 인용|제목= 씨엔블루, 日 데뷔싱글 일주일 만에 7만장 판매|url=http://sports.chosun.com/news/utype.htm?id=201110270100197960017298&ServiceDate=20111026|출판사 = 스포츠조선|날짜 = [[2011년]] [[10월 26일]]}}</ref><ref>{{뉴스 인용 |제목= 씨엔블루 '인 마이 헤드', 日 오리콘 주간 차트 4위 랭크 |url= http://tvdaily.mk.co.kr/read.php3?aid=1319589921221164011 |출판사= 티브이데일리 |날짜= [[2011년]] [[10월 26일]] |확인날짜= 2012년 8월 19일 |보존url= https://archive.today/20120715225340/http://tvdaily.mk.co.kr/read.php3?aid=1319589921221164011 |보존날짜= 2012년 7월 15일 |깨진링크= 예 }}</ref> 《[[In My Head]]》는 [[2011년]][[11월 10일]]에 일본 레코드 협회에서 선정하는 골드 레코드가 되었다.<ref>{{뉴스 인용|제목= 씨엔블루 일본 데뷔싱글 10만장 넘겨, 日 '골드 레코드' 선정|url= http://tvdaily.mk.co.kr/read.php3?aid=1321064770229443011|출판사= 티브이데일리|날짜= [[2011년]] [[11월 12일]]|확인날짜= 2012년 8월 19일|보존url= https://archive.today/20130112003527/http://tvdaily.mk.co.kr/read.php3?aid=1321064770229443011|보존날짜= 2013년 1월 12일|깨진링크= 예}}</ref>
         * [[2012년]] [[3월 26일]]에 기자 간담회 쇼케이스에서 세 번째 미니 앨범 [[EAR FUN]]을 발표하고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 씨엔블루, 컴백 쇼케이스를 왜 아침에? |url=http://osen.mt.co.kr/article/G1109369721|출판사 = OSEN|날짜 = [[2012년]] [[3월 23일]]}}</ref><ref>{{뉴스 인용|제목= '컴백' 씨엔블루 "음반 낼때 마다 부담, 초심으로 돌아가려고 노력" |url=http://www.mydaily.co.kr/news/read.html?newsid=201203261244591132&ext=na|출판사 = 마이데일리|날짜 = [[2012년]] [[3월 26일]]}}</ref> 음원은 발표와 동시에 1위를 기록하였으며,<ref>{{뉴스 인용|제목= '컴백' 씨엔블루 '헤이 유' 음원공개 직후 1위|url=http://star.mt.co.kr/view/stview.php?no=2012032608080291572&type=1&outlink=1|출판사 = 스타뉴스|날짜 = [[2012년]] [[3월 26일]]}}</ref> 앨범은 3일만에 4만장이상이 판매되는 기록을 세웠다.<ref>{{뉴스 인용 |제목= 씨엔블루, 3일 만에 4만장 돌파…'3월 전쟁' 최후의 승자 |url= http://news.sportsseoul.com/read/entertain/1022572.htm |출판사= 스포츠서울 |날짜= [[2012년]] [[3월 29일]] }}{{깨진 링크|url=http://news.sportsseoul.com/read/entertain/1022572.htm }}</ref><ref>{{뉴스 인용|제목= 씨엔블루 새 미니앨범 판매량 1위, 최단 시간 4만장 돌파|url=http://interview365.mk.co.kr/news/19427|출판사 = 인터뷰365|날짜 = [[2012년]] [[3월 30일]]}}</ref> 또한, 한터 주간 순위에서 음반 판매량 1위를 차지하였다.<ref>{{뉴스 인용 |제목= 씨엔블루 ‘EAR FUN’, 한터 주간차트 1위! '승승장구' |url= http://thestar.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4/03/2012040300698.html |출판사= 더스타 |날짜= [[2012년]] [[4월 3일]] |확인날짜= 2012-08-19 |보존url= https://web.archive.org/web/20140908061211/http://thestar.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4/03/2012040300698.html |보존날짜= 2014-09-08 |깨진링크= 예 }}</ref> 컴백 무대를 가진 일주일 후 [[4월 5일]] [[Mnet]] 《[[엠카운트다운]]》에서 1위를 차지하였으며,<ref>{{뉴스 인용 |제목= 씨엔블루, 무세운 상승세로 컴백 1주만에 '엠카 1위' |url= http://xportsnews.hankyung.com/?ac=article_view&entry_id=224780 |출판사= 엑스스포츠뉴스 |날짜= [[2012년]] [[4월 5일]] }}{{깨진 링크|url=http://xportsnews.hankyung.com/?ac=article_view&entry_id=224780 }}</ref> 《[[EAR FUN]]》의 타이틀 곡인 '''Hey you'''가 가온차트 4월 1주차에 1위를 등극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 씨엔블루, 가온차트 4월1주차 1위 등극 |url=http://osen.mt.co.kr/article/G1109378505|출판사 = OSEN|날짜 = [[2012년]] [[4월 8일]]}}</ref> 그리고 [[2012년]] [[4월 10일]]에 한 달간의 짧은 활동을 아쉬워하는 팬들을 위해서 《[[EAR FUN Special Limited Edition]]》을 발매하였다.<ref>{{뉴스 인용 |제목= 씨엔블루, 미국화보+DVD 수록된 'EAR FUN' 특별한정판 발매 |url= http://thestar.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4/06/2012040600768.html |출판사= 더스타 |날짜= [[2012년]] [[4월 6일]] |확인날짜= 2012-08-19 |보존url= https://web.archive.org/web/20150925085809/http://thestar.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4/06/2012040600768.html |보존날짜= 2015-09-25 |깨진링크= 예 }}</ref>
         * 공식적인 세 번째 미니 앨범 [[EAR FUN]]활동을 [[2012년]] [[4월 22일]]에 마무리하고, [[2012년]] [[5월 5일]]에 드디어 첫 번째 [[씨엔블루]] 팬미팅을 연세대학교 대강당에서 열렸다.<ref>{{뉴스 인용|제목= 씨엔블루 국내팬미팅 헤드뱅잉+제기차기 ‘폭발반응’ |url=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1205090735301002|출판사 = 뉴스엔|날짜 = [[2012년]] [[5월 9일]]}}</ref><ref>{{뉴스 인용 |제목= 씨엔블루, 팬들과 오붓한 팬미팅 개최 ‘함박웃음’ |url= http://star.fnnews.com/news/index.html?no=87198 |출판사= 파이낸셜뉴스 |날짜= [[2012년]] [[5월 9일]] }}{{깨진 링크|url=http://star.fnnews.com/news/index.html?no=87198 }}</ref>
         * 같은 소속사 가수 [[주니엘]]의 데뷔앨범에 작곡가로 참여하고 듀엣곡과 뮤직비디오 출연소식이 연이어 들리면서 팬들의 기대감을 상승시켰으며, 직접 출연한 선공개곡 ‘바보’라는 곡의 뮤직비디오의 티저가 공개되었다.<ref>{{뉴스 인용|제목= 씨엔블루 정용화 팔에 키운 완두콩, 주니엘 뮤비서 공개 |url=http://starin.edaily.co.kr/news/NewsRead.edy?newsid=01275926599530232|출판사 = 이데일리|날짜 = [[2012년]] [[5월 18일]]}}</ref> [[2012년]] [[5월 22일]]에 음원과 뮤직비디오가 공개되었다.<ref>{{뉴스 인용|제목= 씨엔블루 정용화와 주니엘의 듀엣곡 ‘바보’ 22일 선공개 |url=http://www.segye.com/Articles/SPN/ENTERTAINMENTS/Article.asp?aid=20120521022078&subctg1=&subctg2=|출판사 = 세계일보|날짜 = [[2012년]] [[5월 21일]]}}</ref><ref>{{뉴스 인용|제목= 주니엘-정용화 듀엣곡 '바보', 실시간 차트 2위로 기분좋은 출발 |url=http://www.etoday.co.kr/news/section/newsview.php?TM=news&SM=4101&idxno=587637|출판사 = 이투데이|날짜 = [[2012년]] [[5월 22일]]}}</ref>
         * [[2012년]] [[7월]]부터 [[2011년]] [[6월]]부터 [[8월]]까지 방영된 [[문화방송 수목 미니시리즈|MBC 수목 미니시리즈]] 《[[넌 내게 반했어]]》가 일본 공중파 후지TV에 방영을 시작하게 되었다.<ref>{{뉴스 인용|제목= 정용화, 일본 인기 파워 실감- ‘넌 내게 반했어’ 일본 공중파 입성 |url=http://nanumnews.com/sub_read.html?uid=42246§ion=sc208|출판사 = 나눔뉴스|날짜 = [[2012년]] [[5월 16일]]}}</ref><ref>{{뉴스 인용|제목= 정용화 출연작 '넌 내게 반했어' 日 후지TV 진출 '경사났네' |url=http://www.tvreport.co.kr/?c=news&m=newsview&idx=226944TM=news&SM=4101&idxno=587637|출판사 = TV리포트 |날짜 = [[2012년]] [[5월 16일]]}}</ref> 또한, 공중파 방영 전에 [[2012년]] [[7월 16일]]에 일본에서 공식적인 팬미팅을 개최하였으며,<ref>{{뉴스 인용|제목= 정용화 박신혜, 日 '넌 내게 반했어' 방영 앞두고 팬미팅 개최 |url=http://www.etoday.co.kr/news/section/newsview.php?TM=news&SM=4101&idxno=595980|출판사 = 이투데이|날짜 = [[2012년]] [[6월 13일]]}}</ref><ref>{{뉴스 인용 |제목= 정용화-박신혜, '넌 내게 반했어' 日 팬미팅 성료 |url= http://thestar.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7/17/2012071701006.html |출판사= 조선일보 |날짜= [[2012년]] [[7월 17일]] }}{{깨진 링크|url=http://thestar.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7/17/2012071701006.html }}</ref> 티켓이 모두 매진되는 기염을 토했다.<ref>{{뉴스 인용|제목= 정용화·박신혜, ′넌 내게 반했어′ 日팬미팅 1만석 매진 ″현지 열기 후끈″ |url=http://www.asiatoday.co.kr/news/view.asp?seq=667085|출판사 = 아시아투데이|날짜 = [[2012년]] [[7월 11일]]}}</ref>
         * [[2012년]] [[9월 10일]]에 일본 파시피코 요코하마에서 일본 첫 번째 정규 음반 ‘코드 네임 블루’ 발매 기념 이벤트를 진행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씨엔블루, 日 요코하마 이벤트 대성황 |url=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1209/h20120911151020111780.htm |출판사= 한국일보 |날짜= [[2012년]] [[9월 11일]] |확인날짜= 2012-11-26 |보존url= https://web.archive.org/web/20131212114241/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1209/h20120911151020111780.htm |보존날짜= 2013-12-12 |깨진링크= 예 }}</ref>
         |align="center"|현지녹화 [[2012년]] [[11월 10일]]
         |align="center"|[[2017년]] [[5월 22일]] ~ [[12월 18일]]
  • 배영수 . . . . 20회 일치
         ||<:> '''생년월일''' || [[1981년]] [[5월 4일]] ||
         '''잃어버린 10km'''로 표현하는 그의 구속을 2009 시즌 들어서도 되찾지 않자 자신감을 잃어버렸고, 성적마저 나빠지자 결국 5월, 1승 7패의 상태에서 계투로 강등되었다. 그리고 6월 11일에는 결국 2군으로 내려갔다. 7월 초 다시 1군에 합류했지만 전혀 나아지지 않자, 결국 8월 18일에 시즌 아웃 판정을 받았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41&oid=018&aid=0002144793|#]]
         이 후 5월 1일 대전 한화전에서 5이닝동안 1실점하며 다시 승리투수를 하면서 좋은 흐름을 찾는가 했는데, 이 후 SK와 두산을 상대로 연속 5이닝 미만 투구로 조기강판되면서 강타선을 보유한 상위팀을 상대로는 여전히 극복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5월 중순까지의 투구 내용을 보면 위의 기사와 달리 실제로 구속은 회복되지 못했고,[* 안 되는 경우와 되는 경우의 비율이 절반 정도? 자세한 건 [[토미 존]] 문서에서 수술 부분을 읽어 보도록. [[임창용]]이 특이한 경우.] 예전처럼 묵직한 구위를 앞세운 속구위주의 투구를 더 이상 보여주기는 힘들기 때문에 기교파 투수로 변신했으나 강타선을 보유한 두산, SK와의 대결에서 다소 애매한 모습을 보여주고 말았다. 심지어 5월 20일 대구에서 열린 LG와의 경기에서는 1⅓이닝 동안 5실점(4자책)으로 통타당하는 모습까지 보이면서 결국 계투진으로 강등당하고 만다.
         팀이 시리즈 전적 1승 2패로 지던 10일 11일 [[잠실 야구장]]에서 열린 [[두산 베어스]]와의 플레이오프 4차전에서 스코어 8:7로 불안한 리드를 지키고 있던 8회말 2사 3루 상황에서 7번째 투수로 등판하여 1⅓이닝 17투구수 2탈삼진 무실점 을 기록했고, 한 점차를 지키는 퍼펙트한 피칭을 보여준 배영수는 시리즈 전적 2승 2패를 만드는 중요한 세이브를 따냈다, 이 경기에서 거의 전성기급 구속인 최고 구속 '''147km/h''', 포크볼은 '''140km/h'''까지 찍어서 삼성 팬들에게 큰 감동을 안겨주었다.
         4월 10일 문학 SK전과 4월 17일 대구 두산전, 4월 23일 목동 넥센전에서 연달아 승리함으로써 내리 3승을 거두었다. 삼성팬들에게는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5월 1일 한화전에서 8이닝 2실점으로 호투하고도[* [[장성호]]에게 맞은 투런홈런도 실투가 아니었을 정도로 좋은 볼을 던졌다.] 팀 타선이 1점 밖에 내지 못해 [[패전투수]]가 되었다. 가뜩이나 삼성타자들이 부진한데다가, 한화 선발투수가 '''[[류현진]]'''이었는지라... [[지못미]]. 본인은 최선을 다해 던졌기 때문에 아쉬움도 후회도 없다고 한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109&aid=0002204747|#]] 여담으로 이 날 경기는 철저히 투수전으로 진행되는 바람에 5시에 시작해 7시반에 끝나는 기염을 토했다. 타 구장엔 5회말 경기가 진행되고 있는 곳도 있을 정도로.
         5월 말까지 벌써 5승이나 올리면서 좋은성적으로 선발진에 큰 힘을 보태주고 있었으나, 6월부터 슬슬 부진하기 시작하더니 7월 말까지 이 기간에만 승리 없이 3패를 떠안게 된다. 평균자책점도 3점대 중반에서 5점대 중반까지 상승하고 말았다. 사실 이 기간 중에 QS도 2번을 기록 했으나 5이닝을 채우지 못하고 조기강판 된 경기 또한 4번이나 되었기에 본인 입장으로서도 매우 아쉬웠을 듯 하다.
         2015 시즌 후에 팔꿈치 뼛조각 수술을 받았다. 예정되는 복귀 시점은 5월이였으나, 재활이 지지부진하면서 결국 2016년 시즌을 말아먹을 것으로 전망되며 먹튀가 확정되었다. [[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410&aid=0000330849|관련 기사]]
         재활이후 5월 20일 경희대와의 3군 경기에 등판했는데, 당일 경기에서 2이닝 2실점을 기록했다. 그런데 '''속구 최고구속이 131km/h, 평균구속이 129km/h'''밖에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http://sports.news.naver.com/kbo/news/read.nhn?oid=109&aid=0003322082|관련 기사]]
         그런데...감독에 의하면 시즌 초 10일에 한 번씩 던지게 할 것이라고 한다. 시즌 초 한 번 선발등판 후 2군으로 내려 휴식을 주면서 젊은 투수들을 시험해볼 심산인 듯. 올해 31번 선발로 등판한다면 송진우의 통산 최다 선발 등판 기록을 넘어 1군 통산 378번의 선발 등판이 가능하겠지만, 감독이 공헌한대로 기용된다면 내년을 바라봐야 할 듯 하다.
         4월 20일 5일을 쉬고 넥센전 선발로 등판했으나 4이닝 5자책으로 멸망했다. 정말 10일 휴식밖에 안되는 걸까...
         5월 3일 5이닝 1실점으로 나름 잘 던졌으나 이태양의 방화로 ND. 여담으로 이날 박용택에 삼진을 뽑아내며 1400K를 기록했다. 현역 최다 기록.
         5월 11일 NC전에서 7이닝 2실점으로 퀄리티 스타트 플러스를 기록했다. 추가로 역대 5번째 2100이닝을 달성했다. 이 역시 현역 최다. 그러나 9회말에야 김태균의 동점 투런포가 터져 노디시전.
         5월 18일 LG전에서는 수비 지원을 못받고 4.1이닝 2실점 7K를 기록했다. 만루 장작을 쌓고 내려갔지만 용케 이태양이 급한 불을 꺼 실점이 추가되진 않았고, 6회 병살타로 동점이 되어(...) ND.
         5월 24일 두산전에서는 6.1이닝 6실점으로 대량실점해 패전 투수가 되었다. 그런데 손가락 물집이 터져 피가 났는데도 7회 1사까지 던진 거라고 한다.
         5월 30일 NC전에서는 초구에 선두타자 박민우에 홈런을 맞는등 5이닝 3피홈런 4실점으로 부진했으나[* 배영수가 1경기에서 3피홈런을 기록한 것은 4년여만으로 한화 오고난 2015시즌부터 처음 있는 일이다.] 타선이 2회에만 8점을 뽑아내준 덕에 승리투수가 되었다. 통산 137승으로 현역 최다승 기록을 스스로 갱신했다. 선동열의 대기록 -7.
          * 2017년 5월 10일에 올라온 기사를 보면 아내가 셋째를 임신했다고 한다. [[http://sports.news.naver.com/kbaseball/news/read.nhn?oid=477&aid=0000073539|#]]
  • 성재기 (활동가) . . . . 20회 일치
         [[2013년]] 투신 직전 그는 자금난을 겪고 있었다. 그는 정부에 문의해봤지만 일반 시민단체와는 달리 여성단체들처럼 [[여성가족부]]의 관할이라 했고, 그는 [[여성가족부]]의 지원은 거부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8&aid=0003089755 성재기 투신…여성부 한해 예산 얼마길래?] 머니투데이 2013.07.26</ref> 후원금으로만 [[양성평등연대]](구 남성연대)를 운영하면서 '싱글대디 반찬배달', '무료 법률지원 서비스' 등 돈 드는 사업을 이어 가다 보니 재정난에 부닥쳤다. [[양성평등연대]](구 남성연대)는 [[2011년]] [[3월]]부터 [[2013년]] [[5월]]까지 각종 행사 비용 등으로 2억 4670만 원을 썼다. 하지만 후원금 수입은 1956만 원에 불과했다.<ref name="dongki">[http://news.donga.com/3/all/20130729/56716534/1 <nowiki>[기자의 눈/조동주]</nowiki> 男權을 대변한다며 몸던진 비극] 동아일보 2013.07.29</ref>
         * 아버지 : [[2012년]] [[5월 14일]] 사망
         그는 [[군 가산점]] 외에도 [[병역]] 보상 방안을 반대하는 세력과 네티즌에 대해 이기적이고 이중적이라며 비판을 가하였다. 그는 남성들의 병역 복무로 인한 손실보상 방안을 마련할 것을 [[대한민국 정부]]와 사회에 촉구하였다. [[2011년]] [[6월 11일]] 케이블채널 리얼TV의 '리얼리티 시사 인터뷰쇼'는 10일 오전 9시 30분 '[[군 가산점]]제는 정당한 보상인가?' 편에 출연하여 [[군 가산점]] 부활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여기서 그는 제대 군인에 대한 보상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주장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01&aid=0005105043 리얼TV '시사인터뷰쇼', 군가산점제 논란] 연합뉴스 2011.06.09</ref> 또한 군 가산점, 각종 군필자 보상을 반대하는 네티즌들과 블로그와 트위터 등을 통해 설전을 벌이기도 했다.
         성재기는 자신의 사비를 들여 [[성폭행]] 무고 피해자, 허위 성폭행 신고 피해자, 여성에게 구타당한 남성 폭행 피해자, 이혼 소송 피해자들의 소송 비용과 변호 비용을 지원하였다. [[2013년]] [[2월 26일]]부터는 [[남성연대]]의 숙소를 개방하였다.<ref>[http://www.manofkorea.com/mnotice/441232 남성연대 숙소를 개방합니다.]</ref> 강남구 삼성동에 가출 남성, 노숙자, 가정폭력 피해 남성을 위한 쉼터를 개설했지만 쉼터 수용 인원이 늘어나자 결국 그는 남성연대 숙소마저 개방하였다. 그는 가출 남성 혹은 오갈데 없는 남성들의 쉼터이자 임시 거처로 남성연대 숙소를 개방하게 했고, 숙식은 그가 부담하였다. 또한 주변 건물을 임대하여 남성들의 쉼터이자 일시 거처로 머물게 했다. 그 뒤 [[2013년]] [[4월]] 말부터 [[5월 15일]]까지 사정으로 인해 잠시 문을 닫았던 [[남성연대]] 숙소는 [[5월 16일]]부터 재개방되었다.<ref>[http://www.manofkorea.com/mnotice/511831 남성연대 숙소를 재개방 합니다.]</ref>
         [[2012년]] [[5월 23일]]에는 가수 [[백지영]]의 곡 '[[굿보이]]'에서 남자를 개로 묘사했다며 음원유통 금지 가처분 신청을 제기하였다. 이 노래는 '짖어댄다', '주인을 문다' 등의 가사로 연인 관계의 남성을 비하했으며 뮤직비디오에서는 남성을 말 잘 듣는 개로 설정했다. 그는 [[5월 23일]] 남성연대 대표 자격으로 서울지법에 소장을 제출했다.<ref name="musgish">[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2052301072730159002 남성연대, 백지영 '굿보이' 유통금지 신청] 문화일보 2012.05.23</ref> 백지영 측 관계자는 "전혀 남성을 비하하려는 의도로 만든 노래가 아니다. 위트 있는 가사로 이해해 달라"고 말했다.<ref name="musgish"/>
         [[2013년]] [[5월 2일]]부터는 [[아모레퍼시픽]] [[미쟝센]]의 광고 문구 중 '어린 수컷들이여 스타일 반전의 기회에 동참하라'는 구절에 문제가 있음을 꾸준히 지적, 남성연대 대표 명의로 광고문구 삭제 혹은 수정을 요청, [[아모레퍼시픽]] [[미쟝센]]에서는 [[5월 16일]] 문제가 된 '어린 수컷들'을 '어린 형제들'로 개정하였다.
         성재기는 [[2012년]] [[1월]] "여성가족부가 남성을 위한 정책을 시행한 적이 없는데도 부처 명칭에 '[[가족]]'을 사용했다"며 [[여성가족부]] 명칭사용 금지 가처분 신청을 제기하였으나<ref name="namgist">[http://news.hankooki.com/lpage/society/201208/h2012082220593621950.htm 법원 "여성가족부 '가족' 명칭 문제없다"] 한국일보 2012.08.22</ref>, [[2012년]] [[8월 10일]] [[서울중앙지법]]은 이 가처분 신청을 기각하였다.<ref name="minsis">[http://www.lawtimes.co.kr/LawNews/News/NewsContents.aspx?serial=66490 "여성가족부에서 '가족' 빼라" 남성연대 신청 기각] 법률신문 2013.08.22</ref> 재판부는 결정문에서 "[[여성가족부]]가 '가족'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가족에 관한 정책을 시행하는 것은 정부조직법에 따른 것으로, 명칭을 변경하기 위해서는 법률의 개정이 있어야 한다"라며 "[[남성연대]]가 여성가족부에 대해 '가족'이라는 명칭의 사용금지를 구할 권리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라고 밝혔다<ref name="minsis"/>.
         [[2013년]] [[5월]]에는 [[나이키]] 주최 여성 마라톤이 남성을 역차별하는 것이라며 반대 운동, 반대 캠페인을 펼쳤다. 그는 나이키 회사에 항의 전화를 하기도 했다. 이후 [[양성평등연대]]( 구 남성연대)에서는 [[나이키]] 마라톤 반대 운동을 벌였지만 성재기는 [[5월 24일]] 입장을 바꾸어 자신도 회비를 내고 여성 마라톤에 참가하겠다, 참여하여 반대 의사를 나타내겠다는 뜻으로 의사를 바꾸으나 참여하지 못하고, 양성평등연대(구 남성연대)의 여성 회원 3인이 [[5월 23일]]부터 [[5월 25일]] 마라톤 대회에 참석하기도 했다.<ref name="namma">[http://www.edaily.co.kr/news/NewsRead.edy?SCD=JG31&newsid=01430086602812528 '여성 마라톤대회' 앞둔 성재기 트위터 발언 '눈길'] 이데일리 2013.05.25</ref>
         [[2011년]] [[5월]]부터는 게임 [[셧다운 제도]] 반대 운동에 참여하였고, 방송 토론과 라디오 프로그램 등에 출연하여 게임 셧다운제가 개인의 권리를 침해한다는 점과 게임 셧다운제를 한다 하여 학생들이 공부에 전념하지는 않는다, 학생들이 학교에 가지 않고 PC방에서 게임을 한다, 성인인데도 생일이 빠른 만 18세, 만 19세는 엄연히 성인인데 게임에서 강제로 퇴장당한다는 점 등의 폐단을 지적하였다.
         [[2011년]] [[5월]]부터는 [[아동 청소년법]] 폐지를 주장하였다. 그는 [[2000년]] 당시 아동 청소년법이 국민적 동의를 거치고 통과된 법안이 아니라며, [[2011년]]부터 [[여성부]]에 의해 개정 추진되는 [[아청법]] 제2조 제5호의 '아동청소년으로 명백하게 인식될 수 있는 표현물 및 사람'이라는 조항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아청법 개정안은 [[11월 20일]] 원안대로 국회에 상정되었다.
         2012년 5월 8일에도 그는 가부장제가 싫다고 가부장의 권한을 어머니에게 갖다주는 것은 잘못이라며, 가족 구성원 개개인에게 동등한 발언권을 줘야 하지 않느냐고 주장했다. 다만 성재기는 자녀들은 아직 미성년자라서 의사판단이 어려운 만큼 부모가 조언을 해주어야지 부모가 일방적으로 명령하고 강요하는 것은 폭력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일부 어머니들의 교육열, 자녀들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고 어머니 본인의 뜻대로 가정을 좌지우지하는 것을 지적했다. 성재기는 가부장제 싫다고 호주제 폐지하고, 군가산점 없애고, 가부장을 비난한 결과가 고작 이런 것이냐고 항변했다.
         [[2013년]] [[1월]]에는 정부 주도로 관공서에서 여성기업제품 구매의무화 하는 정책을 철회할 것을 요청하였다. 2013년 2월 10일부터 대림미술관 화장실문 부착광고를 시정 요청하여 2월 20일 성사시켰다.
         10여 명의 자원봉사자로 현장 활동, 홍보, 문건 작업 등에 문제가 있다고 본 그는 [[2013년]] [[3월]]부터 공지, 유급 직원을 고용하였다. 그러나 유급 직원이자 [[일베저장소]] 회원이었던 최모는 그해 [[5월]] 자신이 월급을 받지 못했다고 [[일베저장소]]에 올리기도 했다. 이 내용에는 "[[양성평등연대]](구 남성연대)에서 털리고 나온 애들이 뭉쳐서 [[남성]] [[인권]]운동 단체를 만든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2013년]] [[5월]] 월급 체불을 이유로 [[양성평등연대]](구 남성연대)의 노트북을 무단으로 들고 나간 최모는 [[일베저장소]] 짤방게시판에 그가 여론 조작을 사주했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 우규민 . . . . 18회 일치
         2007년에도 7월 10일 전까지는 1승 0패 24세이브 ERA 1.20, WHIP는 1도 되지 않는 호성적으로 [[오승환]]과 세이브왕 경쟁을 하고 있었는데, 8월 2일 [[채태인]]이 대타로 나와 ~~방망이가 나가다가 띵 하고 맞아서~~프로 첫 홈런을 때려낸 후부터는 어째 [[블론세이브]]의 왕이 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816 대첩]]. 이후부터 부상으로 인한 [[스프링캠프]] 불참의 여파가 나타나 방화 비율이 높아지다가 결국 13블론세이브를 달성, 1시즌 최대 기록을 세우고 말았다. 이 시즌 30개의 세이브로 오승환의 뒤를 이어 세이브 2위에 올랐는데, 13블론의 임팩트가 너무 컸던지라 방화범 이미지가 확립되었다. ERA도 2.65로 크게 상승했다.
         2009 시즌 초반에 잠시동안 [[김정민(야구)|김정민]]포수와 배터리를 이룰 땐 5⅔이닝 동안 삼진 5개, 피안타 2개, '''볼넷 0개''', '''[[평균자책점]] 0.00'''의 엄청난 성적을 냈으나, [[512 대첩|5월 12일]][[무박 2일 경기|과 13일 사이에 벌어진]] [[SK 와이번스|SK]]와의 잠실 경기에서, 12회초에 올라왔을 때, 주심 '''전일수'''의 대활약(?)으로 처절하게 망가졌다. 지못미.
         다행히 그 이후에는 통증이 없었으며, 퓨처스리그를 거친 후 5월 14일까지 펼쳐지는 NC와의 홈경기에 선발로 등판해 5⅓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았다.
         5월 7일 NC 전에서 1회에 [[나성범]]에게 통산 100호 홈런을 헌납한 이후, 4이닝 6실점(4자책)으로 부진했다. 안 그래도 과부하가 걸린 불펜의 조기등판을 불렀고, 팀도 대패해 패 하나를 더하게 되었다. 한편 이날 경기에서도 강습타구에 맞을 뻔했지만, 이번에는 글러브로 막았다. 타구에 맞은 것 때문인지 밸런스가 무너져버렸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밑에 3연승을 보면 더더욱 의심간다~~
         5월 13일 넥센전에 선발 등판할 예정이었으나 경기를 앞두고 무릎 염증으로 인해 선발 등판을 미뤘다.
         5월 19일 한화전에서 6이닝 2실점(1자책) 7피안타로 QS를 기록하고 '''첫 승'''을 거두었다. 이 날 ~~결승타와~~ 두 번의 실책으로 무자책점을 떠안겨 준 ~~강지배~~[[강한울]]을 ~~비글 쓰다듬듯~~ [[http://mlbpark.donga.com/mp/b.php?m=user&p=1&b=kbotown&id=201705190003804436&select=&query=&user=nibasorol&site=donga.com&reply=&source=&sig=h4aTGY-Y6hjRKfX@hca9Sg-Ajhlq|다독이는 모습]]이 전파를 타며 훈훈함을 안겨 주었다. 그리고 이날 선수단에게 피자를 돌렸다고 한다.
         5월 25일 '''8.1이닝 11k 1자책 118구 투구로 최고의 경기를 보여줬다.''' 역시 상대팀은 kt. 콱나쌩의 정석을 보여주고 있다. 시즌 2승째.
         9월 10일 광주 기아전 4이닝 5피안타 3탈삼진 4실점(2자책)으로 부진하며 7승 사냥에 실패했으나, 팀은 이겼다.
         5월 2일 1군에 등록됐고, 당일날 SK와의 경기에서 최충연에 이어 8회초 중간계투로 등판해 노수광에게 안타를 맞긴 했지만 삼자범퇴로 이닝을 잘 마무리했다.
         5월 5일 한화전 5점차로 앞선 한화와의 경기에서 한기주에 이어 9회초 등판해 1이닝 1피안타 2K 무실점을 기록했다.
         5월 10일 선발 보니야가 8회말 흔들리자 구원등판했으나 분식을 하며 블론세이브를 시전했다. 팀은 믿었던 장필준마저 블론을 저지른 끝에 연장 11회말 끝내기 안타로 패해 15년만의 수원에서의 스윕 시리즈 달성에 실패했다.
         5월 13일 기아전 7대5로 리드를 하고 있는 6회에 등판해 기아에게 1점을 내줬다. 이는 팀의 역전패에 발판을 마련한 점수였다.
         5월 15일 엘지전 6회초에 올라와서 정타 한개를 이원석의 호수비의 덕으로 막아내고 안투 두개와 볼넷 1개를 주며 1사 만루의 위기를 자초하였다. 이형종에게 적시타를 얻어맞았지만 구자욱의 어깨로 아웃카운트를 잡고 후속투수 임현준이 이닝을 틀어막으며 더이상의 실점은 하지 않았지만 정타 4개에 볼넷 한개를 내주는 눈이 썩어들어가는 투구 내용을 보여주었다. 압권은 투스트라이크를 선점한 이형종에게 승부하러 들어가다 공이 몰려서 그대로 안타를 내주는 장면.
         5월 19일 넥센전 7회말에 등판해서 주전이 대거 빠진 1.8군 넥센 타선을 상대로 1이닝 1실점하였다. 4대3 한점차로 쫓고 있던 삼성의 추격 의지를 꺼버리는 역할을 하였다. 이로써 이기고 있으나 지고 있으나 우규민이 올라오면 무조건 한점을 헌납하는 것은 공식이자 과학인데 투수코치와 감독만 그 사실을 모르는 듯하다.
         5월 22일 롯데전 8회 등판해 꾸역꾸역 한타자만 잡고 내려갔음에도 홀드를 기록했다. (...)
         5월 25일 백정현이 8이닝 무실점 인생투를 하고 내려갔음에도 2아웃 잘잡고 볼넷-2루타로 1실점해 방어율이 다시 5점대 중반으로 치솟았다. ~~재원이 형 보고 싶다~~
         5월 29일 장원삼이 0.2이닝 8실점으로 털린 ~~108번뇌~~ kt전에서 패전조로 등판해 이전 타석들에서 홈런, 3루타, 단타를 기록한 멜 로하스 주니어에 2루타를 맞으며 kt 최초의 사이클링 히트 기록에 이름을 올리고 말았다. 팬들은 이미 모든 것을 체념한채 '그 과일'이라고 부르고 있는 중.[* 별명이 귤인데다가 정현욱의 별명이 '그 투수'라서...][*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지만, ~~야갤에서 퍼진 건지~~ 고소미를 먹기 싫거나 그냥 언급조차 하기 싫을 정도로 싫어하는 대상을 '그XX'라고 부르는 사례가 많아졌다. 이를테면 [[최형우|소외감 발언으로 대구아재들의 분노를 산 외야수]]를 '그 선수'라고 부른다든지...원조는 야갤에서 [[문재인]]을 '그 새끼' 라고 부른 것이 원조.]
  • 허목 . . . . 18회 일치
         '''허목'''(許穆, [[1596년]] [[1월 10일]](음력 [[1595년]] [[12월 11일]]<ref>이익, 《성호전집》 권58, 미수 허 선생 신도비명</ref>) ~ [[1682년]] [[6월 2일]]([[음력 4월 27일]]))은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 및 유학자, [[역사가]]이자 교육자, 정치인이며, 화가, 작가, 서예가, 사상가이다. 본관은 [[양천 허씨|양천]](陽川)으로, 자(字)는 문보(文甫)·문부(文父)·화보(和甫)<ref>[http://people.aks.ac.kr/front/dirservice/dirFrameSet.jsp?pUrl=/front/dirservice/ppl/viewDocumentPpl.jsp?pLevel2Name=&pLevel3Name=&pAgeCode=&pAgeName=&pGanadaFrom=&pRecordID=PPL_6JOb_A1595_1_0014464&pPplCount=&pOrderByType=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ref>, 호(號)는 미수(眉叟), 태령노인(台領老人),대령노인(臺領老人), 석호장인(石戶丈人)이다. 별호는 미로(眉老), 희화(熙和), 공암지세(孔巖之世), 승명(承明)이고 별호로는 동교노인(東膠老人), 구주노인(九疇老人), 동서노인(東序老人), 이서포옹(二書圃翁),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1657년]] 하순 그뒤 [[사헌부]]장령(掌令)이 되고 [[12월]] 사헌부지평이 되었으나 사양하다가, [[1658년]](효종 9년) [[1월]] 다시 사헌부지평에 다시 천거되어 취임하여 상경하였다. 그해 3월에 부사용(副司勇)을 거쳐 다시 [[사헌부]]지평이 되었다. 4월에 또 다시 부사용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계속 사양하다가 [[1658년]] 5월에는 봉정대부(奉正大夫)에 임명되자 하는수 없이 도성으로 올라와 출사하였다. 바로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고, [[경연관]]의 한사람으로 [[경연]]에 입시하였다. [[1659년]] 다시 [[사헌부]]장령이 되어 사직을 청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했다.
         [[1658년]] [[6월 10일]] 허목은 마포에서 배를 띄웠다. 조카인 굉과 규가 동행했으며 배를 탄 곳은 옹점(옹점) 앞 물가였다. 또 배가 떠나기 전 규가 토정(土亭)에 들렀다가 돌아왔다고 했으니 바로 이지함(李之菡)이 지은 토정을 말하는 것이다. 그때는 이미 토정이 사망한 지 80여년이 지난 시절인 데도 정자가 말끔하게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일행은 내리는 빗속을 마다하지 않고 노를 저어 서강에 다다라 조수가 물러가기를 기다렸다고 한다.<ref name="kyunghangang">[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06151510201&code=900308 <nowiki>[</nowiki>한강을 걷다<nowiki>]</nowiki>행주산성 ·개화산· 검단사] 경향신문 2007년 06월 15일자</ref> 허목은 잠두봉을 지나 선유봉(선유봉)을 구경하고 행주산성 아래에 이르러 하룻밤을 묵어가기도 했다.<ref name="kyunghangang"/>
         [[1661년]] [[4월 21일]] 용주 [[조경]]이 [[윤선도]]의 구명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서인]]계 유생들의 심한 공격을 받았다. 그해 [[5월]] 내내 [[조경]]을 죄주어야 된다는 탄핵이 빗발쳤고, [[6월 3일]]까지 매일 [[조경]]을 탄핵하자 그는 [[송시열]], [[송준길]]을 사형시킬 것을 상주한다. 그는 계속해서 [[송시열]], [[송준길]]과 [[서인]]들이 종통과 적통을 분리하려는 그릇된 사고관을 가졌다며 계속 공격했다. 그해 그는 다시 상소문을 올렸는데, 이때 그는 오도된 [[기해복상]](己亥服喪)의 잘못을 다시 추정(追正)해야 된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리므로써 [[서인]]측과 대립하게 된다.
         [[1675년]](숙종 1년) [[1월]]에 [[이조]][[참판]](吏曹參判) 겸 [[성균관]][[제주|좨주]](成均館祭酒)가 되고 이어 [[비국]][[당상]](備局堂上)과 [[귀후서]]제조(歸厚署提調)를 겸임하였으며, 동년 [[5월]] [[성균관]][[제주|좨주]]가 되었다.
         [[1675년]] [[5월]] 다시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진, [[의정부]][[우참찬]](議政府右參贊) 겸 [[성균관]][[제조]](成均館提調)로 특별 승차하고 한달 뒤에는 [[의정부]][[좌참찬]](左參贊)으로 옮겨 경연에 입시하였다. 이때 [[송시열]]의 처리를 놓고 그는 사형을 주장하였다. [[윤휴]] 등도 사형을 주장했으나, [[허적]]은 두 선왕의 스승이고 고명대신임을 들어 사형을 반대하였다. 허목은 송시열의 사형을 극력 주장하였다. 이때 그는 서인에 의해 [[복평군]]의 추종 세력 내지는 [[복평군]]의 하수인인 것으로 몰렸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1675년]](숙종 1) 초 [[의정부]][[우참찬]]이 되었다. 그해 [[5월]] 상소를 올려 [[송시열]]을 처형시킬 것을 주청하여 논란이 되었다.
         {{인용문|정치와 형벌이 문란하여져서 전도(顚倒)되고 괴려(乖戾)되어 그 바름을 얻지 못하고 있어서 오늘날 죄를 진 자가 나라의 명령을 쥐고 남에게 위복(威福)을 가한 지 이미 오래 되었고, 심지어는 천경(天經)을 독란(瀆亂)케 하고 인기(人紀)를 괴멸(壞滅)해 왔습니다. 선왕(先王)의 총명하신 각오(覺悟)로써도 미처 명분을 바로 잡지 못하시고 갑자기 신하와 백성들을 버리고 빈천(賓天)하셨습니다.<br /> 전하께서 사위(嗣位)하심에 이르러서는 어질고 후하신 마음으로써 차마 죄인의 우두머리에게 법을 가하지 못하시고 먼 곳으로 귀양보낸다는 죄명을 내리셨으나, 실지는 중도(中道)에 부처(付處)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은혜로 용서하심이 지극히 두터운데도 그 덕(德)의 두터운 뜻을 생각지 않고서 뜻을 잃은 무리들이 앙앙(怏怏)하게 원망하면서 와언(訛言)을 퍼뜨리고 비방을 지어내서 사람들의 마음을 의혹케 하고 어지럽혀서 의리(義理)가 막히고 삿된 말들이 계속하여 일어나고 있습니다.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의 질서가 어지럽게 되고도 나라가 위태롭지 않은 적은 있지 아니합니다.<br /> 왕자(王者)의 다스림은 관유(寬裕)보다 더 좋은 것이 없습니다마는, 그 나라를 다스리는 데 엄하지 아니하면 이는 참으로 화란(禍亂)을 불러오게 됩니다.<ref>숙종 4권, 1년(1675 을묘 / 청 강희(康熙) 14년) 윤5월 8일(을미) 3번째기사 "우참찬 허목이 송시열을 죽일 것을 바라는 상소문"</ref>}}
         이어 '정치와 형벌이 문란하게 되고 나라를 다스림이 엄하지 못하다.'하여 그 책임을 [[송시열]]에게로 돌렸다. 또한 [[5월]]말의 경연에서 그는 "[[서인]](西人)들이 무도(無道)하여 장차 나라를 어지럽게 할 것인데 임금이 이러한 기미를 먼저 알고 다스렸다"며 서인을 처벌한 숙종을 극찬하였다. 이때 유일인 김종일(金宗一)의 행적을 치하하며 그에게 추증을 건의했다가 [[승지]] [[김만중]]의 탄핵을 받자, 두번 사직을 청했다가 철회했다.
         [[1675년]] [[5월]] 허목은 "죄인에게 형을 더하는 것을 반대하는 차자"(請勿罪人加律箚)를 올려 [[송시열]]이 "효종을 마땅히 서지 못할 임금으로 여겨 지존을 헐뜯고 선왕을 비방했다. 마땅히 죽어야 할 죄가 셋이나 된다"고 주장했다.<ref name="sun09">[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13294 민생 무너지는데, 임금·사대부 눈엔 송시열만 보였다]</ref> 그러나 허목은 형량을 가중해 [[송시열]]을 사형시켜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ref name="sun09"/> 허목의 상소 이후 [[남인]]계열의 [[성균관]]유생, 재지인사들에 의해 [[송시열]]의 사형을 청하는 상소가 계속 올라왔다.
         [[1675년]] [[5월 13일]] 허목은 [[송시열]]을 사형에 처하고 [[송준길]]의 [[추탈]]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같은 날 [[송시열]]의 문인인 전 교관 [[황세정]]이 [[송시열]]과 [[송준길]]을 변호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조선 숙종|숙종]]의 분노를 사서 진도로 귀양갔다.
         또, 허목은 상소를 올려 왕과 양반들이 모범을 보여 권농할 것과 왕비와 귀부인들이 직접 길쌈을 하고 베를 짜는 것을 해야 된다며 사대부의 솔선수범을 주장하였다. 허목은 '친잠에 대한 의논(親蠶議)'에서 신농씨의 법(神農之法)을 인용해 "장부가 농사짓지 않으면 천하에 굶주리는 자가 있으며, 부인이 베를 짜지 않으면 천하에 춥게 지내는 자가 있기 때문에 왕이 친경(親耕)하고 왕비가 친잠하는 것"이라고 전한다.<ref name="chimjam">[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5/06/2008050601620.html <nowiki>[</nowiki>이덕일 사랑<nowiki>]</nowiki> 선잠(先蠶)] 조선일보 2008년 05월 06일자</ref> 여성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이 선잠(先蠶)이었다.<ref name="chimjam"/>
         [[1679년]] [[5월]] 탁남의 영수인 [[영의정|영상]] [[허적]]의 아들 [[허견]]의 권력남용을 이유로 [[허적]]을 탄핵했다가, 오히려 자신이 역공격을 당하였다. [[6월 16일]] [[윤휴]]는 허목의 허물을 지탄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후 [[서인]]에 의해 [[강서]] [[현령]](江西縣令) 김만성(金萬成)에게 뇌물을 받은 일로 비난받은 뒤, [[허견의 옥사]]에 엮여져서 탄핵 대상이 되었고, 이때 송시열을 탄핵하는 과정에서 나온 단어를 문제삼아 그가 [[조선 효종|효종]]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당하였다. [[허견의 옥사]]와 기타 여러가지 이유가 복합되어 [[1680년]] [[5월]] 양사의 탄핵을 받아 삭출(削黜)되고, [[의금부]]에 투옥되었다. [[서인]] 위관들은 그에게 혹독한 형문을 가하며 [[허적]] 일파와의 관계성을 추궁하였으나, 청남의 중진으로 탁남 [[허적]] 일파와 사사건건 대립했던 그는 혐의를 승복하지 않았다. 같은 달 거듭된 탄핵으로 [[문외 출송]](門外黜送)되었다가 서인 [[사헌부]]의 건의로 사판에서 삭제되었다. [[서인]]은 허목을 국문을 계속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조선 숙종|숙종]]은 고령이라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았다.
         [[1682년]](숙종 8년) [[5월]] [[조선 숙종|숙종]]은 그의 직첩을 되돌려주려 했으나 [[서인]] 삼사에서는 이를 반대하였다. 홍수의 변(紅袖之變) 당시 악의를 품고 삼복 형제를 구원하기 위해 [[김우명]]을 소환과 무고죄 처벌 건의했으며, 효종 때의 예송논쟁 역시 정변을 기도한 것이며 [[윤휴]]보다 죄가 못하지 않다며 계속 공격하였다. [[5월 15일]] 형조 판서 박신규(朴信圭)가 허목만이 죽었는데도 죄안에 있음을 들어 사면을 청하여 사면되었다.
         [[1883년]](고종 20년) [[10월 24일]] 진사(進士) 윤희배(尹喜培)가 상소를 올려 허목의 학문과 공적을 높이 평가하여 [[문묘]]에 배향할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11월 10일]] 유생 정혼(鄭混)등이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고, [[11월 13일]] 유생 신석영(申錫泳) 등이 윤희배를 [[사문난적]]으로 몰며 다시 반대 상소를 올림으로써 무산, 좌절되었다.
         * 어머니 : [[나주 임씨]](羅州 林氏, [[1575년]] [[2월 3일]] - [[1647년]] [[7월 10일]])
  • 희빈 장씨 . . . . 18회 일치
         |사망일 = 숙종 27년(1701) 음력 10월 8일 ~ 10일<!--사망 발표가 10일 오전이었음-->
         외할머니 변씨는 조선 최고의 갑부 역관으로 유명했던 [[변승업]]의 당고모로, [[변승업]]의 아버지이자 소설 《허생전》에 변부자로 등장했던 변응성의 사촌누이(백부의 딸)이다. 외삼촌 윤정석은 조선의 부를 장악했던 [[육의전]]의 면포 상인이었다.<ref>《조선왕조실록》숙종 21권, 15년(1689 기사 / 청 강희(康熙) 28년) 5월 9일(갑진) 4번째기사</ref><ref group="주">윤정석의 본래 출신이 기록된 《숙종실록》에는 "시인(市人)으로 면포(綿布)를 파는 자"로 기록하고 있다. 17세기 조선의 한성에서 면포를 팔 수 있는 건 오직 [[육의전]] 상인 뿐이다.</ref> 1701년 [[무고의 옥]]에 연루되어 공초되었을 때의 기록에 따르면 1680년 장씨가 출궁되어 은평구 친정에서 머물 당시에 담 하나를 두고 이웃에 살았던 만큼 누이인 윤씨와 관계가 매우 각별했음을 알 수 있다.
         희빈 장씨의 입궁 시기는 불분명하다. 그가 11세의 어린 나이에 아비 [[장형 (조선)|장형]]을 잃고 생계가 어려웠던 탓에 궁녀가 되었다는 주장과 [[장형 (조선)|장형]]이 사망하기 전에 역시 궁녀였던 딸이 있는 [[장형 (조선)|장형]]의 사촌형 [[장현 (조선)|장현]]의 권고를 받아 막내 딸인 장씨를 입궁시켰다는 주장이 존재한다. 생부 [[장형 (조선)|장형]](張炯)의 옥산부원군신도비 기록에 따르면 희빈 장씨가 어린 나이에 간택되어 입궁해 성장한 것으로 되어있으며, 숙종 실록에도 머리를 스스로 땋아 올리기 전에 입궁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ref>숙종실록 15년 5월 6일 2번째 기사</ref>
         조사석의 도움으로 대왕대비전의 궁녀였던 장씨는 [[조선 인조|인조]]의 [[계비]]이자 [[조선 숙종|숙종]]의 증조모 뻘인 [[장렬왕후|자의대비]] 조씨를 웃전으로 모셨다. 장씨가 출궁되었을 때 [[장렬왕후|자의대비]]가 친필로 서신을 써서 법적 며느리이자 친정 외질녀인 [[숭선군]]의 부인 신씨에게 장씨를 돌보게 한 것이나 장씨의 재입궁을 주선했던 것, 조씨가 내전([[인현왕후]])과 소원하고 장씨를 치우치게 사랑했다는 기록<ref>숙종실록 12년(1686 병인 / 청 강희(康熙) 25년) 12월 10일(경신) 4번째기</ref> 의 존재 등으로 미루어 장씨가 [[장렬왕후|자의대비]]의 각별한 애정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같은 해, 숙종의 어머니였던 대비 [[명성왕후]] 김씨(明聖王后 金氏)에 의해 강제로 출궁되었다. 숙종실록이나 인현왕후전 등에는 숙종을 모시기에 장씨의 출신이 천하고 성품이 극악한 이유로 쫓아낸 것으로 언급하고 있지만, [[경신환국]] 당시 [[장현 (조선)|장현]] 일가가 [[복평군]] 형제와 절친한 사이이니 죄를 물어야 한다고 주장해 몰락시킨 장본인이 바로 [[명성왕후]] 김씨의 사촌 오라비 [[김석주]]였던 것으로 비추어 장씨의 보복을 견제한 탓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그녀가 출궁된 직후인 [[1681년]] 1월 3일에 계비 간택령이 내려졌고, 3월에 [[조선 숙종|숙종]]의 모후인 [[명성왕후|대비 김씨]]와 [[송시열]]의 추천으로 민씨([[인현왕후]])가 간택되어 [[1681년]] 5월 14일 [[조선 숙종|숙종]]과 민씨가 가례를 올렸는데 본래 [[명성왕후|대비 김씨]]의 친정 가문과 원한이 있던 [[송시열]]과 [[민유중]]<ref group="주">명성왕후 김씨의 아버지 [[김우명]]은 당파로선 엄연한 서인이었지만 [[조선 현종|현종]]의 척신으로서 예송논쟁 당시 [[송시열]]과 [[송준길]]을 비판하고 [[남인]]의 손을 들어주어 [[서인]]의 공적이 되었다. [[민유중]]은 과거 [[김우명]]의 형인 [[김좌명]]과 심하게 다투어 벼슬을 버리고 지방에 은거하였던 경력이 있다.</ref> 의 혈육인 민씨가 [[조선 숙종|숙종]]의 계비가 된 것은 [[경신환국]] 당시 [[서인]]과 손을 잡았던 명성왕후의 정치적 계약임을 짐작할 수 있는 만큼 [[인경왕후]]의 죽음 직후 계비로 내정된 민씨를 위해 장씨를 [[조선 숙종|숙종]]의 곁에서 치운 것일 가능성도 존재한다.<ref group="주">본래 정처의 3년상이 마치기 전에 재혼하는 것은 경국대전과 의례의 조항으로 엄격히 금지되었으며 이는 왕 또한 마찬가지이다. [[조선 숙종|숙종]]이 [[인경왕후]] 김씨의 사후 3년상은 고사하고 불과 반 년도 되지 않아 [[인현왕후]] 민씨와 재혼을 한 것은 조선 왕실 역사 상 전례에 없는 일이었다. 당연히 논란이 있어야 할 [[인현왕후]] 민씨와의 재혼에 대해 반대하지 않았던 서인은 [[인현왕후]] 민씨의 사후 3년상이 마쳐지기 전에 [[조선 숙종|숙종]]이 계비 간택령을 내리라는 명을 내리자 반대를 하는 이중성을 보였다. 조선왕조실록 숙종 37권, 28년(1702 임오 / 청 강희(康熙) 41년) 8월 27일(병오) 2번째기사</ref>
         라는 [[사간원]] 헌납 [[윤빈]]의 비판에서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1683년에 [[장희재 (조선)|장희재]]의 직위가 포도부장이었던 기록이 존재하며<ref>숙종 17권, 12년(1686 병인 / 청 강희(康熙) 25년) 12월 10일(경신) 4번째기사</ref> 장씨의 동복 언니는 [[관상감]] 직장이었던 김지중에게 출가한 상태였는데 1701년 [[김지중]]의 증언으로 미루어 김지중이 처가에 왕래하며 장희재와 밀접한 관계였음을 알 수 있는 만큼 생계가 어렵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장씨의 외삼촌 윤정석은 면포를 팔던 시전상인이었는데, 면포(무명)가 국법 상 [[육의전]]만이 매매가 가능한 독점 상품이었던만큼 윤정석이 일개 장삿꾼이 아닌 [[육의전]] 상인이었음을 뜻하며 이는 윤정석이 상당한 재력을 소유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윤정석은 장희재의 집과 담을 하나 두고 살았을 만큼 가까운 사이이기도 했다.
         서인 영수이자 [[송시열]]의 최측근인 [[김수항]], [[김수흥]]의 종손녀 김씨가 간택되어 3월 28일에 숙의로 봉해졌고 노비 150명이 하사되었다. 5월 27일에는 소의로 진봉되었으며 얼마 뒤에는 종1품 귀인으로 봉해졌는데 회임은 고사하고 [[조선 숙종|숙종]]의 사랑도 받지 못한 김씨에게 이러한 특별진봉이 거듭된 것은 서인 영수의 종손녀라는 신분과 장씨를 향한 [[서인]]과 [[인현왕후]]의 견제를 의식한 [[조선 숙종|숙종]]의 방어책이었다.<ref group="주">김씨가 [[조선 숙종|숙종]]의 총애를 받지 못한 것은 숙종 17권, 12년(1686 병인 / 청 강희(康熙) 25년) 12월 10일(경신) 4번째기사에 언급되어 있다.</ref>
         [[인현왕후]]는 직접적으로 숙종에게 숙원 장씨를 쫓아낼 것을 종용하기도 하였는데, 숙종에게 [[명성왕후]] 김씨가 꿈에서 계시를 내리길 장씨가 원한을 품고 환생한 짐승의 화신이며 불순한 무리(남인)의 사주를 받고 입궁했으니 쫓아내야 한다고 발언했던 기록이 숙종실록에 실려 있다.<ref>숙종실록 15년(1689 기사 / 청 강희(康熙) 28년) 5월 2일(정유) 2번째기사</ref> 또한, '장씨 팔자에 본디 아들이 없으니 노고하셔도 공이 없을 것이다'는 주장도 했는데 이는 모두 훗날 [[인현왕후]] 민씨가 폐서인이 되어 폐출되는 이유가 된다. [[조선 숙종|숙종]]은 원자([[조선 경종|경종]])가 탄생하자 [[인현왕후]]가 매우 노여워했으며, 급작스레 주가(主家: 공주의 처소. [[홍치상]]의 어미 [[숙안공주]] 혹은 [[명안공주]] 등을 의미한다)와 더욱 친밀해지고 [[1688년]] 2월, '[[조사석]]이 장씨 친정의 청촉으로 상신에 제배되었다'는 소문을 유포했던 것이 발각되어 유적에서 삭제되고 위리안치된 [[홍치상]]의 방면을 종용했던 것을 폭로하기도 했다.<ref group="주">[[1688년]] 4월에 발발한 [[기사환국]]의 여파로 [[노론]] 과격파였던 [[김만중]]이 다시 한양으로 압송되어 국문되었는데 소문의 근원지가 [[조선 숙종|숙종]]의 고모인 [[숙안공주]] 들에게서라는 자복이 있자 [[홍치상]]에게 교형이 내려졌다. [[갑술환국]]으로 [[홍치상]]은 다시 복관되었지만 [[조선 숙종|숙종]]은 '매우 가까운 친척이고 높은 연세인 공주가 집에 있으니, 내가 차라리 떳떳하지 않은 데에 빠지겠다. 특별히 복관(復官)하라'하며 불쾌함을 드러냈으며, 1702년 [[홍치상]]의 아들이 [[홍치상]]의 억울함을 호소하며 격쟁하자 '[[홍치상]]의 지은 죄는 만번 통분할 일인데 아들이 감히 격고하였다'며 분노를 터트렸고 곧 '지은 죄가 낭자한데도 관작이 그대로인 탓이다'하여 복관한 관작을 다시 거두었다.</ref>
         5월 2일, [[조선 숙종|숙종]]은 당시 사대부 여성으로선 입에 담을 수 없는 발언을 했던 [[인현왕후|중전]] 민씨의 언사를 낱낱이 폭로하여 공개적으로 망신을 시킨 후 폐서인하여 강제로 출궁시켰다. [[조선 숙종|숙종]]은 [[인현왕후|중전 민씨]]의 폐출은 폐비 윤씨와 비교할 바가 아니며 그녀의 인성이 여후<ref group="주">한고조([[유방]])의 아내 [[여태후]]를 의미한다. 여태후는 중국 3대 악녀(여태후, 측천무후, 서태후)로 꼽히는데, 투기와 잔혹성은 여태후가 단연 으뜸이다. 여태후는 남편 한고조가 사망하자 그녀의 정적이었던 척부인의 혀와 팔다리를 자르고 인간돼지라고 명명하여 변소에 장식하였으며 척부인의 소생을 살해하였다.</ref> 와 흡사하다고 비교하였다. [[인현왕후]] 민씨에게 물어진 죄는 죽은 시부모의 계시를 빙자하여 왕에게 거짓을 고한 죄<ref group="주">'''(장씨의) 팔자(八字)에 본디 아들이 없으니'''를 말한다</ref>, 왕의 육체를 조롱한 죄<ref group="주">(장씨의) 팔자(八字)에 본디 아들이 없으니, '''주상이 노고(勞苦)하셔도 공이 없을 것'''의 부분을 말한다.</ref>, 투기로 내전(內殿)의 일을 조정으로 확대시켜 국정을 어지럽힌 죄<ref group="주">서인이 장씨를 출궁시키도록 종용한 것과 옥교 사건, 장씨 소생의 왕자를 원자로 삼은 것에 대한 서인의 반대를 의미한다.</ref>, 내전에서 궁인의 당파를 나누어 붕당을 일으킨 죄였다. [[조선 숙종|숙종]]은 [[인현왕후|폐서인]] 민씨의 남겨진 물건을 모두 불태워버리도록 명하였으며 그녀가 가례를 올릴 때 입었던 장복은 대내에서 공개적으로 태우도록 했다.<ref group="주">이후 노론은 숙종이 옳은 주장을 한 [[송시열]]을 처벌하고 정권을 갈아치운 목적이 왕비 민씨를 내쫓고 후궁 장씨를 왕비로 올리기 위한 것이었으며 왕비 민씨의 폐출은 장씨의 모략이었다고 기록한다.</ref>
         [[인현왕후]]가 폐출된 후 [[조선 숙종|숙종]]은 새로이 계비를 간택하지 않고 원자의 생모인 희빈 장씨를 왕비로 삼을 것을 선포하였다. 5월 13일, 희빈 장씨의 왕비 명호가 정해졌다. 이는 후궁 소생의 원자가 왕비 소생의 정통성을 얻게 되는 사건임과 동시에 중인 출신이자 궁녀 출신인 후궁이 국모의 위에 오르는 조선 역사상 최초의 사건이었다. 하지만 [[장렬왕후|대왕대비]] 조씨의 복상 기간이 끝나지 않은 탓에 장씨가 정식으로 왕후로 책봉된 것은 다음 해인 1690년 10월 22일이다. [[조선 숙종|숙종]]은 장씨의 부모인 [[장형 (조선)|장형]](張炯)과 [[장형 (조선)|장형]]의 첫 아내 고씨는 옥산부원군(玉山府院君), 영주부부인(瀛洲府夫人)으로 추숭되었고, 장씨의 생모인 윤씨는 파산부부인(坡山府夫人)으로 책봉되었으며 [[장형 (조선)|장형]] 묘소에 옥산부원군 신도비를 세우도록 하여 장씨가 새로운 왕비가 되었음이 기정사실화 되었다.
         숙종실록에는 장씨 소생의 왕자가 9월 16일에 사망하였는데 태어난지 열흘이 지났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승정원일기의 기록에 따르면 6월에 이미 [[산실청]]이 설치되었으며 7월 19일 중궁전(장씨)이 해만(解娩: 해산)한 후 약방(藥房)과 정원(政院), 옥당(玉堂)이 대전과 중궁전의 안부를 물었다.<ref>[[승정원일기]] 숙종 16년 7월 19일 (무신) 원본342책/탈초본18책 (10/14)</ref> 다음 날인 7월 20일, 중전 장씨의 해만 상태와 산후 기후가 편안하다는 보고가 있으며 2품 이상 관원들이 문안을 올렸다. 22일에는 장씨의 유즙(乳汁: 젖)이 나오지 않아 약을 의논하는 기사가 있다. 7월 26일에는 산실청 의관이 입진하여 중궁전(장씨를 말한다)이 해만(解娩: 해산)한 지 제7일이 되었으니 산실을 철파(撤罷)하겠다는 계를 올렸다.<ref>승정원일기 숙종 16년 7월 26일 (을묘) 원본342책/탈초본18책 (8/13)</ref> 같은 날 [[조선 숙종|숙종]]은 산실청 전(前) [[도제조]]와 [[우의정]] 및 여러 관원과 의관들에게 각 [[말]] 한 필과 안장을 하사하였다. 다음 날 27일에는 산실청 담당 의관이었던 [[김유현]] 등에게 숭록(崇祿: 종1품 문무관 관직)을 제수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반대로 수령(守令)<ref group="주">고려ㆍ조선 시대에, 각 고을을 맡아 다스리던 지방관들을 통틀어 이르는 말. [[절도사]], [[관찰사]], [[부윤]], [[목사]], [[부사]], [[군수]], [[현감]], [[현령]] 따위를 이른다.</ref> 직을 제수하였는데, 이는 [[조선 숙종|숙종]]이 의관에게 종1품 숭록의 위를 제수할 만큼 대군의 탄생을 각별히 기뻐했음을 알 수 있다.<ref group="주">이 기록 역시 숙종실록에는 누락되어 있는데 반면에 [[숙빈 최씨]]가 [[조선 영조|영조]]를 출산하자 [[조선 숙종|숙종]]이 [[호산청]] 담당 내시와 [[의관]]에게 말을 하사한 것은 강조하여 기록하였다.</ref> 이러한 승정원일기의 기록은 장씨가 출산한 왕자가 9월 10일 경에 탄생된 것으로 기록한 숙종실록의 기사가 허위임을 증명한다.
         이때에 소론은 고문 과정이 비정상적이었음을 주장하며 희빈의 결백을 주장했지만 이미 희빈을 죽일 결심을 한 숙종의 뜻이 단호하였다. 이에 영의정 [[최석정]]과 소론은 희빈에게 죄가 있다고 치더라도 세자의 어미이니 처우에 관대하게 하자고 주장을 바꿨지만 이 역시 기각되었고 [[최석정]]은 부처되었다.<ref group="주">같은 해 12월부터 숙종은 다시 최석정을 조정으로 부르지만 최석정은 수십 차례 사직을 고집한 후 은거하였다.</ref> 1701년 10월 7일, [[조선 숙종|숙종]]은 빈어(嬪御:임금의 첩)에서 후비(后妃:임금의 정실)로 승격되는 일을 금지하는 법을 만들었고, 다음날 10월 8일에 승정원을 통해 공식적으로 장씨에게 자진의 명을 내렸다. 10월 10일, [[조선 숙종|숙종]]은 희빈 장씨가 이미 자진하였음을 공표하였다. 향년 43세였다.
         1701년 10월 10일, [[조선 숙종|숙종]]은 이미 장씨가 자진하였음을 통보하며 아들인 [[조선 경종|세자 윤]] 부부에게 상주로서 거애식에 참여하여 망곡례를 행할 것을 명한다. 다음 날인 10월 11일에는 [[조선 경종|세자 윤]] 부부의 상복에 대한 논의가 있었고 '서자(庶子)로서 아버지의 후사가 된 자는 그 어머니를 위해서 시마복(緦麻服)3개월복)을 입는다.'는 예조의 말에 따라 그대로 시행하라 명을 했지만 이후 숙종은 이를 번복하여 장씨를 위해 3년복을 입도록 한다.<ref group="주">정확히는 3년복이 아닌, 3년이 되기 며칠 전에 상복을 벗게하라고 명한다. 이는 왕후와 차별을 두기 위함임을 알 수 있는데 왕비 아래 후궁 이상이었던 장씨의 신분을 다시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조선 영조|영조]]는 생모 숙빈 최씨를 위해 시마복을 입었으며 장례를 마친지 닷새 후에 이마저 벗으라는 어명을 받아야 했다. 덧붙여 영빈이씨(사도세자 사친)와 수빈박씨(순조 사친)의 성복은 시마복이었다.</ref>
         장씨의 상례부터 장례까지의 모든 절차는 궁에서 주관하고 치루어졌으며 종친부 1품의 예로 받들어졌다.<ref group="주">숙종의 다른 후궁인 명빈 박씨와 숙빈 최씨의 상장례는 법도대로 궁 밖 사가에서 이루어졌다.</ref> 그녀의 무덤 역시 여느 후궁들<ref group="주">숙종의 후궁 숙빈 최씨의 무덤은 아들인 연잉군과 환관 장세상, 풍수에 밝은 노비 목호룡이 구하였다.</ref> 과는 달리 친정 식구나 궁속 환관이 구한 것이 아니라 왕실 종친인 금천군 이지와 예조참판 이돈이 지관들을 거느리고 여러 곳을 다니며 구하였다. 경기도 양주 인장리로 결정된 장씨의 묘는 숙종의 명으로 종친부 1품의 예<ref group="주">사방 100보의 규모로 경내에 농사와 목축을 금한다. 품계가 한 등씩 내려갈 수록 10보씩 감소된다. 문무관은 종친부와 비교해 10품씩 감하여 정1품은 90보, 6품은 40보로 한정되었으며 7품 이하는 6품과 같다. 왕실의 여인을 제외한 외명부 여성은 남편의 관직에 따른다.</ref> 로 단장되었다. 장씨의 장례 역시 여느 후궁의 장례처럼 3월장<ref group="주">세상을 떠날 달을 포함한 세 번째 달에 길일을 택하여 장례를 치르는 것. 짧게는 30일, 길게는 80여일이 장례기간이 되는데 숫자가 클 수록 상급이다. 4품 이상의 품계를 가진 이들의 장례이며 후궁, 왕자녀는 물론 왕세자 부부의 장례 또한 3월장으로 치루어진다. 1718년 3월 9일에 사망한 숙빈 최씨는 5월 12일에 장사됨으로써 정상적인 후궁의 장례인 3월장을 치렀다.</ref> 으로 치루어지지 않고 4월장으로 치루어졌는데, 왕과 왕후의 장례인 5월장보다 단지 하루가 부족한 1702년 1월 30일에 치루어졌다.<ref group="주">이 또한 후궁의 위, 왕후의 아래임을 증명하는 대목이다. 왕세자의 생모인 탓에 특별 대우를 받은 것으로도 해석되기도 하지만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와 순조의 생모 수빈 박씨도 3월장을 치렀던 점은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ref> 장례식 전날에 세자가 친림하였고, 수일 전부터 입관 당일까지 궁에서 식을 거행하였다.
         기록의 진실성은 차치하더라도 조선 시대의 신분법 상 희빈 장씨를 얼녀 출신 천민으로 계산하기에는 오차가 있다. 희빈 장씨의 생모인 윤씨는 첩이 아닌 엄연한 정실 부인인 계실이었으며, 남의 집 여종을 첩도 아닌 정처로 삼기엔 [[장형 (조선)|장형]]의 사회적 위치 및 조건이 결코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ref group="주">남의 집 여종을 아내로 삼은 자를 비부(婢夫)라 하는데, 비부는 아내의 주인 집에 종속되어 그 집안의 대소사에 노동력을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자식은 탄생한 즉시 주인집의 사유재산이 된다. 이러한 한계때문에 자신의 남종이 남의 집 여종과 혼인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여 노인이 되도록 혼인을 못하는 경우가 많아 사회적 문제가 되었으며, 지극히 가난하여 나이를 먹도록 혼인을 하지 못한 양인 남성이 생계를 유지하고 대를 이을 목적으로 비부를 자청한 것이 당시의 현실이었다. 실록 등에 기록된 강력 범죄 사건에 비부가 자주 등장하는 것은 비부가 법적으로는 그 가문의 종이 아니기에 사례를 조건으로 주인의 범죄를 대리시켰거나 덮어씌운 결과인데 이는 비부의 사회적 위치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ref> 첩을 처로 만들 수 없는 조선의 국법<ref group="주">[[윤원형]]이 첩 [[정난정]]을 처로 만든 전례가 있어 첩을 처로 만드는 것이 흔한 일인 양 오해되고 있지만 [[윤원형]]이 [[문정왕후 (조선)|문정왕후]]의 사후에 관직을 잃고 유배되었던 공식적인 이유는 국법을 어기고 첩을 처로 만들었다는 죄목때문이었다. 조선 사회에서 첩실을 정실로 격상할 수 있는건 왕과 왕세자 뿐으로, 이 또한 1701년 이후로 금지되었다.</ref> 과 윤씨 소생 아들인 [[장희재 (조선)|장희재]]가 무과(武科)로 등용<ref>옥산부원군신도비 기록</ref> 되어 [[1680년]]에 내금위에 재직<ref>숙종실록 27년(1701 신사 / 청 강희(康熙) 40년) 10월 22일(을해) 3번째기사 中 동평군 이항의 공초내용</ref> 하였고 [[1683년]]에 좌포도청 부장에 재직<ref>숙종실록 12년(1686 병인 / 청 강희(康熙) 25년) 12월 10일(경신) 4번째기사</ref> 하였던 점<ref group="주">선조16년 병조판서였던 [[이율곡|이이]]의 주청으로 납속을 낸 서얼을 허통하여 무과에 입시하는 것이 허락되었으나 숙종시대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청요직은 허락되지 않았으며 무과에 합격한 서얼은 관직은 받지 못한채 무기 발령대기 상태로 남거나 지방 군졸로 발령, 혹은 외적의 침입이 잦은 국경으로 발령되는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시대에 중인 역관의 얼자가 [[내금위]]에 재직하고 경내 좌포도청에 부장으로 재직한다는 것은 무리한 일이다. 희빈 장씨가 숙종의 후궁이 된 건 1686년 12월이니 누이의 후광을 입었다고 볼 수 없다.</ref>, [[1689년]] 11월 13일 윤씨를 당하관인 역관의 처로 언급한 윤덕준(尹德駿)의 상소내용<ref group="주">조선시대에는 처와 첩, 적서의 구분을 명확히 구분하여 언급하거나 기록하였다.</ref>, [[1698년]]에 사망한 윤씨가 남편 [[장형 (조선)|장형]]과 전처 제주 고씨의 옆에 나란히 매장된 것<ref group="주">첩은 가문의 묘산에 매장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며 특별히 매장되더라도 남편 부부의 무덤에서 떨어진 음지나 발치 아래에 묻어 정처와 확고한 차별을 두었다. 희빈 장씨는 1694년에 강봉되었으며 오빠 장희재가 [[노론]]의 공격으로 목숨이 위태로웠던데다가 왕세자인 아들 [[조선 경종|경종]]은 [[인현왕후]]에게 입적되어 [[노론]]이 이미 모자의 연이 끊겼다고 주장했던 만큼 만약 윤씨가 첩으로서 처와 동등하게 매장되었다면 당시 탄핵이 되지 않았을 리 없으며 희빈 장씨의 사후나 경종의 사후에도 반드시 탄핵이 있었어야 정상이다.</ref> 은 희빈 장씨가 낳은 아들이 원자가 되어서나 그녀가 왕비가 되어 [[조선 숙종|숙종]]이 특별히 장씨의 생모를 첩에서 처로 승격해주었을 가능성조차 극히 희박함을 증명한다. 이는 윤씨가 설사 여종 출신이었더라도 이미 면천한 후에 [[장형 (조선)|장형]]의 계실이 되어 장씨 남매를 낳았음을 뜻하는데, 그렇다면 장씨 남매에게는 노비 종모법이 적용되지 않아 이들의 신분은 아비를 따라 중인이 된다. 물론 윤씨가 애초에 종 출신이 아니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ref group="주">종(奴婢)의 정의에는 '남에게 얽매이어 그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는 뜻도 있다. 조사석의 처인 권씨는 권문세가의 딸이고 윤씨는 역관의 딸이었던 만큼 두 사람이 교류하였던 것을 신분의 위계 상 윤씨를 종으로 비유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이런 식의 말장난은 [[민진원]]의 특기이기도 했다는 점이 유의사항이다.</ref>
  • 대한민국 FA컵/2016시즌 . . . . 17회 일치
         경기는 각 팀이 속한 리그의 사정을 고려하여 4월 23일부터 5월 3일 사이에 치뤄졌으며, 본선 티켓을 확보한 팀은 다음과 같다.
         || 52 || 2016년 05월 11일 || 코레일 || : || [[울산 현대]] || 0:2 ||
         || 53 || 2016년 05월 11일 || [[포항 스틸러스]] || : || [[부천 FC]] || 0:2 ||
         || 54 || 2016년 05월 11일 || [[수원 삼성]] || : || 경주한국수력원자력(주) || 1:0 ||
         || 55 || 2016년 05월 11일 || [[FC 서울]] || : || [[대구 FC]] || 4:2 ||
         || 56 || 2016년 05월 11일 || [[제주 유나이티드]] || : || [[광주 FC]] || 1:1(3:5) ||
         || 57 || 2016년 05월 11일 || [[대전시티즌]] || : || [[수원 FC]] || 1:1(3:1) ||
         || 58 || 2016년 05월 11일 || [[성남FC]] || : || 경북영남대 || 1:0 ||
         || 59 || 2016년 05월 11일 || 용인시청 || : || 강릉시청 || 1:1(4:3) ||
         || 60 || 2016년 05월 11일 || [[부산아이파크]] || : || 부산교통공사 || 3:0 ||
         || 61 || 2016년 05월 11일 || [[FC안양]] || : || [[전북 현대]] || 1:4 ||
         || 62 || 2016년 05월 11일 || 포천시민축구단 || : || 경주시민축구단 || 1:2 ||
         || 63 || 2016년 05월 11일 || [[상주 상무]] || : || 충남단국대 || 1:2 ||
         || 64 || 2016년 05월 11일 || [[서울 이랜드]] || : || 경기성균관대 || 2:2(1:3) ||
         || 65 || 2016년 05월 11일 || [[인천 유나이티드]] || : || 청주CITYFC || 1:0 ||
         || 66 || 2016년 05월 11일 || [[전남 드래곤즈]] || : || [[강원 FC]] || 4:0 ||
         || 67 || 2016년 05월 11일 || [[안산 무궁화]] || : || 충북건국대 || 3:2 ||
  • 한선교 . . . . 17회 일치
         * 2004년 5월 30일 ~ 2008년 5월 29일: 제17대 국회의원 (경기 용인시 을)
         * 2008년 5월 29일 ~ 2012년 5월 29일: 제18대 국회의원 (경기 용인시 수지구)
         * 2012년 5월 30일 ~ 2020년 5월 29일: 제19대 ~ 제20대 국회의원 (경기 용인시 병)
         * 2013년 3월 ~ 2014년 5월: 제19대 국회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
         * 2014년 6월 ~ 2016년 5월: 제19대 국회 후반기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위원
         * 2016년 6월 ~ 2018년 5월: 제20대 국회 전반기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위원
         * 2018년 5월 ~ 2018년 6월: [[자유한국당]] 6·13 지방선거 중앙선거대책위원회 부위원장
         |임기 = 2004년 5월 30일 ~ 2008년 5월 29일
         |임기 = 2008년 5월 30일 ~ 2012년 5월 29일
         |임기 = 2012년 5월 30일 ~ 2016년 5월 29일
         |임기 = 2016년 5월 30일 ~
  • 권혁 . . . . 16회 일치
         5월 4일 NC전에는 첫 타자에게 안타를 맞고 내려갔으나, [[507 대첩|5월 7일 SK전]]에는 4:0으로 지고 있는 상황에 등판하여 제구는 불안했으나 1이닝을 막았다. 그리고 9회에 팀이 [[박정배|SK의]] [[박희수|필승조]]를 탈탈 털며 뜬금없이 승리 투수가 되었다. 시즌 첫 승리이자 2012년 7월 12일 이후 664일만의 승.
         6월 4일 허리 통증 때문에 보호 차원에서 2군으로 내려갔는데, 권혁은 5월 20일 이후로는 등판하지를 않았다(...). 대신 [[백정현]]이 올라왔다.
         5월 2일 SK전에서 역시나 지고 있는 8회 5번째 투수로 등판해 공 4개로 투수 땅볼 아웃 하나만 잡고 내려갔다. 이날 한화는 총 7명의 살려조를 투입해 역전승했다. (...)
         5월 3일 SK전 8회 말 무사 1루에 마운드에 올라 두개의 아웃카운트를 잡고 내려갔다. 0.2이닝 7구 1탈삼진.
         5월 4일 SK 와이번스와의 원정경기에서 또 등판하며 '''기어이 3연투'''를 달성했고 아웃카운트 2개를 잘 잡은후 [[조용호]]에게 2루타를 얻어맞고 [[윤규진]]과 교체되며 물러났다.윤규진이 [[나주환]]에게 투런홈런을 허용해 권혁의 주자를 분식했다.이날 기록은 0.1이닝 1실점.
         5월 10일 롯데 자이언츠와의 홈경기에서 2사 주자 2루상황에서 등판하였으나 [[강민호]]에게 쐐기 투런포를 맞으며 멸망했다.[* 당연히 [[김성근]]이 팔꿈치 피수술자를 억지로 떙겨써서 발생한 참사라는게 중론.] 결국 이날 기록은 0.1이닝 1실점을 기록했으며 시즌 ERA는 7.36을 마크했다. 김재영이 원 포인트로 쓰기 위해 기용된 투수라지만, 공도 4개밖에 던지지 않은채 2아웃을 잘 잡았던 상태라 감독이 너무 이르게 교체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다만 5월 초 시점에서 강민호는 잠수함을 상대로 극강이었고, 애초에 김재영은 최준석, 이대호 저격용으로 끌고 온 것이기 때문에 나름 납득이 가기도...
         5월 21일 [[삼성 라이온즈]]와의 홈경기에서 친정팀을 맞아 불끄러 나왔다가 되려 1이닝 1실점으로 부진하였다.시즌 ERA는 4.70
         5월 25일 기아전에서 지고 있던 상황에 등판했다
         5월 26일 NC전에 6회 윤규진의 뒤를 이어 등판해 1이닝을 든든히 막아주었으나 팀은 송은범의 처참한 구원 대실패로 8연패를 달성했다. 이날 패전팀의 홀드투수.
         5월 27일 NC전에 8회 1이닝을 무사히 무실점으로 막고 송창식과 함께 홀드를 얻어갔다. 별로 주목은 안 받는 듯하지만 3연투째다. 그 중에 2경기는 필승 상황이긴 했지만.
         5월 30일 두산전 이태양, --송은범--, 송창식에 이어 4번째 투수로 등판해 6번째 공으로 타자를 맞혀 출루시켰으나 다음 타자를 초구 땅볼로 잡아 이닝을 끝냈다. 정우람이 나머지 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 홀드를 챙겼고, 이 날 기록은 ⅓이닝 무실점.
         5월 31일 두산전 오간도, 송창식에 이어 3번째 투수로 등판해 ⅔이닝을 뜬공, 삼진으로 막았으나 끈질지게 공을 커트하는 김재환에 사구를 허용했고, 정우람과 교체되었다. 정우람이 나머지 이닝을 무사히 막아 홀드 하나를 더 추가. ERA 3.09.
          * 여담으로 대구 팔공산 정상에 올라가면 '[[삼성 라이온즈]] 권혁 파이팅!' 이라는 현수막이 걸려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권혁이 경기에서 보이지 않던 시절인 것을 보아 2012년 5월 초 쯤으로 추정된다.
  • 전인범 . . . . 16회 일치
         2009년 11월 [[2성 장군|소장]]으로 진급해 제27보병사단장에 임명되었다. 재임하면서 그는 전역하는 병사들을 위해 전역식을 열어주고 직접 참석해 “군 생활 하느라 고생했는데 내가 줄 건 육군 소장의 경례밖에 없다”며 전역병들에게 부동자세로 경례를 해주었고,<ref>[http://www.sisaweek.com/news/articleView.html?idxno=95508 [김준범 ‘오늘과 내일’] 박찬주 대장 사태로 돌아본 ‘병사들을 사랑한 장군들’], 《시사위크》, 2017년 8월 14일</ref> 부대를 방문한 군수사령관 앞에서 병사들에게 보급되는 슬리퍼의 열악함을 토로하며 보급에 대한 확답을 받을 때까지 사령관 앞에서 슬리퍼를 물고 있기도 하는 등 장병들의 처우 개선을 위해 노력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81&aid=0002796411 전인범 전 특전사령관 끝없는 미담 “능력과 인품 두루 갖춘 진짜 장군”], 《서울신문》, 2017년 2월 7일</ref> 2011년 5월에는 한·미 연합작전 태세를 발전시킨 공과 한·미 우호관계 증진 노력을 인정받아 미국이 외국군에게 주는 최고등급 훈장인 [[:en:Legion of Merit|공로훈장]](Legion of Merit)을 수훈하였다.<ref>[http://www.breaknews.com/sub_read.html?uid=172160 전인범 육군 27사단장 '美 공로훈장' 수상], 《브레이크뉴스》, 2011년 5월 13일</ref> 그는 2008년 11월부터 2009년 11월까지 합동참모본부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추진단장으로 근무 중 한미가 2007년에 합의한 전작권 전환을 구체적으로 진행하면서 150개에 달하는 전환 과제를 계발하고 진행을 감독하며 미측과의 긴밀한 협의를 추진, 복잡한 전환 과정을 관리하는 총 책임을 맡은 바 있다. 미국으로부터 이 훈장을 수훈한 외국인으로는 중화민국 총통 [[장제스]], 영국 국왕 [[조지 6세]], 소련군 총사령관 원수 [[게오르기 주코프]], 프랑스 대통령 [[샤를 드 골]] 등이 있다.
         특전사령관 취임 후 부대의 장비 구입을 위한 예산 확보, 새로운 장비의 개발, 해외 특수부대와의 교류협력 등 특전사의 전투력 강화를 위한 개혁을 주도하고 있다는 평을 받았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81&aid=0002476150 [이일우의 밀리터리 talk] ‘괴짜 사령관’과 특전사의 환골탈태], 《서울신문》, 2014년 10월 23일</ref> [[:en:Picatinny rail|피카티니 레일]]이나 광학장비와 같이 관행적으로 몰래 사용하던 사제 장비들의 사용을 허용하는 등 기존의 과도한 제재 규정들은 폐지시켰으며, 특히 헬기 사격, 천리행군 인증제 도입과 같이 과거에 하지 않던 실전적 훈련들을 대거 강화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33&aid=0000028778 [한국군 코멘터리] 불굴의 ‘지옥훈련’ 더 독해진 특전사], 《주간경향》, 2014년 12월 17일</ref> 우선 일반 병사보다 3배 정도 총을 더 쏘는 특전사 요원의 사격량을 5배로 늘렸고 전진하면서 사격할 때 탄피받이를 못 쓰게 하였다. 탄피 하나 없어지면 전 부대원이 나서서 찾아야 하는 것이 매우 비생산적인 일이라고 생각한 그는 대신 탄피를 주울 필요가 없도록 전진 사격 훈련시 1명이 뒤따라가게 하여 실제 몇 발을 쏘는지 세게 하였다. 또한 사령관 취임 당시 특전사에 체계적인 체력 증진 프로그램이 없어 특전사에서 35년간 복무했고 체력 단련과 관련해 박사 학위를 받은 한 원사에게 12개 코스의 프로그램을 만들도록 지시했다. 그 결과 특전사 요원의 허벅지가 평균 1cm 커졌고 체력 프로그램 시행 후 6개월 뒤 미군 특전사 요원들과 경기를 해 수영을 제외한 나머지 종목을 한국 특전사 요원들이 다 이기게 하기도 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3&aid=0003210074 [Why] "특전사 허벅지 1cm 굵어졌다, 그게 내 자랑"], 《조선일보》, 2016년 9월 10일</ref> 이와 같은 훈련들은 특전사의 실제 전투력을 극대화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ref>[http://www.asiatoday.co.kr/view.php?key=20150108010004329 왜 우릴 특전용사라고 부르는가?], 《아시아투데이》, 2015년 1월 8일</ref><ref>[http://www.breaknews.com/sub_read.html?uid=344947§ion=sc2 육군 특수전사령부 설한지 극복-생존훈련], 《브레이크뉴스》, 2015년 1월 9일</ref> 그리고 긴박한 전장상황에서 오역 가능성을 최소화하고 한미 연합작전 수행능력 향상을 위해 전군 최초로 한국군은 영어로, 미군은 한국어로 브리핑하는 제도를 시행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7500588 특전사 창설 57주년 기념식… 내년 2월 이천시대 개막], 《연합뉴스》, 2014년 4월 1일</ref> 전 사령관은 이러한 자신의 개혁적인 행보에 관해 “모든 3성 장군은 4성 장군이 되고 싶어하고 4성 장군이 되는 게 군인으로서 더 없는 영광이라는 것을 나 역시 알고 있다. 일각에선 내가 부대 훈련을 실전적으로 바꾸고 개혁을 하면서 무리수를 두어 4성 장군이 되지 못할 것이라고 걱정한다. 하지만 나는 특수전사령관이고 내 임무는 4성 장군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싸워서 백전백승 할 수 있는 세계 최고의 특수전 부대를 만드는 게 나의 사명이다”라고 밝혔다.<ref>[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317906 전인범 전 특수전사령관, 영원한 특전맨이자 진정한 군인의 퇴임], 《뉴데일리》, 2016년 7월 28일</ref> 훗날 그가 사령관을 이임한 뒤 특전사에 부대장비 및 개인물자를 납품하고 연구하는 특전사 출신의 한 예비역 대위는 “우리 군은 지나치게 ‘군복제 규정’에 얽매여 있다. 전인범 前 특전사령관은 유연한 사고를 가진 지휘관이었다. 그는 “‘군복제 규정’보다 임무와 전술향상이 더 중요하다. 사고를 유연히 하고 우수 장비라면 사제라도 활용하라”라고 이야기하면서 전술장비 및 피복의 사용과 발전을 장려했지만, 그가 교체되면서 이런 유연한 사고는 다시 움츠러들었다. 우리 군의 유연한 사고는 지휘관에 따라 들쑥날쑥 하다”며 아쉬움을 소회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8&aid=0002286112 [무기와 사회] 한국군 전투복], 《한겨레》, 2015년 8월 19일</ref> 뉴데일리 군사전문기자 태상호는 “전인범 前 특수전사령관 같은 깨어 있는 특수전 지휘관들이 (특수부대의 역량을 강화시키기 위해) 고군분투를 했지만 특수작전에 대한 군내외부의 중요성 인식 부족과 비대칭 전력을 이해하지 못하고 큰 군(Big Army)만 중요시 하는 풍토로 인해 그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라고 현 한국군에 대해 비판했다.<ref>[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301915 [컬럼] 프로 대접을 못 받는 한국의 특수부대], 《뉴데일리》, 2016년 2월 22일</ref>
         2015년 4월 5일부터 12일까지는 [[:en:United States Special Operations Command|미국 통합특수전사령부]]와 [[:en:United States Army Special Operations Command|미 육군 특수전사령부]]를 직접 방문, 미 통합특전사령관 [[:en:Joseph Votel|조셉 보텔]] [[:en:General (United States)|대장]]과 미 육군 특전사령관 찰스 클리브렌드 [[:en:Lieutenant general (United States)|중장]]을 만나 한·미 연합 특수작전에 대한 실질적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그는 저격용 소총과 미군 주력 소총인 [[:en:M4 carbine|M4]], 권총, 산탄총, 박격포, 방탄복 등을 점검하고 체험하는 등 미군 특전사의 장비와 무기를 현장 견학하고 실제 사격도 하였다.<ref>[http://www.asiatoday.co.kr/view.php?key=20150413010008491 미군 주력 소총 M4 쏘는 전인범 특전사령관], 《아시아투데이》, 2015년 4월 13일</ref> 이와 함께 방미 기간 동안 [[시애틀]]에 있는 6·25 참전 기념공원을 찾아 참전용사비에 헌화하기도 했다.<ref>[https://www.youtube.com/watch?v=ZIB7y0ZvFJs 한미연합 특수작전사령부 시애틀 방문 6·25 참전용사비 헌화식], 《KOAM-TV》, 2015년 4월 10일</ref>
         2016년 5월 [[:en:United States Special Operations Command#USSOCOM medal|미국 통합특수전사령부 훈장]](USSOCOM Medal)을 받았다.<ref>[http://kookbang.dema.mil.kr/kookbangWeb/view.do?parent_no=4&bbs_id=BBSMSTR_000000000004&ntt_writ_date=20160615 “전인범 장군, 미 특수전 발전에 혁혁한 공로”], 《국방일보》, 2016년 6월 15일</ref> 미 특수전 발전에 공로가 있는 개인에게 수여되는 이 훈장은 1994년 제정된 이후 한국군이 받는 것은 그가 처음이다. 미 통합특수전사령부는 미 육군과 해군(해병대), 공군의 특수전사령부를 지휘하는 3군 통합사령부로, 전 중장은 2013년 10월부터 2015년 4월까지 한국 특전사령관 겸 연합특전사령관으로 재직하며 연합작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이 훈장을 받게 되었다. 미 통합특수전사령부는 훈장 수여 증서를 통해 “연합특전사령관으로서 미 최정예 특수부대와 [[:en:United States Navy SEALs|네이비 실]](SEAL), 특수전 항공자산 등 1000여 명 이상의 미군을 훌륭하게 지휘했으며, 뛰어난 전문지식과 공익을 위한 헌신으로 한미연합군의 전략적 목표 달성을 위한 연합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고 밝혔다.<ref>[http://www.asiatoday.co.kr/view.php?key=20160615010007077 [단독] 전인범 전 특전사령관, 한국군 최초 미군 통합특전사 훈장], 《아시아투데이》, 2016년 6월 15일</ref> 더불어 전 장군의 추진력과 창의력,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결의와 함께 장기 비전이 대한민국 방어에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또한 전 장군의 남다른 노력과 뛰어난 리더십, 그리고 개인의 추진력은 대한민국과 한미연합사에 큰 기여가 됐다고 전했다.
         2017년 2월 7일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그가 문재인을 지지하게 된 이유를 구체적으로 밝혔다.<ref name="b"/> 왜 문재인을 돕기로 마음먹게 되었는지에 대한 질문에 “(문재인이) 저를 한번 보자고 그래서 궁금해서 만났다. 그 전부터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은 있었다. 만나보니까 좋은 분이고, 지적이더라. 공부하는 분이고. 근데 그날 제가 기분 나쁜 소리도 많이 했다. (- 안보관을 지적했나) 음…. 하여튼 그 기분 나쁜 소리를 다 받아주더라. 저는 그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제가 설득하는 건 둘째고, 일단 잘 들어줬다는 게 중요하다. 그래서 도와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한편 전인범 중장의 전역식 때 전역사를 하면서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유혈 진압 책임자인 정호용을 고마운 선배로 언급한 것에 관해서는 “저는 죄는 미워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자는 걸 중시하는 사람이다. 그분의 잘못된 부분을 옹호할 생각은 없다. 그런데 그분이 굉장히 인간적인 사람이다. 아랫사람들을 배려하는 사람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야기한 거지, 5·18과 관련해 그를 옹호하려는 건 아니다”라고 답했다. 뒤이어 5·18에 대해서는 “일선 군인들은 아무 죄가 없다고 생각한다. 오늘도 호남 분하고 이야기를 하며 ‘저는 언젠가 광주 5·18묘역에 그때 죽은 군인들이 같이 묻혔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지금도 발포 명령을 누가 내렸는지 아무도 모르잖나. 지휘 체계가 문란했던 점이 당시 군의 잘못이지 하사들이 무슨 죄가 있나. 특전사가 살인마처럼 비춰지는 건 바뀌었으면 한다. 하여튼 저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발포를 지시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책임을 면할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이 감옥에도 가고 그런 것 아닌가. 정호용은 그런 책임이 있지만, 제가 이야기했던 건 그분이 인간적으로 부하를 대했다는 것이다. 그 부분을 본받고, 감사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했다. 이와 같은 그의 5·18에 대한 견해에 우파 언론인임에도 5·18을 반공적 민주화 운동으로 높이 평가하는 [[조갑제]]는 “여러 번의 국가적 수사와 조사에서 광주 사태 초기엔 상급 지휘부의 발포 명령 자체가 없었으며 현장 상황이 워낙 급하여 자위적 차원의 대응발포로 비극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확정되었다. 물론 전두환 국군보안사령관의 발포 명령은 없었다”며 전인범의 발언을 옹호하였다.<ref>[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335656 제목으로 드러나는 동아일보의 末期 증세], 《뉴데일리》, 2017년 2월 10일</ref>
         그러나 그의 5·18 발언을 문제 삼은 정치권에서 부인인 [[심화진]] 성신여대 총장이 학교 공금 횡령 혐의로 1심에서 징역형을 선고 받은 것까지 싸잡아 공격하며 논란이 불거지자<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2&aid=0003143692 전인범 前 특전사령관 부인 심화진 성신여대 총장, 징역 1년 법정구속], 《세계일보》, 2017년 2월 8일</ref>, 그는 광주 항쟁에 대한 표현의 부족으로 심려를 끼쳐 사과드린다는 말과 함께 다시 미국 연수과정으로 돌아가겠다는 의사를 밝혔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5&aid=0002684649 文 영입 전인범 자진사퇴 "5·18 발언 백번천번 송구… 미국 돌아가겠다"], 《중앙일보》, 2017년 2월 10일</ref> 그는 “저는 다시 미국 연수과정으로 돌아가 북핵을 바라보는 엄중함과 심각함, 오랜 동안 지속돼온 혈맹으로서의 미국에 대한 변함없는 지지, 이를 통한 더욱 굳건한 한미 동맹관계 발전이라는 문 전 대표의 안보관을 알리는 데에 미력이나마 도움이 되도록 노력하겠다”며 “멀리서나마 문 전 대표와 대한민국의 승리를 기원하겠다”고 덧붙였다. 이에 문재인 후보 측 관계자는 “누를 끼친 데 대한 글을 올리시고 미국에서도 돕겠다고 한 것은 ‘자숙’으로 보면 된다”고 설명하며 “안보, 군사 분야에 대한 자문은 계속 하실 것”이라고 언급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3&aid=0007763546 文측, 전인범 미국行에 '선긋기'… "본인 판단"], 《뉴시스》, 2017년 2월 10일</ref> 문재인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이틀 후 청와대 관계자는 “대선 과정에서 공을 들여 영입한 전인범 전 특전사령관이 문 대통령의 외교안보라인 구상의 한 축이었는데 그가 중도 하차하면서 인사가 꼬였다”고 발언함으로서 [[문재인 정부]]는 출범과 함께 그를 중용할 계획이었음을 나타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2&aid=0003172701 한반도 상황 긴박한데… 외교안보 라인 인선은 '설왕설래'], 《세계일보》, 2017년 5월 12일</ref>
         2017년 5월 23일부터 25일까지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지상군(LANPAC) 심포지엄에 초청을 받아 한미동맹의 중요성과 발전 방안에 대해 발표하였다. 전인범 중장은 이례적으로 [[예비역]] 한국 장군임에도 불구하고 각 국의 현직 육군 최고 수뇌부가 참석하는 이 심포지엄에 초청을 받아 예비역으로는 유일하게 발표했는데, 현직 미군 주요 지휘관들은 물론 전직 미군 수뇌부들로부터 한·미 군사동맹과 한·미 연합전력 극대화 해법에 대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한국군 출신으로 평가받고 있어 이 심포지엄에도 초청되었다.<ref>[http://www.asiatoday.co.kr/view.php?key=20170528010015215 전인범 전 특전사령관 “한·미 군사 혈맹, 한국군 주도적 역할 중요”], 《아시아투데이》, 2017년 5월 28일</ref> 그는 발표문에서 “한미간 긴밀한 연합작전과 지휘통제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효율적인 전술지휘통제자동화체계(C⁴I)가 기반되어야 하며 양국간 언어장벽의 문제를 보다 깊이 있게 이해하고 문화의 차이를 이해하는 등 상호 이해를 증진시키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하였고, “미국이 우리나라의 주도적 역할을 인정하고 우리나라는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했다.<ref>[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346579 전인범 前 특전사령관, 美 'LANAPC'에서 한미동맹의 중요성 및 발전 방안 발표], 《뉴데일리》, 2017년 5월 26일</ref> 또한 심포지엄이 끝나고 연합뉴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미군 발표자들 대부분은 기조연설과 발표문에서 북한을 ‘부상하는 적(rising adversary)’으로 지칭했다”면서 “미국이 핵과 미사일 개발에 질주하는 북한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말”이라고 전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9292284 "美, 아태 지상군회의서 북한을 '부상하는 적' 지칭"], 《연합뉴스》, 2017년 5월 25일</ref>
         통역이 필요없는 유창한 영어 실력과 뛰어난 업무 추진력으로 주한미군 지휘부와 깊은 신뢰관계를 유지해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미국통’으로 불리고 있다.<ref>[http://news.donga.com/People/3/06/20110512/37149041/1 ‘전작권 전환 기여’ 전인범 소장이 받는다], 《동아일보》, 2011년 5월 12일</ref> 조선일보 군사전문기자 [[유용원]]은 그를 ‘군내에서 영어를 가장 잘하는 사람’이라고 언급하였다.<ref>[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4/20/2013042000200.html 박지만씨 육사 37기 동기들, 청와대·국정원·軍 요직 올라], 《조선일보》, 2013년 4월 20일</ref> 주한미군사령관 [[:en:Curtis Scaparrotti|커티스 스캐퍼로티]] 대장은 그를 일컬어 ‘가장 절친’이라 칭할 정도로 미군들의 신뢰를 받으며 강력한 한·미 군사동맹의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다고 평가받는다.<ref>[http://www.asiatoday.co.kr/view.php?key=20141116010009522 주한미군사령관 "한반도 평화·안정 온힘 쏟겠다"], 《아시아투데이》, 2014년 11월 16일</ref> 미 8군사령관 버나드 샴포 중장 역시 ‘한국 군인 중에서는 가장 오랜 절친이며 항상 올바른 조언을 해 주는 고문(顧問)이자 한미 군사동맹의 미래’라고 강조했다.<ref>[http://www.asiatoday.co.kr/view.php?key=20150208010005247 주한 미8군사령관 "한미 군사동맹 강력하다"], 《아시아투데이》, 2015년 2월 8일</ref>
         “국회의원들을 초대해 특공무술 시범을 한 적이 있는데, 그날 식사시간에 전 사령관이 의원들에게 전투식량을 건네 보이며 ‘우리 애들이 이런 대우 받을 애들 아니다, 더 잘 먹여야 훈련도 더 잘할 수 있다’고 호소했다. 그후 정말 전투식량이 좋아졌다. 군에 그런 분이 많으면 나도 (드라마 《태양의 후예》의 주인공인) 유시진 대위 같은 군인으로 살고 있을 것이다.” (부사관 출신 A씨)<ref>이혜민. 2016.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4&oid=262&aid=0000009287 “진짜 특전사는 이렇지 말입니다.”] 『新東亞』 통권 680호, 216-225.</ref>|이혜민. 2016. “진짜 특전사는 이렇지 말입니다.” 『新東亞』 2016년 5월호, 216-225.}}
         ** 고모 : 전혜성<ref>[http://lady.khan.co.kr/khlady.html?mode=view&code=13&artid=201301101828231&pt=nv 글로벌 사회에서 주목받는 아이로 키우는 법], 《레이디경향》, 2013년 1월 10일</ref> (全惠星, 1929년 ~ , [[:en:Yale University|예일 대학교]] [[교수]])
  • 정칠성 . . . . 16회 일치
         [[1924년]] [[5월 15일]] 그는 [[경성]] [[천도교당]]에서 [[허정숙]], [[주세죽]], [[김조이]], [[정종명]], 박원희, 김필애 등과 함께 한국 최초의 여성 사회운동 단체인 [[조선여성동우회]](朝鮮女性同友會)를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으며, 여성동우회 창립발기식의 사회자로 활동했다. 바로 [[조선여성동우회]] 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이어 신사회 건설과 여성해방운동에 참여할 여성의 단결 등을 목표로 설정하였고, [[조선]]과 일본을 오가며 사회운동을 벌였다.
         정칠성은 근우회 제1회 창립준비위원회에서 회원모집의 업무를 맡았고, 이후 근우회 창립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ref name="dispose"/> 창립대회장에서 정칠성은 "여자의 날(당시 4월16일) 제정기념으로 시위를 하자" 는 의견을 내었으나 감시중이던 일본경관들의 저지로 시행할 수 없었다.<ref name="dispose"/> [[5월 27일]] [[근우회]] 선전조직부 위원, [[5월 29일]] [[근우회]]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7년]] [[7월]] [[근우회]] 중앙집행위원장이 되었다.
         [[1927년]] [[5월 19일]]의 [[근우회]] 총회에서는 [[4월 16일]]을 [[여자의 날]]로 정하는데 참여하였다.<ref>동아일보 1927.05.29 2면, 사회면</ref>
         1928년 5월 12일 경성부 경운동 천도교기념관에서 근우회 창립1주년 기념식 때 사회자이자 연사로 활동했다. 이때 그는 '근우회 창립 일주년 기념식을 맞으며'라는 주제로 강연하였다. [[6월 5일]]에는 [[경상북도]] [[영천]]에 파견되어 [[근우회]] 영천지회 조직에 착수하였다. [[6월 7일]]에는 근우회 영천지회 창립발기식을 지원하고 근우회 조직 취지를 설명하였다.
         여자직업사의 수자수 교사와 근우회 각 지회설치 활동을 하면서도 동아일보, 삼천리지 등에 칼럼과 논설을 발표하였다. [[1928년]] [[5월 20일]]에는 황주청년회관에서 [[신간회]] 황해도 황주지회가 주최한 '사회문제대강연회'에 연사로 참여, '여성운동과 신간회'라는 주제로 강연하였다. 강연 주제 중 그는 '우리 조선여자들은 남자들의 완롱물이요, 남자의 위안물이며, 남자들의 일개의 생식기계에 지나지 않는 노예였다.'는 내용이 문제시되어 임석경찰관에 의해 강제로 연행되었다가 풀려났다.
         [[5월]] 근우회 각 지역순회강연 대표자를 전국에 파견할 때 근우회 중앙상무집행위원으로 경의선 라인 담당을 맡아 순회강연에 나섰다. [[5월 8일]] 그의 강연지는 장단, 개성, 사리원, 해주, 재령, 연백, 평양, 진남포, 정주, 의주, 신의주로 정해지고, [[5월 12일]] 경성에서 열차를 타고 황해도, 평안도를 다녔다.
         5월 22일 평양 백선행기념관에서, 5월 25일에는 진남포에서 에버트 청년회관에서 '근우회운동의 의의'라는 주제로 강연하였다. [[6월 1일]] 근우회 경성지회 상무위원을 겸하였고, 의주에 도착하여 의주공회당에서 강연하였다. 이후 신의주 강연을 거쳐 [[6월 14일]] 인천 내리에서 조선여성운동의 의의라는 주제로 순회강연을 마쳤다. [[6월 18일]]에는 개성 고려청년회관에서 개최된 근우회개성지회 대회 행사에 사회자로 참석하였다.
         1931년 5월 신간회 전체대회에서 신간회 해산이 결의되자, 그후 2년동안 사회활동을 일시 중단하고 서울 낙원동에서 조그마한 가게를 경영하였다. 또한 [[기방]]이 쇠퇴해감에 따라 기녀 출신 인사들의 영화 캐스팅, 연극 캐스팅 등에도 노력하였다. 그는 기생들의 판소리와 대본 암기 능력이 다른 여배우들보다 부족하지 않음을 입증해 보이기도 했다. 이후 조선인 기녀들 중에는 [[영화 배우]]나 [[희극 배우]], [[연극 배우]]로 캐스팅되거나 전직하였다.
         1938년 5월 함경남도 장진에서 삼포금광배급소 주임으로 일하면서 생활하였다.<ref name="dispose"/> 정치 활동에 일체 관여하지 않겠다고 하여 [[조선총독부]]의 의심의 눈을 피한 그는 지하활동을 하는 [[박헌영]], [[김조이]], [[조봉암]] 등과 수시로 연락하며 정세를 살폈다.
         테러와 탄압을 피해 피신생활 중에도 그는 [[1946년]] [[3월]] [[허정숙]]과 함께 [[서울]]에서 [[세계 여성의 날|국제부녀절]] 행사를 조직하였다. 그해 [[5월]] [[허정숙]]이 월북한 뒤에도 [[1948년]]까지 매년 [[3월 8일]] [[서울]]에서 여성운동가들과 함께 [[세계 여성의 날|국제부녀절]] 행사를 개최했다.
         [[1948년]] [[4월]] [[남북 협상]] 직전 [[삼팔선]] 이북 지역으로 탈출하였다. [[4월]]부터 [[5월]]까지 [[평양]]에서 개최된 [[전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에 남한측 여성단체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석하였으며, 제1차 남북협상을 마친 뒤 [[서울]]로 귀환하였다.
         1928년 5월 20일에는 황주청년회관에서 신간회 황해도 황주지회가 주최한 '사회문제대강연회'에서의 강연에서 그는 '우리 조선여자들은 남자들의 완롱물이요, 남자의 위안물이며, 남자들의 일개의 생식기계에 지나지 않는 노예였다.'며 여성의 억압을 지적하였다.
  • 한규복 (1881년) . . . . 16회 일치
         [[1906년]] [[3월 31일]] [[탁지부]][[번역관]](度支部繙譯官) 주임관 4등(奏任官四等), [[5월 31일]] [[탁지부]] 문서과 수석번역관(度支部首席繙譯官) 주임관 4등(奏任官四等), [[1907년]] [[탁지부]][[서기관]] 양지과장(量地課長)을 역임했다. [[1907년]](융희 2년) [[6월 27일]] 탁지부 서기관, 풍지과장으로 재직 중 [[주임관]] 3등으로 승급하였다. [[1907년]] 수석번역관, 이어서 [[탁지부]] [[서기관]](書記官), [[토지조사국]] 서기관을 역임했다. [[1910년]](융희 4년) [[3월]] [[탁지부]] [[토지조사국]] [[서기관]], [[주임관]] 2등이 되고, 탁지부 토지조사국 정리과장에 보직되었다.
         [[1917년]] [[경상남도지방토지조사위원회]] 조사위원이 되고, [[1917년]] 진주군수 재직 중 [[고등관]] 5등(高等官5等)으로 승진했다. [[1918년]] [[7월 1일]] [[동래군|동래]][[군수]] 고등관 5등(東萊郡守 高等官5等)으로 발령받았다. [[1921년]] [[2월 12일]]에는 [[충청남도]] 참여관(慶尙北道參與官) 고등관 4등(高等官4等)으로 승진하였다. [[7월 22일]] 다시 [[충청남도]] [[참여관]]으로 임명되었다. [[1922년]] [[5월 30일]]에는 [[만주]]로 출장갔다가 [[10월]]에는 [[동양협회]] 시찰단의 한 사람이 되어 [[일본]]을 시찰하고 [[1923년]]초 되돌아왔다. [[1923년]] [[11월]] [[충청남도]] [[참여관]]으로 재직 중 [[충청남도음악협회]]회장에 선출되었다. [[1924년]] [[2월 11일]]에 [[경상북도]] 참여관으로 옮겼다. [[12월]] [[경상북도]] 참여관 재직 중 [[고등관]] 3등(高等官3等)으로 승진하였다.
         [[1937년]] [[1월]] [[방송선전협의회]](放送宣傳協議會) 위원으로 위촉되어 수양강좌·부인강좌·상식강좌의 강사로 출연하였고, [[7월]] [[중추원]] 주최 행사에 참여하였다. 동년 [[조선총독부]]에서 조선인들의 소득을 조사할 목적으로 국민소득조사위원회를 구성하자, 한규복은 국민소득조사위원회 경성지역 관내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8월 3일]]부터는 [[10월]]까지 총독부 학무국에서 지나사변 이후 흉흉한 민심을 수습하고자 순회시국강연위원회를 조직할 때 연사가 되어 [[서울]]과 각지에 시국강연을 다녔다. [[8월 16일]]에는 [[경상남도]] [[함양군]]에서 시국강연을 하였다. [[9월 10일]]에는 용인공보교 대강당에서 [[용인군]] 지역 시국강연회를 주최하였다.
         [[1938년]] [[조선간이생명보험사업 자문위원회]] 자문위원에 위촉되었다. [[1938년]] [[3월 3일]] [[성남고등보통학교]] 재단인 [[원석학원]] 재단 이사가 되었다. [[5월]] 재무간담회(財務懇談會) 회장에 선임되었다. [[5월 17일]] 체포된 법학자 [[정광현]]에 대해 선처를 호소하여 석방시켰다.<ref name="yunchi381">윤치호, 《윤치호 일기 1916-1943》 (김상태 역, 역사비평사, 2001) 381페이지</ref> [[서대문경찰서]] 서장을 만나 '나를 봐서라도 [[정광현]]에게 선처를 베풀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5월 17일]] 오전 9시 30분, 서장은 한규복의 의견을 흔쾌히 받아들였다.<ref name="yunchi381"/>
         [[1939년]] [[조선금융조합연합회]] 참여에 선임되었다. [[1940년]] [[5월 30일]]에는 [[동아일보]]에 "저축과 국민생활"이라는 주제의 칼럼을 발표하였다.<ref>"貯蓄과 國民生活", 동아일보 1940년 05월 30일자 5면, 생활/문화면</ref> [[5월 30일]]과 [[5월 31일]], [[6월 1일]]에는 경성중앙방송국에 출연하여 저축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5월 31일]] 오후 7시 30분에는 경성제2방송국에 출연하여 저축의 필요성에 대하여 강연하였다.
         [[1941년]] [[12월]] [[중선주조조합연합회]] 회장에서 해임되었다. [[1942년]] [[4월]] [[조선맥자주식회사]](朝鮮麯子株式會社) 취체역 회장에 선임되었다. 그해 [[5월]]에는 [[재무간담회]] 회장직을 사퇴했다.
         [[1942년]] [[징병제]] 실시가 결정되고 [[조선인]] [[참정권]] 허용 문제가 [[일본]] 의회 [[중의원]]과 [[귀족원]]에 상정되자, 그는 [[조선임전보국단]]의 부단장 자격으로 일본 수상과 참모총장에게 감사 전보문을 타전하고, 그해 [[5월 15일]] [[경성부|경성]] YMCA에서 [[이광수]](李光洙) 등 명사들을 초청해 연설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1942년]] [[9월]]에는 [[조선국자주식회사]] 회장에 취임하였으나 [[1943년]] [[6월]] 사퇴하였다. [[1943년]] [[국민총력연맹]] 징병기념사업실행위원회 위원의 한 사람에 피선되었다.
         * 아버지 : 한만홍(韓晩洪, [[1851년]] [[5월 5일]] - [[1926년]] [[1월 9일]])
         * 부인 : 평양 조씨, 조인옥(平壤趙氏 趙仁玉, [[1881년]] [[2월 24일]] - [[1945년]] [[9월 10일]]). 조재연(趙載淵)의 딸
         * 부인 : 김해 김씨(金海金氏, [[1908년]] [[5월 27일]] - [[1951년]] [[1월 28일]]), 김명옥(金明玉)의 딸
  • 양준혁 . . . . 15회 일치
         |첫 출장 = [[KBO (야구)|KBO]] / [[1993년]] [[4월 10일]] <br />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대구]] [[쌍방울 레이더스|쌍방울]]전
         '''양준혁'''(梁埈赫, [[1969년]] [[7월 10일]] ([[1969년]] [[음력 5월 26일]])<ref>[https://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022&aid=0002158013 링크]</ref> - )은 전 [[KBO 리그]] [[삼성 라이온즈]]의 [[내야수]] 겸 [[외야수]]이자, 현재 [[문화방송|MBC]]와 [[MBC 스포츠플러스|MBC Sports+]]의 야구 해설위원이다.
         [[1969년]] [[7월 10일]] 출생으로 그는 타격 폼이 마치 만세를 부르는 것과 같아서 붙여진 ‘만세 타법’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사실 만세 타법은 야구 교본에도 실려 있지가 않은 실로 창의적 타법이며, 이를 사용한 선수는 양준혁이 세계 최초이다. <ref>더욱이, 메이저 리그에서 희한한 폼으로 타격하는 선수들조차 이런 폼을 생각 조차 해보지 않았다고 한다.</ref> 프로 야구 선수 시절에는 [[삼성 라이온즈]]의 대표적인 프랜차이즈 스타로 군림했고 '''양신'''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ref>최훈 Naver 카툰 스포츠 - 2010년 9월 기사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223&aid=0000000421 "프로 야구 카툰 - ‘양신’을 떠나보내며"]</ref>
         [[2005년 한국프로야구|2005년]] [[6월 25일]], 13시즌 만에 1772개의 안타를 쳐서 [[장종훈]]의 [[한국 프로 야구 안타 관련 기록|개인 통산 최다 안타 기록]]을 경신했다. 특유의 만세 타법으로 [[장종훈]]에 이어 ‘기록의 사나이’란 명성을 쌓아갔다. 이어 [[2007년]] [[6월 9일]], [[두산 베어스]]전에서 [[KBO 리그]] 사상 최초로 개인 통산 2,000안타를 달성, 지금까지 [[한국 프로 야구 골든 글러브 상|골든 글러브]]를 모두 8차례 수상했다. [[KBO 올스타전|프로 야구 올스타전]] 홈런 레이스에서 [[1993년]] 초대 챔피언에 등극한 데 이어 [[1998년]]과 [[2001년]]에도 타이틀을 거머쥐는 등 최다 수상을 했다. [[2008년 한국프로야구|2008시즌]]에는 1할대 타율을 기록하는 부진을 보이며 처음으로 시즌 도중 2군으로 내려가는 수모를 겪기도 했으나<ref>[http://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baseball&ctg=news&mod=read&office_id=295&article_id=0000000039 삼성 양준혁 "세월은 오래된 라이벌일 뿐"] 《박동희 칼럼》, 2008년 5월 26일</ref> 2002년, 2005년, 2008년, 2010년을 제외한 모든 시즌에 3할대 타율을 기록하고, 15시즌 동안 두 자릿수 홈런을 때려 내는 등 꾸준한 활약을 보였다.
         한때 [[임창용]]을 상대로 한 트레이드로 [[삼성 라이온즈]]를 떠나 [[1999년]] [[KIA 타이거즈|해태 타이거즈]](현 [[KIA 타이거즈]])와 [[2000년]] ~ [[2001년]] [[LG 트윈스]]에서 선수 생활을 하기도 했으나 2001 시즌이 끝난 뒤 FA를 선언하여 친정 팀에 복귀해 처음으로 [[한국시리즈]] 우승을 맛보았다. [[2008년 한국 프로 야구 포스트시즌|2008년 준 플레이오프 때 포스트시즌]] 최고령 홈런을 기록하였다.<ref name="rem">[[2008년 한국 프로 야구 포스트시즌]] 기록 참조</ref> [[2009년]] [[5월 9일]]에는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대구]] [[LG 트윈스]]와의 경기에서 기존 [[장종훈]]이 가지고 있던 [[KBO 리그 개인 통산 최다 홈런]](340개)을 경신했다.
         군 복무를 마친 양준혁은 삼성이 1993년 1차 지명함으로써 드디어 자신이 오래전부터 원했던 구단에 입단할 수 있게 되었고, 역대 타자 최고액인 계약금 1억 100만 원, 연봉 1800만 원에 계약을 체결하였다. [[1993년]] [[4월 10일]], 그는 자신의 프로 첫 대구 [[쌍방울 레이더스|쌍방울]]과의 대구에서 [[임창식 (야구 선수)|임창식]]으로부터 첫 안타를 뽑으며, 5타수 5안타를 치는 무서운 활약을 선보였고, 그후로도 계속 놀라운 활약을 펼치며 신인임에도 팀의 3번 타자로 꾸준히 출전하였다.<ref name="경향신문">{{뉴스 인용
         다른 선수들과 합심하여 투쟁을 계속한 끝에 결국 [[2000년]] [[1월 22일]] 한국 프로 야구 선수협회가 공식 출범하게 되었으며, 초대 회장은 [[송진우 (야구인)|송진우]], 감사는 [[정수근]], [[박충식 (1970년)|박충식]]이 맡게 되었다.<ref name="양14">{{웹 인용 |1= |url=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1293&page=65&type=&values= |제목=선수회 출범 |확인날짜= |확인날짜=2009년 1월 31일 |날짜=2000년 1월 22일 |웹사이트= |출판사=스포츠서울 }}{{깨진 링크|url=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1293&page=65&type=&values= }}</ref> 선수협 출범 후 하루 뒤 [[한국 야구 위원회|KBO]]는 양준혁의 영구 제명을 추진하였는데, 이러한 KBO의 움직임에 이번에는 시민 단체가 선수협을 지지하며 KBO를 압박하기 시작했고, 양준혁을 비롯한 여러 선수협 선수들은 선수협이 공식적으로 인정받을 때까지 전지 훈련에 불참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결국 선수협 문제는 [[2000년 한국프로야구|2000 시즌]] 시범 대구 개막을 하루 앞둔 2000년 3월 10일 열린 선수협과 KBO의 협상에서, '선수협은 올시즌 종료후 결성하고 제도개선위원회는 4월 3일 발족시킨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합의사항이 도출되면서 극적으로 타결되었다.<ref name="양15">{{웹 인용 |1= |url=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1289&page=65&type=&values= |제목=선수협 시민단체 동참 "실체인정" 압박 |확인날짜= |확인날짜=2009년 1월 31일 |날짜=2000년 1월 26일 |출판사=스포츠조선 }}{{깨진 링크|url=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1289&page=65&type=&values= }}</ref><ref name="양16">{{웹 인용 |1= |url=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1282&page=65&type=&values= |제목=선수협 승리 그날까지 |확인날짜= |확인날짜=2009년 1월 31일 |날짜=2000년 2월 8일 |출판사=스포츠서울 }}{{깨진 링크|url=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1282&page=65&type=&values= }}</ref><ref name="양17">{{웹 인용 |1= |url=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0&page=1&type=2&values=%B4%EB%C5%B8%C7%F9 |제목=선수협 대타협 |확인날짜= |확인날짜=2009년 1월 31일 |날짜=2000년 3월 11일 |출판사=스포츠서울 }}{{깨진 링크|url=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0&page=1&type=2&values=%B4%EB%C5%B8%C7%F9 }}</ref>
         [[LG 트윈스|LG]] 이적 첫해에는 한때 타율이 0.235까지 떨어지는 부진을 보이며 [[LG 트윈스|LG]] [[이광은]] 감독의 애를 태우기도 했지만<ref>{{웹 인용 |1= |url=http://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1220&page=62&type=&values= |제목=LG 양준혁 2할3푼... 의기소침 |확인날짜= |확인날짜=2009년 9월 4일 |날짜=2000년 5월 11일 |출판사=스포츠투데이 }}{{깨진 링크|url=http://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1220&page=62&type=&values= }}</ref> 이후 타격 페이스가 살아나기 시작하며 3할이 넘는 타율을 유지하여 시즌을 마칠 수 있었고, 이듬해에도 본인의 최고 타율인 0.355 로 타격왕에 등극하며 [[자유계약선수제도|FA]] 자격이 될 수 있는 시즌을 좋은 성적으로 마치면서 후일 [[LG 트윈스|LG]]와 한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게 된다.
         [[2002년 한국프로야구|2002 시즌]] 친정팀 삼성에 돌아온 후 10년 연속 3할에 도전했으나, 갑작스런 부진에 빠졌다. 결국 2할 7푼대의 타율로 실패하고 말았다. 그는 "훈련 도중 FA를 위해 귀국해서, 훈련 부족이 문제가 되어 2002년에 3할의 타율을 기록하지 못하고 부진에 빠진 것"이라는 기사가 나왔다. 양준혁은 시즌 전 삼성의 훈련 끝에 자체 청백전과 시범 대구에서 대활약을 보여주면서 한때 [[한국 야구 위원회]]에서 설문 조사를 했을 때 가장 가능성 있었던 기록이 양준혁의 10년 연속 3할이라고 나왔었다.<ref name="첫우승1">{{웹 인용 |1= |url=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885&page=45&type=&values= |제목=KBO, 설문 1위 - 양준혁 3할 달성 |확인날짜= |확인날짜=2009년 2월 17일 |날짜=2002년 2월 20일 |출판사=중앙일보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50825161910/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885&page=45&type=&values= |보존날짜=2005-08-25 |깨진링크=예 }}</ref> 또한 한국 프로 야구가 열리기 전 시범 대구에서 대활약으로 인해 여러 기사에서 극찬을 받았고, 기사에서 [[이종범]], [[이병규 (1974년)|이병규]]와 함께 타격 부문 후보로 뽑히기도 했다.<ref name="첫우승2">{{웹 인용|1=|url=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843&page=43&type=&values=|제목=프로 야구 개막 ― 타격 부문 후보|확인날짜=|확인날짜=2009년 2월 17일|날짜=2002년 4월 3일|출판사=스포츠투데이|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50517081335/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843&page=43&type=&values=|보존날짜=2005-05-17|깨진링크=예}}</ref> 양준혁은 한국 프로 야구가 개막된 뒤 새로 만든 '탈수기 타법'으로 4할 1푼 7리라는 타율을 기록했으나 얼마 가지 못해 2할 7푼 8리로 추락하였고, 심지어 그의 타율은 개막전이 열린 후 5월 초부터 더욱 급격히 하향곡선을 보였고, 2할 5푼대를 기록한 후 계속해서 타율은 상승하지 못하였다.<ref name="첫우승3">{{웹 인용|1=|url=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808&page=41&type=&values=|제목=양준혁 ‘10연속 3할’ 주저앉나|확인날짜=|확인날짜=2009년 2월 17일|날짜=2002년 6월 11일|출판사=스포츠 투데이|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50827142037/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808&page=41&type=&values=|보존날짜=2005-08-27|깨진링크=예}}</ref>
         양준혁은 6월에 5월부터 계속 지속되었던 타격 부진이 잘 맞은 타구가 계속해서 야수 정면으로 가고, 타격 부진이 지속되자 "작년에는 잘맞은 타구가 거의 안타가 되었는데 올해는 이상하다. 자꾸 정면으로만 간다"라고 밝힌 적이 있었다. 그는 타격 부진이 일시적인 불운으로 생각되었으나 계속해서 타격 부진이 이어지게 되면서 타격 자세에 대한 의문이 들어 계속해서 타격폼을 바꾸었지만 역시 타격 부진은 지속되어 나아지지가 않았고, 타격감이 좋을 때는 타격 훈련을 통해 스윙을 점검하지만 타격감이 좋지 않을 때는 각종 자세를 시험해 보는 문제가 일어나기까지 했다. 계속되는 타격 부진에 이어 심지어 양준혁에게 타격 부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부담감, 스트레스 피로감으로 인해서 더욱더 타격 부진에 빠져 벗어나오기 힘들어지게 되었다.<ref name="가나다라양준혁">{{웹 인용|1=|url=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808&page=41&type=&values=|제목=삼성 양준혁은 6월 '위기의 남자'|확인날짜=|확인날짜=2009년 2월 25일|날짜=2002년 6월 5일|출판사=스포츠서울|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50827142037/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808&page=41&type=&values=|보존날짜=2005-08-27|깨진링크=예}}</ref>
         선동열 감독은 양준혁이 2할 4푼대까지 떨어지자 양준혁이 가장 안 좋았을 때는 타격감의 부활을 위해 최근 성적이 좋아진 심정수를 지명타자로 돌리고 양준혁의 타격감을 최대한 회복하도록 노력을 하겠다고 밝혔다.<ref name="두부3">{{웹 인용|1=|url=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421&page=22&type=&values=|제목='2할4푼대 부진' 삼성 양준혁, 26일 만에 대포 가동 타격|확인날짜=|확인날짜=2009년 2월 18일|날짜=2005년 5월 29일|출판사=스포츠투데이|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30918091831/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421&page=22&type=&values=|보존날짜=2003-09-18|깨진링크=예}}</ref> 그러나 타격감은 좋아지지 않았다. 하지만 양준혁은 2005년 시즌을 치르고 있는 도중에 [[장종훈]]의 [[한국 프로 야구 안타 관련 기록|최다 안타 기록]]과 같은 안타를 기록하여 타이를 이루고, 장종훈의 최다 안타 기록을 경신했을 때에는 무려 380경기나 앞섰다. 양준혁은 부진으로 인해 9타석이나 안타를 기록하지 못해 삼성은 꽃다발을 만들었다가 폐기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은 뒤에 경신을 하였고, 그는 이후 1773개의 안타를 기록하게 되었다. 그러나 최다 안타를 경신했을 때의 타율은 2할 3푼 8리로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었다.<ref name="두부4">{{웹 인용|1=|url=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412&page=21&type=&values=|제목=1771안타 양준혁 최다타이,장종훈 기록 깼다|확인날짜=|확인날짜=2009년 2월 18일|날짜=2005년 6월 22일|출판사=스포츠투데이|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50508081036/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412&page=21&type=&values=|보존날짜=2005-05-08|깨진링크=예}}</ref><ref name="두부5">{{웹 인용|1=|url=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403&page=21&type=&values=|제목=양준혁 최다 안타... 장종훈보다 380경기 먼저 쐈다|확인날짜=|확인날짜=2009년 2월 18일|날짜=2005년 6월 26일|출판사=스포츠투데이|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50508080953/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403&page=21&type=&values=|보존날짜=2005-05-08|깨진링크=예}}</ref> 타격 부진 끝에도 13년 연속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하였다.
         [[2009년]] [[5월 9일]]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대구]]에서 열린 [[LG 트윈스]]와의 홈경북에서 상대 투수 좌완 [[류택현]]의 바깥쪽 패스트 볼을 밀어치는 좌월 홈런(비거리 110m)을 기록하여 마침내 시즌 2호 홈런이자 통산 341호 홈런을 기록하였다. 이 홈런으로 양준혁은 [[장종훈]] 현 [[롯데자이언츠|롯데 자이언츠]] 2군 타격 코치가 가지고 있던 [[한국프로야구 홈런 관련 기록|340개의 통산 홈런 기록]]을 경신하였다. 그는 홈런을 치고 난 후에 가진 인터뷰에서 "부상으로 2군에 내려갔다가 처음 등록하였고, 적응이 되지 않은 상황이라 홈런을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냥 풀 스윙을 했는데 넘어갔다"며 소감을 밝히면서도 "장종훈 선배가 생각난다"며 그의 기록을 기리고 싶다고 말하였다. 이외에도 양준혁은 "세울 수 있는 기록은 이미 갖고 있다. 팀에 필요한 선수로 남고 싶다"며 소감을 밝혔다.<ref>{{뉴스 인용
         은퇴 후 여러 방면에서 활동하던 양준혁은 2011년 6월 13일 발대식을 개최하며 '양준혁 야구재단'을 출범했다.<ref>[http://www.segye.com/Articles/SPN/SPORTS/Article.asp?aid=20110530002968&subctg1=&subctg2= 양준혁 야구재단, 내달 13일 출범] 《세계일보》 2011년 5월 30일</ref> 양준혁은 “일반 학생들이 참가하는 야구 클럽을 활성화해 야구를 통한 인성교육을 목표로 재단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야구 붐을 타고 리틀야구팀도 많이 늘어나는 등 확장세에 있지만 중·고교생을 대상으로 한 청소년 야구는 사실상 정체 상태”라면서 “청소년이 너무 공부에만 얽매이지 않고 야구를 통해 훌륭하게 성장하도록 힘을 보태겠다”고 각오를 밝혔다.
         |최고령 20-20클럽(38세 4개월 10일) ||2007.10.5 ||[[삼성 라이온즈|삼성]] ||[[롯데 자이언츠|롯데]] ||부산 ||1회 안타 후 2루, 3회 몸에 맞는 공 후 2루 도루 ||[[이종범]] (KIA), 33세 28일전체 29번째 (22홈런 20도루) ||개인 통산 4회 째([[박재홍 (야구인)|박재홍]]과 타이)
  • 정인욱 . . . . 15회 일치
         2010 시즌에는 2군에서 [[선발 투수]]로 9경기 등판해 4승을 올리고 5월 4일 1군에 올라왔다. 첫 데뷔전은 롯데전이었는데 2사 만루 상황에서 등판, [[홍성흔]]을 상대로 파울 플라이를 잡았다. 베테랑을 상대로도 떨지 않고 정면 승부한 것을 [[선동열]] 감독이 좋게 봤는지 5월 14일 넥센전에서 선발로 등판하게 된다.
         시리즈 전적 1승 1패인 2010년 10월 10일 [[잠실 야구장]]에서 열린 [[두산 베어스]]와의 2010년 플레이오프 3차전에서 스코어 6:6이던 10회말에 7번째 투수로 등판하여 10회말을 삼자범퇴로 막았다. 하지만 팀이 스코어 8:6으로 이기던 11회말에도 등판했다가 아웃카운트 하나 못 잡고 3실점을 하며 '''역전패를 허용'''하였다.
         그러나 선발투수인 외국인 선수 [[카도쿠라 켄]]이 부친의 건강 악화로 일본에 다녀오며 선발 로테이션에 구멍이 나자, 이를 메꾸기 위해 1군으로 콜업되어 5월 5일 롯데전에 선발 등판하게 된다. 이 경기에서 정인욱은 손가락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부상으로 마운드를 내려갈 때까지 5와 1/3 이닝 동안 1피안타 무실점으로 롯데 타선을 막으며 데뷔 첫 선발승의 감격을 누린다. 경기 직후 곧바로 2군으로 다시 내려가지만, 선발의 한 축을 담당하던 [[안지만]]이 셋업맨으로 보직을 옮기며 다시 6선발 로테이션에 합류할 예정.
         [[5월 3일]]에 1군에 올라온 적이 있으나, 2군에서도 한창 안 좋았을 때니 잘할리가 만무했다. 4일만에 경산행. 2군에서도 6점대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할 정도로 고전하면서 잔류군(3군)으로 강등되기도 하고, [[중간계투]]로 보직이 바뀌기도 했다. [[중간계투]]로서 그럭저럭 좋은 모습을 보여 다시 선발로 복귀했고, 점점 좋아져 7월 1달 동안은 4경기에 선발로 등판해 24이닝 동안 4실점(3자책)을 기록했다. [[8월 2일]] [[차우찬]] 대신 1군으로 올라와 [[중간계투]]로 합류했다.
         [[상무 피닉스 야구단|상무]] 첫 해부터 1선발로 등판했다. 148⅓이닝을 소화해 [[경찰 야구단|경찰청]]의 [[장원준]]에 이은 퓨처스 전체 이닝 소화 2위를 기록했다. 하지만 [[장원준]]의 경우엔 투구수가 110개를 넘게 던진다거나 시즌 후반 들어서는 계투 알바로 연투하는 등 혹사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정인욱은 시즌 초반을 제외하면 투구수가 110개를 넘은 경기가 거의 없다시피 했고, 5월에는 컨디션 난조로 로테이션을 아예 거르기도 하는 등 어느 정도 관리를 받았다. 첫 해 성적은 26경기 148⅓이닝 7승 6패 [[평균자책점]] 3.40. 다소 승운이 없었는데, 정인욱 스스로가 말아먹은 경기도 종종 있었다(…).
         2년차에는 허리 재활의 영향인지 5월에서야 올라올 정도로 시작이 늦었고, 등판 간격을 길게 가져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전역 후 STC로 보냈는데, 생각보다 몸 상태가 좋은지 바로 퇴소했다고 한다. 키도 많이 커서 189~190cm까지 컸다는 듯.
         5월 8일 선발로 내정돼 1군에 올라왔으나[* 실제로는 며칠 전 1군에 합류한 상태였다.] 4이닝 6피안타 5실점을 기록하고 교체됐다. 1회부터 무사 만루 위기를 자초해 밀어내기 볼넷에 이어 안타와 희생플라이 2개로 4점을 내줬다. 그나마 타선의 도움으로 패전투수는 면했는데, 1군에 올라오기 전인 5월 1일 상무와의 퓨처스 경기에서 6이닝 4실점으로 그리 인상적인 투구 내용은 보여주지 못했던지라 애초에 이 날 경기에서도 호투할 가능성이 낮았다.
         5월 14일 대구 롯데전에서 5이닝 4실점(3자책) 4K 7피안타로 나름의 선방을 하여 240일 만의 승리를 따냈다. 시즌 초 130~140 초반에 그쳤던 구속도 최고 147km을 찍으면서 자신감을 찾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고무적. 류중일 감독도 정인욱의 구속이 올라온 것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5월 20일 마산 NC전에서 빵빵한 타선 지원을 받으며 5이닝 2실점 6K로 호투했다. 투구수가 102개로 많았기에 6회 때 교체되었다.
         5월 27일 인천 SK전에서 1실점으로 호투하였다. 게다가 그 1점도 수비의 실책으로 비자책이었다. 그러나 뒤이어 올라온 불펜의 방화와, 답이 없는 물빠따로 승리투수가 되지 못했다.
         [[김현욱(야구)|김현욱]] BB 아크 코치와 함께 투구폼 개조에 나서면서 5월 11일에서야 2군 경기에 등판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투구폼 적응 문제인지 그냥 실력이 퇴화하는 것인지 3경기에 등판해 6⅔이닝 ERA 12.15로 그야말로 처참한 성적을 기록했다. 21일 SK 2군전에서는 선발로 등판해 '''1⅔이닝 7실점'''을 기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월 25일 [[안규현]]과 함께 1군에 등록됐다.
         8월 10일 경기에서 8회말 2실점을 했고 이 2실점 없었다면 삼성은 10:10 동점상황으로 경기를 이어나갔을 수 있다는 점에서 답이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 경기 연속 털리니 이제 거품이 꺼지려는 모양이라고 삼팬들은 생각한다.
  • 정호용 . . . . 14회 일치
         |임기2 = 1987년 1월 21일~1987년 5월 26일
         |임기4 = 1992년 5월 30일 ~ 1996년 5월 29일
         |임기5 = 1988년 5월 30일~1990년 1월 5일
         '''정호용'''(鄭鎬溶, [[1932년]] [[9월 10일]] ~ )은 [[대한민국]]의 [[군인]], [[정치가]]이다.
         5월 18일에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자 광주와 서울을 3차례 오가면서 공수부대로부터 보고를 받거나 현장 상황을 확인했다. 5월 27일 [[광주 재진입 작전|상무충정작전]] 직전 육군본부로부터 가발, [[수류탄]] 등 군수품을 지원받아 현지의 공수부대에 제공했다.
         5월 30일, [[국가보위입법회의]]가 구성되자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상임위원회 위원의 한 사람으로 위촉되었다.
         1987년 1월, [[대한민국 행정안전부|내무부]] 장관에 임명되었다가 4개월 만인 그 해 5월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민주정의당]] 당내에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 같은 해 7월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 장관으로 내각에 복귀했으나 전두환 정권이 불과 7개월밖에 남지 않은지라 오래 재직하지 못했다. 이후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정치인으로 변신했고 1988년 5월 민주정의당 대구경북지구당 위원장에 임명, 같은 해 [[대한민국 13대 총선|13대 총선]]에서는 대구 지역에서 출마해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그러나 여소야대 국회에서 제5공화국 비리에 대한 청문회, 5·18 청문회로 사회 여론이 공직사퇴요구를 제기하자 결국 1990년 1월 5일에 국회의원직을 사퇴했다.<ref>1990년 1월 5일에 사직했다.</ref> 이후 명예회복을 위해 자신의 지역구 보궐선거에 다시 출마했지만 정치적 부담을 느낀 노태우 정부의 압력에 의해 후보직에서 다시 사퇴했다.
         |임기 = [[1987년]] [[1월 21일]] ~ [[1987년]] [[5월 26일]]
         |임기 = [[1988년]] [[5월 30일]] ~ [[1990년]] [[1월 5일]]
         |임기 = [[1992년]] [[5월 30일]] ~ [[1996년]] [[5월 29일]]
  • 조진호 (축구인) . . . . 14회 일치
         '''조진호'''(趙眞浩, [[1973년]] [[8월 2일]] ~ [[2017년]] [[10월 10일]])는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였으며, [[대전 시티즌]], [[상주 상무]], [[부산 아이파크]]의 감독을 지냈다. 본관은 [[함안 조씨|함안]].
         [[2000년]] 대한화제컵 포항과의 A조 2차전서 멀티골, 연장전 골든골을 기록하며 친정팀에 비수를 꽂았으며,5월 5일 [[서울올림픽주경기장]]에서 펼쳐진 [[전남 드래곤즈]]와의 대회 결승전서 연장 전반 4분 [[전경준]]의 프리킥을 헤딩으로 연결해 골을 기록하며 부천의 대회 우승을 이끌었다.
         [[K리그 챌린지]]에서 시작한 2014 시즌 개막전에선 [[수원 FC]]에 대패하였으나 [[3월 30일]] [[고양 Hi FC]]전 4:1 대승을 시작으로 [[4월 27일]] [[부천 FC 1995]]전 까지 총 리그 5연승을 거두었으며, 5월 8일 [[감독 대행]]에서 정식 감독으로 부임하였다. [[6월 21일]] [[대구 FC]]전까지 총 14경기 연속 무패와 더불어 한시즌동안 11경기 연속 홈 무패를 기록하며 구단의 한시즌 홈 최다 연속무패 신기록을 세움<ref> 이 기록은 2016년 [[최문식]] 감독이 한시즌 홈 12경기 무패를 기록하며 깨졌다.</ref>과 동시에 리그의 절대강자로 치고 올라가는 등 상승세를 보이자 [[5월 8일]] 마침내 정식 감독으로 선임되었으며, [[5월 11일]] [[안산 경찰청 축구단]]과의 정식감독으로서의 데뷔전에서 2:0승을 이끌었으며, 5월 이달의 감독에 선정되었다.<ref> [http://osen.mt.co.kr/article/G1109868314/ 대전 돌풍 이끈 조진호, 연맹 선정 5월의 감독] </ref> 이후 시즌 종료까지 꾸준히 리그 1위 자리를 수성하며 대전의 1부 리그 승격을 이끌었으며, K리그 챌린지 최우수감독에 선정되었으며, 구단 역사상 최초로 한시즌에 20승 이상을 거둔 감독이 되었으며, 대전팬들 사이에서 '''갓진호'''라는 별명을 얻었다. <ref> [http://m.sports.naver.com/kfootball/news/read.nhn?oid=139&aid=0002028091/‘갓진호’, 축구특별시 부활 이끈 지휘자] </ref>
         이틀 뒤인 [[2017년]] [[10월 10일]]에 화명동 [[부산 아이파크]] 숙소를 나서다 상주 시절부터 좋지 않았던 심장에 심적 부담이 더해진 것이 원인이 되어 급성 [[심장마비]]로 쓰러져 병원에 후송됐지만, 끝내 향년 4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빈소는 양산부산대학교병원 장례식장 특 2호실에 마련되었으며, 발인은 12일 오전에 이루어졌다.<ref name="sportschosun_2017-10-10_death">{{뉴스 인용 | 저자=박찬준 | 뉴스=스포츠조선 | 제목=[속보]조진호 부산 감독, 심장마비로 사망 | url=http://sports.naver.com/kfootball/news/read.nhn?oid=076&aid=0003160548 | 날짜=2017-10-10 | 확인날짜=2017-10-12 | 보존url=https://archive.today/20171012131826/http://sports.naver.com/kfootball/news/read.nhn?oid=076&aid=0003160548 | 보존날짜=2017-10-12 | 깨진링크=아니오 }}</ref><ref name="yonhapnews_2017-10-10_death">{{뉴스 인용 | 저자=김태종 | 위치=서울 | 뉴스=연합뉴스 | 제목=프로축구 부산 조진호 감독 심장마비 별세(종합2보) | url=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10/10/0200000000AKR20171010097452007.HTML | 날짜=2017-10-10 | 확인날짜=2017-10-12 | 보존url=https://archive.today/20171012131801/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10/10/0200000000AKR20171010097452007.HTML | 보존날짜=2017-10-12 | 깨진링크=아니오 }}</ref> 그의 유해는 김해 화장장에서 화장된 뒤 [[경기도]] [[광주시 (경기도)|광주시]] 추모공원에 안장되었다.
         [[10월 10일]] 당일 [[스위스]] 베른 주 빌에서 열린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과 [[모로코 축구 국가대표팀]]의 평가전 시작 전 선수들이 묵념의 시간을 가졌으며, 10월 14일부터 15일까지 모든 K리그 경기에서도 추모 묵념을 진행했으며, [[10월 14일]] [[수원 FC]]와 [[부산 아이파크]]의 경기에서는 부산 측 원정 서포터석에 조진호 감독의 사진을 걸었며, 이 날 [[이정협 (축구 선수)|이정협]]은 패널티킥으로 골을 성공시킨 뒤 조진호 감독의 사진 앞에 달려가 얼굴을 파묻는 모습을 보여줬으며, [[10월 15일]] [[대전 시티즌]]과 [[부천 FC 1995]]와의 경기에서 대전 홈팬들이 조진호 감독이 대전을 K리그 챌린지에서 우승시켰던 2014년을 기억하고 추억하고자 경기 시작 후 14분 동안 응원을 하지 않으며 조진호 감독을 추모했다.
         * [[2014년]] [[K리그 챌린지]] 5월의 K리그 감독상
         |임기 = [[2013년]] [[10월 3일]] - [[2014년]] [[5월 8일]] (감독 대행)<br /> [[2014년]] [[5월 8일]] - [[2015년]] [[5월 20일]]
         |임기 = [[2016년]] [[11월 25일]] - [[2017년]] [[10월 10일]]
  • 김상훈 (1963년) . . . . 13회 일치
         * [[2012년]] [[5월 30일]] ~ [[2016년]] [[5월 29일]] : 제19대 국회의원 (대구 서구)
         * [[2013년]] [[4월]] ~ [[2016년]] [[5월]] : 제19대 국회 전, 후반기 산업통상자원위원회 위원
         * [[2016년]] [[5월 30일]] ~ [[2020년]] [[5월 29일]] : 제20대 국회의원 (대구 서구)
         * [[2016년]] [[5월]] ~ [[2017년]] [[2월]] : [[새누리당]] 정책위원회 수석부의장
         * [[2016년]] [[6월]] ~ [[2018년 5월]] : 제20대 국회 전반기 보건복지위원회 간사
         * [[2018년]] [[3월]] ~ [[2018년]] [[5월]] : 6.13지방선거 자유한국당 대구시당 공천관리위원장
         * [[2018년]] [[5월 23일]] ~ [[2018년]] [[6월 13일]] : 6.13지방선거 자유한국당 대구시당 공동선거대책위원회 위원장
         |임기 = [[2012년]] [[5월 30일]] ~ [[2016년]] [[5월 29일]]
         |임기 = [[2016년]] [[5월 30일]] ~ [[2020년]] [[5월 29일]]
  • 손승락 . . . . 13회 일치
         ||<:> '''등장곡''' || [[나다]] - King pin (Feat. [[쿤타]], [[던밀스]])~~19금 노래다~~[* 2018년 5월 1일부터 [[KBO리그 응원가 저작권 사태]]의 일환으로 개인 등장곡을 틀지 않기로 했는데 7월부터 치어리더의 공연 형식으로 노래를 튼다.] ||
         그의 최고의 무기는 최고 152km/h, 평균 146km/h에 달하는 빠른공이다. 주 변화구는 평속 140km/h에 컨디션이 좋으면 140km/h 중반대까지 나오는 커터와 130km/h중반에서 140km/h 초반까지 구속이 나오는 슬라이더다. 포크볼도 간간히 던졌으나 거의 쓰지 읺았으나 2018년 5월말에 부진을 하고 2군에 내려갔다 온 이후부터는 본격적으로 던지고 있다. 그리고 7월 부터는 포크볼 외에 커브도 섞어던진다.
         이듬해 4선발로 등판하여 시즌 초반에는 굉장히 잘 던졌으나[* 5월까지만해도 5승 무패, 방어율 0점대였던 때도 있었을 정도였다.] 6월 접어 들면서부터 가면서 체력 저하로 난조를 종종 보였고, 팔꿈치 부상까지 겹쳐 중후반부터 선발과 불펜을 오가면서 전천후 투수로 활동했다. 6승 5패에 [[평균자책점]] 4.17을 기록했다.
         5월 27일 LG전에서 시즌 첫 세이브를 달성했고, 이날 넥센은 8연패를 탈출했다.
         부상끼도 있어서 시즌 초에 안 좋았고 [[LG 트윈스]]의 [[이병규(1983)|작은 이병규]]와 맞바꾸었더라면 [[LG 트윈스]]가 많이 아쉬울 뻔했다는 말이 현실이 될 뻔했으나, 무릎 십자인대 부상으로 병역이 면제될 정도로 고질적으로 무릎이 나쁜 작뱅의 몸 상태가 메롱임이 밝혀져서 5월 이후로는 트레이드했으면 [[넥센 히어로즈]]의 큰 손해였을 거라는 쪽이 강해졌다.[* 덤으로 [[이병규(1983)|작뱅]]은 그 해 시즌 막판이 되어서야 1군에 복귀했으며, [[박종훈(1959)|박종훈]] 당시 [[LG 트윈스]] 감독이 복귀 지연에 대해 작뱅에게 강하게 질타했다.]
         2012 시즌은 불안하게 출발했다. 주자 있는 위기 상황에 나오기는 했지만, 블론 세이브도 간간이 기록. 대표적으로 [[406 대첩]]. [[4월 15일]] 삼성과의 경기에서도 승리투수는 되었지만 블론세이브를 기록했다. 특히 매 번 등판에서 주자를 출루시키는 모습이 불안한 편. [[5월 3일]] 롯데와의 목동 홈 경기에서도 8회 2아웃에 나와 [[강민호]]에게 동점타를 맞고 블론세이브를 범하며 시즌 세 번째 블론을 기록했고, 9회에 만루 위기를 자초하고 강판되었다. 그리고 [[김상수(투수)|김상수]]가 [[전준우]]에게 안타를 맞으면서 2점의 자책점을 기록하며 패전투수가 되었다. 5월 초까지의 손승락은 평균자책점은 나쁘지 않지만, 내용이 좋지 않았다.이런 상황이 나오니까 '''손퇴물'''이라는 별명까지 생겨버렸다.
         5월 22일 [[잠실 야구장]]에서 열린 [[LG 트윈스]]와의 경기에서 2:1로 앞선 9회말 등판해 [[강정호]]의 실책으로 주자를 내보내기는 했지만, 병살로 잡으면서 깔끔하게 세이브를 달성, 시즌 10세이브를 기록했다. 5월 들면서 조금씩 안정감을 찾는 분위기다. 그러나 5월 30일 8회초 3:2로 앞선 2사 3루 상황에서 올라와 일단 8회는 막았지만, 9회 연속 4안타를 맞고, 후속 투수인 [[심수창]]이 분식 회계를 하면서 4자책점을 내주면서 시즌 4번째 블론세이브와 시즌 2패를 기록했다. 다음 날인 5월 31일 9회초 9:4로 앞선 무사 만루에서 올라와 [[김강민]]은 3루 땅볼을 유도해 2아웃을 잡았지만, [[최정]]에게 인정 2루타를 맞으면서 1점을 허용했다. 결국 세이브는 챙겼지만, 세이브 내용이 계속 그리 깔끔하지 않다. 5월까지 12세이브를 기록한 상황에서 단 4번만 출루없이 해결했다.
          * 2010년 시즌 후 결혼하여 2012년 5월 26일에 득녀했다. ~~오오 분유버프~~ 이름은 '''손체링'''. 의미가 따로 있다는데 이건 비밀이라고 한다.
  • 추경호 . . . . 13회 일치
         * 2010년 5월: 대통령실 경제금융비서관, 비상경제상황실장
         * 2016년 5월 ~ 2020년 5월: 제20대 국회의원 (대구 달성군)
         * 2016년 7월 ~ 2018년 5월 : 제20대 국회 전반기 기획재정위원회 경제재정소위원회 위원
         * 2017년 1월 ~ 2018년 5월: 제20대 국회 전반기 기획재정위원회 간사
         * 2017년 2월 ~ 2018년 5월: 제20대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조세소위원회 위원장
         * 2017년 3월 ~ 2017년 5월: 자유한국당 대선기획단 정책 부본부장
         * 2017년 12월 ~ 2018년 5월: 제20대 국회 4차 산업혁명특별위원회 위원
         * 2018년 1월 ~ 2018년 5월: 자유한국당 혁신위원회 경제정책 분과위원장
         * 2018년 2월 ~ 2018년 5월: 자유한국당 지방선거총괄기획단 지방선거기획본부 공약소위 위원
         * 2018년 5월 23일 ~ 2018년 6월: 6.13지방선거 자유한국당 대구시당 공동선거대책위원회 직능본부 본부장
         * 2019년 3월 ~ 2019년 5월 : 자유한국당 文정권 경제실정백서특별위원회 위원
         |임기 = 2016년 5월 30일 ~
  • 곽상도 . . . . 12회 일치
         2008년까지 검사로 활동했다가 퇴직하여 변호사가 되었다. [[박근혜]] 정부 [[청와대]] [[대한민국 대통령비서실|대통령비서실]] [[청와대 민정수석|민정수석비서관]]을 역임하였고, 대한법률구조공단 이사장을 맡았다.<ref>연합뉴스《무죄확정 '유서대필 사건' 수사 검사들은 '승승장구'》2015년5월14일</ref> 제20대 국회의원이다.
         * [[2016년]] [[5월]] ~ [[2020년]] [[5월]] : 제20대 국회의원 (대구 중구/남구)
          - [[2016년]] [[6월]] ~ [[2018년]] [[5월]] : 제20대 국회 전반기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위원
          - [[2016년]] [[5월]] ~ [[2018년]] [[5월]] : 제20대 국회 전반기 윤리특별위원회 위원
         * [[2018년]] [[2월]] ~ [[2018년]] [[5월]] : 자유한국당 지방선거총괄기획단 대여투쟁본부 위원
         * [[2018년]] [[3월]] ~ [[2018년]] [[5월]] : 6.13지방선거 자유한국당 대구시당 공천관리간사
         * [[2018년]] [[5월 23일]] ~ [[2018년]] [[6월 13일]] : 6.13지방선거 자유한국당 대구시당 공동선거대책위원회 전략본부 본부장
         * [[대한민국 국가정보원 여론 조작 사건]] 검찰 수사에 압박을 가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ref>임혜리,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6101140301&code=910402 신경민 "곽상도, 검사들 회식 자리 전화해 '니들 뭐하는 사람들이냐'고 말해"], 한겨레, 2013년 6월 10일</ref>
         |임기 = [[2016년]] [[5월 30일]] ~ [[2020년]] [[5월 29일]]
  • 김강민 . . . . 12회 일치
         그런데 5월 10일 [[두산 베어스|두산]]과의 [[잠실구장|잠실]] 원정경기에서 8:8 동점이던 9회 말 2아웃 1, 2루 상황에서 [[임재철]]의 타구를 거의 잡았다가 놓치면서 3루타가 되어 '''[[히 드랍 더 볼]]'''의 희생양이 되었다. 하지만 임재철의 타구가 정상적이었으면 잡기조차 힘들었다는 것은 고려해야 한다. 당시 중계석에 있었던 [[XTM]] [[민훈기]] 해설위원도 '김강민이니까 저렇게 따라가서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라고 언급했다.~~그리고 이만수는 좋아하며 달려나가다 무표정이 되었다~~
         타격은 2010년 수준으로 돌아온 상태인데, 5월 중순까지 '''[[볼넷]]과 [[병살타]]가 단 한 개도 기록하지 않는''' 변태스탯을 기록했다. 5월 셋째주에 접어들어서야 볼넷과 병살이 나왔으며 덕분에 타율과 출루율의 차이가 거의 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타격 순위 10위 안에 들고 있으니 [[흠좀무]].
         그러나 5월부터 타격감을 찾기 시작하고, 6월에 0.366의 타율을 기록하며 어느 정도 성적이 올라왔다. ~~그래도 시즌 타율 2할6푼~~ 8월 25일 기자의 장타가 늘어난 이유를 묻는 질문에 '쎄게 쳐서요' 라고 답변했다.
         5월 30일 현재 45경기에서 180타수 57안타 타율 .317, 출루율 .403, 장타율 .561로 3/4/5를 기록 중이며 도루 14개, 홈런 9개 타점 27개로 리그 탑급의 1번 타자 역할을 해주고 있다. ~~팀은 6위~~ 팀에서 야구 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선수다(...).
         5월 30일 넥센전에서 복귀를 했다. 팀이 연패를 하고있고 연패의 주요 원인이 타자들의 부진임을 생각하면 김강민의 복귀는 팀에게 좋은 소식. ~~복귀 때부터 가축 모드면..~~ 다행히도 복귀뒤 첫 시리즈에서 타격감과 수비감 모두 나쁘지 않은 모습을 보여줬다. 출전한 두 경기에서 각각 안타 하나씩을 기록했고 31일 경기에선 호수비를 무려 세개나 선보이며 복귀를 알렸다.
         4월달엔 시즌 초에 삼진 내야뜬공 땅볼만 쳐서 엄청 까였으나 4월 말에 조금씩 살아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5월 초 갈비뼈 부근 부상으로 2군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이후 전년도 주장이었던 ~~졷장님~~ [[조동화]]가 임시로 주장을 맡고 있는 중이지만 주장의 이탈로 인해 팀의 케미가 흔들리지 않을까 걱정하는 팬들이 많다.
         그리고 6월 10일 경기에서 드디어 ~~득녀 소식과 함께~~[* 빅보드에 김강민이 잡혔을 때 '''예쁜 공주님 축하드려요''' 라는 문구가 나온 것으로 보아 딸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복귀했다!''' 그러나 2:2의 균형이 유지되던 9회 초 [[박석민]]의 거짓말같은 [[만루홈런]]으로 팀이 패배하면서 뒷맛이 씁쓸한 복귀전이 되었다.
         5월 2일 기준으로 퓨처스 리그에서도 15경기에 나와 38타수 9안타 4볼넷 10삼진 타율 0.237를 기록하며 부진하고 있어 1군에는 올라오지 못하는 상태이다. 2군의 다른 외야 자원인 [[조용호(야구선수)|조용호]]와 [[김재현(1987)|김재현]]은 3할 중반대의 고타율을 보이고 있고, 둘 다 주루센스도 좋은 편이라 대주자로도 가치가 있는 편이라 콜업 순위에서 김강민보다 우위에 있는 상태로써 현재 김강민의 설 자리는 더욱 좁아지고 있다. 아무래도 올 시즌이 마지막 시즌이 될 수도. 다만 조용호, 김재현은 일단 1군에 올라오기만 하면 타격이 시망 수준이라 글쎄.... 특히 김재현은 나이도 상당히 많다. 일단 2군 성적은 이들보다 확실히 저조하다. 베테랑의 품격과 더불어 그 두 선수가 가지고 있지 못한 장타력을 어필할 필요가 있다.
         7월 10일 [[LG 트윈스]]전에서 결승 쓰리런 포함 3안타 3타점으로 맹타를 휘둘렀다. 팀은 이에 힘입어 10:3으로 완승. 이로써 4위와의 게임차를 더욱 벌려놓았다.
          * 또한 [[번트]] 실력이 '''대단히 안 좋다'''. 덕택에 팬들은 김강민의 번트 모션을 볼 때마다 순간 심장이 내려앉는 공포감을 느낀다. [[2009년 한국시리즈]] 4차전에서 번트로 내야안타를 만들어 냈지만 번트 기술이 아닌 빠른 발을 이용한 안타라서 아직 번트가 미숙하다는 건 사실. 번트 파울플라이를 만든다거나, 2012년에는 '''자신이 댄 번트 타구에 얼굴을 맞는다거나'''(5월 4일 롯데전), 번트를 잘못대서 병살될 것 같으니까 '''일부러 공을 헤딩해서 혼자만 아웃당하고'''(9월 26일 넥센전) 마는(…) 어이없는 플레이도 했다. 그 경기 이후 네이버에선 김강민 천재논란(?)이 일어났다. 어찌됐든 순발력이 빛난 영리한 플레이.[* 어쩌면 진짜 천재일지도 모르는게 이때 병살을 막기위해 헤딩을 했고, 결과적으로 그 이닝에서 2점 선취득점을 올릴수 있었다.]
  • 전여옥 . . . . 12회 일치
         * 2004년 5월 ~ 2008년 5월 제17대 국회의원 (한나라당)
         * 2008년 5월 ~ 2012년 5월 제18대 국회의원 (서울 영등포구갑 / 한나라당 → 새누리당 → 국민생각)
         1981년 [[한국방송공사]]에 입사하여 1994년까지 기자로 활동했다. 1991년 1월부터 1993년 8월까지는 도쿄특파원이었다. 특파원시대에 쓴 독설적 일본론 《[[일본은 없다]]》를 냈으며 베스트셀러가 됐다. 《[[일본은 없다]]》의 표절의혹을 제기한 원작가인 [[유재순]] [[제이피뉴스]] 발행인 등 5인에 대해서 손해배상으로 5억원을 청구하였지만, 2012년 5월 18일 대법원 확정판결로 유재순씨의 레포트를 표절한 것이 인정되어 패소했다.<ref>[http://media.daum.net/politics/newsview?newsid=20120518060109739 '표절시비' 전여옥, 언론 상대 손배訴 대법서 패소] [[뉴시스]] 2012.5.18</ref><ref>[http://media.daum.net/politics/clusterview?newsId=20120518111515384&clusterId=578748 전여옥, 표절 책으로 얼마나 벌었나 했더니…] [[한국일보]] 2012.5.18</ref> 이에 대해 전여옥은 '표절이 아닌 아이디어 인용'일 뿐이라고 변명하였다.<ref>[http://media.daum.net/politics/others/view.html?cateid=1020&newsid=20120518125412177&p=mediatoday 전여옥 “표절 아니라 아이디어 인용일 뿐”] [[미디어오늘]] 2012.5.18</ref>
         2004년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2004년 5월 제17대 국회의원에 비례대표로 당선됐다. 2004년 7월 제17대 [[대한민국]]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2008년 3월 서울 영등포갑에 출마했다. 2008년 4월 [[박근혜]]의 팬클럽인 박사모는 전여옥의 낙선운동을 했다.<ref name="인권1">[http://www.cbs.co.kr/Nocut/Show.asp?IDX=794156 노컷뉴스<!-- 봇이 붙인 제목 -->]</ref> 4월 6일 [[박사모]]는 전여옥의 낙선을 위해 민주당 후보인 [[김영주]]를 지지한다는 성명을 언론에 발표하기도 했다.<ref>[http://www.mt.co.kr/view/mtview.php?type=1&no=2008040610580120426&outlink=1 박사모 "전여옥 퇴출 위해 민주당 지지" - 머니투데이:투자뉴스<!-- 봇이 붙인 제목 -->]</ref> 2008년 5월 영등포갑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2008년 한나라당 국제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2008년 국회 연구단체 미디어정치2.0 활동했다.<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019592 55개 국회의원연구단체 명단 - 오마이뉴스<!-- 봇이 붙인 제목 -->]</ref> 2008년 12월 국민일보 20주년에 축사를 보냈다.<ref>[http://www.kukinews.com/news2/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921124081&cp=nv [쿠키뉴스] 갓 구워낸 바삭바삭한 뉴스<!-- 봇이 붙인 제목 -->]</ref>
         2008년 5월 8일 [[한미 쇠고기 협상 내용에 대한 반대 시위|촛불 시위]]에 대해 '악령이 출몰하는 사회'([[칼 세이건]]의 문구)로 비유, 시위대를 비난하는 논평을 냈다.<ref>{{뉴스 인용|제목=전여옥,'광우병 논란,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url=http://www.freezonenews.com/news/article.html?no=26583|출판사=프리존뉴스|날짜=2008-05-08|확인날짜=2009-03-05}}</ref>
         또한 같은 날 민가협 등에서 가해자들에 대한 구속이 부당하다며 제기했던 구속적부심은 기각됐다.<ref>[http://www.cbs.co.kr/Nocut/Show.asp?IDX=1084807 법원 "민가협 대표, 구속이 적법하다"- 노컷뉴스 2009-03-06]</ref> 또한 경찰은 전여옥 폭행 용의자 4명에 대해 10일까지 경찰에 출석하도록 통보했다. 앞서 5일에 용의자 중 한 명이었던 배씨(34, 여)는 혐의점을 찾지 못해 귀가 조치된 바 있었다.<ref>[http://www.asiatoday.co.kr/news/view.asp?seq=218117 '전여옥 폭행' 용의자 재소환 통보-아시아투데이 2009-03-06]</ref> 일부 네티즌들은 전여옥 폭행사건에 대해 "'전치 8주지만 부상은 경미하다'고 밝힌 의료진의 발표를 이해할 수 없다", "70대 할머니가 전치 8주의 상해를 입혔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는 등의 의혹을 제기했다.<ref>[http://www.cbs.co.kr/Nocut/Show.asp?IDX=1084417 "할머니가 원더우먼이냐?" vs "전의원 테러 당했다" - 노컷뉴스 2009-03-06]</ref> 석방대책위 측에서는 경찰에 국회 CCTV 화면 공개를 요구했으나, 경찰측에서는 CCTV 화면이 없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대책위 등에서는 "경찰이 객관적 증거도 내놓지 못하면서 전의원 주장만 따른다"고 비판했다.<ref name="시사"/><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302145537 "경찰, '전여옥 폭행' CCTV 왜 공개 못하나" - 프레시안 2009-03-02]</ref> 전여옥은 바로 병원으로 입원했다.
         2009년 5월 30일 법원은 전여옥 의원을 폭행한 민가협 공동대표 이모씨와 조모씨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법원은 사안이 무거우나 초범인 데다 공탁금 500만 원을 맡긴 점, 68세의 고령 등을 참작했다고 밝혔다.<ref>[http://www.donga.com/fbin/output?n=200905300126] 동아일보</ref>
         |임기 = [[2008년]] [[5월 30일]] - [[2012년]] [[5월 29일]]
  • 황치열 . . . . 11회 일치
         * 2017년 5월 14일, 5월 21일 문화 방송 [[문화방송|MBC]]의 음악 예능 프로그램 [[미스터리 음악쇼 복면가왕]] 111회 ~ 112회에 '짐승남 강백호'로 참가, 1라운드부터 2라운드, 3라운드까지 [[정혜성]], [[Y2K (음악 그룹)|고재근]], [[이예준 (가수)|이예준]] 등을 상대로 이김. 56대 복면가왕 선발전까지 진출하였으나 '노래 9단 흥부자댁'([[소향]])에게 석패.
         * 2010년 5월 12일 디지털 싱글 [http://www.melon.com/artist/song.htm?artistId=471643 《웬즈데이(Wednesday) - Happy Train New Artist Project Vol.1》]
         * 2014년 12월 10일 디지털 싱글 [http://www.melon.com/album/detail.htm?albumId=2294549 《치열Ten2 - 경상도 남자》]
         * 2017년 5월 24일 - 드라마 《[[군주 - 가면의 주인]] OST Part 3》 - 〈잠시나마〉
         * 2018년 2월 10일 - 드라마 《[[화유기]] OST Part 7》 - 〈그 언젠가 기적처럼〉
         * 2015년 5월 2일 - 《[[불후의 명곡 - 전설을 노래하다]]》 (7인의 전설편) - 〈칠갑산〉
         * 2015년 5월 16일 - 《[[불후의 명곡 - 전설을 노래하다]]》 (가족 특집) - 〈아버지〉 '''425점 우승'''
         * 2016년 5월 14일 중국 [[난징]] 첫 중국팬미팅 '열화(烈火) Time'
         * 2016년 6월 10일 중국 성도 애니메이션 축제 게스트
         ** [[5월 4일]] [[KBS 2TV|KBS2]] 《[[뮤직뱅크]]》 K-Chart 1위
  • 권은희 (1959년) . . . . 10회 일치
         '''권은희'''(權恩嬉, [[대구광역시|대구]], [[1959년]] [[5월 24일]] ~ )는 [[대한민국]]의 컴퓨터공학자이다. 정계에 진출하여 [[2012년]] [[새누리당]]으로부터 공천을 받아 대구에서 당선되어 [[대한민국 제19대 국회의원 목록|대한민국 제19대 국회의원]]이 되었다. 20대 총선에는 공천을 받지 못하고 컷오프 되었으며, 탈당하여 무소속으로 출마하였다.<ref>[http://www.newsis.com/ar_detail/view.html?ar_id=NISX20160320_0013969591&cID=10301&pID=10300 與권은희 무소속 출마…유승민계 두 번째 탈당] 뉴시스, 2016년 3월 20일</ref> 바른미래당 전당대회에서 6.85%를 얻어 4위 안에 들지 못했으나, 여성 몫으로 최고위원이 되었다.<ref>{{뉴스 인용|url=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4917155|제목=바른미래당, 전당대회…손학규 신임 대표 선출|성=남정민|날짜=2018-09-02|뉴스=SBS NEWS}}</ref>
         * 2006년 12월 ~ 2007년 5월: (주)KT하이텔 경영지원부문장(상무이사)
         * 2007년 5월 ~ 2009년 6월: (주)KT하이텔 파란포탈사업부문장(상무이사)
         * 2012년 5월 ~ 2016년 5월: 제19대 국회의원(대구 북구갑)
         * 2012년 5월 ~ 2013년 3월: 제19대 국회 지식경제위원회 위원
         * 2013년 3월 ~ 2016년 5월: 제19대 국회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 위원
         * 2014년 6월 ~ 2016년 5월: 제19대 국회 후반기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
         |임기 = [[2012년]] [[5월 30일]] ~ [[2016년]] [[5월 29일]]
  • 김재연 (1980년) . . . . 10회 일치
         19대 총선 이후인 2012년 5월 4일 통합진보당 진상조사위원회는 통합진보당의 비례대표 경선이 총체적 부실, 부정이었다고 밝혔다. 이튿날 당 전국위원회는 대표단 총사퇴와 김재연을 포함한 비례대표 후보 14명의 전원 사퇴 권고안을 통과시켰다. 다음날인 5월 6일 김재연은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청년비례 선거는 100% 온라인 선거로 치러졌다" "문제투성이 진상조사보고서를 근거로 청년비례 사퇴를 권고한 전국운영위원회 결정은 철회되어야 한다" "청년당원들과 청년선거인단의 명예는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고 말했다.<ref>http://www.mt.co.kr/view/mtview.php?type=1&no=2012050616304606768&outlink=1</ref> 당내 비례경선 부정의혹이 제기된 초반인 3월 20일에는 [[MBC]] [[백분토론]]에 출연해 "당의 온라인투표 시스템을 믿지만, 제기하신 부분이 사실로 밝혀지면 당연히 그렇게(사퇴)하겠다"고 발언하기도 했다.<ref>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66064</ref>
         김재연의 기자회견 이틀 뒤인 5월 8일, 김재연과 더불어 '위대한 진출'의 후보였던 [[김지윤 (1984년)|김지윤]], 조성주, 이윤호는 김재연의 기자회견에 대한 반박 성격의 성명을 내고 "('위대한 진출') 투표 기간 중이었던 3월 11일 오전 7시, 시스템 개발업체에 의해 투표 프로그램의 소스파일이 수정됐다"고 주장했다.<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20120508145233</ref> [[민주통합당]] 청년비례 경선에 출마한 이계덕 역시 전날인 5월 7일 자신의 블로그에 "(통합진보당 선출위원회에서 업무를 하고 있다는) 한 지인이 '선거인단 모집 할당을 충족해야 한다'며 청년비례대표 경선 투표 첫날 '김재연 후보 찍으라'는 내용의 문자를 보내왔다. 이 같은 독려가 온 것은 선거부정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ref>[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20508004012 서울신문] 2012.05.08 [“김재연도 부정선거… 선출위서 독려 문자”]</ref>
         5월 14일 당 최고 의결기구인 중앙위원회도 경쟁명부 비례대표들에 대한 사퇴 권고안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이튿날 김재연은 [[이석기]] 등과 더불어 국회의원 신분을 국회에 등록했다.<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732365</ref> 이후 김재연은 5월 24일 [[한겨레TV]]의 [[김어준의 뉴욕타임스]]에 출연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사퇴하지 않는다고 한 적은 없다. 그러나 아직까지 왜 청년 비례대표 당선인이 사퇴해야 하는지, 왜 우리 당이 부정선거를 한 비도덕적인 정당으로 낙인 찍혔는지에 대해 천천히 바라볼 수 있게 설명드릴 수 있는 기회가 충분하지 않았다”며, "청년 정치에 대해 많은 분이 기대를 했는데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이 너무너무 죄송하다. 저도 사람이니까 정해놓은 답을 갖고 귀를 닫고 사는 것이 아니다. 한번 더 믿어주시라고 말하기 어렵지만 끝까지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겠다"라고 말했다.<ref>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534476.html</ref>
         5월 31일 [[미디어오늘]]과의 인터뷰를 통해서는 "상황에 떠밀려서 사퇴를 하게 된다면, 지금은 이석기, 김재연이 사퇴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 같지만 내일, 그 다음은 또 다른 희생자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통합진보당 부정경선 논란에 대해 "3월, 4월부터 (보수언론에 의해) ‘경기동부’ ‘종북세력’ 논란은 있었다. 이 모든 문제들이 그 연장선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한편, [[강기갑]] 당시 통합진보당 혁신비상대책위원장은 김재연, 이석기 등 당의 제명 권고에 불복한 비례대표 후보자, 당선자들에게 5월 25일까지 자진사퇴할 것을 권고했다. 하지만 사퇴시한까지 해당 비례대표 후보자, 당선자들이 사퇴하지 않자 강기갑은 당기위원회에 이들을 제소했고, 일련의 과정을 거쳐 당기위원회는 6월 29일, 김재연과 이석기를 최종 출당조치했다. 하지만 정당법상 국회의원의 출당은 당 소속 국회의원의 과반수 이상의 찬성으로 최종 의결해야 하기 때문에, 두 사람의 당적은 유지됐다.
         통합진보당에서 이석기와 김재연에 관한 출당 절차가 진행되던 2012년 5월, 김재연은 서울에서 경기도 의정부시의 시댁으로 전입했다. 5월 21일 현장을 방문한 [[헤럴드경제]]는 1면 기사를 통해 김재연의 시댁이 300평 대의 넓은 전원주택이며, 차고에는 고급 승용차들이 주차돼 있었다고 보도했다.<ref>[http://news.heraldcorp.com/view.php?ud=20120521000582&md=20120617062559_AV] 2012.05.22 '럭셔리' 김재연 시댁…300평대 주택-차량 3대]</ref> 헤럴드경제는 시댁의 '기사'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성의 입을 빌려 실제 김재연이 이곳에 거주하는 것은 아니라고 밝혔다.
  • 김종훈 (1952년) . . . . 10회 일치
         '''김종훈'''(金宗壎, [[1952년]] [[5월 5일]] ~ , [[대구광역시|대구]])은 [[대한민국]]의 외교관이었고, 제19대 국회의원을 지낸 정치인이다.
         * 2010년 5월 : 제66차 UN [[아시아 태평양 경제 사회 위원회]] 총회 의장
         * 1974년 5월 : 제8회 외무고시 합격
         * 2014년 11월 ~ 2016년 5월 : 제19대 국회 산업통상자원위원회 위원
         * 2013년 4월 ~ 2014년 5월 : 제19대 국회 윤리특별위원회 위원
         * 2012년 6월 ~ 2013년 5월 : 새누리당 국제위원장
         * 2012년 5월 ~ 2016년 5월 : 제19대 국회의원 (서울 강남을)
         |임기 = [[2012년]] [[5월 30일]] ~ [[2016년]] [[5월 29일]]
  • 윤덕주 (농구인) . . . . 10회 일치
         [[2005년]] 5월 부천에서 열린 2005 국제농구연맹(FIBA) 월드리그의 개회선언을 하는 등 최근까지 왕성하게 활동했고 7일에도 지인들과 함께 점심식사를 할 정도로 건강한 모습을 보였지만 갑자기 찾아온 병마를 이기지 못했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507081754171&code=100402 <nowiki>[</nowiki>부고<nowiki>]</nowiki> ‘여자농구의 대모’ 윤덕주씨 별세] 경향신문 2005.07.08</ref>
         * [[1999년]] [[4월 27일]] ~ [[1999년]] [[6월]] 제18회 아시아여자농구선수권대회(5월2-9일, 일본 시즈오카) 한국 선수단 단장<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l&ctg=news&mod=read&office_id=001&article_id=0004570997 한국 여자농구대표팀 28일 결단식]</ref>
         * [[2005년]] [[5월 18일]] 2005 FIBA 여자농구 월드리그 행사 주관<ref>[http://www.jumpball.co.kr/cont/cont_view.php?cont_cd=03&cont_seq=1661 <nowiki>[</nowiki>월드리그<nowiki>]</nowiki> 한· 일전 이모저모]</ref>
         * 할아버지 : [[윤필오]](尹弼五, [[1860년]] [[음력 9월 10일]] ~ [[1924년]] 양력 [[3월 30일]])
         *** 외당숙 : [[이상정]](李相定, [[1897년]] [[6월 10일]] ~ [[1947년]] [[10월 27일]], 독립운동가. 아호(雅號)는 청남(晴南), 산은(汕隱). [[대한독립군]] [[3성 장군|중장]])
         *** 외당숙 : [[이상화 (시인)|이상화]](李相和, [[1901년]] [[5월 9일]] ~ [[1943년]] [[4월 25일]], 작가, [[독립운동|민족]] [[시인]]. 아호(雅號)는 상화(尙火, 想華), 무량(無量), 백아(白啞).)
         **** 외6촌제부 : [[박창암]](朴蒼巖, [[1923년]] [[5월 15일]] ~ [[2003년]] [[11월 10일]], 군인, 정치가. 이상오의 사위. 아호(雅號)는 만주(滿洲), 허주(虛舟), 농부(農夫). [[군사영어학교|대한민국 군사영어학교]] 1기 출신. [[대한민국 육군|육군]] [[1성 장군|준장]] 전역.)
         * 사돈 : [[최남선]](崔南善, [[1890년]] [[4월 26일]] ~ [[1957년]] [[10월 10일]])
         * 사돈 : [[박중양]](朴重陽, [[1872년]] [[5월 3일]] ~ [[1959년]] [[4월 23일]])
  • 함인섭 . . . . 10회 일치
         '''함인섭'''(咸仁燮, [[1907년]] [[5월 3일]] ~ [[1986년]] [[9월 15일]])은 [[일제 강점기]]의 전문학교 교수이며, 초대 강원대학교 학장, 제6대 농림부 장관을 지낸 [[대한민국]]의 [[정치가]]이자 [[대학 교수]]이다. 본관은 강릉(江陵), 호(號)는 산남(山南)이다. 그는 [[춘천농업대학]]([[강원대학교]]의 전신)의 설립에 참여, 개교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춘천농업대학]] 초대 학장과 2대, 4~5대 학장, 강원대학교 농과대학원장, 강원대학 학장 등을 역임했다. 제3대 부통령 송암 [[함태영]]의 손자이며, 26년 연하인 [[함병춘]]은 그의 배다른 이복 삼촌이었다.
         [[1907년]](광무 10년) [[5월 3일]] [[충청남도]] [[천안군]]에서 함병석과 진주 강씨 강리백가(姜利百加)의 아들로 태어났다. 처음 이름은 재인이었으나 뒤에 인섭으로 고쳤다. 함병석은 [[대한제국]]시대의 법관이자 [[일제 강점기]] 당시에는 [[장로교]] [[목사]]로 활동했던 [[함태영]]의 본처 밀양 손씨 소생 아들이었다. 그러나 그의 부모는 일찍 사망하였다. 형제로는 남동생 함의섭이 있었다.
         [[1948년]] [[2월 1일]] 당시 춘천농업대학을 설립하면서 농업토목기술원 양성소를 부설로 설립하였다. 그러나 춘천농대 부설 토목기술원양성소는 48년 10월 30일 1기 수료생을 배출하였으나, 운영 여건이 여의치 않아 [[1949년]] [[5월 5일]] 2기생을 배출하고 폐소하게 되었다.
         [[1952년]] [[3월 6일]] 제6대 농림부 장관이 되었다. 농림부 장관이 되자 그는 정부 수립 직후에 시행한 [[토지개혁]] 당시 농지보상금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고, 8·15 광복 직후에 발생한 토지관련 분쟁과 토지보상 문제를 해결하였다. 그러나 [[1952년]] [[8월 28일]], 1952년의 중석불 사건으로 인책 사임<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210200032920100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2-10-20&officeId=00032&pageNo=1&printNo=1947&publishType=00020 ]</ref>하였다. 그는 중석불 사건의 피해자라는 시각도 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5032200099109001&editNo=15&printCount=1&publishDate=1995-03-22&officeId=00009&pageNo=9&printNo=9047&publishType=00010 ]</ref> 그밖에 그는 강원도 노동위원회 공익위원, 강원도 교육위원 등으로도 위촉되었다. [[1956년]] [[9월 12일]] UN가입추진위원회 전원위원회 강원도지부 부위원장<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6091200329201003&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6-09-12&officeId=00032&pageNo=1&printNo=3366&publishType=00020 ]</ref>이 되었다. 1957년 4월 20일 춘천농과대학 학장이 되고 1957년 5월 12일부터 [[1960년]] [[7월 7일]]까지 문교부 중앙교육위원회 위원을 겸임하였다. 그는 또 [[1960년]] [[7월 5일]]까지 고등고시 전형위원에도 위촉되었다.
         * 1956년 5월 ~ 1956년 8월 [[한국독립당]] 농림행정특보위원
         * 1957년 4월 20일 ~ 1960년 7월 10일 춘천농과대학 학장
         * 1957년 5월 12일 ~ 1960년 7월 7일 중앙교육위원회 위원 겸임
         *** 이복 숙모 :심효식(<ref>[http://news.hankooki.com/lpage/politics/200305/h2003050715164827000.htm 한국의 보배 함병춘… 강단 그리워한 진정한 공복] 한국일보 2003년 05월 07일자</ref> 沈孝植, [[1928년]] ~ , 화가)
         * 어머니 : 강리백가(姜利百加, [[1890년]] [[2월 10일]] ~ ?), 강성흠(姜星欽 또는 강종근(姜種謹))의 딸
         * 부인 : 유명숙(兪明淑, [[1917년]] [[5월 8일]] ~ ?), 기계인 유권(兪權)의 딸
  • 김보름 . . . . 9회 일치
         2009년 2월 10일 탄천종합운동장빙상장에서 열린 제90회 전국동계체육대회 1500m에서 김보름(정화여고 1학년)은 2분35초64로 5위를 차지했다.<ref>{{웹 인용|url=http://result.sports.or.kr/sk/schedule_result.jsp?classCd=2&toCd=200902&detailClassCd=04&rhCd=9&page=16&gameDate=&baseClassName=1500M&rhName=%EA%B2%B0%EC%8A%B9&kindCd=08&kindNm=%EC%97%AC%EC%9E%90%EA%B3%A0%EB%93%B1%EB%B6%80&pcntGbn=I&useGbn=|제목=정보제공 _ 대한빙상경기연맹|확인날짜=2017-04-04}}</ref> 11일 열린 3000m에서는 김보름이 6분19초03으로 동메달을 차지했다.<ref>{{웹 인용|url=http://result.sports.or.kr/sk/schedule_result.jsp?classCd=2&toCd=200902&detailClassCd=05&rhCd=9&page=16&gameDate=&baseClassName=3000M&rhName=%EA%B2%B0%EC%8A%B9&kindCd=08&kindNm=%EC%97%AC%EC%9E%90%EA%B3%A0%EB%93%B1%EB%B6%80&pcntGbn=I&useGbn=|제목=정보제공 _ 대한빙상경기연맹|확인날짜=2017-04-04}}</ref>
         2011년 11월 18일 러시아 첼랴빈스크에서 열린 2011-2012 국제빙상경기연맹 스피드스케이팅월드컵 1차 대회 3000m 디비전B에서 김보름은 4분12초38로 2위를 차지했다. 19일 열린 1500m 디비전B에서는 김보름이 2분01초39로 4위를 차지했다. 20일 열린 팀추월에서는 이주연, 노선영, 김보름이 3분05초79로 4위를 차지했다. 2011년 11월 25일 카자흐스탄 아스타나에서 열린 2차 대회 3000m 디비전A에서 김보름은 4분13초61로 20위를 차지했다. 26일 열린 1500m 디비전A에서는 김보름이 2분02초58로 20위를 차지했다.<ref name=":24" /> 27일 열린 매스스타트에서는 김보름(한국체대)이 7분26초85의 기록으로 첫 동메달을 따냈다.<ref>{{뉴스 인용|url=http://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1033550|제목=이승훈, 매스스타트 금메달|날짜=2011-11-28|뉴스=SBS NEWS|언어=ko|확인날짜=2017-03-06}}</ref> 2011년 12월 2일 네덜란드 히렌빈에서 열린 월드컵 3차 대회 5000m 디비전B에서 김보름은 7분26초10으로 12위를 차지했다. 3일 열린 1500m 디비전B에서는 김보름이 2분01초39로 5위를 차지했다.<ref name=":24" /> 4일 열린 팀추월에서는 이주연(동두천시청)-노선영(한국체대)-김보름으로 구성된 대표팀이 3분03초18의 기록으로 캐나다(3분00초01)와 러시아(3분02초38)에 이어 3위에 올랐다. 한국 스피드스케이팅이 월드컵 시리즈 팀 추월에서 메달을 딴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ref name=":17">{{웹 인용|url=http://m.yeongnam.com/jsp/view.jsp?depth1=3&depth2=4&nkey=20111206.010260719320001|제목=한국 빙속 팀추월 사상 첫 메달|성=영남일보|확인날짜=2017-03-06}}</ref> 2012년 2월 12일 노르웨이 하마르에서 끝난 월드컵 5차 대회 팀추월 경기에서 이주연(25)과 노선영(23), 김보름(18)이 출전하여 3분05초65의 기록으로 폴란드(3분05초57)에 이어 동메달을 차지했다. 3000m에 출전한 김보름은 4분15초66의 기록으로 16위에 머물렀다.<ref name=":2">{{뉴스 인용|url=http://www.icenews.co.kr/entry/%EB%B9%99%EC%86%8D-%EC%9B%94%EB%93%9C%EC%BB%B5-5%EC%B0%A8%EB%8C%80%ED%9A%8C-%ED%8C%80-%EC%B6%94%EC%9B%94-%EB%82%A8%EB%85%80-%E9%8A%80-%E9%8A%85|제목=빙속 월드컵 5차대회, 팀 추월 남녀 銀, 銅|날짜=2012-02-13|뉴스=아이스뉴스|확인날짜=2017-03-06}}</ref> 1500m 디비전A에서는 김보름이 2분00초24로 10위를 기록했다. 디비전B에서는 이주연(동두천시청)과 노선영(한체대)이 각각 1위(2분01초53)와 3위(2분01초82)를 차지했다.<ref>{{뉴스 인용|url=http://www.icenews.co.kr/entry/%EC%9D%B4%EC%8A%B9%ED%9B%88-%EB%B9%99%EC%86%8D%EC%9B%94%EB%93%9C%EC%BB%B5-5000m-13%EC%9C%84-%EA%B9%80%EB%B3%B4%EB%A6%84-%EC%97%AC%EC%9E%90%EB%B6%80-1500m-10%EC%9C%84|제목=이승훈 '빙속월드컵' 5000m 13위... 김보름 여자부 1500m 10위|날짜=2012-02-12|뉴스=아이스뉴스|확인날짜=2017-03-11}}</ref> 2012년 3월 10일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월드컵 파이널 1500m에서 김보름은 1분59초52로 12위를 차지하며 73점 22위로 시즌을 마쳤다. 11일 열린 매스스타트에서는 김보름이 8분53초69로 7위를 차지하며 110점 7위로 시즌을 마쳤다. 팀추월에서는 김보름, 이주연, 노선영이 3분03초29로 은메달을 차지하며 320점 3위로 시즌을 마쳤다.<ref name=":24" />
         2012년 11월 16일 네덜란드 히렌빈에서 열린 2012-2013 국제빙상경기연맹 스피드스케이팅월드컵 1차 대회 3000m 디비전B에서 김보름은 4분10초81로 1위를 차지했다. 17일 열린 1500m 디비전B에서는 김보름이 1분58초41로 1위를 차지했다.<ref name=":24" /> 매스스타트 부문에서는 김보름이 4위를 차지했다.<ref name=":8" /> 18일 열린 팀추월에서는 김보름, 노선영, 박도영이 3분03초13으로 5위를 차지했다.<ref name=":24" /> 2012년 11월 24일 러시아 콜롬나에서 열린 월드컵 2차 대회 매스스타트에 출전한 김보름은 8분40초77의 기록으로 금메달을 따냈다. 박도영(20-한국체대)은 8분41초26으로 5위, 노선영은 8분41초82로 10위를 차지했다. 1500m 디비전A에서는 김보름이 1분57초05로 전체 선수 20명 중 5위를 기록하며 한국 여자 장거리의 스타 탄생을 예고했다. 1500m 디비전B에서는 노선영이 2분00초74로 5위, 박도영이 2분02초34로 15위를 차지했다. 25일 열린 3000m 디비전A에서도 김보름은 4분06초13의 기록으로 7위에 오르는 등 장거리에서 꾸준히 좋은 모습을 보였다. 박도영은 4분12초31의 기록으로 16명의 출전선수 중 최하위에 머물렀다. 3000m 디비전B에서는 노선영이 4분13초51로 16위를 차지했다.<ref name=":9">{{뉴스 인용|url=http://www.icenews.co.kr/entry/%EA%B9%80%EB%B3%B4%EB%A6%84-%EC%8A%A4%ED%94%BC%EB%93%9C%EC%8A%A4%EC%BC%80%EC%9D%B4%ED%8C%85%EC%9B%94%EB%93%9C%EC%BB%B5-%EB%A7%A4%EC%8A%A4%EC%8A%A4%ED%83%80%ED%8A%B8-1%EC%9C%84|제목=김보름, 스피드스케이팅월드컵 매스스타트 1위|날짜=2012-11-26|뉴스=아이스뉴스|확인날짜=2017-03-12}}</ref> 2012년 12월 1일 카자흐스탄 아스타나에서 열린 월드컵 3차 대회 5000m 디비전A에서 김보름은 7분11초19의 기록으로 전체 12명의 선수 중 5위를 기록, 메달권 진입에 실패했다. 5000m 디비전B에서는 박도영이 7분30초18로 16위, 노선영(23, 한국체대)이 7분35초47로 19위, 임정수가 7분39초23으로 21위를 차지했다. 2일 열린 1500m 디비전A에서는 김보름이 2분00초38의 기록으로 17위를 차지했다. 1500m 디비전B에서는 노선영이 2분02초47로 9위, 박도영이 2분03초10으로 11위를 차지했다. 팀추월 경기에 출전한 김보름, 노선영, 박도영은 3분00초55의 기록으로 은메달을 획득했다.<ref name=":14">{{뉴스 인용|url=http://www.icenews.co.kr/entry/%EC%9D%B4%EC%8A%B9%ED%9B%88-%EC%9B%94%EB%93%9C%EC%BB%B5-10000m%EC%84%9C-%E9%8A%85|제목=이승훈, 월드컵 10,000m서 銅|날짜=2012-12-03|뉴스=아이스뉴스|확인날짜=2017-03-13}}</ref> 2013년 2월 9일 독일 인첼에서 열린 월드컵 7차 대회 매스스타트에서 김보름은 8분13초80만에 1위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이 대회에서 김보름은 월드컵 포인트 100점을 추가, 총점 260점으로 네덜란드의 마리스카 휘스먼(240점)을 제치고 여자 매스스타트 월드컵 랭킹 1위로 올라섰다. 함께 레이스를 펼친 박도영(8분16초82)과 노선영(8분17초64)은 각각 10위, 15위에 그쳤다. 1500m 디비전A에도 김보름은 출전했으나 1분58초43의 기록으로 10위에 머물렀다.<ref name=":10">{{웹 인용|url=http://sbssports.sbs.co.kr/news/news_content.jsp?article_id=S10002306875|제목=김보름, 빙속월드컵 매스스타트서 두 번째 金... 이승훈 부진|언어=ko|확인날짜=2017-03-13}}</ref> 10일 열린 3000m 디비전A에서는 김보름이 4분13초04로 13위에 머물렀다. 2013년 3월 1일 독일 에르푸르트에서 열린 월드컵 8차 대회 5000m 디비전A에서 김보름은 7분41초22로 11위를 차지했다. 2일 열린 1500m 디비전A에서는 김보름이 2분02초80으로 18위를 차지했다. 2013년 3월 9일 네덜란드 히렌빈에서 열린 월드컵 파이널 3000m에서 김보름은 4분08초51로 8위를 차지하며 185점 10위로 시즌을 마쳤다. 10일 열린 1500m에서는 김보름이 2분00초58로 16위를 차지하며 133점 13위로 시즌을 마쳤다.<ref name=":24" /> 매스스타트에서는 김보름이 3위로 골인했지만 앞서 치른 2차와 7차 월드컵에서 1위를 한 바 있어 총점 365점으로, 330점에 그친 마리스카 후이스만(네덜란드)을 제치고 종합우승의 쾌거를 달성했다.<ref name=":12">{{뉴스 인용|url=http://m.blog.naver.com/woorikangsan/20201685972|제목=한국 빙상 유망주 - 김보름 선수,한국, 토렌티노 동계 U대회 종합 3위…빙속 김보름 최다 메달 획득,|뉴스=네이버 블로그 {{!}} 사진과 여행하기|언어=ko|확인날짜=2017-03-13}}</ref>
         2013년 11월 8일 캐나다 캘거리에서 열린 2013-2014 국제빙상경기연맹 스피드스케이팅월드컵 1차 대회 3000m에서 김보름은 4분07초93의 기록으로 12위에 머물렀다.<ref>{{뉴스 인용|url=http://news.joins.com/article/13090996|제목=‘빙속 여제’ 이상화, 캘거리 월드컵 500m 금메달|날짜=2013-11-09|뉴스=중앙일보|언어=ko|확인날짜=2017-03-13}}</ref> 9일 열린 1500m에서는 김보름이 1분56초94 만에 결승선을 통과, 20명의 선수 중 최하위에 머물렀다.<ref>{{웹 인용|url=http://www.yonhapnews.co.kr/sports/2013/11/10/1007000000AKR20131110013951007.HTML|제목=-빙속월드컵- '여제' 이상화 500m 세계신기록(종합) {{!}} 연합뉴스|확인날짜=2017-03-13}}</ref> 10일 열린 팀추월에서는 김보름, 노선영, 양신영이 3분00초32로 5위를 차지했다. 2013년 11월 15일 미국 솔트레이크시티에서 열린 월드컵 2차 대회 3000m 디비전A에서 김보름은 4분04초62로 15위를 차지했다. 16일 열린 1500m 디비전B에서는 김보름이 1분56초12로 개인최고기록을 세우며 8위를 차지했다. 17일 열린 팀추월에서는 김보름, 노선영, 박도영이 2분58초32로 7위를 차지했다. 2013년 11월 29일 카자흐스탄 아스타나에서 열린 월드컵 2차 대회 5000m 디비전B에서 김보름은 7분09초99로 6위를 차지했다. 30일 열린 1500m 디비전B에서는 김보름이 1분58초12로 1위를 차지했다.<ref name=":24" /> 2013년 12월 9일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월드컵 4차 대회 팀추월에 김보름은 노선영(24-강원도청), 양신영(23-전라북도청)과 함께 출전해 3분02초04의 기록으로 네덜란드(2분58초19), 폴란드(3분1초18)에 이어 3위에 올랐다.<ref>{{뉴스 인용|url=http://www.jjan.kr/news/articleView.html?idxno=493417|제목=전북도청 양신영 국제빙상 월드컵 동메달 - 전북일보|언어=ko|확인날짜=2017-03-13}}</ref>
         2016년 11월 11일 중국 하얼빈에서 열린 2016-2017 국제빙상경기연맹 스피드스케이팅월드컵 1차 대회 3000m 디비전B에서 김보름은 4분12초21로 3위를 차지했다.<ref name=":24" /> 12일 열린 팀추월에서 이승훈과 김보름이 힘을 보탠 남녀 팀추월 대표팀이 동메달을 나란히 수확했다. 13일 열린 매스스타트에서는 이승훈이 남자부 금메달, 김보름이 여자부 동메달을 목에 걸며 메달 사냥의 본격적인 시동을 걸었다.<ref>{{뉴스 인용|url=http://d.kbs.co.kr/news/view.do?ncd=3380743|제목=이승훈·김보름, 매스스타트서 ‘맹활약’|뉴스=KBS 뉴스|언어=ko|확인날짜=2017-03-27}}</ref> 2016년 11월 18일 일본 나가노에서 열린 월드컵 2차 대회 3000m 디비전A에서 김보름은 4분05초91로 16명 가운데 6위에 올랐다. 자신의 최고 기록(4분04초62)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2016년 11월 11일 중국 하얼빈에서 열린 월드컵 1차 대회 디비전B에서 세운 4분12초21보다 6초30 빨랐다. 우승은 체코의 마르티나 사블리코바가 4분03초56으로 차지했다. 그 뒤는 안토이네트 데 용(네덜란드-4분04초53), 안나 유라코바(러시아-4분05초24)가 이었다. 3000m 디비전B의 박지우(의정부여고)는 4분18초88로 20명 가운데 16위에 자리했다.<ref>{{웹 인용|url=http://www.msn.com/ko-kr/news/sports/%EB%B9%99%EC%83%81-%EA%B9%80%EB%B3%B4%EB%A6%84-%EC%8A%A4%ED%94%BC%EB%93%9C%EC%8A%A4%EC%BC%80%EC%9D%B4%ED%8C%85-2%EC%B0%A8-%EC%9B%94%EB%93%9C%EC%BB%B5-%EF%A6%81-3000m-6%EC%9C%84/ar-AAkrY2E|제목=[빙상] 김보름, 스피드스케이팅 2차 월드컵 女 3000m 6위|확인날짜=2017-03-27}}</ref> 19일 열린 팀추월 결승에서는 대한민국(노선영, 김보름, 박지우)이 3분05초01로 5위를 차지했다. 20일 김보름은 박지우와 함께 23명이 출전한 매스스타트 결승에서 8분15초02의 기록으로 가장 먼저 골인하면서 금메달을 획득하였고 박지우는 8분22초85로 18위를 기록했다. 1500m 디비전B에서는 김보름이 1분59초65로 2위에 올랐고 박지우는 2분01초89로 16위를 차지했다.<ref>{{뉴스 인용|url=http://m.blog.naver.com/ufo5405/220866296406|제목=김보름 매스스타트 금메달(2016~2017 ISU 스피드스케이팅 월드컵 2차 대회)|뉴스=네이버 블로그 {{!}} 자유 평화 사랑|언어=ko|확인날짜=2017-03-27}}</ref> 2016년 12월 2일 카자흐스탄 아스타나에서 열린 월드컵 3차 대회 3000m 디비전A에서 김보름은 4분10초61로 14위를 차지했다. 3일 열린 팀추월에서는 박지우, 노선영, 김보름이 3분04초62로 6위를 차지했다.<ref name=":24" /> 5일 열린 매스스타트에서는 김보름이 8분29초51로 결승선을 통과하며 2차 대회 우승자인 캐나다의 이바니 블롱댕(8분29초28)과 일본의 다카기 나나(8분29초46)에 이어 3위를 차지했다. 이번 대회에서 랭킹 포인트 70점을 획득한 김보름은 총점 240점으로 블롱댕(랭킹포인트 280점)에 이어 월드컵 랭킹 2위를 유지했다.<ref>{{뉴스 인용|url=http://mn.kbs.co.kr/news/view.do?ncd=3388523|제목=이승훈·김보름, 3차 대회 매스스타트 동메달|뉴스=KBS 뉴스|언어=ko|확인날짜=2017-03-27}}</ref> 2016년 12월 9일 네덜란드 헤렌벤에서 벌어진 월드컵 4차 대회 팀추월에서 박지우, 노선영, 김보름은 3분06초42로 7위를 차지했다. 10일 열린 1500m 디비전A에서는 김보름이 2분00초71로 19위를 차지했다.<ref name=":24" /> 10일 열린 매스스타트에서 김보름은 8분31초73의 기록으로 이린 쇼우텐(네덜란드)을 0.09초 차로 제치고 정상에 올랐다. 이로써 김보름은 일본 나가노에서 열렸던 2차 대회에 이어 시즌 월드컵 시리즈에서 두번째 금메달을 차지하며 월드컵 랭킹 점수에서도 340점을 확보, 이바니 블롱댕(캐나다, 308점)을 제치고 선두로 올라섰다. 중국 하얼빈에서 열린 1차 대회와 카자흐스탄 아스타나에서 열린 3차 대회에서 금메달, 2차 대회에서 은메달을 차지했던 블롱댕은 8분33초59로 10위로 밀려나면서 4회 연속 메달 사냥에 실패하고 김보름에게 월드컵 랭킹 선두 자리를 내줬다. 함께 김보름과 매스스타트에 출전한 박지우(의정부여고)는 8분41초67의 기록으로 14위에 올랐다. 박지우는 3차 대회 13위에 이어 4차 대회에서도 줄곧 중위권을 유지하며 월드컵랭킹 52점으로 18위로 올라섰다.<ref>{{뉴스 인용|url=http://m.sportsq.co.kr/news/articleView.html?idxno=215576|제목=김보름 매스스타트 '동-금-동-금 행진', 이젠 당당한 평창 우승 후보|날짜=2016-12-11|언어=ko|확인날짜=2017-03-27}}</ref> 11일 열린 5000m 디비전A에서 7분17초89로 12위를 차지했다.<ref name=":24" /> 2017년 3월 12일 노르웨이 스타방에르에서 열린 월드컵 파이널 매스스타트에서 김보름은 8분45초75의 기록으로 결승선을 통과해 네덜란드의 이린 쇼우턴(8분45초69)에 단 0.06초 뒤지는 2위에 그쳤다. 3위는 이탈리아의 프란체스카 롤로브리기다(8분45초78)가 차지했다. 매스스타트 랭킹 포인트 120점을 획득한 김보름은 합계 460점으로 364점의 롤로브리기다를 여유 있게 제치고 시즌 1위 자리를 지켜냈다.<ref>{{뉴스 인용|url=http://news1.kr/articles/?2934262|제목=[빙속] ISU 월드컵 파이널 매스스타트 이승훈金-김보름銀|날짜=2017-03-13|뉴스=뉴스1|언어=ko|확인날짜=2017-03-31}}</ref>
         2017년 2월 9일 강릉스피드스케이팅경기장에서 열린 2017 국제빙상경기연맹 종목별스피드스케이팅세계선수권대회 3000m에서 4분03초85를 기록했다. 순위는 6위에 그쳤지만 2013년 11월 미국 솔트레이크시티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자신이 세운 한국기록(4분04초62)을 0.77초 앞당겼다. 우승은 3분59초05를 기록한 네덜란드의 이레인 뷔스트(31)가 차지했다. 이날 경기에서도 김보름의 뒷심이 발휘됐다. 첫 200m 구간을 20초45(9위)로 통과한 김보름은 레이스 중후반인 1800m 이후에도 랩타임을 줄곧 32초대로 유지하며 순위를 끌어올렷다. 메달 획득은 하지 못했지만 아시아 선수 중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ref>{{뉴스 인용|url=http://news.donga.com/BestClick/3/all/20170210/82801694/1|제목=매스스타트 간판 김보름, 3000m서 ‘한국신 스퍼트’|날짜=2017-02-10|뉴스=동아닷컴|언어=ko|확인날짜=2017-03-29}}</ref> 10일 열린 팀추월에서는 김보름, 노선영, 박지우가 3분02초95로 5위를 차지했다.<ref name=":24" /> 12일 열린 매스스타트에서는 김보름이 출전해 8분00초97를 기록해 60점을 획득하며 우승을 차지했다.<ref>{{뉴스 인용|url=http://www.yonhapnewstv.co.kr/MYH20170213003000038/|제목=김보름 세계선수권 매스스타트 금메달 획득|날짜=2017-03-31|뉴스=연합뉴스TV: : 대한민국 뉴스의 시작. 채널 23|언어=ko|확인날짜=2017-03-31}}</ref> 레이스 동안 5위 안팎에서 벗어나지 못해 곡선 코스마다 선두 진입을 노리던 김보름은 마지막 바퀴에서 앞에서 달리던 네덜란드 선수가 일본 선수와 충돌해 넘어진 틈을 타 역전에 성공했다. 쇼트트랙 선수 출신으로 코너워크가 장점인 김보름의 장점이 발휘된 순간이었다. 자칫하면 김보름까지 휩쓸려 넘어질 수 있던 상황에서 순간적으로 인코스 진입을 시도해 선수들을 차례대로 제쳤다. 마지막 직전코스에서 1위를 달리던 일본 다카기 나나까지 따돌리며 태극기를 드높였다. 다키기는 8분00초90의 기록으로 2 번째로 결승선을 통과했고, 3위는 8분01초36을 기록한 미국 헤더 베르그스마가 차지했다.<ref>{{뉴스 인용|url=http://www.newspost.kr/news/articleView.html?idxno=53070|제목=뉴스포스트|언어=ko|확인날짜=2017-03-31}}</ref>
         11월 11일 네덜란드 헤이렌베인 티알프 인도어 아이스링크에서 열린 2017-2018 국제빙상경기연맹 스피드스케이팅 월드컵 1차 대회 팀추월에 출전한 김보름(강원도청), 박지우(한국체대), 노선영(콜핑팀)은 3분2초66으로 5위에 올랐다. 다카기 미호, 다카기 나나, 사토 아야노로 구성된 일본 대표팀은 2분55초77의 세계신기록을 수립하며 우승을 차지했다.<ref>{{뉴스 인용|url=http://news.joins.com/article/22105384|제목=日 빙속 女추월팀, 평창 앞두고 '무서운 질주'…ISU 월드컵서 '세계新' 우승|날짜=2017-11-11|뉴스=중앙일보|언어=ko|확인날짜=2017-12-12}}</ref> 여자 매스스타트 예선에서 김보름은 넘어져 결승 진출에 실패했다.<ref>{{뉴스 인용|url=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11/12/0200000000AKR20171112002800007.HTML|제목=빙속 이승훈, 월드컵 매스스타트 금메달…대회 2관왕(종합)|성=김경윤|날짜=2017-11-12|뉴스=연합뉴스|언어=ko|확인날짜=2017-12-12}}</ref> 노르웨이에서 개최되는 2차대회에 김보름은 출전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김보름은 1차대회 1일차 매스스타트 준결승 경기 도중 다른 선수의 스키이트 날에 걸려 넘어 졌으며, 경기 후 허리에 통증을 느껴 1차대회 다른 경기 출전도 포기했었다.<ref>{{뉴스 인용|url=http://www.xn--q20b51t9le1sh.com/sub_read.html?uid=19371§ion=sc51|제목=[전남방송] 스피드 김보름 선수, 월드컵 2차대회 출전 포기|뉴스=전남방송|확인날짜=2017-12-12}}</ref> 12월 2일 캐나다 캘거리에서 열린 3차대회 여자 3,000m 디비전A(1부리그)에서 김보름은 4분06초41의 기록으로 16명의 출전 선수 가운데 14위를 차지했다. 3,000m에서는 다카기 미호(일본)가 3분57초09의 일본 신기록으로 우승했다.<ref>{{뉴스 인용|url=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12/02/0200000000AKR20171202034500007.HTML|제목=김보름, 스피드스케이팅 월드컵 3차 대회 3,000m 14위|성=이영호|날짜=2017-12-02|뉴스=연합뉴스|언어=ko|확인날짜=2017-12-12}}</ref> 4일 열린 여자부 매스스타트에 나선 김보름은 11위에 그치면서 메달을 따내지 못했다. 김보름은 경기 초반 후미 그룹에서 기회를 엿보다가 6바퀴를 남기고 속도를 끌어올렸지만 먼저 치고 나간 선두 그룹을 다라잡지 못했다. 하위권에서 막판 스퍼트를 노렸지만 이미 선두권과 격차가 너무 벌여져 결국 11위의 성적표를 받았다. 하편, 독일의 백전노장인 45세의 플라우디아 페히슈타인(독일)은 매스스타트에서 깜짝 우승을 차지했다.<ref>{{뉴스 인용|url=http://www.hankookilbo.com/v/49929a51806c4912ad5ee75e37e3b0d5|제목=이승훈ㆍ김보름, 월드컵 매스스타트에서 동반 부진|뉴스=한국일보|언어=ko|확인날짜=2017-12-12}}</ref> 12월 10일 미국 솔트레이크시티 유타 올림픽 오벌에서 열린 4차 대회 매스스타트에서 9분00초72의 기록으로 3위를 기록했다. 일치감치 선두그룹을 만들어 질주한 프란테스카 롤로브리지다(이탈리아)가 8분 53초49로 금메달, 중국의 궈단이 8분57초54로 은베달을 목에 걸었다.<ref>{{웹 인용|url=http://sports.chosun.com/news/utype.htm?id=201712110100073520005174&ServiceDate=20171210|제목='컨디션 회복'김보름 월드컵 4차 대회 매스스타트 동메달: 스포츠조선|확인날짜=2017-12-12}}</ref>
  • 김이브 . . . . 9회 일치
         ||<#5DADE2> {{{#fff '''방송 시작'''}}} || [[2001년]] [[3월 15일]] ~ [[2017년]] [[1월 14일]] [br] [[2017년]] [[1월 14일]] ~ [[2017년]] [[3월 14일]] [br] [[2017년]] [[3월 14일]] ~ [[2018년]] [[5월 15일]] [br] [[2018년]] [[5월 15일]] ~ ||
         2018년 5월 15일, 아프리카로 다시 복귀했다.
         2016년 10월 10일 조회수 4억을 돌파했다.
         2018년 5월 15일 플랫폼을 아프리카 TV로 변경하면서 2018년 5월 14일 카카오 실시간방송이 종료되었고, 2018년 5월 15일 유튜브 실시간방송이 종료되었다.[* 당초은 아프리카TV와 유튜브 동시송출을 진행하였으나 방송진행중 프로그램에 의한 CPU의 사용율이 90%를 초과 등의 문제등이 발생 하여 원활한 방송진행을 위하여 부득이하게 유튜브 송출을 중단할 수 밖에 없었다.]
          * 2015년 5월 7일에는 뷔페에서 탕수육을 먹고 33년만에 자신이 부먹파 였다는 걸 깨닫게 되어서 자신이 튀김을 싫어한 건 바삭한 것보다 부드러운 튀김옷이 좋아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 2018년 5월 15일, 염보성의 힐링캠프 행복전도사~행복을 찾아서에 게스트로 출연. [[철구(BJ)|철구]]의 권유로 휴방일인 화요일에 아프리카에 복귀를 선언하였다. 당분간은 아프리카와 유튜브 동시 송출을 예정이었으나 사정상 아프리카 단독송출을 결정하였다.
  • 김재박 . . . . 9회 일치
         || '''생년월일''' || [[1954년]] [[5월 23일]] ||
         5월 10일에는 사직 넥센-롯데전에 배정되었으나, 부산 지역의 우천으로 인해 경기 시작 1시간 12분 전에 우천 취소를 결정하였다.
          * 1998년 5월 14일 해태전, [[이대진]]이 10타자 연속 [[삼진(야구)|삼진]]을 기록하고 있을 때 11번째인 4번타자 [[김경기]]에게 [[번트]]를 지시했다고 '''알려졌는데''' 이 사건은 사실이 아니다. 당시 기록지에는 유격수 땅볼로 아웃된 것으로 나오고[* 번트였다면 유격수 땅볼아웃이 될 리가 없다.], 야구의 추억이라는 칼럼으로 유명한 [[김은식]]은 이대진을 주제로 한 칼럼에 번트를 댔다는 내용을 썼지만 후에 이대진과의 인터뷰에서 "갖다 맞추려는 스윙을 했지 번트는 아니었다" 라는 말을 들었다며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경기 영상의 부재와 '''김재박에 대한 편견 때문에 만들어진 거짓 사건.''' 이미 10타자 연속 삼진을 당했는데 11타자 연속 삼진 막는다고 얻을 것도 없다. 그런 것은 상대방을 도와주는 꼴이다. 매경기 무슨 일이 일어날 지 모르는데 신기록을 체크하며 경기하는 것도 말이 안된다.
          * 2000년 5월 19일 한화전, [[박경완]]이 5연타석 [[홈런]]을 기록할 수 있는 찬스였는데, '''5번째 타석에서 교체'''(…). 당시 팀메이트 [[조웅천]]에 의하면 사실은 [[빈볼]] 우려 때문이었다고 하는데, 상대였던 [[한화 이글스]]가 이 한 경기에서만 '''10홈런'''을 쳐맞는 추태를 보이며 처참하게 격침당했다는 걸 생각하면 확실히 빈볼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15년 후 비슷한 일이 발생하는데, 2015년 5월 26일 마산 대 두산전에서 [[에릭 테임즈]]가 3연타석 홈런, 그것도 투런 홈런만 한번 더 치면 되는 [[사이클링 홈런]]에 도전할 수 있는 상황이 나왔는데, 한 타석만 남겨둔 상황에서 7회 대수비 [[조평호]]로 교체된 것이다. [[김경문]] 감독은 차피 이긴 게임이었으니 이참에 후보선수에게도 기회를 주기 위해 교체했다고 밝혔으며, [[에릭 테임즈]]에게 2번을 물어봤는데 테임즈가 쿨하게 승낙해서 교체했다고.]
          * 2005년, [[롯데 자이언츠|모 팀]]을 겨냥하여 '5월이 되면 내려가는 팀이 나온다'는 명언을 시전. 많은 사람이 잘못 알고 있는데, 김재박의 명언은 "[[내려갈 팀은 내려간다]]"가 아니고 "5월이 되면 내려가는 팀이 나온다"이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111&aid=0000009098|기사]] 하여간 당시 2위던 모 팀은 5위로 시즌 마무리. 최근 나온 증언에 따르면 이 말은 그 [[롯데 자이언츠|모 팀]]을 대상으로 한 것도 아니라, 현 시점에서 소속팀 현대가 최하위에 쳐져 있긴 하지만 일정 간격을 최대한 유지하면서 어떤 팀이 미끄러지는 순간 치고 올라갈 수 있다는 의미의 발언이었다고 한다. 이 부분에 대해선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을 수 있지만 재평가를 하기엔 김재박 감독 본인의 인증이 너무나도 커서...
          * 2008년 5월 29일, [[이재우]]가 [[야맹증]] 때문에 항상 쓰고 나오는 [[고글]]을 지적하였다.[* 고글 착용은 규정상으로 위반이나, 어쩔 수 없거나 별 이상 없으면 그냥 넘어가는 것이 관례다.] 이 일로 흔들렸는지 그 해 [[방어율]] 1점대를 기록하고 있던 필승계투 이재우는 안타를 맞고 강판되었고, LG는 이와 같은 "감독님의 활약" 덕에 [[잠실시리즈|잠실 라이벌]]인 두산전 5연패를 그날 끊었다.(...)
  • 백정현 . . . . 9회 일치
         2010 시즌 5월에는 [[김현수(1988)|김현수]]와 빈볼 때문에 벤치클리어링 일어날 뻔했다. 2010 시즌에는 [[김효남]], [[임진우]]와 함께 1군 불펜 추격조에 속해 있는데, 불펜이 약한 팀에서는 충분히 필승조도 해낼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는 앞의 두 선수와는 달리 '''[[조원수박차]]'''의 재림을 노리는 듯한 플레이를 펼쳐주며 삼팬들에게 집중적으로 까였다.
         2012 시즌 초반 2군에서 5경기에 등판해 1.69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면서, 5월 8일 부진했던 [[정인욱]]을 대신 1군에 올라왔다. 허리통증으로 이미 2군으로 내려갔던 [[권혁]]을 대신해 좌완 계투요원으로 활약을 기대했으나, 볼질만 일삼으로 5일만에 다시 2군행. 그러나 불과 1년 전 팔꿈치 수술을 받고 복귀한지 얼마 되지 않은 터라 당시엔 [[양일환]] 2군 투수코치도 백정현의 콜업을 반대했었다고 한다.
         6월 16일 아침에 목욕탕을 갔다온 후 갑자기 허리 통증을 호소해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됐고, 대신 [[김현우(야구선수)|김현우]]가 올라왔다. [[이병훈(야구)|이병훈]] 해설위원 말로는 이날 목욕탕에서 자빠졌다고 한다. 6월 26일 1군에 복귀했다. 그러나 허리 부상의 여파로 밸런스가 무너진 모습을 보이면서 7월 17일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됐고, 7월 30일 1군에 복귀했다. 7월 31일 두산전에서 1이닝 2실점, 8월 10일 넥센전에서 0⅓이닝 2실점 등 2경기 연속 부진했다. 8월 13일 다시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됐고, [[권오준]]이 대신 올라왔다.
         5월 6일 SK 와이번스와의 경기에서 2점 지고 있는 8회 2사에 등판하여 박정권을 중견수 플라이로 잡아냈다. 팀이 2점을 더 내서 역전, 9회 심창민이 퍼펙트로 막아냈고 백정현은 '''1구'''로 승리투수가 되었다.
         5월 10일 LG 트윈스와의 경기에서 선발인 김기태의 책임주자를 아무렇지 않게 잔루로 남기는 결정적인 활약을 보이며 '''2승'''을 거둔다.
         9월 10일 대구 NC전에서 선발 땜빵으로 등판했다. 3.1이닝동안 3피안타 (1피홈런) 3사사구를 기록하며 1실점으로 막아냈고 신용운과 교체되었다. 팀은 후속 투수 신용운, 장원삼, 장필준, 심창민이 모두 무실점으로 틀어막으며 1:4로 승리.
         5월 25일 '''두산전에서 8이닝 5k 무실점'''[* 무려 2018시즌 크보를 지배했던 두산을 두산의 홈인 '''잠실'''에서 완벽투를 선보였다.]으로 본인 야구인생 최고의 투구를 펼치며 2승을 수확, 2015년 9월 이후 32개월 만의 팀 5연승을 이끌었다. 위력적인 공을 스트라이크존 구석구석 꽂아넣는 완벽한 투구내용을 보여줬다. 완봉도 가능했지만 100구를 넘기는 등 많이 던졌기에 관리차원에서 8이닝만 던지게한듯. 이날의 호투로 본인의 평균자책점을 3.86으로 끌어내렸다.
         6월 6일 기준으로 WAR 1.51을 기록하며 삼성 투수진들 중 WAR 1위를 마크하고있다. [[리살베르토 보니야]]가 5월들어 각성하며 1선발 자리를 꿰차고 있지만, 기록으로 보면 실질적인 에이스는 [[백정현]]이라고 봐도 좋을 수준.
  • 이선희 . . . . 9회 일치
         2000년 5월 31일에서 2000년 10월 31일까지 [[새천년민주당]] 문화예술행정특보위원 직위를 잠시 지낸 그녀는 [[새천년민주당]] 탈당을 한 이듬해 2001년 3월, [[유영석]], [[박진영]], [[김종서 (1965년)|김종서]] 등 젊은 세대들의 대표 아티스트들이 도운 12집 《[[My Life + Best]]》에서도 건재한 모습을 보여주며 MBC 10대가수상을 다시 한번 수상했다. <이별소곡>은 조용한 느낌을, <이 노래를 빌려서>는 슬픈 감정을, <살아가다 보면>은 삶에 격려와 희망을 주며 인기를 끌었다. 2002년에는 [[영화]] 《[[가문의 영광 (영화)|가문의 영광]]》에 1988년에 발매했었던 <나항상 그대를>이 삽입되어 후세대 사람들에게도 각인되었다.
         2016년에는 [[SBS]] "판타스틱 듀오"의 첫방송에 출연하여 5주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최고의 아이돌 가수들과 경쟁하는 모습에 "역시 이선희"라는 찬사가 쏟아졌다. 2016년 9월부터 2017년 3월까지 "The Great Concert LEESUNHEE" 전국 13개도시 23회 공연을 전회 매진으로 진행하였고 2017년 5월 미국 LA와 9월 호주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에서 해외투어 공연을 열었다.
         * [[4월 10일]] [5집 앨범] '한바탕 웃음으로' 출반 (서울음반)
         * [[5월]] ~ [[9월]] '나의 거리' TV가이드, 뮤직박스, DJ연합회 등 각종 차트 1위
         * [[5월]] 어린이 마당극 '박문수' 출연
         ** [[5월 11일]] [[KBS]] 《[[가요톱텐]]》 1위
         ** [[5월 18일]] [[KBS]] 《[[가요톱텐]]》 1위
         ** [[5월 25일]] [[KBS]] 《[[가요톱텐]]》 1위
         ** [[9월 10일]] [[KBS]] 《[[가요톱텐]]》 1위
  • 이소선 . . . . 9회 일치
         전상수는 여러 사업을 크게 벌리다 일이 어렵게 되자 가족을 데리고 부산으로 갔다. [[한국 전쟁]] 직전이었다. 이소선은 둘째를 임신한 상태에서 [[자갈치시장]]에서 지냈다. 1950년 6월 15일 둘째 [[전태삼]]을 낳았다. 집도 없이 시장에서 지내다 전상수가 포목점에 취직하여 지낼 곳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93137 자갈치시장서 둘째 낳은 소선, 고생은 계속됐다], 오마이뉴스 연재 - 이소선 평전 <어머니의 길> (15), 2014.06.12</ref> 부산에서 피란 생활을 하면서 잠시 장사가 잘 되어 비교적 평온한 삶을 산 적도 있지만 공장을 크게 늘린 일이 잘못되어 가세가 기울었다.<ref name="경향30">[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3151824225&code=210000&s_code=af077 "2009 특별기획" 이소선의 80년, 살아온 이야기 (30) - 아득한 행복했던 순간], 경향신문, 2009년 3월 15일</ref> 장마철 큰 비에 창고 지붕이 무너져 재료를 모두 못쓰게 된 것이다.<ref name="오마이뉴스18">[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94490 "말짱한 젊은 년이 뭐가 아쉬워 구걸을 다녀"], 오마이뉴스 연재 - 이소선 평전 <어머니의 길> (18), 2014.06.12</ref> 전상수는 점점 술에 취해 폭력적으로 변해갔고, 일이 풀리지 않아 빚을 지면 가재를 모두 팔아 정리하고 가족을 길바닥에 둔채 자취를 감추기 일쑤였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3101751125&code=210000&s_code=af077 "2009 특별기획" 이소선의 80년, 살아온 이야기 (27) - 지우고 싶은 남편의 기억], 경향신문, 2009년 3월 10일</ref> 1953년 셋째 [[전순옥]]이 태어났다.<ref name="경향30" />
         1970년 11월 13일 오후 1시 아들 [[전태일]]이 평화시장 앞 거리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엔 쉬게 하라"와 같은 구호를 외치며 분신하였다.<ref>[[조영래]], 《전태일 평전: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 (돌베개, 1991) 283페이지</ref><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59640 전태일 분신 순간 오갔던 긴박한 대화들], 오마이뉴스 연재 - 이소선 평전 <어머니의 길> (3), 2014년 6월 12일</ref> 이소선은 구역 예배를 돌고 있다 동네 주민이 건내준 라디오에서 나오는 뉴스를 듣고 이 사실을 알았다.<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59623 아들이 죽었는데... 버스 타고 간 이 여인], 오마이뉴스 연재 - 이소선 평전 <어머니의 길> (1), 2014년 6월 12일</ref> 전태일은 메디컬 병원에서 성모병원으로 옮겨졌고 이미 가망이 없었다. 전태일은 달려온 친구들과 어머니에게 자신이 못다한 일을 다 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전태일은 이소선에게 거듭 어떤 유혹에도 굴하지 말고 자신의 부탁을 들어달라 간청하였고 큰 소리로 대답하게 하였다. 이소선은 "내 몸이 가루가 되어도 니가 원하는 거 끝까지 할 거다!"라고 크게 대답하였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5211752042&code=210100&s_code=af077#csidxf48d2d357d2bfa4844d69c179a524c7 2009 특별기획" 이소선의 80년, 살아온 이야기 (59) - 문학 보수화, 예술적 성취 다양한 분석], 경향신문, 2009년 5월 21일</ref> 그날 오후 10시 전태일은 "배가 고프다"는 말을 남기고 사망하였다.<ref>조영래, 《전태일 평전: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 (돌베개, 1991) 289페이지</ref>
         이소선은 노동운동과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희생된 수 많은 사람들의 장례위원을 지내기도 하였다. 2003년 두산중공업의 노동자 [[배달호]]가 분신 사망하였을 때에도 장례위원을 지냈고<ref>[http://news.hankyung.com/article/2003031462508 분신 고 배달호씨 전국노동자葬 거행], 한국경제, 2003년 3월 13일</ref>,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장례에도 장례위원을 지냈다. 이소선은 [[원진레이온]] 사태 때부터 노무현과 인연을 맺었고, [[이석규 장례투쟁]]에서는 함께 장례위원을 지내기도 하였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5271756105 2009 특별기획" 이소선의 80년, 살아온 이야기 (61) - “살지, 살아서 싸우지 왜 죽어”], 경향신문, 2009년 5월 27일 </ref>
         * 1954년 5월 5일(음력) 장녀 순옥 태어남.
         * 1973년 5월 21일 노동교실 개관. 함석헌선생을 초청했다는 이유로 탄압 받음.
         * 1980년 5월 17일 확대비상계엄, 계엄당국으로부터 수배당함.
         * 1991년 4월-5월 강경대 타살과 많은 분신 운명에 대한 항의 투쟁들을 전개함.
         * 1993년 5월 전국해고자 협의회 지원대책위 상임의장.
         * 1994년 5월 1일 영화 전태일제작위원회 제작위원.
  • 이열희 (1924년) . . . . 9회 일치
         [[1977년]] [[5월]] [[대한악안면성형외과학회]] 명예회장에 추대되었고, [[대한치과의사협회]] 회원, 대한치과의학협회 경상북도 지회장, [[경북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경북대학교]] 치과대학 치의학과 교수, [[경북대학교]] 치과대 학장, 경북치과의사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시인 [[이상화 (시인)|이상화]], 독립운동가 [[이상정]], 역사학자 겸 스포츠인 [[이상백 (사학자)|이상백]]의 5촌 조카였다. 일제 강점기 당시 도지사를 지낸 [[박중양]]은 그의 처조부가 된다. 본관은 [[경주 이씨|경주]](慶州)이고 호는 백산(白山)이다. [[천주교]] 영세명은 '''토마'''이다. [[대구광역시]] 출신.
         [[1972년]]부터 4년간 [[대한구강안면성형외과학회]] 회장에 선출되었다. [[1974년]] [[3월]] [[경북대학교]] 의과대학 치의학부 교수가 되고 이후 대구시 치과의사회 회원이기도 했다. [[1974년]] [[3월]] 경북대 의대 치의학과장이 되었다. 1977년 5월 대한악안면성형외과학회 명예회장에 추대되었고, [[대한치과의사협회]] 회원, [[대한치과의학회]] 경상북도지회장 등을 역임했다.
         *** 5촌 당숙: [[이상정]](李相定, [[1896년]] [[6월 10일]] ~ [[1947년]] [[10월 27일]], 독립운동가. 아호(雅號)는 청남(晴南), 산은(汕隱). [[대한독립군]] [[3성 장군|중장]])
         *** 당숙모: [[한문이]](韓文伊, [[1897년]] [[5월 7일]] ~ [[1941년]], '''이상정'''(李相定)의 부인.
         *** 5촌 당숙: [[이상화 (시인)|이상화]](李相和, [[1901년]] [[5월 9일]] ~ [[1943년]] [[4월 25일]], 작가, [[독립운동|민족]] [[시인]]. 아호(雅號)는 상화(尙火, 想華), 무량(無量), 백아(白啞).)
         **** 6촌 매부: [[박창암]](朴蒼巖, [[1923년]] [[5월 15일]] ~ [[2003년]] [[11월 10일]], 군인, 정치가. 이상오의 사위. 아호(雅號)는 만주(滿洲), 허주(虛舟), 농부(農夫). [[군사영어학교|대한민국 군사영어학교]] 1기 출신. [[대한민국 육군|육군]] [[1성 장군|준장]] 전역.)
         * 처조부 : [[박중양]](朴重陽, [[1872년]] [[5월 3일]] ~ [[1959년]] [[4월 23일]])
         * 처조모 : 이주열(李主悅, 본관은 전주(全州), [[1870년]] [[3월 4일]] - [[1961년]] [[5월 20일]])
  • 정광용 . . . . 9회 일치
         2017년 5월 25일 박근혜 대통령이 파면되던 3월 10일 폭력 집회를 주최한 혐의로 구속되었다. [[http://news.naver.com/main/ranking/read.nhn?mid=etc&sid1=111&rankingType=popular_day&oid=001&aid=0009289767&date=20170524&type=1&rankingSeq=3&rankingSectionId=102|#]] 당시 그 폭력집회로 인해 총 4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을 당했다.
         5월 31일자로 검찰에 송치되었다. 조만간 서울구치소에 수감될 예정이라고 한다. [[http://naver.me/xoxNhky9|#]] 6월 15일자로 구속기소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5&aid=0002726379|#]] [[박근혜|님]]이 계신 곳으로 가니 오히려 영광이라고.--아이돌 스타를 영접(?)하는 아이돌 팬클럽 회장--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16&aid=0001251498|#]] [[http://cafe.daum.net/parkgunhye/U8YZ/862421|박사모에 올라온 원문]] [[독수리 켄|--??? : 역시 우리 팬클럽 회장님이셔. 날 구하러 왔구나!-- --아니야 나도 잡혔어--]]
         2018년 5월 31일, 2심에서 [[http://www.newspim.com/news/view/20180531000406|집행유예로]] [[http://v.media.daum.net/v/20180531163651927|풀려났다]].
         탄핵반대 집회 관련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박사모 집회에서 계엄령 선포요구, 폭력집회 선동, 내란 선동, 경찰관 폭행, 기자, 시민 폭행 등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로 불법행동을 많이 저질러졌다. 심지어 3월 10일 박근혜 파면이 결정된 날에는 박근혜 지지자들의 폭동이 격화되는 바람에 사망자가 3명이나 나왔다. 결국 경찰은 수사에 착수했고 박근혜 탄핵 반대 집회의 주동자 정광용은 경찰에 피의자 신분으로 출석했지만 끝까지 변명을 늘어놓으며 책임지지 않는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3&aid=0007885974|무책임한 행동을 보여주었다]]. 결국 2017년 5월 25일 같이 폭력 시위를 선동한 손상대 뉴스타운 대표와 함께 구속되었고 2017년 12월 1일 1심 재판에서 손상대와 함께 실형 2년을 선고 받았으나 2018년 5월 31일,2심 재판부는 징역 2년의 실형을 선고한 1심을 깨고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http://naver.me/GGVzj1Wi|#]]
         2017년 4월 10일 정광용은 40억원대 기부금법 위반 및 사기‧배임 혐의로 검찰에 고발당했다. 이후 친박 단체간 내홍은 더욱 격화되어 5월 13일 대선이 끝난 직후 벌어진 첫 주말집회에선 정광용 찬성파vs반대파 인원들간에 험한 욕설과 몸싸움이 빚어지는 꼴사나운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5&aid=0000991276|#]]
  • 홍진 . . . . 9회 일치
         [[1898년]] 법관양성소<ref>[[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및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의 전신</ref>를 졸업한 뒤 [[평리원]](平理院) 판사, 충주재판소 검사를 지냈다. [[1910년]] 경술국치를 맞자, 변호사가 되어 경성부와·평양 등지에서 애국지사를 변론하는 법정 투쟁을 계속했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연락책임을 맡아 활동했고, 4월에는 [[한성 임시정부]]의 조직에 참가하여 법무차장이 되었다. 그 뒤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이 되었으며, 법제위원장으로 헌법 개정, 국무위원 개선 등 제도 정비에 노력했다. 11월에는 임시의정원 충청도 선거위원장으로도 활약했다. [[1921년]] 4월 장붕(張鵬)의 뒤를 이어 상하이 대한교민단(大韓僑民團) 단장이 되었고, 5월에는 임시의정원 의장이 되었다. 그해 8월 대(對) 태평양회의외교후원회의 간사장이 되어 한국의 완전독립을 주장하고 일본에게 손해배상을 요구했으며, 의정원 의원 25명의 연서로 태평양회의의 각국 대표에게 독립청원서를 발송했다. 다음해 7월 [[국민대표회의]] 문제를 둘러싸고 임시정부에서 의견대립이 생기자 [[여운형]](呂運亨)·[[김구]](金九) 등과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하여 사태를 수습하고자 노력했다.
         :* [[12월 10일]] [[충청북도]] 재판소 검사로 발령.
         * [[1908년]] [[5월 14일]] 의병 사건의 논고를 거부하고 검사직을 의원면직.
         :* [[5월 29일]] [[대한제국]] 법부로부터 변호사 인가장을 받음.
         :* [[5월 6일]] 임시의정원 제3대 의장에 선출.
         :* [[5월 20일]] 교민단장 면직.
         * [[1924년]] 5월 임시의정원 내에서 개헌 문제로 분란이 일자 사임후 [[장쑤 성]] [[전장]]에서 은거.
         * [[1940년]] [[5월 9일]] [[한국독립당 (1940년)|한국독립당]] 창당,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
         |임기= [[1921년]] [[5월 6일]] ~ [[1922년]] [[4월 3일]]
  • Victoria II/기술 및 발명 목록/해군 . . . . 8회 일치
          * 해군 부대의 건조 시간 '''{{{#green -10일}}}'''
          * 해군 부대의 건조 시간 '''{{{#green -10일}}}'''
          * 해군 부대의 건조 시간 '''{{{#green -10일}}}'''
          * 해군 부대의 건조 시간 '''{{{#green -10일}}}'''
          * 해군 부대의 건조 시간 -10일
          * 해군 부대의 건조 시간 '''{{{#green -10일}}}'''
          * 해군 부대의 건조 시간 '''{{{#green -10일}}}'''
          * 해군 부대의 건조 시간 '''{{{#green -10일}}}'''
  • 강영식 . . . . 8회 일치
         수술과 재활에 성공적이었는지 시즌 초에는 거의 2008 시즌 때만큼 좋은 모습을 보였지만, 5월 이후로 난조를 보였다. 피홈런이 많아 피안타율이나 [[WHIP]]에 비하면 [[평균자책점]]은 높았다. 롯데 불펜진 중 [[임경완]](4개) 다음 가는 블론세이브(3개)를 기록했다. 시즌 중반에 [[허준혁(1990)|허준혁]](좌완)이 불펜에 합류하기 전까지는 좌완투수가 없는 관계로 상당히 자주 등판했다.
         5월에는 더욱 심각해져 올라오면 좌우 가리지 않고 신나게 얻어맞으며 5경기 4.2이닝 먹는 동안 자책점을 7점이나 기록, 결국 5월 9일에 1군에서 말소되었다. 문제는 또다른 좌완 계투인 [[이명우]]마저 부진하다는 것. 신인인 [[김유영]]을 올려 테스트 중이지만 신통치 않은 상태다.
         시즌 초반에는 부상으로 인해 전력을 이탈했으나 5월 중순부터 복귀를 했다. 그놈의 불안한 불펜덕분에 매일매일 롯데시네마가 개봉되자 '''억삼이형 어딨냐'''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으나 진짜 롯데시네마 회장님이 돌아오실줄은 몰랐다는 평. 평균자책점 9점대의 사나이라는 ~~애칭~~ 별명이 붙어버렸다. [[KBO 올스타전/2015년|2015 올스타전]]이 지난다음 랜디영식모드로 전환할뻔 하다가 또 X랄병이 도져서 볼질을 시전하는 중.
         9월 10일 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에서 3:4로 앞선 9회 1아웃에서 [[박한이]]와 [[박찬도]]를 유격수 땅볼과 좌익수 플라이로 아웃시켜 2013년 4월 19일 이후 2년 4개월만에 [[세이브(야구)|세이브]]를 기록하였다.
         ~~ 그걸 듣고 각성했는지 ~~ 5월 복귀 이후에는 위 3명보다는 좋은 성적을 보이고 있다.
         5월에는 1이닝 무실점도 3번이나 하였다. 그리고 평균자책점을 3점대 초반으로 낮추었다. ~~ 랜디 영식 모드 올해는 5월부터 발동 되나요?? ~~
  • 김성주(축구선수) . . . . 8회 일치
         5월 2일 [[수원 FC]]와의 리그 원정경기에서 61분에 이재안 선수와 교체되며 출전해서 76분에 김창욱선수가 보낸 패스를 받아 살짝 드리블 후 왼발로 감아찬
         5월 10일 [[경남 FC]]와의 리그 원정경기에서 93분 타라바이와 교체되며 투입되지만 공 한번 못잡아보고 경기가 종료.. 팀은 3:2 역전승을 거두고 2연승에 성공했다.
         5월 13일 [[강원 FC]]와의 리그 홈경기에서 51분 이재안 선수와 교체되며 투입되었다. 후반 종료직전에 보비와 [[주민규(축구선수)|주민규]] 사이로 패스를 보냈고 이를 [[주민규(축구선수)|주민규]]가 받은 후 드리블로 수비를 속이고 오른발 슛으로 득점에 성공하지만 팀은 결국 2:4로 패하고 만다.
         5월 16일 [[충주 험멜]]과의 리그 홈경기에서 선발로 출전 전반 34분 엄청난 개인기에 이은 크로스를 [[주민규(축구선수)|주민규]]가 헤딩으로 골을 넣으며 도움을 기록하고 48분 [[주민규(축구선수)|주민규]]의 개인기에 이은 힐패스를 받아 수비와 키퍼 사이로 패스, 이를 타라바이가 골을 넣으며 2도움을 기록하고 첫 MOM을 달성했고 팀은 4:0 완승을 거두고 리그 홈 첫승을 달성했다.
         5월 23일 [[고양 Hi FC]]와의 리그 원정경기에서 선발 출전해서 47분 [[주민규(축구선수)|주민규]]가 뺏은 공을 드리블 후 먼거리에서 감아찬 슛이 들어가며 골을 기록하였고 55분 코너킥 상황에서 상대 키퍼가 펀칭으로 처리한 공을 페널티박스 밖에서 또 감아찬 슛이 키퍼에 손에 닿지한고 들어가며 멀티골을 기록하며 2연속 MOM을 달성했고 팀은 4:2로 승리를 거두며 리그 2연승.
         5월 30일 [[수원 FC]]와의 리그 홈경기에서 경기종료 직전 김창욱이 뺏어낸 공을 받아서 [[주민규(축구선수)|주민규]]에게 쓰루패스 이를 [[주민규(축구선수)|주민규]]가 받은후 개인기로 수비를 살짝 제치며 왼발슛, 김한원 선수가 따라갔지만 결국 득점에 성공하며 도움을 기록했고 팀은 2:0으로 승리하며 리그 3연승, 리그 3위를 달성했다.
         6월 10일 [[충주 험멜]]과의 리그 원정경기에서 선발출전해서 90분을 소화했지만 공격포인트는 기록하지 못하고 팀은 보비의 동점골과 [[주민규(축구선수)|주민규]]의 후반 종료직전 극적인 역전 결승골에 힘입어 2:1 승리를 거두고 5연승에 성공했다. 7승 4무 2패, 리그 2위 유지.
  • 김재규 . . . . 8회 일치
         ||<:> '''생몰년도''' ||<:> [[1926년]][* 최후진술을 들어보면 알겠지만, 김재규 자신은 1926년생이 아닌 1924년 생이라고 밝혔다.이 부분에 대해 자세히 아는분은 추가바람] [[3월 6일]] ~ [[5.18 민주화운동|1980년 5월 24일]] (54세 총 19804일) ||
         김재규(金載圭, [[1926년]] [[3월 6일]] ~ [[1980년]] [[5월 24일]])는 [[대한민국]]의 [[군인]]·[[정치가]]이다. 호는 덕산(德山)이고, 본관은 [[김녕 김씨]]. [[경상북도]] [[구미시]] 출신. [[유신정권]] 당시 [[중앙정보부]]장을 재임했으며, [[10.26 사건]] 당시 대통령 [[박정희]]를 암살하고, 사건 다음날 새벽 [[육군본부]]에서 검거되어 이후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미수에 대하여 유죄판결을 받고 사형을 언도받아 교수형에 처해졌다. 김재규의 육성이나 말투를 들어보고 싶으면 [[http://www.youtube.com/watch?v=5YItsPrAcq8|본 육성녹음을 참고]]. 이것은 1979년 12월 8일의 보통군법회의 최후진술 녹음 중 하나다.
         > - 1980년 5월 23일 사형집행이 내려지기 전날 유서에서.
         사건에 대한 합동수사본부장이 된 [[전두환]]은 알려진 바와 같이 [[12.12 군사반란]] 때 계엄사령관인 [[정승화]]를 긴급체포하여 군을 장악하게 되었고, 김재규는 육군 고등군법회의에서 내란목적 살인 및 내란미수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1980년 5월 20일 대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박선호, 유성옥, 김태원과 같이 사형이 확정되어 기각 4일 만인 5월 24일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리고 8:6으로 내란목적 살인죄가 적용되 사형판결을 받는다. [[http://glaw.scourt.go.kr/wsjo/panre/sjo100.do?contId=2173227&q=80%EB%8F%84306&nq=&w=yegu§ion=yegu_tot&subw=&subsection=&subId=&csq=&groups=&category=&outmax=1&msort=&onlycount=&sp=&d1=&d2=&d3=&d4=&d5=&pg=0&p1=&p2=01&p3=&p4=&p5=&p6=&p7=&p8=&p9=&p10=&p11=&p12=&sysCd=&tabGbnCd=&saNo=&joNo=&lawNm=&hanjaYn=N&userSrchHistNo=&poption=&srch=&range=&daewbyn=N&smpryn=N&tabId=|80도306]][* 민문기, 양병호, 임항준, 김윤행, 정태원, 서윤홍 이렇게 6명은 그냥 살인이라고 소수의견을 냈다. 적극적인 의견을 개진하지 않은 정태원 대법관을 제외한 나머지 5명은 고초를 겪다가 사표를 써야했다. 특히 양병호 대법관은 서빙고문실로 끌려가 고문까지 받았다. 그 당시 법원행정처장 서일교가 당시 이영섭 대법원장에게 대법원장이 사표를 수리해 주셔야만 양병호가 풀려날 수 있다면서 친필 사표를 내밀었고 결국 사표를 수리할 수 밖에 없었다. 그 후 한 시간 정도만에 양병호 판사가 대법원장실에 나타났고 양병호는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면서 커피를 마셨지만 커피가 입으로 들어가지 않고 가슴과 와이셔츠를 적시는데도 그것을 모른 채, 정신나간 사람처럼 눈에 초점이 풀려있었다고...] 사형 판결을 받은 김재규는 1980년 5월 24일에 [[교수형]]으로 숨진다. 사형집행일 김재규는 아침을 먹지 않고 냉수마찰을 한 뒤 새 옷으로 갈아입고 길을 나섰는데, 이는 이승에 남기고 갈 마지막 흔적을 더럽히지 않기 위함이였다고 한다.[[http://www2.donga.com/docs/magazine/new_donga/9810/nd98100020.html|#]] 당시 교도관의 증언에 의하면 김재규는 사형집행 직전까지 목숨을 구걸하지 않고 의연한 모습을 보였으며 "남길 말이 있으면 하라"는 참관 검사의 말에 아무런 말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죽음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이때가 향년 54세. [[http://blog.naver.com/aa6753/220795466265|사형 집행 장면]] 그 비극은 김재규의 남은 가족들에게도 이어져, 부인 김영희와 동생 김항규는 무자비한 고문을 당하고 재산까지 빼앗기는 비극을 당했으며 '3족을 멸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주변인들 역시 갖은 고초에 시달려야 했다.
         인터뷰에 응한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의 과거 발언내용인 2004년 8월 11일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4&oid=036&aid=0000005863|한겨레21 기사]]와 최근 발언 내용을 비교하면 그의 김재규에 대한 평가가 변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몇 년 전까지는 김재규에 매우 비판적이었으나, 2013년 5월 17일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87948.html|한겨레 기사]]를 통해 재평가 여지가 있음을 밝혔고 2016년 12월 17일 경향신문 기사에서도 마찬가지 입장임을 알 수 있다. 경향신문 기사를 참고하면 한 교수는 지금이 '''[[박정희]]와 유신의 망령을 떨쳐내는 시기'''라고 규정하고 그렇기 때문에 김재규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는 측면이 있다고 여기는 듯하다. 과거 한 교수는 '대한민국이 박정희와 유신의 망령을 떨치고 자유민주주의를 만끽하게 될 때 김재규에 대한 평가는 분명 달라질 것이다.'라고 발언한 적이 있다. 아래 기사 참고.
         >'''2013년 5월 17일'''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87948.html|한겨레 기사]]
  • 정대철 . . . . 8회 일치
         * 어머니 : [[이태영]] (李兌榮, [[1914년]] [[8월 10일]] ~ [[1998년]] [[12월 17일]])
         |임기 = [[1998년]] [[5월 27일]] ~ [[1998년]] [[9월 16일]]
         |임기 = [[1988년]] [[5월 30일]] ~ [[1992년]] [[5월 29일]]
         |임기 = [[1992년]] [[5월 30일]] ~ [[1996년]] [[5월 29일]]
         |임기 = [[2000년]] [[5월 30일]] ~ [[2004년]] [[5월 29일]]
  • 정인숙 (1945년) . . . . 8회 일치
         [[1968년]] 12월 30일자로 발급된 출입국 회수여권을 받았다. 아기를 낳은 이후 고급 요정과 비밀요정을 그만두었고, 출입하는 곳에도 잘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타워호텔, 사보이호텔, 반도조선 아케이드 등에는 자주 나타났다. [[1969년]] 봄 [[일본]]에 다녀온 뒤 그해 5월에 [[서울특별시|서울]]시내의 고급 코로나를 매입하였다.
         출국을 한 정인숙은 무료한 이국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갑갑해 한다. 미국 일본 등지를 여행하던 정인숙은 정일권의 반대를 무릅쓰고 귀국하였다. 이때부터 그녀는 다시 남성편력을 시작한다. 국내로 들어온 정인숙은 홀로 호텔나이트클럽, 카바레 등지로 다니며 흥청망청 돈을 쓰고, 마음에 드는 남자를 만나면 잠자리도 같이 하는 등 난잡한 생활을 한다. 이 때는 전과는 달리 주로 돈 잘 쓰는 사람들을 상대했고, 재일교포와 사업가 등 유력 인사들이 그녀를 거쳐 갔다. [[1969년]] [[10월 10일]] [[국무총리]] [[정일권]]의 주선으로 그녀는 아기를 데리고 미국으로 가서 석 달 동안 있다가 되돌아 왔다. 다시 돌아온 그녀는 주변에게“곧 미국에 갈테니 차를 팔아야 겠다”는가 하면“돈 달라는 사람 많아 귀찮아 죽겠다”고 말했다. 한때는“이젠 미국 안 갈래”라고 하기도 했다. 사건 당일인 [[3월 17일]] 낮, 자동차 매매업소에 나타나 시보레 6기통짜리를 흥정을 했다.
         사건의 파장은 국회에까지 올라갔다. 겉으로는 범인을 잡아 끝난 것처럼 보였지만 이 사건의 파장은 국회에까지 이르렀다. [[1970년]] [[5월]] 열린 임시국회는 정인숙 사건과 33명의 목숨을 앗아간 [[와우 아파트 붕괴 사건]]으로 소란스러웠다. 야당 국회의원들은 대정부 발언을 통해 [[정인숙 사건]]과 관련된 의혹을 밝히라고 촉구했다.<ref name="kim99">김환표 외, 《스캔들에 갇힌 영혼들:시사인물사전 16》 (인물과사상사, 2002) 99페이지</ref> 그 첫 출발은 [[법무장관]]이던 [[이호]]가 정인숙 사건을 자진해서 보고한 국정보고에서 시작되었다.<ref name="kim99"/>
         70년 [[5월 12일]] 열린 첫 본회의에서 법무장관 이호는 정인숙 사건을 자세하고 비중 있게 취급해 보고를 했다. 국회 속기록에 남겨진 기록을 보면 정인숙 관련 기록이 4쪽인 것에 비해 와우아파트와 관련된 기록은 3쪽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호 장관이 이렇게 자세하게 정인숙 사건을 국회 본회의장에서 다룬 것은, 정인숙 사건을 자신의 발언 선에서 마무리 짓자는 일종의 호소였다.<ref name="kim99"/> 정인숙 사건을 야당이 더 이상 키우지 않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유진산]] 당시 [[신민당]] 총재는 5월 13일 대정부 질문을 통해 정인숙 사건에 대한 정부의 민감한 대처방식을 통렬하게 비<ref name="kim99"/> 꼬았다.
         유진산 당수를 시작으로 [[조윤형]], [[김상현]] 등의 야당 의원들은 정인숙 사건과 관련된 소문을 전달하고 그 의혹을 추궁했다. 조윤형 의원은 [[5월 15일]] 정일권과 정인숙의 관계에 대한 소문을 본회의장에서 공개했고, 대정부 질문을 통해 정인숙 수사에서 불거진 의혹을 밝히라고 요구했다.<ref name="kim100">김환표 외, 《스캔들에 갇힌 영혼들:시사인물사전 16》 (인물과사상사, 2002) 100페이지</ref> 조 의원은 이어 경찰이 정 여인 주변에 대해서는 수사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묻고, 경찰은 오빠 정씨가 정 여인 재산을 노리고 열등감에서 살해했다고 하지만 재산 자체가 정 여인 명의로 돼 있어 상속할 수<ref name="kim100"/> 도 없다는 의문을 제기했다.
         그렇지만 아버지를 찾기 위한 [[정성일]]의 노력은 계속되었다. [[1993년]] [[3월]] '저는 당신의 아들이었습니다'(행림, 1993)이란 책을 낸 정성일은 [[1993년]] [[5월]], [[서울가정법원]]에 [[정일권]]을 상대로 친자 확인소송을 다시 제기했으나, [[1994년]] [[1월]] 정일권이 타계함으로써 정성일의 노력은 무산되고 말았다.<ref name="hp107"/>
         * 이병주, 《그해 5월》 6 (한길사, 2006)
  • 차명진 . . . . 8회 일치
         * [[2006년]] 7월 ~ [[2008년]] 5월 : 제17대 [[한나라당]] 국회의원(부천시 소사구)
         * [[2008년]] 5월 ~ [[2012년]] 5월 : 제18대 한나라당 국회의원(부천시 소사구)
         * [[2011년 5월]] : 한나라당 비상 대책위원회 위원
         * [[2011년]] [[9월 18일]] 국민일보의 "[정치자금 겉과 속-(4) 정치 후원금은 쌈짓돈] 이발비 12만원·안경 구입비 45만원 쓰고 “의정활동용”"이라는 기사 <ref>{{뉴스 인용|제목=`[정치자금 겉과 속-(4) 정치 후원금은 쌈짓돈] 이발비 12만원·안경 구입비 45만원 쓰고 “의정활동용`|url=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5364841&code=11121100|출판사=국민일보|날짜=2011-09-18}}</ref> 에 의하면 차명진은 2010년 5월 27일 업무용 안경 10만원, 6월 23일 다시 업무용 안경 45만원, 7월 1일에도 업무용 안경 45만원, 9월 8일 진료비 21만 9100원, 11월 28일 목도리 4만5천원, 12월 8일 셔츠 3만9천원을 각각 '의정활동용'으로 신고했다.
         |임기 = [[2006년]] [[7월 27일]] ~ [[2008년]] [[5월 29일]]
         |임기 = [[2008년]] [[5월 30일]] ~ [[2012년]] [[5월 29일]]
  • 최동수 (야구인) . . . . 8회 일치
         |첫 출장 = [[KBO (야구)|KBO]] / [[1994년]] [[5월 29일]] <br /> [[숭의야구장|인천]] 대 [[태평양 돌핀스|태평양]]전
         [[2009년]] [[5월 12일]] [[SK 와이번스|SK]]전에서 그는 프로 데뷔 15년 만에 [[투수]]로 첫 등판하였다. 이와 더불어 팀 동료이자 [[포수]]인 [[김정민 (1970년)|김정민]]은 [[좌익수]]로 출전하게 되었는데, 이 상황은 역할 분담이 철저하고 [[지명타자]]제를 채택하고 있는 [[KBO 리그]]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그는 데뷔한 후 [[포수]]에서 [[내야수]]로 전향했고, 이 날 경기에 [[지명타자]]로 출장했으나 연장 12회 초에 마무리 [[투수]] [[우규민]]이 대량 실점으로 인한 부담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모창민]]의 머리 위로 날아가는 [[몸에 맞는 볼|빈볼]]성 투구를 던지고 퇴장당했다. 남아 있는 [[투수]]가 선발로 등판해야 할 [[심수창]] 외에는 없자 당시 감독이었던 [[김재박]]은 궁여지책으로 [[지명타자]]로 나선 그를 [[투수]]로 내보냈다.<ref>[http://www.siminilbo.co.kr/news/news.php?id=news&mode=view&no=60005 무박 2일 잠실 혈투 진기록 양산] 《시민일보》 2009년 5월 15일 9:25, 2009년 5월 16일 23:55 확인</ref><br>마운드에 오른 그는 상대 타자 [[박경완]]을 공 2개(1구 128 km, 2구 131km로 스피드 건에 찍힘)로 플라이 아웃 처리했는데, 당시 [[박경완]]은 경기 후 "차마 제대로 칠 수가 없었다. 그냥 가만히 서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대충 휘둘러서 아웃됐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그 와중에 외야에서 그의 등판을 지켜본 [[이진영]]은 "본래는 내가 등판하려 했다. 내가 아무래도 동수 형보다는 구속이 빠르다"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지만,<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o&ctg=news&mod=read&office_id=076&article_id=0001992073 (어젯밤 이야기) 박경완 "'투수 최동수' 공 솔직히 칠 수 없더라"] 《스포츠조선》 2009년 5월 14일 10:18, 2009년 5월 17일 0:18 확인</ref> 그의 공에 대해 "[[오승환]]인 줄 알았다. 돌직구를 던지더라" 라며 감탄하기도 했다.<ref>[http://www.donga.com/fbin/output?n=200905140203 (베이스볼 브레이크) SK-LG 대혈투…'무박 2일' 뒷담화] 《동아일보》2009년 5월 14일 8:01, 2009년 5월 17일 0:18 확인</ref>
  • 최영희 (1921년) . . . . 8회 일치
         * 1952년 05월 육군 소장 승진
         * 1954년 05월 육군 [[3성 장군|중장]] 승진
         * 1960년 05월 정치적 이해관계에 얽혀있지 않다는 이유로 [[대한민국의 육군참모총장|육군참모총장]]에 선출되었다. [[대한민국]] [[대한민국 대통령|대통령 권한대행]] 겸 [[국무총리|내각수반]]인 [[허정]](許政)은 [[최경록]]을 [[대한민국의 육군참모총장|육군참모총장]]에 채용하려 하였으나, [[장면]] [[민주당 (1955년)|민주당]] 대표최고위원과 인연이 있던 [[최경록]]은 [[허정]]의 [[대한민국의 육군참모총장|참모총장직]] 제의를 사양하였었다.
         * 1971년 05월 제8대 국회의원 당선([[경기도]] 평택 지역구)
         * 1952년 05월 금성을지무공훈장
         * 1953년 05월 미국 근무공로훈장
         * 1968년 05월 에티오피아 일등성장 명예훈장
         |임기 = [[1960년]] [[5월 23일]] ~ [[1960년]] [[8월 28일]]
  • 고성국 . . . . 7회 일치
         이후에는 [[나라정책연구회]] 정책실장 등을 지냈으며, [[1994년]]에는 서울경찰청의 민간인 사찰대상으로 거론되기도 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4101100289101001&editNo=6&printCount=1&publishDate=1994-10-11&officeId=00028&pageNo=1&printNo=2034&publishType=00010</ref> 같은 해 5월에는 자신이 편집위원으로 있던 진보적 월간지 《사회평론 길》에서 《[[월간조선]]》과 논쟁하기도 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4052600289114011&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4-05-26&officeId=00028&pageNo=14&printNo=1907&publishType=00010</ref> 1995년에는 [[조선일보]], [[중앙일보]] 등 보수 일간지의 '이승만 재평가'에 대해 "분단과 독재를 정당화하고 [[박정희]] 시대와 그 이후까지 미화하려는 시도의 시작"이라 비판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5021800289101001&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5-02-18&officeId=00028&pageNo=1&printNo=2153&publishType=00010</ref>
          1997년 5월 17일, 고성국은 추적 60분에서 하차했는데, 이는 KBS 노조 측에서 고성국을 [[김영삼]]의 아들인 [[김현철 (1959년)|김현철]]의 인맥이라고 사측에 교체를 요구했고, 사측이 이를 수용한 결과였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7052000289121003&edtNo=6&printCount=1&publishDate=1997-05-20&officeId=00028&pageNo=21&printNo=2883&publishType=00010</ref> 2012년 5월 고성국은 [[미디어오늘]]과의 통화에서 1997년 추적 60분 하차에 대해 "김현철과 (내가) 친구인 것은 사실이고, 당시에도 숨기지 않았다. KBS 노조가 저를 낙하산 인사라고 했는데 결과적으로 KBS한테 부담을 주는 것 같아서 (그만뒀다)"고 말했다.<ref name="mediatoday.co.kr">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2142</ref>
         1998년 검찰 수사발표에 대해 고성국은 2012년 5월 "(이회창 측의) 비선 참모조직원이 아니었다. 후배들이 이회창 팀에도 갔고 김대중 팀에도 갔는데 일하다 나한테 가끔 물으러 왔다"고 말했다. 고성국은 이어 "당시 언론에서 나를 총풍 사건의 책임자라고 방송한 적이 있는데 그 사건과 관련해 검찰수사를 받은 적이 없고 사건은 무혐의 판결났다"고 밝혔다.<ref name="mediatoday.co.kr"/>
         2007년 5월 3일 [[프레시안]]에 기고를 시작하면서 정치평론을 재개했다.<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10070502082715&Section=01</ref> 같은 해 말에는 《10대와 통하는 정치학》을 펴냈고, 2008년 [[1월 8일]]에는 [[대통합민주신당]] 쇄신 초선의원모임에 참가해 발제문을 발표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1928328</ref> 같은 해 [[5월 12일]]부터는 [[기독교방송|CBS]] 《시사자키》 앵커로 두번째 발탁돼, 이듬해 2월 26일까지 진행했다.<ref>http://www.cbs.co.kr/radio/pgm/board.asp?pn=read&skey=tcon&sval=%B0%ED%BC%BA%B1%B9&anum=1458&vnum=397&bgrp=4&page=8&bcd=007C055E&pgm=1383&mcd=BOARD2</ref>
         * [[2008년]] 5월 12일 ~ [[2009년]] 2월 26일 : CBS 시사자키 고성국입니다 진행
  • 권희동 . . . . 7회 일치
         2014년 초반에는 백업으로 시작하게 되었으나 [[김종호(야구선수)|김종호]]의 어깨 부상과 부진으로 5월달부터 좌익수 주전으로 출장하였다. 김종호가 돌아온 뒤에는 좌투수 선발 시 주전 출장중.
         5월 20일 [[SK 와이번스]]와의 2차전에서 좌익수로 선발출전해 ~~누가 슼나쌩아니랄까~~ 2루타 1개 포함 4타수 3안타로 맹활약했다.~~하지만 경기는 선발 [[이재학]]이 무너지면서 패했다.~~ ~~안습~~
         5월 22일 경기 전 인터뷰에서 포수 연습을 하고 있다고 발언하였다. NC의 빈약한 포수 사정상 연습시키는 것 같은데 잘 하면 올 시즌 중에 보게 될지도..?
         5월 27일 마수걸이 홈런을 때려냈다. 그리고 그 다음 타석에서도 홈런을 때려냈다. 이날 연타석 홈런 포함, 5타수 4안타 4타점 4득점으로 맹활약했다. 3루타가 없어서 [[사이클링 히트]] 못 친 것이 아쉬울 뿐.
         5월 28일 [[케일럽 클레이]]를 상대로 개인 통산 2번째 [[http://sports.news.naver.com/videoCenter/index.nhn?uCategory=kbaseball&category=kbo&id=82948|만루홈런]]을 쳤다! 희생플라이를 노렸는데, 운 좋게 넘어갔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5월 4일 2군에서 싸이클링 히트를 기록했다.
          * 상무 복무 중인 2016년 5월 4일에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하였다. [[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117&aid=0002759559|퓨처스리그 역대 22번째]]이다.
  • 김대륙 . . . . 7회 일치
         6월 10일 [[kt wiz|kt]]전에서 7회 최준석의 대주자로 출전했으나 주루사를 당해 1대 7에서 도망가는데 실패했다. [[롯데시네마(롯데 자이언츠)|그리고]]…
         9월 10일 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에서 3:4로 앞선 9회말 1아웃에서 [[박한이]]의 땅볼 타구를 멋진 수비로 잡아내 아웃시켜 팀의 승리에 공헌하였다.
         5월 15일 올해 첫 안타를 신고했다! 큼지막한 타구였는데 본인도 얼떨떨했는지 우익수 키를 넘기는 1루타행(…) 이어 폭투가 나와 첫 도루까지 성공.
         5월 18일에는 무려 데뷔 첫번째 3루타를 기록하였는데, 3루타를 친 상대투수가 '''김광현'''이다. 심지어 2스트라이크 상황에서의 2타점 3루타였다!-- 세상에… 이제 홈런만 보면 되는 건가?-- 두 번째 타석에서는 2루타까지 기록하며, 올 시즌 첫번째, 개인 통산 첫번째 멀티히트를 기록했다. 세 번째 타석에서는 풀카운트 끝에 삼진으로 물러났다.
         5월 19일 경기에도 9번 유격수로 선발출장하여, 첫 타석 3루타를 기록했으나, 나머지 두 타석은 삼진으로 물러났다.-- 3루타를 이틀 연속 치다니 또 다른 거포유격수인건가… 는 무슨.-- 이후 엔트리 말소해서 2군에 지내고 있다가 7월 10일 연이은 난조로 말소된 [[조쉬 린드블럼]]와 교대되어 1군에 다시 올라왔다
         원래 퓨처스 올스타전 참전 자격을 얻었으나, 7월 10일 1군으로 올라오면서 자격을 잃고 대신 박정현이 나가게 되었다.
  • 마재윤 . . . . 7회 일치
         2007년 3월 3일 [[김택용]]과의 MSL 결승전에서 0:3으로 완패한 이후 극심한 슬럼프 끝에 2008년 6월 2군으로 강등당했다가 다시 1군으로 복귀되기까지 했다. 2009년 이후 위너스리그 등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개인리그에서도 조금씩 과거 전성기 시절의 모습을 찾아가는 듯하였으나, 2009년말 다시 부진한 모습을 보였고, 2010년에는 프로리그의 로스터에서 말소되었다. 이 가운데 불거진 승부조작 의혹을 받았는데, 5월에는 승부조작 혐의에 연루되었음이 검찰수사를 통해 발표되었고, 결국 CJ 엔투스에서 방출되었다.
         2003년 12월 GO(현 [[CJ 엔투스]])팀에 입단하여 프로게이머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듬해 5월 [[Spris MSL 2004]]에 첫 데뷔이후 처음으로 진출하면서 최초로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 2010년 5월 영구 제명, 이후 근황 ===
         2010년 3월 프로리그 로스터에서 말소되며 사실상 팀 전력에서 배제되었던 마재윤은 4월 프로게이머 승부조작 의혹이 일면서 선수 생명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게 되었다. 많은 네티즌은 그가 유난히 전성기 이후인 2007년부터 빠른 추락을 거듭했다는 점, 또한 비슷한 시기부터 좋은 모습을 보이다가도 갑작스런 졸전을 펼치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 무엇보다 포모스 측에서 승부조작 의혹 기사에 올린 흑색 처리된 사진이 마재윤의 사진이었다는 점을 들어 그를 의심하였다. 이에 마재윤은 자신의 승부조작 혐의를 강력하게 부인했고, CJ 엔투스에서는 이를 받아들여 승부조작을 의심하지 말 것을 공식적으로 요구했다. 그러나 5월 검찰의 수사 결과 마 모 프로게이머가 원 모 프로게이머와 함께 승부조작에 연루되었음을 공식 선언했는데, 프로게이머 중 마 씨 성을 가진 프로게이머는 마재윤 하나 뿐인 것으로 밝혀져 사실상 승부조작 혐의가 있음이 확실시되었다. CJ 엔투스는 검찰 발표 하루 전 마재윤을 선수 명단에서 제명했고, 마재윤을 임의 탈퇴 처리했음을 기사를 통해 밝혔다. 마재윤은 승부조작에 연루된 다른 프로게이머들과 함께 공판이 진행 되었고, 6월 7일 케스파에서 열린 상벌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영구제명을 당하여 선수 생활에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ref>[http://esports.dailygame.co.kr/news/view.daily?idx=27900 불법 베팅 가담 프로게이머 11명 영구제명]</ref>
         ** 2008년 05월 06일 이성은 승 vs 마재윤 패 - 신한은행 프로리그 2008 전기리그 In Andromeda
         ** 2008년 05월 10일 이성은 승 vs 마재윤 패 - 아레나 MSL 32강 F조 2경기 In Tiamat 1.0
  • 박석민 . . . . 7회 일치
         프로 첫 홈런은 2004년 5월 20일 대 KIA전에서 [[고우석]]을 상대로 기록하였다. 간간히 1군에 올라올 때마다 뜬금타를 터트리면서 타격 면에서도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덕분에 [[2004년 한국시리즈]] 엔트리에도 포함되기도 했다. 2005년 4월 29일에는 1군에 복귀하자마자 선발 출장하여 당시 기아의 마무리였던 [[신용운]]을 상대로 끝내기 안타를 치기도 했다.[* 참고로 신용운은 바로 다음 날인 4월 30일에도 심정수에게 끝내기 안타를 맞음으로써 이틀 연속 패전투수가 되고 만다. 자세한 사항은 [[신용운]] 항목 참조.]
         5월 6일까지 .277의 타율을 기록했다. 타율은 다소 아쉽지만 볼넷을 많이 얻어낸 점은 고무적. 그러나 장타율이 다소 낮고 홈런이 2개 밖에 없으며 실책이 벌써 3개째이다.
         개그 본능은 여전했다. 5월 6일 LG 트윈스 전에서 상대 투수 [[한희]]의 공에 맞자 배트 들고 한희에게 다가가려고 했다. 문제는 '''박석민이 해서 전혀 진지하지 않았다는 거.''' 사실 화가 난 것은 절대 아니었고, 다소 침체된 팀의 분위기를 끌어오려는 작전이었다. 더불어 한희에게 전화로 직접 사과까지 했다. 해당 경기에서 [[벤치 클리어링]] 직전까지 제구가 안되던 한희는 직후 영점이 잡혔다. ~~역시 삼성 라이온즈의 분위기 메이커 박속닌!~~[[http://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baseball&ctg=news&mod=read&office_id=109&article_id=0002206885|박석민 인터뷰]]
         이후 5월 17, 18, 19일 넥센과의 3연전에서 3연속 결승타를 때려내며 회복의 기세를 보였다.
         5월 19일 넥센전 결승타를 치고 나서 사진이 찍혔는데…….
         5월 25일 팀(삼성 라이온즈) 통산 3600번째의 홈런을 기록했다.
         2015년 5월 21일 두산전에서는 [[이지영(야구선수)|이지영]]의 헬멧을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고 쓰고 나갔다.[* 주요 장면 영상에서 헬멧 뒤통수의 번호가 [[이지영(야구선수)|이지영]]의 등번호로 확인.] ~~독보적인 개그왕 타이틀을 [[눕동님]]에게 빼앗길 위기에 처했다~~
  • 서상일 . . . . 7회 일치
         그러나 그후 [[한민당]]을 탈당하고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48년 5월 초대 제헌국회의원 선거에서 대구 을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6월 1일]] 헌법기초위원회 위원장에 선임되었다.<ref>[http://100.nate.com/dicsearch/pentry.html?s=B&i=208337&v=44 '헌법기초위원회' - 네이트 백과사전<!-- 봇이 따온 제목 -->]{{깨진 링크|url=http://100.nate.com/dicsearch/pentry.html?s=B&i=208337&v=44 }}</ref>
         그러나 1950년 5월30일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같은 지역구에 출마했으나 낙선하고 말았다.
         * [[대한민국 제헌국회 총선|1948년 5월 10일]] : [[대한민국 제헌국회 총선 경상북도#대구부 을구 (제2선거구)|제헌 국회의원(경북 대구을)]]
         |임기 = [[1948년]] [[5월 31일]] - [[1950년]] [[5월 30일]]
         |임기 = [[1960년]] [[7월 29일]] - [[1961년]] [[5월 16일]]
  • 이상화 (시인) . . . . 7회 일치
         ** 형: [[이상정]](李相定, [[1897년]] [[6월 10일]] ~ [[1947년]] [[10월 27일]], 독립운동가. 아호(雅號)는 청남(晴南), 산은(汕隱). [[대한독립군]] [[3성 장군|중장]])
         ** 형수: [[한문이(韓文伊)]] [[1897년]] [[5월 7일]] ~ [[?]], '''이상정'''(李相定)의 부인
         *** 조카사위: [[박창암]](朴蒼巖, [[1923년]] [[5월 15일]] ~ [[2003년]] [[11월 10일]], 군인, 정치가. '''이상오'''(李相旿)의 사위. 아호(雅號)는 만주(滿洲), 허주(虛舟), 농부(農夫). [[군사영어학교|대한민국 군사영어학교]] 1기 출신. [[대한민국 육군]] [[1성 장군|준장]] 전역.)
         * 사돈 : [[최남선]](崔南善, [[1890년]] [[4월 26일]] ~ [[1957년]] [[10월 10일]])
         * 사돈 : [[박중양]](朴重陽, [[1872년]] [[5월 3일]] ~ [[1959년]] [[4월 23일]])
         * [[시인]] [[백기만]](白基萬, [[1902년]] [[5월 12일]] 출생 ~ [[1967년]] [[8월 7일]] 사망. 아호는 목우(牧牛). [[문학]][[평론가]]로도 활동하였다.)
  • 이인 . . . . 7회 일치
         '''이인'''(李仁, [[1896년]] [[10월 26일]] ~ [[1979년]] [[4월 5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며 법률가, 정치인이다. 자(字)는 자옥(子玉), 호(號)는 애산(愛山). [[일본]] 유학 후, [[1923년]] 변호사시험에 합격, 변호사를 개업하고 이후 [[일제 강점기]] 당시 [[김병로]], [[허헌]]과 함께 독립운동가 및 애국자, 사회저명인사들을 상대로 무료변호를 하여 등과 함께 '''3대 민족 인권 변호사'''로서 명망을 날렸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창씨개명을 거절하였고, 해방 후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하다가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론에 가담하였다. [[1948년]] [[5월]]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정부수립 이후 국회의원과 법무부장관을 역임하였다. [[1949년]] 7월에 [[반민특위]] 위원장에 임명되어 반민특위를 와해, 해체시켰다.<ref>{{서적 인용
         [[1917년]] 귀국했다가 [[1919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1922년]] 일본변호사시험에 합격했다. [[1923년]] 5월 [[경성부]]에서 [[변호사]]·[[변리사]] 개업을 하여 7월 첫 변론으로 [[의열단]] 사건 피고인들의 변호를 맡았다. 이후 계속 민족운동사건의 변론을 맡아 [[6·10 만세 운동]]·[[고려혁명당 사건]]·[[의열단]] 사건·[[원산총파업]]·[[통의부사건]]·[[정의부사건]]·[[신간회]]민중대회사건·[[수양동우회 사건]] 등과 각종 소작쟁의, 필화(筆禍)·설화(舌禍) 사건과 [[친일파]]나 일본관리의 암살사건 등의 변론을 맡았고, 자청하여 [[안창호]](安昌浩)의 변호를 맡기도 했다. 그가 맡은 변호만도 약 1천 5백여건에 달한다.
         * 제헌 국회 의원 당시 법제사법위원회 위원장([[1949년]] [[12월 21일]] ~ [[1950년]] [[5월 30일]])
         |임기 = [[1949년]] [[6월]]<ref>전임자인 [[장면]]이 1949년 2월에 주미국 대사로 부임하고, 1949년 3월에 종로구 을 선거구에 대한 보궐선거가 치러졌으며 이인은 1949년 6월 5일 법무부장관에서 해임되었으므로 임기가 1949년 6월경에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ref> ~ [[1950년]] [[5월 30일]]
         |임기 = [[1954년]] [[5월 31일]] ~ [[1958년]] [[5월 30일]]
         |임기 = [[1960년]] [[7월 29일]] ~ [[1961년]] [[5월 16일]]
  • 장헌식 . . . . 7회 일치
         1896년 7월 25일 게이오의숙 보통과를 졸업하고, [[게이오 의숙]] 고등과에 들어갔다. 당시 게이오의숙은 조선인 유학생이 급증함에 따라 조선인 특별 고등과를 설치하였다. 1897년 4월 25일 게이오의숙 고등과를 졸업하였다. [[1897년]] [[5월]]부터 [[12월]]까지 그는 [[일본 사법성]] 행정사무급재판소 병설 검사국 견습사무원이 되었다. 그는 [[게의오의숙]]을 졸업하고 사법 부문의 근대 문물을 배우기 위해 일본 사법성의 재판소 검사부에서 견습 사무원으로 일했고, [[1898년]] [[1월]]부터 [[10월]]까지는 일본 [[교토부]] [[가나가와현]] 요코하마항 지방재판소(神奈川縣 橫濱港地方裁判所) 검사국의 견습사무원으로 재직했다.
         [[1905년]]에는 [[관립한성외국어학교]]의 교장, [[1905년]] [[10월 18일]] 귀국과 동시에 6품으로 승륙하고, [[12월 20일]] 학부참서관 주임관 4등 7급(學部參書官敍奏任官四等七級)에 임명되고, [[12월 27일]]부터는관립외국어학교장(外國語學校長)을 겸직하였다. [[1906년]] [[10월 24일]] [[학부]] 편집국 사무임시대변(學部編輯局長事務臨時代辦), [[1907년]] [[3월]] 학부 편집국장(編輯局長)을 거쳐 [[1907년]] [[5월]]부터는 관립 [[한성사범학교]](漢城師範學校) 교장을 겸임하였다.
         [[1910년]] [[10월 2일]]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에는 [[조선총독부]]에서 그를 [[평안남도]] 초대 참여관 고등관 3등(平安南道 參與官 高等官三等)에 임명하였고, 1910년 12월 27일 종5위(從五位)로 승급한 뒤 1912년 8월 1일 일한병합기념장, 1915년 11월 10일 대례기념장(大禮記念章)을 수여받았다. 1916년 3월 31일 정5위(正五位)로 승급하였다. 이후 훈3등(勳三等), [[1917년]] [[6월 12일]]에 [[충청북도]] 장관(도지사) 고등관 2등(忠淸北道 長官 高等官二等)으로 승진한 뒤 도장관이 도지사로 관직 명칭이 바뀌자 그대로 [[충청북도지사]]로 유임되었다. [[1920년]] [[7월 31일]] 훈2등(勳二等)에 올라 서보장(瑞寳章)을 하사받고 [[1920년]] [[9월 27일]] 고등관 1등(高等官一等)에 올랐다. [[1920년]] [[6월 24일]] 청주청년회 발족에 참여하였다.
         [[1921년]] [[2월 12일]] [[조선총독부]] 사무관(朝鮮總督府 事務官)이 되고, 3월 10일 종4위(從四位)로 승급하였다. [[1921년]] [[3월 18일]] 조선총독부 총독관방실(總督官房室) 행정관이 되었다. 1921년 3월 20일 칙임사무관(勅任事務官) 민정시찰관에 임명되어 4월 7일부터 6월 19일 [[평안남도]], [[평안북도]] 일대를 민정시찰하였고, [[10월 16일]]부터 [[12월 27일]]까지는 민정시찰관으로 [[함경남도]]와 [[함경북도]]를 민정시찰을 다녀왔다. 이때 그는 관용 차량이 주어졌지만 거부하고 열차와 대중교통으로 시찰을 다녔다. [[1922년]] [[2월 15일]]에는 [[전라남도]]를 [[3월 5일]]부터는 [[전라북도]]를, [[7월]]에는 [[강원도]]를 시찰다닌 뒤 [[7월 22일]] 귀환하였다. [[9월 4일]]에는 [[황해도]] 수해현장을 시찰하고 돌아왔다.
         1926년 5월 1일 정4위(正四位)로 승급했지만 1926년 8월 14일 스스로 의원면관(依願免官)하였다. 바로 조선총독부 충주원 참의 칙임관대우(中樞院參議 勅任官待遇)에 선발되었다. 1926년 9월 13일 종3위(從三位)로 승급하고, 1928년 11월 16일 다시 대례기념장(大禮記念章)을 받았다. 1927년 4월 6일에는 한식(寒食)일을 기념하여 사회단체에 5원을 기부하였다.
         [[1930년]]대 [[청주]]에 개교 예정인 청주상업고등학교(淸州商業高等學校)의 건립과 개교에 관련하여 건립, 시설비용이 부족하여 개교가 지연되었다. 그는 학교 개교비용을 부담하고 자신의 토지를 기증하였다. 1935년 청주상고는 사립 학교로 개교가 확정되고, [[청주]]시민 대표 방인혁(龎寅赫), 민영은(閔泳殷) 등은 2월 20일 그를 찾아가 교장에 취임해줄 것을 부탁하여 승낙했다. [[1935년]] [[3월 1일]] 청주상업고등학교(淸州商業高等學校) 교장에 취임하고 그해 [[5월 7일]] 개교식과 입학식을 거행하였다. 1935년 9월 27일 경성도시계획연구회 총회에서 집행위원으로 피선되었다.
         [[1926년]]부터 [[1945년]] 광복 시점까지 19년 동안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참의를 지냈으며, [[1945년]] [[5월]] [[이왕직]] 장관으로 관직에 복귀해 있었다. 광복 당시 그는 이왕직 장관이었고, 11월 8일 구황실사무청이 설치될 때까지 계속 재직하였다.
  • 정찬성 . . . . 7회 일치
         2007년 6월 SSF로 [[종합격투기]] 무대에 데뷔, 2007년 12월 판크라스 한국대회와 2008년 5월 횡성 한우배에서 연달아 우승을 차지하며 전적을 쌓아갔다.[* 다만 현 시점에 와서 SSF에 대한 기록은 어딜 봐도 찾아볼 수가 없는 실정이다. Q채널에서 방영한 리얼격투 스트리트파이터 라는 격투기 토너먼트 프로그램에 2007년 6월경 출연한 기록이 있는데, 아마도 SSF는 그 프로그램을 통칭하는 것으로 추정할 뿐. 당시 토너먼트 규칙은 3인 1팀으로 팀전이었는데, 정찬성 선수는 계속 이기며 결승까지 올라갔으나 결승에서 합기도 선수에게 판정패당한다.][* 참고로 정찬성 선수는 해당 토너먼트에 킥복서 베이스를 가지고 참가했는데, 대회 룰 자체가 연속니킥 금지에 링도 없어서 펀치 러쉬가 이어지질 못하는 등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상당히 괴랄한 대회였다.]
         같은 해 5월에는 역시 일본의 신성인 카네하라 마사노리를 상대로 8강전을 치르지만 아깝게 분패하고 말았다. 카네하라가 상위를 차지하고 정찬성이 하위에서 서브미션을 시도하는 형태로 흘러갔다. 카네하라는 정찬성의 타격을 봉쇄하며 초반을 뚜렷한 우세를 보였다. 스탠딩에서는 정찬성의 우세였고 중반 이후에는 전체적으로 호각인 양상이 계속되었으나 결국 카네하라의 만장일치 판정승이 선언되었다.
         2012년 5월 15일 UFC on FUEL TV 3의 [[메인 이벤터]]로 비슷하게 탑 10위권의 강자인 [[더스틴 포이리에]]와 대결이 확정되었다. 이 경기는 넘버원 컨텐더 결정전이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관심을 받고 있다. 상대인 포이리에는 상당히 위험한 상대로, 89년생에 동체급 최상위권의 그래플러이며 어린 나이에도 상당한 발전을 보이고 있는 선수라 이 경기야 말로 정찬성의 검증 매치가 될 듯 하다. 호미닉의 경우는 거품이 있다는 평가가 있던 선수인지라.
         결국 5월 15일 UFC on FUEL TV 3의 메인이벤트에서 [[더스틴 포이리에]]를 상대로 멋진 다스 초크 서브미션 승을 거두었다. 3라운드까지의 심사위원들의 스코어카드를 공개했는데 전부 정찬성의 승리였다. 그 정도로 압도적이었던 상황. 1라운드는 의외로 정찬성이 발전된 레슬링 기량과 정확한 타격을 선보이며 포이리에를 밀어붙였다. 포이리에는 얼굴에 커팅까지 나긴해도 스윕을 성공하며 선전했지만 스탠딩 상태에서 정찬성과 주고받으면서 대미지를 받은 상황. 그리고 이어지는 2라운드에는 무에타이 스탠스에서 '''플라잉 니킥과 트레이드마크인 넥클린치 니킥''', 그리고 어퍼컷으로 화끈하게 난타전을 벌이다가 포이리에가 더블렉을 시도하자 몽키 플립을 시전해 탑 포지션을 점유하며 암바와 트라이앵글초크를 연속적으로 시도하며 오히려 포이리에를 빠져나오지 못하게 했다. 사실 2라운드 마지막에 걸린 트라이앵글 초크로 피니시를 할 수도 있었지만, 공이 울리며 아쉽게도 경기는 계속 진행되었다. 2라운드 이후부터 관중들의 'Zombie!' 챈트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기 시작했다. 3라운드 에서는 두 선수 모두 어느정도 지친 모습을 보였고, 포이리에가 아웃복싱으로 정찬성을 견제했지만 정타수는 정 선수가 위였다. 다소 정찬성이 많이 맞은 정도로 보인것. Fuel TV 중계진도 포이리에가 영리하게 타격을 선보였다고 평가했다. 이때 체력이 저하되는 조짐이 보인 것. 사실 경기 후 인터뷰에서 기자가 물어보니 2라운드인가 3라운드 중반에 무릎을 다쳐서 페이스를 조절해야 했다고 했다. 본인은 지친 기색이 별로 없었던 모양. 그리고 이어지는 4라운드에서 초반 상황을 살피다가 어퍼컷과 레프트 스트레이트를 포이리에의 턱에 적중시켜서 케이지로 몰아 붙인 뒤 이어지는 '''플라잉 니킥'''에 포이리에는 타격을 입었고, 반사적으로 정찬성에게 테이크다운을 시도했지만, 정찬성은 침착하게 포이리에에게 다스 초크 그립을 완성시키며 경기를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경기 후 인터뷰에서는 "I want Jose Aldo"라는 코멘트로 정식으로 챔피언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마크 호미닉전을 시작으로 2경기 연속 언더독으로 평가받으며 싸웠는데, 모두 승리로 마무리 지었으니 선수 자신에게도 감격이 클 듯. 대회가 끝나고 이 경기는 Fight of The Night과 Submission of The Night에 선정되어 보너스만 미화 10만 불을 받았다. 참고로 이 보너스는 병세로 인해 현장에 없던 데이나 화이트 대표가 직접 관계자에게 전화를 걸어 즉시 주라고 했다고 한다. --역시나 각별한 사장님의 코리안 좀비 사랑--
         2017년 5월 13일, 정찬성이 SNS에 본인과 [[최두호]]가 2017년 7월 29일(한국 기준 30일)에 열리는 UFC 214에 출전한다고 밝혔다! 최두호의 상대는 15위 바로 아래 수준의 안드레 필리. 그리고, 정찬성의 상대는 '''페더급 랭킹 3위의 [[리카르도 라마스]]'''이다. 정찬성과 라마스의 경기는 4월부터 각종 해외 종합 격투기 소식에서 추진되고 있다는 말이 나와서 어느정도 예상되었었다. [[UFC]]에서 공식으로 정찬성의 상대가 라마스라고 하지는 않았는데 각종 해외 격투기 소식에서 정찬성 vs 라마스가 성사되었다는 뉴스가 나왔고, 정찬성 본인도 라마스와 잘 싸우고 오겠다고 한 것으로 보아 둘의 경기도 확정인 듯 하다. 드디어 5월 말, UFC에서 공식적으로 '''정찬성과 라마스의 경기'''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정찬성이 이번 경기에서 이길 경우 한 경기를 더 치루고 다시 다시 타이들전에 도전할 것으로 기대되었지만...
         2018년 5월 9일, [[박재범]]이 이끄는 힙합 레이블인 [[AOMG]]의 새로운 멤버로 공개되었다.[* 물론 뮤직 아티스트가 아니라 새로운 사업인 스포츠 관련으로 영입되었다.]
  • 헌경왕후 . . . . 7회 일치
         [[1762년]](영조 38년) [[5월 22일]] [[나경언]]이란 자가 사도세자의 10가지 비행을 고변하자, 영조는 친히 국문을 하였다. 나경언은 액정별감 나상언의 형으로 사람됨이 불량하고 남을 잘 속였다. 가산이 탕진되어 자립하지 못하게 되자 이에 세자를 제거할 계책을 내어 형조에 글을 올렸다.<ref>{{웹 인용|url=http://sillok.history.go.kr/viewer/viewtype1.jsp?id=kua_13805022_002&grp=&aid=&sid=247168&pos=0|제목=영조실록 99권 38년(1762년 임오 / 청 건륭(乾隆) 27년) 5월 22일(을묘) 2번째 기사|확인날짜= |저자= 영조실록|날짜 =|출판사=조선왕조실록|원본일자 = 1762-5-22|인용=}}</ref>
         [[1762년]](영조 38년) [[7월 4일]](윤[[5월 13일]]) 부왕 영조는 사도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뒤주]]에 가두는 참혹한 형벌을 내렸다.<ref>{{웹 인용|url=http://sillok.history.go.kr/viewer/viewtype1.jsp?id=kua_13805113_002&grp=&aid=&sid=247168&pos=5|제목=영조실록 99권 38년(1762년 임오 / 청 건륭(乾隆) 27년) 윤5월 13일(을묘) 2번째 기사|확인날짜= |저자= 영조실록|날짜 =|출판사=조선왕조실록|원본일자 = 1762-5-13|인용=}}</ref>
         [[1762년]](영조 38년) [[7월 12일]](윤[[5월 21일]])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세자는 뒤주에서 나오지 못하고 폭염 속에서 사경을 헤매었고 결국 뒤주에 갇힌 지 8일 만에 아사(餓死)하였다. 영조가 세자에게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리면서, 홍씨에게는 '혜빈(惠嬪)'의 호를 내렸다.<ref>{{웹 인용|url=http://sillok.history.go.kr/viewer/viewtype1.jsp?id=kua_13805121_002&grp=&aid=&sid=0&pos=0|제목=영조실록 99권 38년(1762년 임오 / 청 건륭(乾隆) 27년) 윤5월 21일(을묘) 2번째 기사|확인날짜= |저자= 영조실록|날짜 =|출판사=조선왕조실록|원본일자=1762-5-21|인용=}}</ref>
         *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id=kua_138051&tid=&pos=0&mTree=0&inResult=0&clsName=&indextype=1&searchType=a&keyword=&keyword2=&setlist_K=&setlist_W=&detail=0&opH=0&opAll=0&opP=0&opA=0&opB=0&opC=0&opQ=0&chkID=0&qH=&qAll=&qP=&qA=&qB=&qC=&qQ=&idS=&idE=&tabid=k 조선왕조실록 - 1762년 윤 5월]
  • 현아 . . . . 7회 일치
         |설명 = 2017년 5월 12일 팬사인회에서 현아.
         이후 2009년 [[큐브 엔터테인먼트]]로 소속사를 옮겨 [[포미닛]]의 멤버로 합류해 다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후 2010년 1월에는 첫 솔로 싱글 〈[[Change (현아)|Change]]〉를 발매했고, 골반춤이라는 안무를 유행시키며 성공적인 솔로 데뷔를 했다. 이어 2011년 7월에는 첫 번째 EP 음반 《[[Bubble Pop!]]》을 발매했고, 동명의 타이틀곡인 〈Bubble Pop!〉은 차트에서 상위권을 유지했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에는 [[장현승]]과 유닛 그룹 [[트러블 메이커 (음악 그룹)|트러블 메이커]]를 결성해 2014년까지 활동하였다. 2012년 10월 두 번째 EP 음반 《[[MELTING]]》을 발매해 타이틀곡 〈Ice Cream〉으로 활동했고, 2014년 7월 세 번째 EP 음반 《[[A Talk]]》를 발매해 타이틀곡 〈빨개요〉로 활동했다. 2015년 8월 네 번째 EP 음반 《[[A+]]》을 발매했다. 2016년 그룹 [[포미닛]] 해체 후 8월 1일 다섯 번째 EP 음반 《[[A`wesome]]》을 발매했다. 2017년 5월 [[펜타곤 (음악 그룹)|펜타곤]] 멤버 후이, 이던과 함께 [[트리플 H (음악 그룹)|트리플 H]]로 활동 하였다. 8월 29일 여섯 번째 EP 음반 《[[Following]]》을 발매했다. 12월 4일 두 번째 싱글 앨범 《[[Lip & Hip]]》을 발매했다.
         이후 [[현아]]는 [[JYP 엔터테인먼트]] 공개 오디션을 통해 [[원더걸스]]의 두 번째 멤버로 합류했고 그룹에서 랩퍼를 맡았다. 2007년 2월 [[원더걸스]]의 데뷔 싱글 〈[[The Wonder Begins]]〉를 발매했고, 타이틀 곡은 〈Irony〉였다. 파워풀한 랩과 춤으로 "야생마"라는 별명도 얻었다.<ref name="as">{{뉴스 인용|저자=남안우 기자|제목=‘원더걸스’ 김현아, 건강상의 이유로 팀 탈퇴|url=http://www.mydaily.co.kr/news/read.html?newsid=200707301751501137&ext=na|출판사=마이데일리|날짜=2007-07-30|확인날짜=2008-12-31}}</ref> 2007년 5월 24일에는 [[안소희|소희]], [[브라이언]]과 함께 《[[쇼! 음악중심]]》 MC로 발탁되었다.<ref>{{뉴스 인용|제목=‘원더걸스’소희·현아 ‘쇼!음악중심’ 새MC|url=http://sports.khan.co.kr/news/sk_index.html?cat=view&art_id=200705242109433&sec_id=540101&pt=nv|출판사=스포츠경향|저자=조상인|날짜=2007-05-24|확인날짜=2014-06-29}}</ref> 하지만 MC에서 하차하고 나서 7월 [[원더걸스]]의 광고에도 참여하지 않는 등 탈퇴설이 돌았다. 이에 대해 소속사측은 "멤버 교체에 대해 논의한 것은 사실이다. 건강상의 이유로 문제가 있다"며 요양이라고 말했다.<ref name="세계일보">{{뉴스 인용|제목=원더걸스 멤버교체 위기 -­ 현아 이탈하나|url=http://www.segye.com/content/html/2007/07/31/20070731002528.html|출판사=세계일보|저자=이혜린|날짜=2007-07-31|확인날짜=2014-06-29}}</ref> 이후 건강상의 이유로 원더걸스에서 탈퇴한다고 공식 발표했다.<ref>{{뉴스 인용|제목=원더걸스 현아, 건강상 이유로 팀 탈퇴|url=http://star.mt.co.kr/view/stview.php?no=2007073016565270766&type=1&outlink=1l|출판사=머니투데이|저자=김원겸|날짜=2007-07-30|확인날짜=2014-06-29}}</ref> 실제로 [[현아]]는 [[만성장염]]을 앓고 있었고 세 번이나 탈진으로 쓰러지는 등 부모님의 반발을 샀다.<ref name="세계일보"/>
         탈퇴한 후 2008년 5월 [[현아]]는 비보이 페스티벌인 싸이언 비보이 챔피언십 2008 광고 홍보 모델로 등장해 컴백설이 떠돌기도 했지만, [[JYP]] 측은 사실 무근이라고 말했다.<ref>{{뉴스 인용|제목=JYP, 김[[현아]] [[원더걸스]] 복귀와 타이틀곡 '봉봉' 사실무근|url=http://cnbnews.com/category/read.html?bcode=39378|출판사=씨앤비뉴스|저자=김성호 기자|날짜=2008-05-21|확인날짜=2010-11-25}}</ref> 2008년 3월, 현아는 [[한국예술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같은 해 12월 [[큐브 엔터테인먼트]]로 소속사를 옮겨 컴백 준비와 함께 병원 치료를 진행하고 있다고 발표했다.<ref>{{뉴스 인용|저자=길혜성 기자|제목=김현아솔로데뷔, "병원치료하며 컴백위해 맹연습중" |url=http://www.artsnews.co.kr/news/9632|출판사=아츠뉴스|날짜=2008-12-02|확인날짜=2010-11-25}}</ref> 2009년 2월에는 의류브랜드 [[TBJ]] 화보를 통해 원더걸스 활동 이후 처음으로 연예계에 모습을 드러냈다.<ref>{{뉴스 인용|제목=원더걸스 前멤버 김현아, 화보 통해 '깜짝 컴백'|url=http://autotimes.hankyung.com/article_view.php?id=42452|출판사=오토 타임즈|저자=연예취재팀|날짜=2009-02-13|확인날짜=2010-11-25}}</ref> 2009년 3월 30일에는 [[이기광|AJ]]의 데뷔 앨범 《[[FIRST EPISODE A NEW HERO]]》의 선공개곡 〈2009〉에 피처링으로 참여했고, 타이틀곡 〈댄싱슈즈〉 뮤직비디오에도 출연했다.<ref>{{뉴스 인용|제목=원걸 前 멤버 현아, AJ 신곡에서 ‘원더걸스’ 외친 이유 뭘까?|url=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0903310906191002|출판사=뉴스엔|저자=김형우|날짜=2009-03-31|확인날짜=2014-06-29}}</ref><ref>{{뉴스 인용|저자=이수인 기자|제목=원더걸스 전 멤버 '김현아', AJ 뮤직비디오 출연으로 활동재개|url=http://mhj21.com/sub_read.html?uid=11141§ion=section3|출판사=문화저널21|날짜=2009-03-25|확인날짜=2010-11-25}}</ref> 한편, 2008년 12월부터 걸 그룹으로 컴백한다고 밝혔으나, 멤버 수와 그룹명 등 정확한 것은 알려지지 않았다.<ref>{{뉴스 인용|제목=원더걸스 전 멤버 현아 화려한 컴백 … 2009년 새롭게 변신|url=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08121867597|출판사=한국경제|날짜=2008-12-19|확인날짜=2014-06-29}}</ref> 나중에 정확한 정보가 알려질때까지 현아 그룹이라고 불렸다.<ref>{{뉴스 인용|제목=퍼신인 여자 빅뱅-현아 그룹 맞대결 기대만발|url=http://www.newshankuk.com/news/content.asp?news_idx=2009032518550855843|출판사=뉴스 한국|날짜=2009-03-25|확인날짜=2014-06-29}}</ref> 이후 2009년 5월 14일 5인조 걸 그룹 [[포미닛]]으로 컴백한다고 발표했다.<ref>{{뉴스 인용|제목=‘원더걸스’ 前 멤버 김현아, ‘포미닛’으로 컴백 초읽기|url=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ent&arcid=0921288145&cp=nv|출판사=쿠키뉴스|날짜=2009-05-14|확인날짜=2010-11-25}}</ref> 2009년 6월 15일 포미닛의 데뷔 싱글 〈[[Hot Issue]]〉가 발매되었다.<ref>{{뉴스 인용|제목=김현아 그룹 ‘포미닛’, 15일 데뷔곡 ‘핫이슈’ 선공개|저자=온라인 뉴스팀|url=http://breaknews.com/sub_read.html?uid=103665§ion=sc4|출판사=브레이크 뉴스|날짜=2009-06-09|확인날짜=2010-11-25}}</ref> 포미닛은 2009년 6월 《[[엠 카운트다운]]》을 통해 데뷔 무대를 치뤄 큰 호응을 얻었다.<ref>{{뉴스 인용|제목=포미닛, 18일 성공적 데뷔 무대...김현아 공연 후 눈물|저자=박미애 기자|url=http://spn.edaily.co.kr/entertain/newsRead.asp?sub_cd=EA24&newsid=01508806589723032&DirCode=0010204|출판사=이데일리 SPN|날짜=2009-06-18|확인날짜=2010-11-25}}</ref> 포미닛은 날마다 말그대로 핫이슈였는데, 〈Hot Issue〉는 공개당일 각종 실시간 음원차트 1위를 휩쓸었으며,<ref>{{뉴스 인용|제목=포미닛 ‘핫이슈’ 데뷔 당일 음원차트 1위 기염 ‘핫이슈됐다'|저자=김형우 기자|url=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0906160952181002|출판사=뉴스엔|날짜=2009-06-16|확인날짜=2010-11-25}}</ref> 데뷔 일주일만에 광고 2건을 체결하는 파워를 보였다.<ref>{{뉴스 인용|제목=포미닛, 데뷔 1주 만에 의류-통신 광고모델|저자=박재덕 기자|url=http://joynews.inews24.com/php/news_view.php?g_menu=700100&g_serial=424598|출판사=조이뉴스24|날짜=2009-06-25|확인날짜=2010-11-25}}</ref> 또한 현아의 무대 의상이였던 일명 '구멍난 스타킹'은 큰 화제가 되기도 했었고, 방송에서 원더걸스의 "Tell Me"를 재연해 주목을 받았다.<ref>{{뉴스 인용|제목="지금은 레깅스 전성시대"…타이즈가 창조한 섹시열풍|저자=송은주 기자|url=http://www.sportsseoul.com/news2/life/style/2009/0624/20090624101051100000000_7135486611.html|출판사=스포츠서울닷컴|날짜=2009-06-24|확인날짜=2010-11-25}}</ref><ref>{{뉴스 인용|제목=김현아, 2년만에 '텔미' 완벽 재연 '팬들 열광' |저자=박정민 기자|url=http://sstv.freechal.com/index.html?page=news/flypage&od=1&cid=1&nid=55619|출판사=SSTV|날짜=2009-07-03|확인날짜=2010-11-26}}</ref> 이후 포미닛의 첫 EP 앨범 《[[For Muzik]]》을 발매해 타이틀 곡 〈[[Muzik]]〉은 공개하자마자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ref>{{뉴스 인용|제목=포미닛, '뮤직뱅크' 시작으로 'Muzik' 활동 본격 시동 |저자=박미라 기자|url=http://web.reviewstar.net/news/articleView.html?idxno=194889|출판사=리뷰스타|날짜=2009-09-04|확인날짜=2010-11-26}}</ref> 그리고 곧 인기에 힘입어 여러 쟁쟁한 선배 가수들을 제치고 지상파 《[[인기가요]]》에서 첫 1위를 했다.<ref>{{뉴스 인용|제목=포미닛 '인기가요' 첫 뮤티즌 송 수상…끝내 눈물 |저자=박건욱 기자|url=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09092716115557586|출판사=아시아경제|날짜=2009-09-27|확인날짜=2010-11-26}}</ref>
         〈Muzik〉 활동이 끝나자 현아의 솔로 활동이 두드러졌는데, 2009년 10월부터 2010년 6월까지 [[KBS 2TV]] 예능 프로그램 《[[청춘불패]]》 1기 멤버로 활동 했으며,<ref>{{뉴스 인용|저자=김형우 기자|제목=‘청춘불패’ 걸그룹 “새로운 모습 보여주겠다|url=http://sportsworldi.segye.com/Articles/EntCulture/Article.asp?aid=20091009004439&subctg1=05&subctg2=00|출판사=스포츠월드|날짜=2009-10-10}}</ref> 청춘불패 출연으로 징징현아, 막내 PD 등 별명을 얻으며 한층 인기가 높아졌다. 청춘불패 외에도 많은 예능에 출연하며 얼굴을 알렸다. 또한 현아는 삼성의 프로젝트 그룹 [[4Tomorrow]]의 한 맴버로 참여해 디지털 싱글 〈두근두근 Tomorrow〉를 발표하기도 했었다.<ref>{{뉴스 인용|저자=박정환 기자|제목=가인-유이-김현아-한승연, ‘4Tomorrow’ 결성-싱글 발표|url= http://www.gooddaysports.co.kr/news/?cset=star&bset=view&tot_code=47&code=9274|출판사=굿데이스포츠|날짜=2009-10-11|확인날짜=2010-11-26}}</ref> 현아는 피처링 활동도 활발히 했는데, [[나비 (1986년)|나비]]의 디지털 싱글 〈눈물도 아까워〉 피처링으로 참여했고,<ref>{{뉴스 인용|출판사=세계일보|저자=추영준 기자|제목=나비의 '눈물도 아까워'에 포미닛 김현아가 피처링|url=http://www.segye.com/Articles/SPN/ENTERTAINMENTS/Article.asp?aid=20090813002102&subctg1=&subctg2|날짜=2009-08-13|확인날짜=2010-11-26}}</ref> 비슷한 시기, [[용감한 형제]]의 첫 정규 앨범 《[[The Classic]]》의 수록곡인 〈Bittersweet〉에 피처링으로 참여했다.<ref>{{뉴스 인용|출판사=뉴스엔|저자= 박준형 기자|제목=손담비-김현아, 용감한형제 가수데뷔 돕는다|url=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0908041104501001 |날짜=2009-08-04|확인날짜=2010-11-26}}</ref> 현아는 2010년 1월 디지털 싱글 형식의 첫 솔로 앨범 〈[[Change (현아의 노래)|Change]]〉를 발매했다.<ref name="cha">{{뉴스 인용|출판사=굿데이스포츠 연예|저자= 디지털뉴스팀 박정환 기자|제목=포미닛 ‘김현아’ 솔로 앨범 ‘CHANGE’ 음원 및 티저 공개 |url=http://www.gooddaysports.co.kr/news/?cset=star&bset=view&tot_code=47&code=12375|날짜=2010-01-04|확인날짜=2010-11-26}}</ref> 〈Change〉에는 [[비스트 (음악 그룹)|비스트]]의 [[용준형]]이 피처링으로 참여했고,<ref name="cha"/> 무대에서 주로 퍼포먼스 위주의 공연을 펼쳐 나이보다 성숙한 이미지를 뽐냈다.<ref name="cha"/> 또한 노래의 안무 중 일명 '골반춤'은 유행을 시켜 많은 UCC 동영상들이 올라왔고, 연예인들이 따라하기도 했다.<ref>{{뉴스 인용|출판사=메디컬투데이|저자= 남연희|제목=김현아 '골반춤' 올해 첫 유행춤 등극! "한번 따라해볼까?"|url=http://www.mdtoday.co.kr/mdtoday/index.html?no=113319|날짜=2010-01-14|확인날짜=2010-11-26}}</ref> 현아의 솔로 활동이 끝나자 포미닛은 본격적인 해외진출을 시작했고, 대만에서 발매한 앨범 《4Minute for Muzik》은 골드 인증을 받았다.<ref name="4mir">{{뉴스 인용|출판사=서울경제|저자= 이민지 인턴 기자|제목=비스트-포미닛 '인기 돌풍' 아시아 휩쓴다|url=http://economy.hankooki.com/lpage/entv/201005/e2010052411061594220.htm|날짜=2010-05-24|확인날짜=2010-11-26}}</ref> 이 외에 홍콩, 일본, 필리핀 등 아시아 전역에서 인기를 얻는다.<ref name="4mir"/> 2010년 5월 19일 포미닛은 한국으로 돌아와 두 번째 EP 앨범 《[[Hit Your Heart]]》를 발매하고 컴백했고, 타이틀곡 〈HUH〉로 [[엠 카운트다운]] 차트 1위를 차지했다.<ref>{{뉴스 인용|저자=길혜성 기자|제목=포미닛, 신곡 'HUH'로 가요프로 첫 1위|url=http://star.mt.co.kr/view/stview.php?no=2010061723015739806&type=1&outlink=1|출판사=머니투데이|날짜=2010-06-17}}</ref> 이후 포미닛은 2010년 12월 15일 일본에서 첫 정규 앨범 ''[[DIAMOND]]''를 발매했고, 같은 해 11월, 2011학년도 [[건국대학교]] 예술학부 수시모집에 연예특기자 전형으로 합격했다.<ref>{{뉴스 인용|제목=포미닛 김현아-서우, 건대 예술학부 합격! 선배는 샤이니 민호-유아인|url=http://thestar.chosun.com/site/data/html_dir/2010/11/03/2010110300885.html|출판사=조선일보|날짜=2010-11-03}}</ref>
         2017년 5월 [[펜타곤 (음악 그룹)|펜타곤]] 멤버 후이, 이던과 함께 [[트리플 H (음악 그룹)|트리플 H]]로 활동 하였다. 8월 29일 여섯 번째 EP 음반 《[[Following]]》을 발매했다. 12월 4일 두 번째 싱글 앨범 《[[Lip & Hip]]》을 발매했다.
  • 현정건 . . . . 7회 일치
         [[1925년]] 5월 9일에는 상하이에 있던 [[조소앙|조소앙(趙素昻)]]ㆍ여운형ㆍ윤자영ㆍ김상덕(金尙德)ㆍ최창식(崔昌植)ㆍ김규면(金圭冕)ㆍ손두환(孫斗煥) 등 약 30명의 조선인 동지와 함께 서문 밖 체육장에서 배일(排日) 중국인 단체의 집합에 참가하였고 이곳에서 "중국과 한국이 합동하여 일본에 맞서야 한다"는 취지의 『상하이주간(上海週刊)』5월 9일자 특별호에 실린 사설을 인쇄하여 배포하였다.<ref>이는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에 의해 7월 1일에 일본 외무성의 외무차관에 보고되었다. 국회도서관(國會圖書館) 편찬 『한국민족운동사료(韓國民族運動史料)』(중국편), 1976년, 567~568쪽.</ref> 9월 8일에는 상하이교민단의 의사원(議事員)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26년]] 10월 10일에 중국사정연구회(中國事情硏究會)를 조직하여 집행위원이 되었으며, 11월에 상하이에서 의열단 창립 9주년을 맞아 재중 조선인들에게 격문을 발표하며 성대한 기념식을 가졌다. [[1927년]] 4월 10일 홍진(洪鎭)ㆍ홍남규(洪南杓) 두 사람의 명의로 발표된 전민족적독립당결성선언문(全民族的獨立黨結成宣言文)에 따라 11일에 삼일당에서 약 40명이 모여 한국독립당관내촉성회연합회(韓國獨立黨關內促成會聯合會) 창립총회를 열고,
         민족독립운동의 구심점을 하나로 집결시키려 애썼으나 [[1928년]] 봄에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 패륵로(貝勒路) 항경리(恒慶里)에서 상하이 주재 일본 총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조선으로 압송, 11월 9일에 신의주지방법원에서 변동화(邊東華)ㆍ황의춘(黃義春) 등과 함께 공판이 열렸다. 이때 변호를 맡은 것은 최창조(崔昌朝)ㆍ이희적(李熙迪)ㆍ탁창하(卓昌河) 등 신의주 변호사 세 명과 손홍팔(孫洪八)ㆍ현석건(玄奭健)<ref group="설명">현정건의 친형이다.</ref> 등 진주 변호사 두 사람이었다. 현정건은 자신은 회합에 참여한 적도 없고 관련도 없다고 완강히 부인했으나, 12월 12일에 신의주 지방법원은 [[치안유지법]] 제령(制令) 제7호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3년을 언도하였다. 이에 불복하였으나 [[1929년]] 1월 19일에 평양으로 압송, 6월 10일에 열린 민사 제1호 법정 복심에서 원심의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1932년]] 6월 10일에 만기출옥하였으나, 옥살이의 후유증으로 얻은 [[복막염]]으로 12월 30일 의전병원에서 향년 45세로 사망하였다.
         「동아일보」 [[1933년]] 1월 1일 기사에는 1월 3일 오후 1시에 현정건의 발인이 이루어질 것이고 영결식이 가회동 177번지의 자택에서, 묘소는 동소문 밖의 미아리에 마련되었다고 적고 있다. 현정건의 부인 윤덕경(尹德卿)은 남편이 죽은 뒤 이레, 달포 동안 식음을 전폐하다가 조금 밝은 모습을 보이는 듯 싶더니, 끝내 2월 10일에 "(남편이 없이) 아무래도 살 수가 없다", "죽은 몸이라도 형님(현정건)과 한 자리에서 썩고 싶으니 (남편 옆에) 같이 묻어달라"는 요지의 유서를 시동생 현진건에게 남기고 현정건의 영전 앞에서 음독자살하였다.<ref>「玄鼎健氏未亡人 尹德卿女史殉從」 『중앙일보』 1933년 2월 12일자. 「結緣卄年에 同居는 半世」 『동아일보』 1933년 2월 12일자. 유서의 전문도 함께 실려 있다.</ref> 남편이 죽은지 41일만의 일이었다. 다른 자식은 없었다.
  • 홍대광 . . . . 7회 일치
         * 《M GIGS DAY》 (여의도 M PUB, 2013년 5월 12일)
         * 《김광석 다시 부르기 - 춘천》 (춘천문화예술회관, 2014년 4월 10일)
         * 《뷰티풀 민트 라이프 2015》 (올림픽공원, 2015년 5월 2일)
         * 《2015 산책》 (부산롯데호텔 크리스탈볼룸, 2015년 10월 10일)
         * 《2016 춘천 밴드 페스티벌》 (송암레포츠타운, 2016년 5월 14일)
         * 《2016 그린 플러그드 서울》 (난지한강공원, 2016년 5월 22일)
         * 《2017 서울재즈페스티벌》 (서울 잠실 올림픽공원, 2017년 5월 28일)
  • 김정혁 . . . . 6회 일치
         삼성에 [[육성선수|신고선수]]로 입단 후 2군에서 대타나 대수비로 출장하다가 5월부터 선발로 출장하기 시작했는데… 무려 '''4할의 타율'''을 기록하는 등, 절정의 타격감을 과시하고 있다. 게다가 무척이나 성실해 자정까지 연습할 정도의 노력파라 다른 2군 선수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두 번째 출장 경기인 4월 28일 LG전에서는 [[임지섭]]을 상대로 안타를 기록했다. 만 서른살에 나온 프로 첫 안타. 이후로는 [[구자욱]]이 다시 주전 1루수로 복귀하면서 대타나 대수비로 나오다가 [[채태인]]과 [[김태완(1981)|김태완]]의 복귀가 다가온 5월 11일에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됐다.
         개막전 엔트리에 들지 못하면서 2군에서 시즌을 시작했고, 4월 11일 1군에서 빠진 [[정인욱]]을 대신해 12일 1군에 등록됐다. 4월 22일 [[정인욱]]이 1군에 올라오자 1군에서 제외됐다. 5월 28일 [[김현우(야구선수)|김현우]], [[최선호(야구선수)|최선호]]와 함께 1군에 올라왔다.
         그러나 조동찬이 ~~유리몸답게~~ 2일 만에 부상으로 빠지며 다시 주전 자리를 차지했지만 [[아롬 발디리스]]와 [[구자욱]]이 차례대로 복귀하면서 백업으로 밀려났다. 7월 22일 선발로 내정된 [[아놀드 레온]]이 복귀하면서 대신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됐다. 8월 19일 전날 얼굴에 공을 맞아 시즌 아웃된 [[최재원(야구선수)|최재원]]을 대신해 1군에 올라왔다. 9월 10일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됐고, 대신 [[이성규]]가 등록됐다. 10월 3일 부상으로 시즌 아웃된 [[조동찬]]을 대신해 1군에 올라왔다.
         2군에 간 [[다린 러프]]를 대신해 1루수로 나와, 4월 27일 KIA전에서 5타수 4안타 2타점 2득점으로 팀은 패배했지만 입단 후 처음으로 1경기 4안타를 기록했다. 그러나 28일 SK전에서는 안타 없이 삼진만 2개를 당했고, 이후 [[조동찬]]이 1루수로 나오면서 백업으로 밀려났다. [[다린 러프]]의 복귀를 앞두고 5월 1일 [[박근홍(야구선수)|박근홍]]과 함께 1군에서 제외됐다. 5월 중순부터 6월 초까지 3주 가량 결장했다가 6월 4일 복귀했다.
  • 서상기 (1946년) . . . . 6회 일치
         [[2004년]] 5월 ~ [[2008년]] 5월 제17대 한나라당 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17대 4년동안 국회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 위원이자 전반기 간사를 맡았다.
         |임기 = [[2008년]] [[5월 30일]] ~ [[2012년]] [[5월 29일]]
         |임기 = [[2012년]] [[5월 30일]] ~ [[2016년]] [[5월 29일]]
  • 이병후 . . . . 6회 일치
         경상북도 영천 출신으로 1957년 [[영남대학교]]를 졸업하고 제8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해 1958년 12월 17일 대구지방법원 판사에 임명되어 자유당 후보를 당선시키려고 야간에만 개표를 했던 대구병구 올빼미 개표사건, 팔공산에서 생포한 대남 간첩사건 등에서 배석판사로 심리하는 등<ref>동아일보 1959년 4월 4일자</ref><ref>동아일보 1958년 12월 17일자</ref>1961년 8월 27일 대구지방법원<ref>동아일보 1961년 8월 27일자 1964년 5월 19일자</ref> 1966년 11월 15일 대구고등법원 1967년 대법원 재판연구관 1969년 3월 31일 서울고등법원 1969년 10월 7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원장 1971년 4월 1일 부산민사지방법원 1973년 3월 27일 서울민사지방법원 서울형사지방법원, 성동지원장, 1974년 성북지원장을 거쳐 1976년 12월 29일 서울고등법원<ref>동아일보 1976년 12월 30일자</ref> 1977년 11월 5일 서울고등법원<ref>매일경제 1977년 11월5일자</ref> 1980년 영등포지원장 1981년 4월 20일 수원지방법원장<ref>매일경제 1981년 4월 21일자</ref> 1982년 3월 12일 대전지방법원장<ref>경향신문 1982년 3월12일자</ref> 1983년 8월 12일 인천지방법원장<ref>경향신문 1983년 8월 12일자</ref><ref>동아일보 1986년 4월 3일자 매일경제 1966년 11월 16일자 경향신문 1969년 3월 31일자 동아일보 1969년10월7일자 매일경제 1971년 3월 26일자 경향신문 1973년 3월 27일자</ref>을 거쳐 1986년 4월 16일에 [[전두환]] 대통령에 의해 대법원 판사에 임명되었다. 1987년 대법원이 상고허가 신청사건의 처리를 전담하는 상고허가신청부를 신설하면서 [[정기승]] [[황선당]]과 함께 전담 판사로 구성되었으며<ref>매일경제 1987년 1월 5일자</ref> 1987년 5월 18일에 대법원장 추천으로 [[헌법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다.<ref>동아일보 1987년 5월 16일자 매일경제1986년4월3일자</ref>
         부산민사지방법원에서 재직하던 1972년 5월 17일 부산은행 대표가 청구한 약속어음금 반환소송에서 이자에 대한 이자 청구는 이자제한법에 따라서 무효라고 하면서 원금에 대한 이자만 더해 지급하도록 했으며<ref>경향신문 1972년 5월 18일자</ref> 서울민사지방법원에서 재직하던 1973년 5월 31일 혼인 당사자가 동성동본이라고 하더라도 신고서에 '혼인 당사자는 각각 시조를 달리함'이란 사실만 기재하면 구체적인 입증 소명자료가 없더라도 혼인신고를 받아줘야 한다"고 하여 동성동본 금혼을 규정한 민법을 무력화했다.<ref>동아일보 1973년 6월1일자</ref>
  • 이상백 (1904년) . . . . 6회 일치
         ** 형: [[이상정]](李相定, [[1897년]] [[6월 10일]] ~ [[1947년]] [[10월 27일]], 독립운동가. 아호(雅號)는 청남(晴南), 산은(汕隱). [[대한독립군]] [[3성 장군|중장]])
         ** 형: [[이상화 (시인)|이상화]](李相和, [[1901년]] [[5월 9일]] ~ [[1943년]] [[4월 25일]], 작가, [[독립운동|민족]] [[시인]]. 아호(雅號)는 상화(尙火, 想華), 무량(無量), 백아(白啞).)
         *** 조카사위: [[박창암]](朴蒼巖, [[1923년]] [[5월 15일]] ~ [[2003년]] [[11월 10일]], 군인, 정치가. '''이상오'''(李相旿)의 사위. 아호(雅號)는 만주(滿洲), 허주(虛舟), 농부(農夫). [[군사영어학교|대한민국 군사영어학교]] 1기 출신. [[대한민국 육군]] [[1성 장군|준장]] 전역.)
         * 사돈 : [[최남선]](崔南善, [[1890년]] [[4월 26일]] ~ [[1957년]] [[10월 10일]])
         * 사돈 : [[박중양]](朴重陽, [[1872년]] [[5월 3일]] ~ [[1959년]] [[4월 23일]])
  • 이철우(1955) . . . . 6회 일치
         2017년 4월 1일 [[자유한국당]] [[사무총장]]에 임명됐고, 제19대 대통령선거 자유한국당 선거대책위원회 총괄선대본부장을 맡았다. 그러나 대선 이튿날인 5월 10일 사무총장 직을 스스로 사퇴했다. 대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자진 사퇴한 유일한 당직자였다. 이후 2017년 7월 3일 전당대회에 출마하여 최다득표로 자유한국당 최고위원에 당선됐다.
         현역 국회의원이므로 2018년 5월 2일 국회에 사직서를 제출했고, 이 사직서는 14일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됐다.
         [[2018년]] [[5월 24일]]에는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경상북도지사 후보로 등록하였으며 이후 경상북도지사로 당선되었다.
         2018년 9월 10일 두번째 시행된 리얼미터 시도지사 직무수행 지지도에서 4위[* 1위 김영록 전남지사, 2위 원희룡 제주지사, 3위 권영진 대구시장]를 차지하며 포스트 [[김관용]] 체제의 틀을 닦아나가고 있다.[[http://news1.kr/articles/?3422005|#]]
         [[2018년]] [[5월]] 경북도지사 후보 정책 토론회에서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33098|독도의 날이 2월 22일이냐는 질문에 맞다고 답했다.]] 이날은 일본에서 주장하는 다케시마의 날이고 독도의 날은 10월 25일이다. 다만 이때 질문에는 민주당 예비 후보를 제외하고 전부 틀렸다고 한다.
  • 장성집 . . . . 6회 일치
         |사망일 = [[1839년]] [[5월 26일]]
         |시성일 = [[1984년]] [[5월 6일]]
         '''장성집'''(張--, [[1786년]] ~ [[1839년]] [[5월 26일]])은 [[조선]]의 [[천주교]] [[박해]] 때에 [[순교]]한 [[한국 천주교]]의 [[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103위 성인]] 중에 한 사람이다. [[세례명]]은 '''요셉'''(Joseph)이다.
         그가 용감한 [[순교자]]들의 소식을 듣고 격분하여 그는 조정에 직접 항거하려 하였으나, 그의 [[대부모|대부]]는 그의 결단을 말렸다. 마침내 그는 [[5월 18일]]에 체포되었고, 이웃들과 그를 잡아가려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그의 종교를 부정하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사람들에게 자기 신앙을 거듭 확고히 다졌다. 그는 "나는 하느님을 사랑해야 하는 한 사람이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창조하셨으며, 좋은 사람은 [[천당]]으로, 나쁜 사람은 [[지옥]]으로 보내신다."고 말했다.
         포도대장은 그를 상급 [[재판소]]로 이송했다. 장성집은 관청의 아치들이 왜 자신을 아무런 [[심문]]이나 [[고문]]도 없이 내버려 두는지 알려달라고 외쳤다. 이미 그는 정신병자로 오해받고 있었고, 다시 감옥에 수감되었다. 포장은 끊임없이 배교하라고 충고하였으나, 그는 포장의 충고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는 곤봉으로 수차례 맞고, 다시 감옥에 수감되었다. 결국 그는 [[1839년]] [[5월 26일]], 54세의 나이로 [[한양]]에 있는 감옥에서 [[순교]]하였다.
         }}</ref> [[1984년]] [[5월 6일]]에 [[서울특별시]] [[여의도]]에서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집전한 [[미사]] 중 이뤄진 103위 [[시성|시성식]]을 통해 [[성인]] 품에 올랐다.
  • 최공웅 . . . . 6회 일치
         * 대구고등법원 제1형사부 재판장으로 재직하던 1985년 5월 18일에 내연의 남편을 살해하여 1심에서 징역12년이 선고된 신압찻집 여주인에 대해 "범인으로 인정할 직접적인 증거가 없고 공소사실을 인정할 정황 증거도 없다"는 이유로 원심을 깨고 무죄를 선고했다.<ref>동아일보 1985년 5월 18일자</ref>
         * 서울고등법원 형사1부 재판장으로 재직하던 1988년 2월 5일에 1971년 4월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후보 유세 중에 "[[박정희]] 대통령이 영구 집권을 위해 총통제를 기도하고 있다"는 등의 허위사실을 유포하여 1971년 7월 26일에 기소된 사건에 대해 "재판 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면소 판결했다.<ref>동아일보 1988년 2월 5일자</ref> 3월 4일에 [[긴급조치]] 1호, 4호 위반, 법정모욕 등으로 1,2심 군법회의에서 징역10년 자격정지10년이 선고됐다가 대법원 상고심에서 이미 폐지된 [[긴급조치]] 면소에 대한 판단은 유보한 채 파기환송된 [[강신옥]]에게 "자유 민주주의 체제에서 형사 피고인에 대한 자유로운 방어권 행사없이 형식적인 변론만 인정한다면 사법권읜 근본적으로 파괴되고 말 것"이며 "공개재판에서 변론은 재판 방해를 하려는 폭력이 없는 한 처벌할 수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8030400329211003&editNo=3&printCount=1&publishDate=1988-03-04&officeId=00032&pageNo=11&printNo=13056&publishType=00020 경향신문 1988년 3월 4일자]</ref> 5월 27일에 내란 예비죄 피고인인 [[박형규]] 목사에게 "10여명의 선동만으로 국가 전복을 우려한다는 것은 전혀 합리성이 없다"며 징역2년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무죄를 선고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8052700329211001&editNo=3&printCount=1&publishDate=1988-05-27&officeId=00032&pageNo=11&printNo=13126&publishType=00020 경향신문 1988년 5월 27일자]</ref> 5월 31일에 1974년 세검정 동굴에서 북한방송을 듣고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에 대해 "똑똑한 학생이 왜 나쁜 짓을 하겠느냐"고 말했다는 이유로 [[긴급조치]]위반으로 구속돼 1심에서 징역10년 자격정지10년을 선고받은 박규신 피고인에게 대법원에서 파기된지 13년만에 반공법위반 무죄, 긴급조치 위반은 면소 판결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8053100289107009&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8-05-31&officeId=00028&pageNo=7&printNo=14&publishType=00010 한겨레 1988년 5월 31일자]</ref>
  • 한동욱 . . . . 6회 일치
         2009년 5월 1일, [[스타리그#박카스 스타리그 2009|박카스 스타리그 2009]] 오프라인 예선에 참가한 한동욱은 박재영([[KT 롤스터]]), 공민창([[MBC게임 히어로]]) 등을 꺾고 36강에 진출, [[EVER 스타리그 2008]] 이후 3시즌만에 스타리그 본선에 복귀 하였지만, [[한상봉 (프로게이머)|한상봉]]에게 2:0으로 져서 16강 진출은 결국 좌절되고 말았다.
         * [[2007년]] [[5월 13일]] vs [[허영무]] (몬티홀)
         * [[2008년]] [[5월 28일]] vs [[이승훈 (프로게이머)|이승훈]] (안드로메다)
         * [[2009년]] [[5월 17일]] vs [[이경민 (프로게이머)|이경민]] (단장의능선)
         * [[2009년]] [[5월 20일]] vs [[김승현 (프로게이머)|김승현]] (아웃사이더)
         * [[2010년]] [[5월 30일]] vs [[윤용태]] (그랜드라인)
  • 현진건 . . . . 6회 일치
         [[1917년]] 다시 귀국하였는데, 이때 대구에서 [[백기만]](白基萬) · [[이상화 (시인)|이상화]](李相和) 등과 습작 동인지 『거화(炬火)』를 발간하였다. 이것이 그가 처음으로 시작한 '문학'이었다(다만 본격적인 동인지는 아니고 작문지 정도의 수준이었다고<ref>양진오, 「조선혼의 발견과 민족의 상상 - 현진건의 학술적 평전과 문학 연구」(도서출판 역락, 2008), p.44. 대구대학교 인문과학연구총서24.</ref>). 4월에 현진건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5년제 세이조 중학교(成城中學校)에 3학년으로 편입하였다. [[1918년]] 3월에 다시 귀국하였는데<ref>일본 학자 시라카와 유타카에 의해 세이조 중학교 3학년 성적대장 일람표에서 현진건의 이름이 확인되어, 그가 1917년 4월부터 1918년 3월까지 실제 이 학교에 재적했음을 고증할 수 있었다. 양진오, 「조선혼의 발견과 민족의 상상 - 현진건의 학술적 평전과 문학 연구」(도서출판 역락, 2008), p.43. 대구대학교 인문과학연구총서24.</ref>, 얼마간 대구에 머물다가 집안 몰래 형 정건이 있던 [[중화민국|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 가서 [[후장 대학]](扈江大學) 독일어 전문부에 입학한다. 조선에서 일어난 [[3.1 운동]]의 여파가 상하이에까지 커져 상하이에서도 만세운동이 벌어지고,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가 수립되던 해인 [[1919년]] 다시 귀국하여, 당시 육군 공병 영관을 지낸 당숙 현보운(玄普運)의 양자로 들어가게 되면서 서울로 상경, 지금의 종로구 관훈동 52번지에서 살았는데, 현보운은 1919년 음력 9월 10일에 사망하고 그가 호주가 되었다. 12월에 첫딸 경숙(慶淑)이 태어났으나 이듬해에 죽고 만다.
         처음 「희생화」를 발표하던 때부터 현진건은 이미 '빙허'라는 아호를 스스로 지어 쓰고 있었는데, 대체로 그가 혼인을 올리던 1915년에서 학교를 자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간 1916년 사이부터 쓰기 시작한 것으로 자신은 회고하고 있다. 다소 허무주의적 표현이 없지 않지만 '허공(虛空)에 의지한다'는 이 말이 자신의 심경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말이었고, 고대 중국 [[북송|송]](宋)의 문인 [[소식 (북송)|소식]](蘇軾)의 《적벽부(赤壁賦)》의 구절 가운데 "넓기도 하구나, 허공에 의지하여 바람을 타고서(浩浩乎! 憑虛御風而)..."란 구절에서 느낀 바가 있어 그대로 '빙허'를 자신의 아호로 정하게 되었다고 한다.<ref>「雅號의 由來(2)」 1930년 5월 1일자 『삼천리』제6호.</ref> [[1920년]] 11월에 현진건은 [[조선일보]]사에 입사하였다.
         [[1921년]] 1월에 현진건은 다시 『개벽』에 단편소설 「빈처」를 발표하였는데, 이것이 문단의 호평을 받아<ref>이때의 문인들의 평가는 성해(星海)의 「憑虛君의 『貧妻』와 牧星君의 『그날밤』을 읽은 印像」(1921년 05월 01일자 『개벽』제11호), 박종화의 「文壇의 一年을 追憶하야 現狀과 作品을 槪評하노라」(1923년 1월 1일자 『개벽』제31호)에 나타나 있다.</ref> 11월에는 다시 『개벽』에 단편 「[[술 권하는 사회]]」를 발표하였고, [[1922년]] [[1월]]부터 [[4월]]까지 『개벽』에 중편소설 「타락자」를 발표하였다. 작품 [[술 권하는 사회]]에서 그는 사회의 부조리함을 알면서도 저항하지 못하는 나약한 지식인상을 풍자하였다.
         [[1925년]] 1월, 현진건은 『개벽』에 단편 「불」을 발표하였다. 이때 그는 「시대일보」의 사회부장이 되었으나 「시대일보」가 폐간되면서 동아일보사로 전직하여야 했다. 3월 1일자 『개벽』 제57호에는 이때의 현진건의 근황에 대해 "근래에 빙허(憑虛) 군은 신문사 일도 뜻대로 되지 않으므로 더 많은 독서와 연구에 노력하겠다 한다. 늘 군은 조선의 평론계가 아무 보잘 것 없는 것을 매우 분개해서 앞으로는 논문도 쓰실 작정이라고. 고마운 일이며 즐거운 일이며 마음히 든든해지는 일이다."라고 짤막하게 소개하고 있다.<ref>「文壇雜談」 1925년 3월 1일자 『개벽』제57호.</ref> 그리고 박문서관에서 그의 중편 「지새는 안개」가 단행본으로 간행되었다. 또한 2월에 단편 「[[B사감과 러브레터]]」를 『조선문단』에 발표하고<ref>현진건이 『조선문단』에 작품을 싣기 시작한 것은 『개벽』이 점점 '계급주의 문학'을 외치는 [[카프]]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이면서부터였다는 지적이 있다. 양진오, 「조선혼의 발견과 민족의 상상 - 현진건의 학술적 평전과 문학 연구」(도서출판 역락, 2008), p.91. 대구대학교 인문과학총서24.</ref>, 4월과 5월에는 수필 「목도리의 복면」과 「설 때의 유쾌와 낳을 때의 고통」을 각각 기고하였다. 7월에는 「조선문단과 나」라는 기고에서 작가는 삼삼오오 짝을 짓고 당을 나누어 서로 갈라서서 싸우는 존재가 아니라 작가 하나하나가 독립적인 개체라는 "일인일당(一人一黨)주의'라는 용어를 써가며, 계급주의 문학을 옹호하는 카프의 주장에 맞서 내용적 가치와 계급적 가치란 별개임을 주장하였다. 또한 『조선문단』에서 만든 조선문단합평회의 정기회원으로서, 10월에는 『조선문단』 신추문예(新秋文藝)에 응모한 작품들의 심사를 맡아 처음으로 평론을 싣기도 했다.
         [[1930년]] 2월과 12월에는 장편 「웃는 포사」를 『신소설』과 『해방』에 연재하다 4회만에 중단하고, [[1931년]] 10월에 단편 「서투른 도적」을 『삼천리』에, 11월에는 『신동아』에 「연애의 청산」을 발표하였다. [[1932년]] 7월 8일부터 23일까지 단군(檀君)의 전승이 남아있는 [[안주군|안주]](安州), [[묘향산]](妙香山), 평양, [[황해도]](黃海島), [[강화도]](江華島) 등지를 답사하고 그 기행문 「단군 성적(聖跡) 순례」를 7월 29일부터 『동아일보』에 연재하였다(~11.9). 그러나 이 해, 3년의 옥살이를 마치고 6월 10일에 출소한 형 현정건은 현진건이 『동아일보』지면에 장편소설 「적도(赤道)」를 연재하기 시작한지 열흘 뒤인 12월 30일에 옥살이의 후유증으로 숨을 거두고, 이듬해 형수(현정건의 부인) 윤덕경(尹德卿)도 자결하는 등 현진건에게 개인사적 비극이 잇따랐다(「적도」는 [[1934년]] 6월 17일에 완결되었다).
         부친 경운의 첫 부인이자 현진건의 친어머니인 완산 이씨 정효(貞孝)는 진건을 비롯한 네 명의 아들을 낳은 뒤 막내 진건의 나이 열 살 때인 [[1910년]] 6월 13일에 죽고, 경운은 정선(旌善) 전씨를 후처로 맞아들여 또 한 명의 아들을 두었다. 진건의 큰형 '''홍건(鴻健)'''은 러시아 사관학교 출신으로 대한 제국의 육군 참령을 지냈다. 한때 러시아 대사관에서 통역을 맡기도 했으며, 《각사등록》과 《승정원일기》 등의 문헌에 따르면 광무 6년([[1902년]])에 외국어학교(外國語學校) 부교관(副敎官)과<ref>《각사등록》 광무 6년(1902년) 7월 28일조. 이듬해인 광무 7년(1903년) 4월 23일(양력 5월 19일)에 면관되었음이 《승정원일기》에 수록되어 있다.</ref> 칭경시(稱慶寺)의 예식사무위원(禮式事務委員)을 잠시 맡기도 했다<ref>《승정원일기》 광무 6년([[1902년]]) 6월 24일조. 그러나 광무 7년(1903년) 2월 28일(양력 3월 26일)에 해임되었다(《승정원일기》 같은 날 기록).</ref> 말년의 행적은 잘 알려지지 않았으며 [[미소공동위원회|미(美)·소(蘇) 공동위원회]] 시절에 납북되었다는 설도 있다.<ref>양진오, 「조선혼의 발견과 민족의 상상 - 현진건의 학술적 평전과 문학 연구」(도서출판 역락, 2008), p.34, 대구대학교 인문과학연구총서24.</ref> 둘째 형 '''석건(奭健)'''은 일본 메이지 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대구에서 변호사로 근무했으며, 아우 정건이 독립운동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을 때 변호를 맡기도 했다. 셋째 형 '''[[현정건|정건]](鼎健)'''은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로 유명하다.
  • 혜정(1993년 8월) . . . . 6회 일치
         ||<#FFFFF0> '''{{{#black 출생}}}''' ||<(> [[1993년]] [[8월 10일]] ([age(1993-08-10)]세), [[전라북도]] [[정읍시]][* 출생 당시에는 전라북도 정읍시이었다.] ||
         [[1993년]] [[8월 10일]], [[전라북도]] [[정읍시|정읍시]](현 [[전라북도]] [[정읍시]])에서 태어났다.
         힙합 그룹 '팬텀'의 '오늘따라 (feat. 가인)'을 2014년 5월 [[http://www.youtube.com/watch?v=eDRMslW2ZDU#t=17|22일]], [[http://tvcast.naver.com/v/241126|24일]], [[https://www.youtube.com/watch?v=Hc9kzT30jcc|25일]], [[http://www.youtube.com/watch?v=uACsCeV0OvA|28일]] 피처링하며 가요 프로그램에 출연하였다.
         2015년 5월 2일 / 9일 / 16일 - SBS+ <날씬한 도시락>에 출연. [[http://aoatv.net/713|#5/2]] [[http://aoatv.net/722|#5/9]] [[https://vimeo.com/127994679|#5/16]]
         5회 - <사랑의 스튜디오>에서 대학생 신혜정으로 출연, 매력 발산 시간에 [[김종민]]과 댄스를 하다 오히려 김종민이 더 흥이 나버려 브레이크 댄스를 춘다.[[http://m.tv.naver.com/v/1624413/list/124158|#]] <[[엠카운트다운|엄카운트다운]]>에서 1위 곡인 '바보'에 김종민과 출연, 투표소에서 투표날 '''5월 9일'''을 강조한다.[[http://m.tv.naver.com/v/1624433/list/124158|#]] <[[분노의 질주]]>에서 밥사달라는 후배 일행으로 등장, 주인공들의 돈을 탈탈 털어간다.
         || [[2018년]] [[5월 27일]] || [[SBS]] || [[런닝맨]] || 게스트 || ||
  • 홍수환 . . . . 6회 일치
         '''홍수환'''(洪秀煥, [[1950년]] [[5월 26일]] ~ )은 프로[[권투|복싱]] 세계챔피언을 지낸 [[대한민국]]의 전직 [[권투|복싱]] 선수이다.
         * [[1969년]] [[5월 10일]] 김상일과 프로복싱 데뷔전(4R 무승부)
         * [[1978년]] [[5월 7일]] [[서울특별시]]에서 열린 2차 방어전에서 [[리카르도 카르도나]]에 12회 TKO패.
         * [[2005년]] [[5월 2일]] ~ [[2006년]] [[4월 23일]] [[KBS 제2라디오|KBS 해피FM]] 《[[라디오 챔피언|홍수환 이승연의 라디오 챔피언]]》
         |임기 = [[1977년]] [[11월 26일]] ~ [[1978년]] [[5월 7일]]
  • 강동우 . . . . 5회 일치
         스프링캠프에서 몸이 안 좋아 훈련을 제대로 못 했고 시즌 시작 시점에 몸을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 간염으로 인해 하와이에서 1주일만에 귀국하여 대전시는 모 병원에서 잠시 입원 생활을 했다. 결국 체력부족으로 1할대를 넘나드는 극악의 타격과 심각하게 좁은 수비범위를 보여주며 [[FA로이드]] 부작용 의혹을 받다가 결국 2군에 내려갔다. 그러나 5월 초에 2군에서 복귀해서 타율을 2할 7푼대로 끌어올리는 등 준수한 성적을 냈다. 6월 27일 개인 통산 1000안타를 기록했고, 후반기에는 1군과 2군을 왕복하였다.
         5월 24일, [[SK 와이번스]]와의 3연전 첫 경기에서 [[이승호(1981)|이승호]]의 높은 직구를 그대로 때려 2:2 피말리는 접전 끝에 끝내기 안타를 날렸다. 팬과 칰갤러들은 [[야왕]]의 작전지시를 충실히 수행한 강동우에게 '''[[공작]]'''의 칭호를 내려야 한다며 강동우 공작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그리고 [[불암콩콩코믹스]] '''<추두: 도망두산을 쫓다>''' 편에서는 '''야또나리'''가 되었다!!
         5월 17일 두산전에서 [[3루수]]가 공을 잡자 오른팔을 빼고 왼팔을 뻗어 태그하는 ~~헬멧 블로킹~~ 센스있는 주루플레이로 3루타를 만들어냈다.
         이후 꾸준히 제몫을 해냈으나 허리 미세통증으로 인해 6월 26일자로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되었다. 회복기간을 거쳐 7월 10일 1군에 복귀. 한화는 강동우가 2군에 내려가 있는 동안 [[고동진(야구선수)|고동진]], [[양성우(야구선수)|양성우]] 등을 1번 타자 자리에 기용하였으나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했고, 실제로 강동우가 2군으로 내려가 있는 동안 한화는 2승 7패로 부진을 면치 못했다. 마지막에는 '''[[장성호]]가 1번 타자'''로 기용될 정도였으니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한지? 1군으로 올라왔으나 별 활약을 하지 못하고 8월 2일 이후로 다시 2군행. 다행히 1번 구멍은 [[오선진]]이 각성하면서 메울 수 있게 되었다.
         5월 말 1군에 복귀하여 타선에 나름대로 힘을 보탰으나 14경기에서 30타수 6안타에 그쳤고, 팀의 리빌딩 방침과 맞물려 다시 2군으로 향했다. 다행히 [[퓨처스리그]]에서는 3할대의 타율을 기록하며 타격감을 끌어올렸다. 하지만 그 후로 전혀 1군에 올릴 기미가 안 보인다. 그토록 대타를 남발하는 상황임에도 정작 강동우의 복귀는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일각에선 '(감독의 권위를 위한) 베테랑 죽이기'로 의심할 정도.
  • 경주시 . . . . 5회 일치
         2008년 10월 10일 경주시민운동장에서 열린 제28회 경주시민체육대회의 모습
         |align="center"|[[1960년]] [[11월 10일]]
         |align="center"|[[1999년]] [[5월 6일]]
         |align="center"|[[1956년]] [[5월 5일]]
         |align="center"|[[1987년]] [[5월 29일]]
  • 골든 위크 . . . . 5회 일치
         [[일본]]에서 4월 말에서 5월 초에 이르는 약 일주일 가량의 장기 연휴. 줄여서 GW. [[한국]]에서는 "황금연휴"라고도 부른다.
         이 시기에 4월 29일 쇼와의 날(昭和の日), 5월 3일 헌법기념일, 5월 4일 녹색의 날(みどりの日, 식목일과 비슷), 5월 5일 어린이 날, 여기에 더해서 5월 1일 노동절이 있으며, 이 사이에 끼인 휴일이나 일요일이 겹친 대체휴일 등이 있어서 대략 1주일 정도의 연휴가 된다.
  • 권벌 . . . . 5회 일치
         [[1540년]] [[병조판서]]에 임명되자 그는 여러번 체직을 청했지만 왕이 듣지 않았다. 곧 [[한성부 판윤]]에 임용되었으며, 1541년 [[5월]] [[예조판서]], [[11월]]에는 [[의정부]][[좌참찬]]에 임명되었다. 다시 [[예조판서]]가 되었으며, 예조판서와 좌참찬 재직 때는 지[[의금부]]사를 겸직했다. [[1542년]] [[5월]] 장령이 되었으며, 같은 해 [[가정제]]의 엽기행각에 궁비인 양금영(楊金英) 등이 가정제를 시해하려 했다가 실패했다. 이때 [[조선 중종|중종]]이 봉변을 당한 [[가정제]]를 위로하겠다고 진위사(陳慰使)를 파견하려 하자, 그는 경연(經筵)에서 이를 반대하였다. 그는 오히려 중종에게 "천자가 만승(萬乘)의 지존(至尊)으로 깊은 구중 궁궐에 있는데도 뜻밖의 음모가 측근의 시어(侍御)에서 나왔으니, 잠시도 경계하지 않으면 위험한 화가 따릅니다. 원컨대 이를 거울로 삼아 항상 성찰을 더하시면 좋겠습니다."고 하며 오히려 중종에게 타산지석 삼아서 항상 성찰하고 깨닭으라고 권고했다. [[정경세]]에 의하면 그 말이 매우 기휘(忌諱)를 범하였으므로 동료들이 두려워해서 고개를 움츠렸을 정도였다 한다.
         [[1544년]] 정월 다시 [[의정부]][[좌참찬]]에 임명되었다. 중종이 죽자 그해 [[11월]] [[빈전도감]](殯殿都監)에 참여하였다. [[1545년]](인종 2) [[5월]] [[의정부]][[우찬성]]이 되었으며 [[우찬성]]으로 [[의금부]][[판사]]를 겸하였고,[[인종]]이 후사 없이 병으로 갑자기 죽자, [[7월]]에는 [[명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어린 왕 [[명종]]을 대신하여 [[7월]] [[원상]](院相)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그러나 이때 [[윤인경]] 등이 [[충순당]](忠順堂)에 입대(入對)할 적에 '[[이언적]]과 권벌 등이 [[문정왕후|대왕 대비]]([[문정왕후]])가 [[수렴청정]]하는 일을 막으려 한다.'는 말을 몰래 퍼뜨려 그를 모함하였다.
         승선시일기는 승정원 승지로 재직할 당시의 공사를 기록한 일기로 1책은 중종 13(1518)년 5월 15일부터 7월 5일, 2책은 7월 10일부터 11월 6일까지의 기록이다.
  • 김대환 (법조인) . . . . 5회 일치
         항소심에서 징역1년6월 구류10일, 피고인 2명에게 징역1년, 그외 3명에게 징역1년 집행유예2년을 선고했다.<ref>동아일보 1986년 2월 17일자</ref>
         징역15년을 선고받고 1988년 가석방되었으나 1995년 보안관찰 처분을 갱신하자 낸 소송에서 "재범 위험성을 인정할 충분한 이유가 없다"며 원고 승소 판결했다.<ref>한겨레 1997년 1월 22일자</ref> 5월 20일에 1994년 인천 북구청 세무계장으로 있으면서 지방세 55억여원을 횡령하여 1심에서 징역22년6월 벌금40억원 선고받자 전재산 사회 헌납 약속으로 2심에서 벌금없이 징역22년6월만 선고된 안영휘의 가족이 "가족 명의의 재산을 압류한 것은 부당하다"며 청구한 소송에서 "구청은 안씨 명의의 부동산을 처분해 20억여원을 환수하라"는 원심을 깨고 원고패소 판결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7052100329123005&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7-05-21&officeId=00032&pageNo=23&printNo=16110&publishType=00010 경향신문 1997년
          5월 21일자]</ref>
         자격정지3년을 선고하면서 박일룡 전 안기부 1차장에게 징역2년 집행유예3년 자격정지2년, 임광수 전 101실장과 임경묵 전 102실장 등 전직 안기부 간부 4명에게 징역8월~1년6월 집행유예2~4년 자격정지1~2년을 선고하면서 [[김대중]] 후보를 비방하는 X파일 시리즈를 게재한 격주간지 인사이더월드 발행인 손충무에게 징역2년을 선고했다.<ref>한겨레 1999년 1월 23일자</ref> 4월 26일에 대통령과 함께 찍은 것처럼 합성한 사진을 선거공보에 실은 허위사실공표죄에 대해 벌금150만원을 선고했다.<ref>한겨레 1999년 4월 27일자</ref> 5월 20일에 [[자민련]] 후보가 시장 후보를 결정하자 무소속 후보로 출마하면서 [[새정치 국민회의]]의 추천을 받았다며 선거운동을 했던 경기 안성시장 [[한영식]]에게 원심대로 징역8월 집행유예2년을 선고했다.<ref>동아일보 1999년 5월 21일자</ref> 8월 31일에 성남시 지하상가 개발업자로부터 금품을 받은 [[오성수]] 전 성남시장에 대해 징역5년 추징금 1억6천만원을 선고하면서 공직선거법 위반에 대해 벌금100만원, 업무상 횡령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ref>한겨레 1999년 9월 1일자</ref>
  • 김동명(가수) . . . . 5회 일치
         2016년 5월 31일 막걸리대중화 홍보 '막걸리드림' [[https://youtu.be/RqIE4PdqPhsl|#]]
         10)2016년 5월 28일 부활멤버들,, 불후의 명곡 253회,고백영호 편 ''''여로(ost)''' [[http://tvpot.daum.net/v/sa90bweRBiORB05D44RBwBB|#]] [[http://tvcast.naver.com/v/901369|#]]
         ||2015년 5월 16일 in 전북 익산||올림픽홀 대공연장 3:00pm, 7:00pm||
         ||2015년 5월 30일 in LA||PALM SPRAING 7:00pm||
         ||2016년 12월 10일 in 전북 고창, LEGEND||의정부 예술의전당 대극장 5:00pm||
  • 김진향 . . . . 5회 일치
         * [[2002년]] 5월 ~ [[2003년]] 5월:[[세종연구소]] 북한연구센터 객원연구위원
         * 2003년 5월 ~ [[2004년]] 12월:[[국가 안전 보장 회의]] 사무처 행정관
         * 2004년 2월 ~ [[2005년]] 5월:[[대한민국 대통령비서실|대통령비서실]] 통일외교안보정책실 행정관
         * 2005년 5월 ~ [[2008년]] 2월:대통령비서실 인사수석실 인사비서관
  • . . . . 5회 일치
         방탄소년단의 공식적인 댄스라인은 제이홉, 지민, 정국이지만 2018년 5월 6일 뷔의 컴백 트레일러 영상이 공개되면서 방탄소년단의 안무가 손성득은 자신의 [[https://www.instagram.com/p/BiceFnUF3me/|인스타그램]]에 뷔를 공식적으로 댄스라인으로 인정했다. 2018년 5월 18일에 [[V LIVE]]를 통해 [[LA]]에서 진행된 BTS Comeback Preview show <방탄늬우스 in LA>에서도 이 내용을 뷔의 뉴스로 다루며 언급했다.
          * [[11월]] [[팬사인회]]에서 [[여성]] [[팬]]의 [[머리카락]]을 잡고 [[위]]로 들어서 좌우로 흔든 [[행동]]이 [[논란]]이 되었다.[* [[현재]]는 해당 [[팬]]이 [[파생]] [[논란]]을 부담스러워하여 [[본인]]의 모습이 담긴 [[영상]]의 [[삭제]]를 [[http://www.instiz.net/popup_showpic.htm?type=1&id=pt&no=4188545&url=http%3A%2F%2Ffile2.instiz.net%2Fdata%2Fcached_img%2Fupload%2F2016%2F11%2F11%2F12%2Fb608215eb9d62c0e101ecd7af03deab7.png|요청]]한 [[상태]].] 이 [[일]]을 [[처음]]으로 [[논란]]거리 삼은 트윗에서 빠르게 [[조작]]한 [[움짤]]과 '[[팬]]의 [[머리]]채를 잡았다'고 표현해 더욱 [[부정]]적 [[반응]]이 거셌으며, 해당 [[트위터]]리안이 다른 관련 트윗에서 "다른 멤버가 말릴 때까지 [[머리]]채를 놓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해서 뷔가 일방적으로 [[팬]]에게 심한 [[장난]]을 친 것처럼 비춰졌으나 [[https://www.instiz.net/pt/4192032|아니다]].[* [[논란]]이 된 [[머리카락]] 부분의 앞뒤 [[맥락]]을 모두 파악한 후 뷔의 [[잘못]]이 아님을 [[설명]]하고 있다.] [[https://pgr21.com/pb/pb.php?id=spoent&no=1731|관련 글]][* 한편 이날 [[팬사인회]] [[논란]]을 언급한 [[기사]]에는 [[테이블]] 위에 맨[[발]]을 올린 것을 [[문제]] 삼은 내용도 언급되었으나, [[A.R.M.Y|팬들]]의 요청에 따른 [[행동]]이었음이 밝혀졌다. [[인터넷]] [[커뮤니티]]를 대충 [[눈팅]]하여 [[기사]]를 작성한 [[기자(직업)|기자]]로 인해 [[논란]]이 증폭되었던 것. [[여담]]이지만, 이 [[논란]]을 언급한 해당 [[커뮤니티]]의 [[댓글]] [[반응]]을 보면, [[팬사인회]]에서 특이한 요청이 들어오는 일이 의외로 흔하다며 중립을 취하는 [[분위기]]였다.] [[팬]]과 [[장난]]을 치던 것이었으며, 실제 [[https://www.instagram.com/p/BkCrPkQn8qm/?taken-by=taehyungul|영상]]을 보면, '[[머리]]채를 잡았다'는 표현을 쓸 정도도 아니었고, [[똥머리]]를 만들 때처럼 [[머리]]를 그러모아서 살랑살랑 흔들다가 이내 곱게 매만져 주었다. [[녹음]]된 소리를 들어 보면 현장 분위기도 화기애애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단편적인 부분만을 악의적으로 [[편집]]해서 벌어진 일이다. 졸지에 논란의 당사자가 된 사인회 현장의 팬은 '아플 만큼 [[머리]]채를 잡는 과격한 정도가 아니라 [[머리카락]]을 들어올린 정도였다. 무분별한 [[욕설]]은 삼가해 달라'고 해명 [[글]]을 올렸다. --[[https://twitter.com/HahaYOLO_3/status/795583145722540032|원문]]--[* [[계정]]이 프로텍트로 전환되었다가 [[계정]] [[주인]]이 [[계정]]을 [[탈퇴]]함.] [[http://m.todayhumor.co.kr/view.php?table=star&no=385270|캡처]][* [[댓글]] 맨 [[마지막]]에 [[팬]]이 올린 해명[[글]] [[캡처]]가 있다.] 하지만 '[[팬]]이 괜찮아하는데 뭐가 [[문제]]인가'라는 [[의견]]과 '타인의 [[머리카락]]을 허락도 없는 상태에서 갑자기 잡아서 당기는 것은 실례'라는 [[의견]]이 여전히 [[충돌]]하고 있다. [[위키]]에서 항상 나오는 [[말]]이지만, 보는 위키러의 [[판단]]에 맡기자. 결국 멤버를 향한 [[인신공격]]이 도를 넘어, [[빅히트 엔터테인먼트|소속사]]는 [[11월 10일]] 부로 [[허위사실유포죄]], [[명예훼손]]에 관해 [[법]]적 조치로 대응하겠다는 [[http://www.twitlonger.com/show/n_1sp9h9n|공식 입장]]을 밝혔다.[* [[법]]적 대응 대상에는 이번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받아오던 [[명예훼손]]을 전부 포함하고 있다. 문맥상 이미 법적 절차를 진행 중인 것으로 보인다.]
          * [[2016년]] [[5월]], 꽃미남 브로맨스에서 [[운전면허증]]을 땄다고 밝혀졌다. --그리고 [[막내]] [[정국(방탄소년단)|정국]]은 자신은 한 번에 땄는데 뷔 [[형]]은 두 번만에 붙었다며 [[디스#s-3|디스]]--
          * [[2017년]] [[5월 25일]] Yahoo Esport 토크에서 좋아하는 [[선수]] [[질문]]에 [[각폭]][[https://twitter.com/YahooEsports/status/867818611917832192|#]]을 언급했다. --프로 [[게임]] 선수를 묻던 [[질문]]이라 다들 빵터졌다--
  • 서영무 . . . . 5회 일치
         '''서영무'''(徐永武, [[1934년]] [[5월 18일]] ~ [[1987년]] [[5월 26일]])은 전 [[대한민국]]의 야구 감독이자, [[삼성 라이온즈]]의 초대 감독이다.
         당시에는 전·후기 리그로 연간 리그가 분리되어 있었는데, 전기리그는 [[두산 베어스|OB 베어스]]가, 후기리그는 [[삼성 라이온즈]]가 각각 우승하였다. [[1982년 한국시리즈]]에서 맞붙은 두 팀은 첫 경기에서 무승부를 기록하고 2번째 경기에서 [[삼성 라이온즈]]가 이겼으나 이후 내리 게임을 내주면서 4승 1무 1패로 [[두산 베어스|OB 베어스]]에 밀려 준우승에 머물렀다. [[1983년]]에는 조감독으로 영입된 [[재일 한국인]] 출신 [[이충남]]과의 지휘권을 둘러싼 갈등으로 건강상의 이유를 들어 생일을 일 주일 지난 그 해 [[5월 25일]]에 감독직에서 전격 사임하고 팀을 떠났다.
         그러나 [[두산 베어스|OB]]의 이사로 임명된 지 한 달도 안 돼 [[1984년]] [[5월 11일]] OB와 삼성의 대구 경기를 앞두고 원정 숙소였던 [[수성관광호텔]]에서 선수들의 방을 정하던 도중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져 [[경북대학교병원]]에 입원했다. 이후 식물인간이 되었고, 긴 투병 끝에 [[1987년]] [[5월 26일]] 오전 7시 5분, [[서울특별시]] [[성동구]] [[사근동]]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 성시경 . . . . 5회 일치
         성시경은 데뷔 이후, 오랜 기간동안 감성적인 [[발라드 (대중 음악)|발라드]]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2008년]] [[6월 28일]]에 [[연세대학교]] 노천극장에서 열린 마지막 콘서트 이후, [[7월 1일]] 현역으로 [[강원도 (남)|강원도]] [[춘천시]]에 있는 102 보충대에 입대하였고, [[제1야전군 (대한민국)|제1야전군사령부]] 군악대 군악병으로 복무한 뒤 [[2010년]] [[5월 17일]]에 제대하였다. 제대 후, 매년 축가콘서트와 연말콘서트를 진행했으나 2015년을 마지막으로 연말콘서트는 진행되지 않고 있다. [[MBC FM4U]] 《FM 음악도시 성시경입니다》의 [[디스크 자키|DJ]]를 거쳐서, 현재 [[KBS2]] 《[[배틀 트립]]》, [[tvN]] 《[[모두의 연애]]》, [[OLIVE]], [[tvN]] 《달팽이호텔》 등의 진행자로 활동하고 있다.
         |[[2018년]] [[5월 26일]] ~ [[2018년]] [[7월 14일]]
         | [[2005년]] [[10월 25일]] ~[[2008년]] [[5월 12일]]
         ** [[5월 12일]] [[M.net]] 《[[엠카운트다운]]》 1위
         ** [[5월 29일]] [[SBS]] 《[[인기가요]]》 뮤티즌송
  • 손담비 . . . . 5회 일치
         소속사에 들어가서는 트레이닝을 받았고 2002년에는 MBC의 시트콤 《[[논스톱3]]》에 단역으로 출연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 준표도 담비도 출발은 단역 아이돌 스타 무명 시절 살펴보니 |url = http://www.sportsseoul.com/news2/entertain/hotentertain/2009/0503/20090503101040100000000_6928737571.html |출판사 = 스포츠서울 |저자 = 나지연 |날짜 = 2009-05-03 |확인날짜 = 2009-09-02 |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091011100530/http://www.sportsseoul.com/news2/entertain/hotentertain/2009/0503/20090503101040100000000_6928737571.html# |보존날짜 = 2009-10-11 |깨진링크 = 예 }}</ref> 이처럼 원래 손담비는 가수보다 배우가 꿈이었으며 기획사에 들어간 계기도 사실은 배우가 되기 위해서였다.<ref name="news">{{뉴스 인용|제목=손담비 “원래 배우가 꿈, 연기 욕심 많다”(인터뷰③)|url=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0904161748501002|출판사=뉴스엔|저자=유현진, 정유진|날짜=2009-04-17}}</ref> 2004년부터 가수가 되기로 결심하면서 춤을 배우기 시작했고, 2005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크럼핑을 배웠다.<ref>{{뉴스 인용 |제목 ="내 이름은 손담비, '몸치'였던 나의 이야기 들어볼래?"|url =http://www.edaily.co.kr/news/NewsRead.edy?DCD=A606&newsid=02086086583165328&OutLnkChk=Yl |출판사 =이데일리|저자 =박미애|날짜 = 2007-06-25|확인날짜 = 2009-09-02}}</ref> 크럼핑을 배울 당시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미국의 안무가 브라이언 프리드먼과 크럼핑 댄스의 창시자 릴C 등 유명인사들에게 배웠다.<ref>{{뉴스 인용|제목=미쓰에이 연습생 시절 보다 더 파워풀한 '손담비 연습생 시절' 영상|url=http://ens.vop.co.kr/A00000350063.html|출판사=ENS|저자=뉴스팀|날짜=2010-12-31|확인날짜=2010-12-31}}{{깨진 링크|url=http://ens.vop.co.kr/A00000350063.html }}</ref> 당시 릴C는 손담비에게 "너는 예쁘니까 그냥 연기나 해라"라고 할만큼 재능이 부족했지만, 오랜 연습끝에 춤을 잘 출 수 있게 되었다.<ref name="10아시아"/> 같은 해 2005년에는 CJ 뮤직이 글로벌 프로젝트로 에스블러쉬라는 그룹을 결성해 초창기 멤버로 발탁되었다.<ref name="머니투데이">{{뉴스 인용 |제목 =손담비, 빌보드 톱 랭크 에스-블러시 멤버였다 |url =http://star.mt.co.kr/view/stview.php?no=2007050618490436796&type=1&outlink=1|출판사 =머니투데이|저자 =김원겸|날짜 = 2007-05-06 |확인날짜 = 2014-05-15}}</ref> 2007년 5월에는 [[가희]]와 함께 에스블러쉬 멤버로서 〈It's My Life〉를 발매했고, 미국 [[빌보드]] 핫 댄스 클럽 플레이 차트 2위까지 진입했다.<ref>{{뉴스 인용|제목=손담비, 빌보드 톱 랭크 에스-블러시 멤버였다|url=http://star.mt.co.kr/view/stview.php?no=2007050618490436796&type=1&outlink=1|출판사=머니투데이|저자=김원겸 기자|날짜=2007-05-06|확인날짜=}}</ref> 하지만 팀 내부 사정으로 솔로로 전향하게 되었다.<ref name="머니투데이"/>
         2008년 2월 29일 게임 [[프리스톤테일2]]의 주제가 "Change the World"를 불렀다.<ref>[http://music.naver.com/album/index.nhn?albumId=136656 네이버 뮤직 - Change The World (프리스톤테일 2) O.S.T] 《[[네이버]]》</ref> 같은 해 4월 29일 손담비는 첫 미니 앨범 ''[[Mini Album Vol.1]]''을 발매하며 컴백 했다. 앨범의 타이틀 곡 "Bad Boy"로, 전 에스블러쉬 멤버로 함께 활동했던 [[가희]]가 피처링으로 참여했다. 이 때 손담비는 주로 여성스러운 이미지로 활동했다. "Bad Boy"는 발표한지 2주만에 음원 사이트 1위를 차지했고, 지상파 음악 프로그램에 출연할때마다 검색어 순위는 1위를 차지하는 등 관심을 모았다.<ref>{{뉴스 인용|제목=손담비 '배드 보이', 29일 미니앨범 공개 후 '대박 조짐' |url=http://joynews.inews24.com/php/news_view.php?g_menu=700100&g_serial=327079|출판사=조이뉴스24|저자=박재덕|날짜=2008년 4월 20일|확인날짜=2011-02-06}}</ref> 뮤직비디오가 공개된 후에는 조회수가 20만 건이 넘었고, 무대에서 입고나온 코르셋 스타일의 파격적인 의상도 많은 관심을 받아 홈페이지가 폭주하기까지 했다.<ref>{{뉴스 인용|제목= 손담비 코르셋패션 "열기"...홈페이지 또 "혼수상태" |url=http://www.hkn24.com/news/articleView.html?idxno=13163|출판사= 깜뉴스|저자=신명희 기자|날짜=2008년 5월 25일|확인날짜=}}</ref>
         EP 활동의 끝난 뒤인 2009년, 첫 정규 음반 ''[[Type-B]]''의 발매로 컴백을 준비했다. 음반 발매와 음원 공개에 앞서 총 3차에 걸친 티저를 선공개하였는데, 2009년 3월 19일 타이틀곡인 〈토요일밤에〉 1차 티저를 공개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손담비 ‘토요일밤에’ 티저영상, 팬들 반응 뜨거워|url=http://www.maxmovie.com/movie_info/ent_news_view.asp?mi_id=MI0083262026|출판사=맥스뉴스|날짜=2009-03-19 |확인날짜=2010-12-29}}</ref> 이어 20일에는 롤러스케이트 장으로 꾸며진 곳에서 1980년대 디스코풍의 2차 티저를 공개하였는데, 마지막에 '토요일 밤에'라는 문구가 등장에 더욱 궁굼증을 자아냈다.<ref>{{뉴스 인용|제목=손담비, '토요일밤에' 2차 티저 공개 이번엔 '롤러걸'|url=http://www.maxmovie.com/movie_info/ent_news_view.asp?mi_id=MI0083284482|출판사=맥스뉴스|날짜=2009-03-20 |확인날짜=2010-12-29}}</ref> 23일에는 백발의 손담비가 등장, 마지막 3차 티저를 공개하여 팬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ref>{{뉴스 인용|제목='백발' 손담비, '토요일 밤에' 3차 티저 영상 공개 |url=http://www.maxmovie.com/movie_info/ent_news_view.asp?mi_id=MI0083340682|출판사=맥스뉴스|날짜=2009-03-23 |확인날짜=2010-12-29}}</ref> 다음날인 24일 타이틀곡 〈토요일밤에〉 음원이 공개된 후, 폭발적인 상승세로 바로 음원사이트 10위 권에 진입하며 또 다른 손담비 열풍을 예고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 손담비 '토요일밤에' 컴백, 그녀의 '인기몰이' 이미 예견된 수순|url=http://www.maxmovie.com/movie_info/ent_news_view.asp?mi_id=MI0083410074|출판사=맥스뉴스|날짜=2009-03-26|확인날짜=2010-12-29}}</ref> 〈토요일밤에〉는 80년대 디스코 복고풍으로 후렴구부분의 '하늘 찌르기춤'으로 인기를 얻었다.<ref name="하늘찌르기춤">{{뉴스 인용|제목= 손담비, 의자춤 이어 하늘찌르기춤 신드롬 일으킨다 |url=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0905032208311001|출판사=뉴스엔|저자=김형우 기자|날짜=2009-05-04}}</ref> 26일에는 첫 정규 음반 ''[[Type-B]]''가 발매되었다. 한편, 〈토요일 밤에〉가 발표된 뒤, 뜨거운 인기몰이를 하고있던 손담비는 2009년 4월 10일, [[KBS]] 《[[뮤직뱅크]]》에서 첫 1위를 하였고 《[[엠 카운트다운]]》,《[[인기가요]]》 등에서도 1위를 해 그 인기를 실감케하였다. 또한 CF계에서도 러브콜이 쇄도하여 광고 섭외순위가 0순위라는 말까지 떠돌았고,<ref>{{뉴스 인용|제목=이승기, 손담비…광고모델 섭외 0순위 드러내|url=http://www.obsnews.co.kr/EnterNews/316308|출판사=OBS 연예뉴스|저자=김광선 에디터|날짜=2009-10-23|확인날짜=}}{{깨진 링크|url=http://www.obsnews.co.kr/EnterNews/316308 }}</ref> 연말에는 MTN 2009 방송광고 페스티벌에서 여자 CF 모델상을 수상하기도 하였으며, 〈토요일밤에〉로 [[골든디스크]], [[서울가요대상]] 에서 수상을 하였다. 정규 앨범 활동이 끝나자 손담비는 [[2009년]] 7월부터 방영된 SBS 월화 드라마 《[[드림 (드라마)|드림]]》에서 박소연이라는 여자 주연으로 출연했지만, 상업적으로 큰 실패를 거두었고, 연기력 논란까지 일어났다. 하지만, [[SBS 연기대상]]에서 뉴 스타상을 받았다.<ref>{{뉴스 인용|제목='드림' 시청률 울상 손담비, 뉴스타상에 웃었다|url=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1001011306221001|출판사=뉴스엔|저자=김소희 기자|날짜=2010-01-21 |확인날짜=}}</ref>
         손담비는 2010년 5월 컴백을 앞두고 준비해왔지만, 같은 소속사 그룹인 [[애프터스쿨]]이 [[천안함 침몰 사건]]으로 인하여 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해 활동이 미뤄졌다.<ref>{{뉴스 인용|제목= 손담비 컴백 연기..애프터스쿨 때문?|url=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10042809051209710|출판사=아시아 경제|저자=조범자 기자|날짜=2010-04-28|확인날짜=}}</ref> 한달 뒤인 2010년 6월 25일 손담비는 공식 사이트를 통해 컴백을 알렸다.<ref>{{뉴스 인용|제목='섹시디바' 손담비, 1년 3개월만의 컴백…움직임 포착!|url=http://autotimes.hankyung.com/article_view.php?id=81096|출판사=오토타임즈|저자=연예취재팀|날짜=2010-06-25|확인날짜=}}</ref> 7월 2일에는 음반의 수록곡 중 하나인 "Can't u see"를 공개해 많은 관심을 받았다.<ref>{{뉴스 인용|제목=손담비, '그림자댄스'로 서버다운까지? '히트예감'|url=http://ntn.seoul.co.kr/main.php?cmd=news/news_view&idx=39797|출판사=서울신문NTN|저자=오영경 인턴기자|날짜=2010-07-03|확인날짜=}}{{깨진 링크|url=http://ntn.seoul.co.kr/main.php?cmd=news%2Fnews_view&idx=39797 }}</ref> 음반 발매 하루 전 날에는 전곡이 유출되는 사고가 일어났다.<ref>{{뉴스 인용|제목=허무한 손담비, 컴백 하루전 음원유출|url=http://sportsworldi.segye.com/Articles/EntCulture/Article.asp?aid=20100708004612&subctg1=10&subctg2=00|출판사=스포츠월드|저자=김용호 기자|날짜=2010-07-09|확인날짜=2010-12-06}}</ref> 그리고 2010년 7월 8일 ''The Queen''을 발매했다. 이후 《[[뮤직뱅크]]》를 시작으로 《[[음악중심]]》, 《[[인기가요]]》에서 "Can't u see"와 "queen"을 선보이며 컴백 무대를 펼쳤다. 한편, 7월 결산 차트에서 손담비는 "Can't U See"와 "queen"이 20위권에 들면서 7월 상위 20위권 차트에서 유일하게 2곡 이상을 진입시킨 가수가 됐다.<ref>{{뉴스 인용|제목=손담비, 7월 음원 톱20 멀티히트 가수 '유일'|url=http://star.mt.co.kr/view/stview.php?no=2010080215133583882&type=1&outlink=1|출판사=머니투데이|저자=김관명 기자|날짜=2010-08-02|확인날짜=}}</ref> 이렇게 초반에는 좋은 출발을 했지만, 얼마 안 되어 "queen"의 MR을 제거한 영상이 올라오면서 처음으로 가창력 논란이 일어났다.<ref name="아츠">{{뉴스 인용|제목='표절논란' 손담비 '퀸(Queen)' MR제거, 무엇이 문제일까?|url=http://www.artsnews.co.kr/news/89424|출판사=아츠뉴스|저자=박진영 기자|날짜=2010-07-12}}</ref> 또한 "queen"의 뮤직비디오 일부분이 미국 드라마 《엘리스》의 장면과 매우 흡사하다는 표절논란을 빚어 소속사는 논란이 된 장면들을 모두 삭제키로 결정했다.<ref>{{뉴스 인용|제목=손담비, 뮤비 표절 논란 일부 장면 삭제|url=http://www.today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6279|출판사=투데이코리아|저자=김민철 기자|날짜=2010-07-12}}{{깨진 링크|url=http://www.today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6279 }}</ref> 2010년 8월, 손담비는 타이틀곡 활동을 마무리했다.<ref>{{뉴스 인용|제목=손담비 ‘퀸’ 활동 끝 ‘잠시만 안녕’ 모두다 이뤄졌나?|url=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1008201835291002|출판사=뉴스엔|저자=이언혁 기자|날짜=2010-08-20}}</ref> 이후 후속곡인 "[[dB Rider]]"로 9월부터 10월 초까지 활발하게 활동했지만, 크게 히트치지는 못했다.<ref>{{뉴스 인용|제목=‘라이더 변신’ 손담비, 파워풀한 섹시美 돋보인 후속곡 첫 무대 |url=http://www.mydaily.co.kr/news/read.html?newsid=201009171909341131&ext=na|출판사=마이데일리|저자=강선애 기자|날짜=2010-09-17|확인날짜=2010-10-12}}</ref>
         한편, 손담비가 무대에서 특유의 표정을 지어 '업신담비'로 불리며 인터넷상에서 큰 화제가 되었다.<ref>{{뉴스 인용|제목= 손담비 업신 표정 화제 "니가?" … 본인도 쿨하게 인증|url=http://www.hkn24.com/news/articleView.html?idxno=57743|출판사=이슈프리즘 깜뉴스|저자=인터넷뉴스팀|날짜=2010-10-16|확인날짜=2010-12-22}}</ref> 2010년 10월부터는 MBC의 새 예능 프로그램 《여우의 집사》에 출연하기도 했지만, 저조한 시청률로 인해 방영된지 2개월만에 폐지되었다.<ref>{{뉴스 인용|제목 = 여우의 집사 폐지…불과 2개월만, 잘나가던 뉴스후 폐지하더니|url = http://www.newsprime.co.kr/news/articleView.html?idxno=177604|출판사 = 프라임 경제|날짜 = 2010-12-17|확인날짜 = 2010-12-29|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140729055321/http://www.newsprime.co.kr/news/articleView.html?idxno=177604#|보존날짜 = 2014-07-29|깨진링크 = 예}}</ref> 한편 손담비는 대만에서 큰 인기를 얻었는데, 〈미쳤어〉와 《드림》의 인기로 '2010 [V] CHINESE TOP 연도 시상식 콘서트'에서 아시아 최고 아티스트상을 수상했다.<ref name="대만">{{뉴스 인용|제목=‘섹시 퀸’ 손담비, 대만진출 나선다|url=http://news.donga.com/3//20110117/33997010/1|출판사=donga.com|저자=김원겸 기자|날짜=2011-01-17|확인날짜=2011-01-17|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40728204248/http://news.donga.com/3//20110117/33997010/1|보존날짜=2014-07-28|깨진링크=예}}</ref> EP 음반 ''The Queen''역시 대만에서 음반 차트 등 각종 차트 정상을 차지했다.<ref name="대만"/> 한편, 2011년 1월에 제20회 서울가요대상에서 본상을 수상하며 3년연속 본상을 수상받았다.<ref name="20회 서가대">{{뉴스 인용|제목=손담비, '서울가요대상' 3년 연속 본상 수상|url=http://www.newsway.kr/news/articleView.html?idxno=101847|출판사=뉴스웨이|저자=최가람 기자|날짜=2011-01-21|확인날짜=2011-01-21}}</ref> 이어 아시아모델시상식에서도 BBF 인기가수상을 수상했다.<ref name="BBF">{{뉴스 인용|제목=권상우ㆍ소녀시대ㆍ옌청쉬, '아시아 스타상'|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01&aid=0004878908|출판사=네이버뉴스|저자=연합뉴스 임은진 기자|날짜=2011-01-21|확인날짜=2011-01-22}}</ref> 2011년 5월부터는 피겨스케이팅 예능 프로그램 《[[김연아의 키스 & 크라이]]》에 출연했고, TOP4에 진출했다.<ref>[http://wizard2.sbs.co.kr/w3/template/tpl_freetype.jsp?vVodId=V0000349432&vProgId=1000708&vMenuId=1014807 김연아의 키스앤크라이 출연진 및 MC 소개] 《[[SBS]]》. 2011-05-21 확인.</ref> 2011년 11월부터는 MBC의 드라마 《빛과 그림자》에서 가수 유채영 역으로 출연했고, 미디엄 템포 장르의 드라마 OST "Everything"을 불렀다.<ref>{{뉴스 인용|제목=손담비, ‘빛과 그림자’ OST 참여 ‘호소력 짙은 목소리 뽐내’|url=http://artsnews.mk.co.kr/news/188777|출판사=아츠뉴스|저자=김세영|날짜=2012-01-04|확인날짜=2012-01-05}}</ref> 《빛과 그림자》는 동시간대 드라마 시청률 1위를 유지했고, 손담비는 연기력을 인정받았다.<ref>{{뉴스 인용|제목='발연기'한다던 손담비, 어느덧 '배우'가 됐다|url=http://news.sportsseoul.com/read/entertain/1047784.htm|출판사=[[스포츠서울]]|저자=오영경|날짜=2012-06-12|확인날짜=2012-06-18|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20616025258/http://news.sportsseoul.com/read/entertain/1047784.htm#|보존날짜=2012-06-16|깨진링크=예}}</ref> 2011년 12월 1일에는 [[애프터스쿨]]과 함께 해피 플레디스 2012 시리즈인 ''[[Happy Pledis 2012 'Love Letter']]''를 발매했고, 수익금 일부를 [[유니세프]]의 "아우인형" 프로젝트에 기부했다.<ref>[http://music.naver.com/album/index.nhn?albumId=304689 네이버 뮤직 - Happy Pledis 2012 `Love Letter`] 《네이버》. 2012-01-05 확인.</ref> 2012년 8월, 《빛과 그림자》가 종영되었고, 손담비는 가수로서 컴백을 준비했다.<ref>{{뉴스 인용|제목=손담비, 런던올림픽과 한판|url=http://sports.donga.com/3/all/20120612/46956635/3|출판사=[[스포츠동아]]|저자=김원겸|날짜=2012-06-13|확인날짜=2012-06-18}}</ref>
  • 송진현 . . . . 5회 일치
         * 서울형사지방법원 형사항소6부 재판장으로 재직하던 1997년 10월 24일에 [[인천역]]에서 다른 승객이 놓고 간 35000원 상당의 공구함을 들고가다 붙잡힌 피고인에 대해 "지하철이 종착역에 도착한 순간부터 점유권이 지하철공사에 있으므로 피고인의 행위는 절도죄에 해당한다"며 징역10월을 선고했다.<ref>경향신문 1997년 10월 25일자</ref> 1998년 1월 10일에 일반음식점 영업 허가없이 통조림, 캔류 등 안주류를 파는 24시간 편의방을 운영해 1심에서 무죄가 선고된 피고인에 대해 식품위생법 위반으로 벌금 100만원을 선고했다.<ref>경향신문 1998년 1월 11일자</ref> 1999년 1월 10일에 폭행 혐의로 조사를 받다가 경찰관의 신분증 제시 요구에 다른 사람의 운전면허증을 보여줘 공문서 부정행사죄로 기소되어 1심에서 징역8월 집행유예2년을 선고받은 정모씨에 대한 항소심에서 "관련 법령에 따라 운전면허증을신분증으로 규정한 조항이 없다"며 일부 무죄를 선고했다.<ref>경향신문 1999년 1월 11일</ref> 4월 24일에 서울대 캠퍼스에서 집단 농성을 주도한 한국통신 서울본부 위원장에 대해 "서울대 총장이 한국통신 노조의 총파업에 대해 학내 출입을 금지했음에도 무단 진입했다"며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과 업무방해죄를 적용해 벌금 700만원을 선고했다.<ref>동아일보 1999년 4월 26일자</ref> 5월 17일에 [[한총련]] 범민족통일대축전에 참가했다가 [[집시법]]위반과 건조물 침입죄로 1심에서 징역8월 집행유예1년이 선고된 노래패 '희망새에 대해 단장 조모씨(31세)에 대해 "당국의 허가를 받지 않은 집회라고 하더라도 공연의 목적으로 참석했고 구호를 외치거나 연설을 하는 등 집회,시위를 한 것이 아니다"는 이유로 원심을 깨고 [[집시법]]위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ref>한겨레 1999년 5월 18일자</ref> 10월 7일에 폭력배를 동원해 채무 해결사 노릇을 했던 [[홍수환]]에 대해 "평소 알고 지내던 사람 부탁으로 후배를 연결해준 점은 인정되지만 채권을 회수하기로 후배와 공모한 일은 그 뒤에 이뤄져 피고인이 개입됐다고 볼 수 없다"며 원심을 깨고 무죄를 선고했다.<ref>한겨레 1999년10월 8일자</ref>
         * 서울형사지방법원 형사6부 재판장으로 재직하던 1997년 1월 10일에 성적이 떨어진 학생을 막대기로 뗘 상해죄로 1심에서 벌금 100만원을 선고받은 체육교사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ref>한겨레 1997년 11월 11일자</ref>
  • 알케이 . . . . 5회 일치
         ||<#000000><:>'''{{{#white 출생}}}'''||<#ffffff>[[1991년]] [[5월 11일]] ([age(1991-05-11)]세), [[대구광역시]] [[수성구]]||
         ||<#ffffff><:>2018년 5월 28일||<#ffffff><:>Yyes ||<#ffffff>Leave Me Alone (feat. ARKAY)||<#ffffff><:>[[https://youtu.be/-uh-wgJ7w1Y|듣기]] ||
         ||<#ffffff><:>2018년 5월 28일||<#ffffff><:>[[EB]] ||<#ffffff>초점 (feat. Dono)||<#ffffff><:>[[https://youtu.be/IV-OSY7b3vA|M]][[https://youtu.be/BTZ7f8ay8ZU|V]] ||
         ||<#ffffff><:>2014년 5월 22일||<#ffffff><:><|3>ARKAY ||<#ffffff>MR. CHU (Remix) (feat. DONO)[* [[Apink]]의 [[Pink Blossom|곡]]을 리메이크] ||<#ffffff><:>[[https://soundcloud.com/aa_official/arkay-mr-chu-remix-feat-dono|링크]] ||
         ||<#ffffff><:>2015년 5월 29일||<#ffffff>One Piece (feat. [[앧콘|Addcorn]])(prod. By DONO) ||<#ffffff><:>[[https://soundcloud.com/aa_official/arkay-one-piece-feat-addcornprod-by-dono|링크]] ||
  • 윤길현 . . . . 5회 일치
         2011년 12월 2일, SK 감독 [[이만수]]는 윤길현과 [[채병용]]을 2012년 전력에 포함시키지 않는다고 했지만 2012년 7월 10일 윤길현은 1군으로 올라왔다.
         5월 3일 2군에서 평균자책점 10.38을 기록하고 있는 와중에 1군으로 콜업되었다. 구승민이 옆구리 부상을 당하면서 대신 1군에 등록된 것이다. 그리고 5월 5일 어린이날에 친정 SK를 상대로 0.2이닝 무실점의 깔끔한 투구를 보여주고 [[이명우]]에게 바통을 넘겼다.
         5월 9일 LG전은 1.2이닝 동안 2탈삼진 무실점을 기록했다. 참고로 이날 경기로 개인 통산 600경기 출장을 달성했다.
         5월 20일 10회 초 2:2라는 중요한 상황에 등판해 공 10개 중에 1개만 존에 넣고 내려갔다. 결국 그것 때문에 멸망했다. ~~연장이라고 셀프 승부치기 만들어주는 클라스~~
  • 이갑성 . . . . 5회 일치
         이때 [[김규식]](金奎植) 등의 좌우합작에 협력하던 중 그뒤 단정 수립론과 남북협상론이 나오자 [[이승만]]의 단정 수립론을 지지하였다. [[1948년]] [[3월]] [[미 군정]]청 군정장관 딘 소장으로부터 [[5·10 총선거]]를 관리하기 위한 중앙선거위원회 위원의 한 사람에 임명되었다. [[1948년]] [[5월]]에는 [[이승만]]의 친위조직화된 [[대한인국민회]] 소속으로 대구에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이후 [[대한인국민회]]를 지도, 운영하였다.
         [[이승만]]의 단정 수립에 참여하였으며 [[1950년]] [[5월]]에는 국민회 소속으로 대구에서 제2대 [[민의원]](民議院) 의원 선거에 출마, 당선되었다. [[6.25 전쟁]] 직후 [[6월 28일]] [[서울]]이 점령당하자 자가용편으로 [[대전]]으로 피신, 무임소 장관으로 국무회의에 참석하였다.
         [[1951년]] [[5월 16일]] [[이시영]] [[부통령]]의 사퇴로, [[부산 피난지]]에서 열린 [[제2대 국회]]에서 실시한 제2대 부통령선거에서 여당격인 [[대한국민당 (1948년)|대한국민당]] 소속 [[부통령]] 후보로 입후보하였으나 낙선했다. 재적 국회의원 210명 중 재석의원 151명에 의해 선출된 부통령 선거에서 [[민주국민당 (1949년)|민주국민당]] 소속 [[김성수 (1891년)|김성수]]와 경합했는데, 1차 투표와 2차 투표에서 당선표수 미달, 3차 투표에서 73표를 얻어 낙선, 78표를 얻은 [[김성수 (1891년)|김성수]]가 부통령으로 선출됐다.
         |임기 = [[1950년]] [[5월 31일]] ~ [[1954년]] [[5월 30일]]
  • 이경영(1960) . . . . 5회 일치
         한편 형사재판이 종결된 후, L양과 그 부모는 이경영을 상대로 정신적 손해에 대해 배상하라는 민사소송을 제기했고 2004년 5월 L양 측이 승소했다.
          * 2002년 5월 14일: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위반 (소위 원조교제) 혐의로 긴급체포
          * 2002년 5월 16일: 구속영장 발부
          * 2004년 5월: 민사재판 판결 선고 (L양 측 승소)
         5월 : 무명인(유강진 역)
  • 전예용 . . . . 5회 일치
         [[1947년]] [[고려대학교]] 강사가 되었다가 [[1948년]] [[8월 15일]][[외무부]] 통상국장에 임명되었다. 1949년 [[서울특별시 부시장]]에 임명되었으며 [[6.25 전쟁]] 중인 [[1951년]] [[5월]]부터 [[6월]]에는 [[서울특별시장]]직무대리를 역임하였다.
         * 아버지 : [[전성배]](全聖旭, [[1877년]] [[5월 20일]] ~ ?)
         |임기 = 1951년 5월 8일 ~ 1951년 6월 26일
         |임기 = 1960년 9월 8일 ~ 1961년 5월 30일
         |임기 = 1964년 5월 11일 ~ 1966년 12월 27일
  • 정재학 (1856년) . . . . 5회 일치
         또한 그의 민족계 은행 경영 노하우는 그의 혈맥을 통해 전해지면서 1950년 중반 [[조흥은행]]은 초우량 기업으로 성장한다. [[대한민국]] [[증권거래소]]가 개장된 1956년 [[조흥은행]]은 국내 기업 중 최초의 [[상장사]]로 등극했다.<ref>경향신문 1998년 4월 10일 9면</ref><ref>서울경제 온라인판 2006년 3월1일 16:55 입력 조흥은 '최초 은행 1호 상장사' 숱한 기록 http://economy.hankooki.com/lpage/economy/200603/e2006033116560370100.htm</ref><ref>한겨레 1992년 2월 28일 19면 상장사 12개로 증권시장 첫발</ref>
         [[정재학]]은 1905년 [[군수]]자리에 오른다. 고급관료와 친분을 맺어 순흥군수에 이어 개령군수를 맡게 됐다. 전임 군수와 달리 세금도 낮춰주고 밥 굶는 이들이 없게했다. 장사꾼들에게는 밑천도 대줬다. 그는 군수 직책에 있으면서 은행업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 1906 년 8월 [[대구상공은행]]이 설립 될 당시 이병학, 이종면 등의 부호들과 힘을 합쳐 대주주로 등극하면서 감사역도 맡았다.<ref name="ReferenceA"/><ref>매일경제 1982년 12월 10일 7면 재계산맥 [[대구은행]] 편 -12</ref>
         1913년 [[조선총독부]]의 인가를 받아 그 해 5월 창립총회에서 은행장으로 선출됐다. 그는 [[대구은행]] 행장 직을 수행하면서도 지분참여 등을 통해 [[경상농공은행]], [[경일은행]] 등의 경영에도 깊숙이 개입했다 .
         이런 사실이 널리 알려지면서 그는 [[1966년]] 경향신문이 제정한 제1회 '국민의 주는 희망의 상' 대상수상자로 선정됐다. 내무부장관 국회사무총장 등 각계에서 격려 축전을 보냈다.<ref>경향신문 1966년 9월 28일 3면</ref><ref>경향신문 1967년 8월 17일 8면</ref> 정인택은 경향신문에 연재한 당선소감에 자신이 정재학의 증손자라고 적고 있다.<ref>경향신문 1966년 10월 10일 7면</ref>
         그러나 오구라는 행장에 오르지 못한 반면 정재학의 손자인 [[정운용]]은 1940년 4월 27일 열린 이사회에서 대표 이사 (대표취체역) 겸 행장에 선임됐다. 이듬해인 1941년 7월 총독부는 전시금융체제를 강화한다는 이유로 금융기관 정리통합 방침을 밝혔다. 예상과 달리 [[경상합동은행]]은 [[대구상공은행]]과의 합병대신 1941년 8월10일 서울 소재 [[한성은행]]에 흡수 합병됐다. 정운용은 한성은행 주식 1220주를 보유하면서 [[상무]] [[취체역]](상무이사)로 발탁됐다. 해방 후 한국인 최초의 은행장이 되는 계기였다. 오구라는 이에 상심한 듯 은행업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본업인 전력산업에 집중한다.
  • 채동욱 . . . . 5회 일치
         [[2017년]] 5월 변호사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 2017년 5월 ~ : 법무법인 서평 대표변호사
         * 4월 16일 : 서울중앙지검장 독대보고제 21년만에 폐지<ref>[http://news.hankooki.com/lpage/society/201304/h2013041621120521950.htm 채동욱 검찰총장 "중앙지검장 독대 보고 폐지 검찰개혁 5월 말까지 완결"] 《한국일보》 2013년 4월 16일 남상욱 기자</ref>
         * 5월 24일 : 전두환 전 대통령 미납추징금환수팀 구성
         * 9월 10일 : 전두환 전 대통령 미납추징금 자진납부계획 발표
  • 채상현 . . . . 5회 일치
         |첫 출장 = [[KBO (야구)|KBO]] / [[2017년]] [[5월 7일]]<br/>[[고척스카이돔|고척]] 대 [[SK 와이번스|SK]]전 대주자
         |마지막 경기 = [[KBO (야구)|KBO]] / [[2017년]] [[5월 13일]]<br/>[[대구 삼성 라이온즈 파크|대구]] 대 [[삼성 라이온즈|삼성]]전
         2016년에 입단하였다. [[2017년]] [[5월 7일]] [[SK 와이번스]]와의 경기에서 대주자로 출전하며 1군 데뷔 첫 경기를 치렀다. 경기에서 1타수 무안타 1볼넷을 기록하였다. [[2017년]] [[5월 10일]] [[NC 다이노스]]와의 경기에서 데뷔 첫 안타를 기록하였다.
  • 최광수 (공무원) . . . . 5회 일치
         |임기 = [[1979년]] [[11월 7일]] ~ [[1979년]] [[12월 10일]]
         |임기 = [[1979년]] [[12월 10일]] ~ [[1980년]] [[8월 27일]]
         |임기 = [[1980년]] [[9월 2일]] ~ [[1981년]] [[3월 10일]]
         |임기 = [[1981년]] [[3월 10일]] ~ [[1982년]] [[5월 20일]]
  • 최남선 . . . . 5회 일치
         '''최남선'''(崔南善, 1890년 4월 26일 ~ 1957년 10월 10일)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 문학가이자 [[대한민국]]의 [[사회 운동|문화운동가]]이다. 본관은 [[동주 최씨|동주]](東州)이다.
         [[1957년]] [[10월 10일]] [[뇌일혈]]로 별세한 그는 일제 강점기 시대 동안에 [[이광수]], [[홍명희]]와 더불어 '''조선의 3대 천재'''로 대표되었던 인물이다.
         1907년 5월, 귀국한 뒤 한민족의 시대적 각성을 위한 신문화 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인쇄 시설을 구입하여 1907년 11월 [[이광수]] 등과 함께 잡지 [[소년]]지를 창간한다. 소년지에서 그는 논설문과 새로운 형식의 자유시 〈해(海)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하였고, 이광수는 계몽적인 소설을 실어 대중의 인기를 모았다. 최남선과 이광수가 발행한 잡지 《소년》지는 근대적 종합잡지의 대표적인 잡지이며 어린이, 소년을 대상으로 한 잡지 중 초기작의 하나이기도 하다. 후일 그가 소년 잡지를 창간한 11월 1일이 잡지의 날로 정해지기도 했다.
         1949년 1월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곧 바로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 투옥되었으나 병보석으로 출감하여 5월에 공판을 받았다. 수감 중에 그는 자신은 민족을 위해서, 나의 연구 성과를 지키기 위해서 협력하였다고 항변하였으며, 특별재판부에 참회의 뜻을 담은 '자열서'(自列書)를 제출했다. 그러나 그를 기소한 [[반민특위]]는 [[친일파]] 출신 정치인들이 친일 인사들을 정치적 목적에서 감싸면서 탄압받았고 1949년 2월 병보석 신청이 받아들여져 석방, 그의 친일행각은 사실상 처벌되지 않았다.
         1950년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대한민국]] 해군전사편찬위원회'에서 일했다. 휴전 후 《서울시사(市史)》 편찬위원회 고문으로 재직하였고, 신문과 잡지에 한국의 역사 문화와 관련된 기고활동을 계속했다. 1957년 10월 10일 《한국역사대사전》을 편찬하던 도중 병으로 죽었다.
  • 최윤동 . . . . 5회 일치
         '''최윤동'''(崔允東, [[1897년]] [[7월 3일]] [[대구광역시|대구]] - [[1968년]] [[5월]])은 대한민국의 국회의원이다.
         * [[대한민국 제헌국회 총선|1948년 5월 10일]] : [[대한민국 제헌국회 총선 경상북도#대구부 갑구 (제1선거구)|제헌 국회의원(경북 대구갑)]]
         |임기 = [[1948년]] [[5월 31일]] - [[1950년]] [[5월 30일]]
  • 코만단테 카펠리니 . . . . 5회 일치
         1943년 5월 11일 [[보르도]], 아퀼라 III는 일본에 보급할 물자를 싣고 [[싱가포르]]로 출항한다. 7월 13일, 두달간의 항해 끝에 아퀼라는 싱가포르에 도착했다. 한편 유럽에서는 연합군이 [[시칠리아]]에 상륙한 상황이었다. 결국 9월 8일, 이탈리아는 연합군에 항복했다. 그때도 아퀼라 III는 싱가포르에 정박해 있었다.
         ||UIT-24, 1943년 9월 10일||
         1945년 5월, 독일이 항복했다. 일본군은 [[고베]]에서 수리중이던 UIT-24를 접수해 I-503이라는 이름으로 편입시켰다. 4개월 후, 일본 역시 항복했다.
         || 1942년 5월 18일 || 티스나렌(Tisnaren) || 상선 || [[스웨덴]] || 9,450t || 0명 || [http://tisnaren.blogspot.kr/2007/09/cargo-ship.html|배수량 출처] ||
         || 1942년 5월 31일 || 딘스데일(Dinsdlae) || 유조선 || [[영국]] || 8,214t || 13명 || [[http://www.wrecksite.eu/wreck.aspx?137277|배수량 및 사망자 출처]] ||
  • 표양문 . . . . 5회 일치
         '''표양문'''(表良文, [[1907년]] [[5월 15일]] [[한성부]] ~ [[1962년]])은 초대 인천시장과 제3대 국회의원을 지낸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본관은 [[신창 표씨|신창]].
         |임기 = [[1949년]] [[8월 15일]] ~ [[1950년]] [[5월]]
         |임기 = [[1952년]] [[5월]] ~ [[1954년]] [[2월]]
         |임기 = [[1954년]] [[5월 31일]] ~ [[1958년]] [[5월 30일]]
  • 한필수 . . . . 5회 일치
         |사망일= [[1986년]] [[4월 10일]] 양력
         '''한필수'''(韓弼洙, [[태양태음력|음력]] [[1900년]] [[11월 6일]] ~ [[태양태음력|양력]] [[1986년]] [[4월 10일]])는 대한민국의 교육자이며 국회의원이었다.
         제2대 국회의원에 무소속으로 당선된 뒤 [[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에 입당하여 [[대한민국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법사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86년]] [[4월 10일]] 87세로 사망하였다. 사후 [[1996년]]에는 [[제천고등학교]] 개교50주년을 맞아 교정에 흉상이 세워졌다.
         |임기 = [[1950년]] [[5월 31일]] - [[1954년]] [[5월 30일]]
  • 함병춘 . . . . 5회 일치
         [[1983년]] [[1월 28일]]부터 [[2월 14일]]에는 대통령 특사에 임명되어 아프리카를 순방하고 되돌아왔고, [[5월 20일]]부터 [[6월 4일]]까지 대통령 특사에 임명되어 뉴질랜드와 인도네시아, 오스트레일리아를 순방하고 돌아왔다.
         * 조모 : 원주 변씨([[1850년]] [[12월 10일]] ~ [[1886년]] [[9월 1일]])
         ** 이복 형수 : 진주강씨([[1890년]] [[2월 10일]] ~ ?), 강성흠(姜星欽)의 딸
         *** 조카 : [[함인섭]](咸仁燮, [[1907년]] [[5월 3일]] ~ [[1986년]] [[9월 15일]], 춘천농대 학장, [[농림부]] 장관 역임)
         * 부인 :심효식(<ref>[http://news.hankooki.com/lpage/politics/200305/h2003050715164827000.htm 한국의 보배 함병춘… 강단 그리워한 진정한 공복] 한국일보 2003년 05월 07일자</ref> 沈孝植, [[1927년]] ~ , 화가)
  • 화완옹주 . . . . 5회 일치
         '''화완옹주'''(和緩翁主, [[1738년]] [[3월 9일]] ([[음력 1월 19일]]) ~ [[1808년]] [[5월]])는 조선의 제 21대 왕 [[영조]]와 [[영빈 이씨]]의 딸이다. 이름은 용완(蓉婉) [[조선 장조|사도세자]]의 친동생이자 조선의 제 22대 왕 [[정조]]의 고모이기도 하다. [[정후겸]]은 그녀의 양자이다.
         순조실록에는 1808년 5월 17일 삼사에서 올린 글에서 정치달의 처가 죽어 더 이상 죄를 묻지 않는다는 구절이 나온다. 즉 옹주의 사망일은 그 이전으로 사료되나 정확한 몰일을 파악할 수 없다. 다만 왕가의 전통상 졸기가 없고 무덤이 경기도 파주 유배지 인근이었던 것으로 보아 죽을 당시 죄를 완전히 벗지는 못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화완옹주 및 정치달 묘]]》는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사목리에 있다. 2001년 12월 21일 파주시의 향토유적 제14호로 지정되었다.
         *** 오빠 : [[조선 장조|장조의황제]] 선(莊祖懿皇帝 愃, 사도세자, 장헌세자, 1735년 1월 21일~1762년 윤5월 21일)
         *** <sup>이복</sup> 동생 : [[화유옹주]](和柔翁主, 1740년 9월 29일~1777년 5월 21일) - 창성위(昌城尉) 황인점(黃仁點)에게 하가
         *** <sup>이복</sup> 동생 : [[화길옹주]](和吉翁主, 1754년 5월 19일~1772년 12월 18일) - 능성위(綾城尉) 구민화(具敏和)에게 하가
  • 황종률 (정치인) . . . . 5회 일치
         |임기 = [[1952년]] [[12월 26일]] ~ [[1953년]] [[5월 28일]]
         |임기 = [[1952년]] [[12월 26일]] ~ [[1953년]] [[5월 28일]]
         |임기 = [[1960년]] [[5월 12일]] ~ [[1960년]] [[10월 7일]]
         |임기 = [[1967년]] [[10월 3일]] ~ [[1968년]] [[5월 21일]]
         |임기 = [[1968년]] [[5월 21일]] ~ [[1969년]] [[10월 21일]]
  • USS 피닉스 (CL-46) . . . . 4회 일치
         USS Phoenix. [[제2차 세계 대전]]과 [[포클랜드 전쟁]]에서 활동했던 [[브루클린급 경순양함]].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미해군 함정으로 활동하였으며 전후 [[아르헨티나]]에 넘겨져 ARA 헤네랄 벨그라노(ARA General Belgrano)라는 이름으로 취역하였다. 1982년 5월 2일, 영국 원자력 잠수함 [[HMS 컨쿼러]]의 뇌격으로 격침. 323명의 사망자를 내며 가라앉았다.
         1943년 7월, [[국무장관]]이었던 [[코델 헐]]을 [[카사블랑카]]까지 수송하는 임무를 수행한 피닉스는 다시 태평양 전역으로 돌아온다. 같은 해 12월에는 글로스터 곶에 상륙하는 연합군을 지원하였으며, 1944년 1월에는 [[뉴기니]] 섬의 해안시설을 포격하는 임무를 맡았다. 2월에는 [[로스니그로스]] 섬에 상륙하는 연합군을 지원하였고, 3월에는 다른 연합군 순양함과 함께 일본군의 해안 포대를 깨부쉈다. 4월 22일에는 홀란디아[* 現 [[자야푸라]].]에 상륙하는 연합군을 지원하였고, 그로부터 1주일 후에는 근처 지역의 일본군 비행장을 포격, 연합군을 위협할 수 없게 하였다. 5월에는 또다른 상륙작전들을 지원하여 일본군의 초소를 초토화시켰다. 6월에는 해당 지역에 증원군을 수송하던 일본군 구축함들을 발견, 쫓아내었다. 7월에는 Numfoor[* Neumfoor라고 읽기도 하는 듯. 갓-구글님께서 한국어 표기를 말씀하시지 않으신다.]의 해안을 포격했다. 9월에는 말루쿠 제도의 [[모로타이]] 섬 상륙작전을 지원하였다.
         1982년 5월 2일, 영국 해군 원자력 잠수함 HMS 컨쿼러가 헤네랄 벨그라노에게 [[어뢰]]를 발사, 명중시킨다. 영국 국방부는 이에 대해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고 발표하였다. 벨그라노는 심각한 피해를 입는 수준을 넘어서 가라앉았고, 이로인해 1,042명 중 323명의 승무원이 사망한다.
         2012년 5월 2일, 아르헨티나 정부는 헤네랄 벨그라노 침몰 30주년 행사를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개최했다.
  • 구본홍 . . . . 4회 일치
         2015년 5월부터 [[아시아투데이]] 부회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 2010년 5월 ~ 2013년 5월 : CTS기독교TV 사장
         * 2015년 5월 ~ : [[아시아투데이]] 상근부회장
  • 구자춘 . . . . 4회 일치
         1932년 5월 11일 ~ 1996년 2월 10일
         1932년 5월 11일 [[경상북도]] [[달성군]] 다사면 세천리(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세천리)에서 태어났다.
         1996년 2월 10일 심장수술을 받던 중 사망하였다.
  • 궁예 . . . . 4회 일치
         |출생일 = [[869년]] [[음력 5월 5일]]
         '''김궁예'''(金弓裔, [[869년]] [[음력 5월 5일]] ~ [[918년]] [[7월 24일]], 재위: [[901년]] [[7월]] ~ [[918년]] [[7월 24일]]([[음력 6월 14일]]))는 [[신라]]의 왕가 서족(王家 庶族) 출신의 [[승려]]이자, [[태봉]]의 군주이다. 그는 [[신라 헌안왕]] 또는 [[경문왕]]과 후궁 사이에 태어난 유복자였다.<ref>《[[삼국사기]]》권 제50 열전 제10 궁예편. 궁예에 관하여 가장 기본적인 사료로, 여기서 인용되는 문장은 특별한 표시가 없다면 이곳에서 인용된 것이다.</ref> [[장보고]]의 외손이라는 설도 존재 한다.<ref>{{웹 인용|url=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6789|제목=궁예|확인날짜=2013-09-05|웹사이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 그의 본래 속세 성은 '''김'''(金)씨, 본관은 [[경주 김씨|경주]](慶州), [[불교]] 승려로서의 법명은 '''선종'''(善宗)이고, 별명은 미륵(彌勒), [[일목대왕]](一目大王<ref name="cho01">http://newsplu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12/17/2008121701603_3.html</ref><ref>20세기 초의 사학자 단재 [[신채호]]가 붙인 별명이다.</ref>)이다. [[918년]] [[고려 태조|왕건]]에게 축출되었으므로 시호는 없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궁예는 신라 제47대 국왕 [[헌안왕]](혹은 신라 제48대 국왕 [[경문왕]])의 빈어(嬪御) 소생, 즉 서자로 기록되어 있다. 원래 이름은 '김궁예'다.<ref>신라왕의 서자이긴 하지만 정확히 어느 왕의 서자인가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다.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헌안왕]]설을 채택했고, [[전남대학교]] 정청주 교수 또한 아들이 없고 딸만 두 명이었기에 맏사위였던 응렴(경문왕)이 즉위하게 된 상황에서 궁예가 태어났으며 이때 응렴의 아버지로 앞서 헌안왕의 즉위에도 힘을 보탠 바 있는 시중 계명(啓明)이 자신의 아들인 응렴을 즉위시키기 위해 헌안왕의 아들인 궁예를 제거하려 했을 것으로 추정했다(「궁예와 호족 세력」 『신라말 고려초 호족 연구』, P.65~67. 1996). 한편 [[2000년~2002년]]에 방송된 KBS 대하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경문왕의 왕자로 설정하였다.</ref> 삼국사기와 고려사에 등장하는 고경참문에 의하면 궁예는 丑년생인데 그러면 857년생, 혹은 869년생인걸 알수 있다. 궁예가 [[891년]] 절을 떠나 처음 봉기에 참여한 시기로 미루어 짐작할때 [[869년]]생, 그러니까 경문왕의 서자인 설이 더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진다. [[음력 5월 5일]]에 외가에서 태어났으며, 태어날 때부터 [[무지개]]를 닮은 흰 빛이 지붕 위에 있었고 날 때부터 [[이]]가 있었다. 이를 불길하게 여긴 [[일관]](日官)이 왕에게 그를 죽일 것을 청했는데, 왕명으로 궁예를 죽이러 온 중사(中使)는 궁예를 포대기에 싸서 높은 누대에서 던졌다. 누대 아래로 떨어진 궁예를 유모가 밑에서 받아서 목숨은 구했지만, 이때 유모의 손가락이 눈을 찌르는 바람에 애꾸가 되었다. 유모는 궁예와 함께 멀리 도망가 궁예를 길렀다고 한다.
         한편 후백제의 견훤은 궁예 성책 5년([[909년]]) 다시 나주 지역에 대한 공략을 실시하여 지금의 영산강 하에서 영광 서쪽 해안인 염해현까지 진격하였다. 6월에 왕건의 수군이 광주(光州)의 진도(珍島)를 쳐서 차지하고 고이도(皐夷島)의 항복을 받아냈으며, 목포에서 덕진포까지 진을 치고 있던 후백제의 수군을 화공(火攻)으로 대파했으며, 압해현의 해상 호족 능창이 왕건의 수군에 붙잡혀 궁예에게 보내져 처형되었다. 성책 6년([[910년]]) 후백제의 견훤이 다시 3천명의 군사를 내어 나주를 포위 공격하자, 궁예는 포위 공격 10일 만에 수군을 내어 견훤을 쳐서 몰아내고 나주 지역을 확고하게 지배하게 되었다. 이 무렵 궁예의 판도는 남으로는 공주와 상주, 동북으로는 증성(甑城), 서북으로는 지금의 황해도와 평안남도 남부까지 이르러 국세를 크게 떨쳤다.
  • 금조(나인뮤지스) . . . . 4회 일치
         [[2015년]] [[5월 26일]] 발표 된 [[카라(아이돌)|카라]]의 [[IN LOVE|미니 7집]] 타이틀곡 '[[CUPID]]' 에서 코러스를 맡은 듯 하다. 앨범 크레딧에 본명인 '이금조'가 명시되어 있고, 이 곡의 작곡가가 같은 [[스타제국]] 소속이었던 [[V.O.S]]의 멤버 [[최현준]]이 속한 작곡팀 [[e.one]]인 점 등 여러모로 봐도 확실한 듯. 또 [[은정(티아라)|엘시]]의 '눈물비' 와 [[구하라]]의 [[ALOHARA|미니 1집]] 중 '하라구' 와 '어때?', [[여자친구(아이돌)|여자친구]]의 '[[SNOWFLAKE|사랑별 (Luv Star)]]', [[에이프릴(아이돌)|에이프릴]]의 '[[Spring|미니 2집]] 중 '팅커벨'과 'JELLY'에서도 코러스로 참여하였다. 이후 여자친구 [[LOL(여자친구)|정규 1집]]에 수록되어 있는 e.one 작곡의 노래들인 '나의 일기장' 과 '바람에 날려' 도 마찬가지로 참여했으며, [[우주소녀]]의 미니 2집 타이틀곡인 '비밀이야'에서도 코러스로 참여하였다. 여기서는 금조라 표기하고 있다. 현역 아이돌이 다른 아이돌 노래에 백그라운드 보컬로 참여하는 보기 드문 케이스라 볼 수 있겠다. '[[CUPID]]'와 '눈물비'는 연습생 시절 참여한 곡들이라 특별히 더 애착이 간다고.
         2017년 4월 11일 ~ 6월 27일, 참가자로 출연했다. 데뷔 후 첫 개인 고정 출연. 정확한 대사구사력과 감정변화의 표현력이 풍부한 안정적인 연기력으로 초반부터 꾸준히 상승세를 이어가고 상위권을 유지하였으며, 5월 16일자 방영분에서는 1위를 차지하는 영광을 누렸다. 마지막 회에서도 평소와 같이 안정적인 연기를 보여주었으나, 아쉽게도 2위를 기록하여 1위를 놓치는 바람에 1등 혜택이었던 웹드라마 출연도 놓치게 되었다.
         2017년 5월 23일, 웹예능 [[http://tv.naver.com/v/1701809?openType=nmp|마스크팩싱어]]에 출연해 [[이하이]]의 '1, 2, 3, 4'를 불렀다.
          * 2017년 5월 15일 브이앱에서 [[프로듀스 101 시즌2]] [[주학년]], [[형섭|안형섭]], [[라이관린]]을 응원했다고 언급했다.
  • 김시진 . . . . 4회 일치
         |첫 출장 = [[한국 야구 위원회|KBO]] / [[1983년]] [[5월 3일]] <br /> [[삼미 슈퍼스타즈|삼미]]전 구원
         |마지막 경기 = [[한국 야구 위원회|KBO]] / [[1992년]] [[5월 15일]] <br /> [[한화 이글스|빙그레]]전 구원
         '''김시진'''(金始眞, [[1958년]] [[5월 8일]] ([[1958년]] [[음력 3월 20일]]) - )은 전 [[KBO 리그]] [[롯데 자이언츠]]의 [[투수]]이자, 현 [[KBO (단체)|KBO]]기술위원장이다.
         [[2008년]] 시즌 종료 후, 성적 부진을 이유로 [[키움 히어로즈|히어로즈]]에서는 [[이광환]]을 경질하고 그를 감독으로 임명했다. 그는 구단과 계약 기간 3년, 계약금 2억원, 연봉 2억원 등 총 8억원에 계약을 맺으면서 [[키움 히어로즈|히어로즈]]의 2대 감독으로 선임되었고, 2008년 [[10월 10일]] 감독 취임식을 가졌다.<ref>《한겨레》, 2008, 10, 11.</ref> [[2009년]]에 6위를 기록하였지만, 시즌 후반 [[삼성 라이온즈]], [[롯데 자이언츠]]와 치열한 4위 다툼을 벌이기도 했고, 시즌 초반에는 한때 선두를 달리기도 했다. 특히 [[강윤구 (야구 선수)|강윤구]]와 [[강정호]], [[황재균]] 등의 젊은 선수들은 [[이택근]], [[이현승 (야구 선수)|이현승]], [[장원삼]]의 [[넥센 히어로즈의 트레이드 파동|트레이드 파동]] 때 "트레이드 불가"로 못박을 정도로 좋은 활약을 보여 주었다. [[2009년]] [[8월 6일]] [[SK 와이번스|SK]]전에서 감독 통산 100승을 기록했다.
  • 김영환(1955) . . . . 4회 일치
         || '''출생일''' ||[[1955년]] [[5월 27일]] (만 [age(1955-05-27)]세) ||
         2016년 5월 11일 국민의당 사무총장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인재영입위원장 시절 영입한 [[김수민(정치인)|김수민]]의 리베이트 건이 터졌다.
         2016년 11월 10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대해 야 3당이 촛불 집회 참여를 밝히자 창당 정신에 어긋나는 일이라며 [[http://www.yonhapnews.co.kr/politics/2016/11/10/0505000000AKR20161110156000001.HTML?template=8275|사무총장 사의를 밝혔다.]]
         [[2018년]] [[5월 29일]] [[KBS]]에서 진행된 [[경기도지사]] 후보 토론회에 출연한 이후 화제가 되었다.
  • 김우식 (1886년) . . . . 4회 일치
         * [[대한민국 제헌국회 총선|1948년 5월 10일]] : [[대한민국 제헌국회 총선 경상북도#달성군 (제4선거구)|제헌 국회의원(경북 달성)]]
         |임기 = [[1948년]] [[5월 31일]] - [[1950년]] [[5월 30일]]
  • 노영하 . . . . 4회 일치
         *전 [[KBS 바둑왕전]] 해설위원으로 활약하였다.<ref>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4050200329117016&editNo=15&printCount=1&publishDate=1994-05-02&officeId=00032&pageNo=17&printNo=15073&publishType=00010 TV速棋(속기)해설 4인방 각축] 경향신문 17면 1994년 5월 2일 확인</ref>
         * 1976년부터 2013년까지 KBS TV 바둑 해설을 맡았다. <ref> (1984년 1월 19일) 《매일경제》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401190009920901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84-01-19&officeId=00009&pageNo=9&printNo=5500&publishType=00020 K3TV「바둑왕전」해설] 매일경제 9면 1984년 1월 19일 확인</ref> <ref>(2013년 5월 24일) 《[[한국일보]]》[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baduk&ctg=news&mod=read&office_id=038&article_id=0002391959 "명승부 장면 생생한 전달 30년, 행복했습니다"] 한국일보 바둑 2013년 5월 24일 확인</ref>
         * [[1984년]] ~ [[2013년]] [[3월 10일]]까지 [[KBS TV]] 바둑왕전 해설을 맡았다.
  • 문무왕 . . . . 4회 일치
         8년([[668년]]) 2월 [[이세적|이적]] 등이 이끄는 당군이 고구려의 [[부여성]]을 비롯한 40여 성을 함락시켰다. 이에 [[연남건|남건]]이 5만의 군사로 그 땅을 수복하려 애썼지만 설하수(薛賀水)에서 3만 명이 죽는 대패를 당하고 퇴각했다.<ref name="고구려-668">《삼국사기》 권제22 고구려본기 제10 보장왕 27년(668)</ref> 3월에 신라는 북방의 요충지였던 비열홀(比列忽, 비열성)에 주를 설치하고 파진찬 용문(龍文)을 총관으로 삼았다.<ref name="삼국사기-668">《삼국사기》 권제6 신라본기 제6 문무왕 8년(668)</ref> [[6월 12일]]에{{refn|group=주|문무왕이 설인귀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유인궤가 신라군과 함께 평양으로 간 것이 5월이라고 기록돼 있다.<ref name="삼국사기-671"/>}} 당의 우상(右相)<ref group="주">정확한 관직명은 요동도안무부대사(遼東道安撫副大使) 요동행군부대총관(遼東行軍副大摠管) 겸 웅진도안무대사(熊津道安撫大使) 행군총관(行軍摠管) 우상(右相) 검교태자좌중호(檢校太子左中護) 상주국(上柱國) 낙성현개국남(樂城縣開國男)이다.</ref> 유인궤가 당 고종의 칙명을 받들고 신라의 숙위 사찬 김삼광과 함께 당항진(党項津)에 도착하자 왕은 [[각간]] 인문을 보내 성대한 예식으로 맞이하게 했다.<ref name="삼국사기-668"/> 이에 유인궤는 약속을 마치고 신라의 선발군을 이끌고 고구려 땅인 천강(泉岡)으로 향하고, 문무왕 역시 [[6월 21일]]에 한성주에서 후발부대를 사열했다. 이때 신라군의 주요 장수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ref name="삼국사기-668"/>
         9년([[669년]]) 5월 천정군(泉井郡)·비열홀군(比列忽郡)·각련군(各連郡) 세 군의 백성이 굶주렸으므로 창고를 열어 진휼하였다.<ref name="삼국사기-669">《삼국사기》 권제6 신라본기 제6 문무왕 9년(669)</ref>{{refn|group=주|이 기록을 통해 이 시기에 이미 비열성(비열홀)은 다른 두 성과 함께 신라 조정의 군이 설치되어 신라의 지배하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당나라는 전략요충지인 비열홀을 [[안동도호부]]에 귀속시키고자 하였다.<ref name="이상훈">이호영·이상훈, [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B%82%98%EB%8B%B9%EC%A0%84%EC%9F%81&ridx=0&tot=614 나당전쟁]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f> 또한, 당은 [[웅진도독부]]를 설치해 백제 땅을 점거하고, 신라의 백성들을 웅진도독부 안으로 편입시키기도 하였다.<ref name="삼국사기-671"/> 신라 내부에선 “당은 [[왜국]]을 정벌한다는 명분으로 군함을 수리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신라를 치려는 것이다.”라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ref name="삼국사기-671"/>}} 같은 달, 급찬 기진산(祇珍山) 등을 당에 보내어 자석(紫石) 두 상자를 바쳤다. 또한 각간 김흠순과 파진찬 김양도(金良圖)를 당에 보내 사죄하게 하였다.{{refn|group=주|신라가 백제의 토지와 유민(遺民)을 취(取)한 것에 대해 당의 질책이 있었으므로 이를 해명하고자 하여 이들을 보낸 것이다. 흠순은 다음해 귀국하였으나 양도는 당나라에 억류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ref name="삼국사기-669"/>}} 겨울에는 당의 사신이 도착하여 신라의 쇠뇌 기술자인 사찬 구진천(仇珍川)을 당에 데려갔다.<ref name="삼국사기-669"/> 이는 당시 ‘천보노(千歩弩)’라고까지 불리며 쏘면 1천 보를 나간다는 소문이 퍼져 있던 신라의 쇠뇌 제작 기술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20년([[680년]]) 5월 가야군(加耶郡)에 [[금관소경]](金官小京)을 설치하였다.<ref name="삼국사기-680">《삼국사기》 권제7 신라본기 제7 문무왕 20년(680)</ref>
         {{Cquote|과인은 나라의 운(運)이 어지럽고 전란의 시기를 맞이하여, 서쪽을 정벌하고 북쪽을 토벌하여 능히 영토를 안정시켰고 배반하는 자들을 치고 협조하는 자들을 불러 마침내 멀고 가까운 곳을 평안하게 하였다. 위로는 조상들의 남기신 염려를 위로하였고 아래로는 부자(父子)의 오랜 원한을 갚았으며, 살아남은 사람과 죽은 사람에게 두루 상을 주었고, 중앙과 지방에 있는 사람들에게 균등하게 벼슬에 통하게 하였다. 무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었고 백성을 어질고 오래살게 하였다. 세금을 가볍게 하고 요역을 줄여주니,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들이 풍족하며 민간은 안정되고 나라 안에 걱정이 없게 되었다. 곳간에는 언덕과 산처럼 쌓였고 감옥에는 풀이 무성하게 되니, 혼과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았고 관리와 백성에게 빚을 지지 않았다고 말할 만하다. 스스로 여러 어려운 고생을 무릅쓰다가 마침내 고치기 어려운 병에 걸렸고, 정치와 교화에 근심하고 힘쓰느라고 다시 심한 병이 되었다. 운명은 가고 이름만 남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므로, 갑자기 긴 밤으로 돌아가는 것이 어찌 한스러움이 있겠는가? 태자는 일찍이 밝은 덕을 쌓았고 오랫동안 태자의 자리에 있어서, 위로는 여러 재상에서부터 아래로는 뭇 관리들에 이르기까지 죽은 사람을 보내는 도리를 어기지 말고, 살아 있는 임금을 섬기는 예의를 빠뜨리지 말라. 종묘의 주인은 잠시도 비워서는 안되므로, 태자는 곧 관 앞에서 왕위를 잇도록 하라. 또한 산과 골짜기는 변하여 바뀌고 사람의 세대도 바뀌어 옮겨가니, 오(吳)나라 왕의 북산(北山) 무덤에서 어찌 금으로 만든 물오리의 고운 빛깔을 볼 수 있을 것이며 위(魏)나라 임금의 서릉(西陵) 망루는 단지 동작(銅雀)이라는 이름만을 들을 수 있을 뿐이다. 지난날 모든 일을 처리하던 영웅도 마침내 한 무더기의 흙이 되면, 나무꾼과 목동은 그 위에서 노래를 부르고 여우와 토끼는 그 옆에 굴을 판다. 헛되이 재물을 쓰면 서책(書冊)에 꾸짖음만 남길 뿐이요, 헛되이 사람을 수고롭게 하는 것은 죽은 사람의 넋을 구원하는 것이 못된다. 가만히 생각하면 슬프고 애통함이 그치지 않을 것이지만, 이와 같은 것은 즐겨 행할 바가 아니다. 죽고 나서 10일 뒤에 곧 고문(庫門) 바깥의 뜰에서 서국(西國)의 의식에 따라 화장(火葬)을 하라. 상복의 가볍고 무거움은 정해진 규정이 있으니, 장례를 치르는 제도를 힘써 검소하고 간략하게 하라. 변경의 성·진(城鎭)을 지키는 일과 주현(州縣)의 세금 징수는 긴요한 것이 아니면 마땅히 모두 헤아려 폐지하고, 율령격식(律令格式)에 불편한 것이 있으면 곧 다시 고치도록 하라. 멀고 가까운 곳에 널리 알려 이 뜻을 알게 할 것이며, 주관하는 자는 시행하도록 하라.|《삼국사기》 권제7 신라본기 제7 문무왕 21년(681)}}
  • 박성우 (정치인) . . . . 4회 일치
         *[[대한민국 제헌국회 총선|1948년 5월 10일]] : [[대한민국 제헌국회 총선 경상북도#상주군 갑 (제27선거구)|제헌 국회의원(경북 상주갑) 낙선]]
         |임기 = [[1950년]] [[5월 31일]] - [[1954년]] [[5월 30일]]
  • 박해극 . . . . 4회 일치
         * [[대한민국 제헌국회 총선|1948년 5월 10일]] : [[대한민국 제헌국회 총선 경상남도#밀양군 을 (제12선거구)|제헌 국회의원(경남 밀양을)]]
         |임기 = [[1948년]] [[5월 31일]] - [[1950년]] [[5월 30일]]
  • 박홍 (신부) . . . . 4회 일치
         [[1997년]] [[5월]] 박홍이 제소되자 언론인 [[이도형 (1933년)|이도형]]은 [[노재봉]], 변호사 [[오제도]] 등 보수인사 70여명이 후원회를 꾸렸는데 이때 당시 후원인단 대표를 맡았던 그는 '대표적인 반좌익인사인 박 전 총장에 대한 탄압을 물리치기 위해 후원회를 만들었다'고 설명하였다.<ref name=autogenerated1 />
         |확인날짜 = 2015년 5월14일
         이에 검찰이 판결에 불복하여 대법원에 상고하였고 2015년 5월14일 대법원은 검찰의 상고를 기각하고 재심에서 강기훈의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확인날짜 = 2015년 5월14일
  • 변요한 . . . . 4회 일치
         ~~지금은 인스타를 접은 상태~~인줄 알았으나, 지난 5월부터 인스타그램 계정을 다시 개설했다. (다만, 소속사가 운영하고 있다.) 다음 공식 팬카페에서 팬들과 활발하게 소통하는 모습을 자주 보인다. (해당 카페 글이 유출 금지라 직접 가야만 볼 수 있다.)
         2015년 5월 열린 [[백상예술대상]]에서 레드카펫을 밟았는데, 멋지게 차려입고도 누가 쫓아오는 듯한 빠른 워킹을 보여주는 바람에 일부에서는 동공지진 뿐만이 아니라 손바닥, 발바닥 지진까지 같이 왔다며 놀려댔다.
          * 2015년 2월, KT&G 상상마당 시네마에서 매달 진행하는 프로그램인 단편 상상극장으로 '변요한展'이 개최됐다. 상영 날짜는 2월 매주 화요일로 3일, 10일, 17일, 24일. 상영 목록은 《[[토요근무]]》, 《재난영화》, 《목격자의 밤》, 《매직 아워》이상 네 편의 단편영화. 10일에는 영화가 다 끝난 뒤 변요한이 깜짝 등장해서 팬미팅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 송호창 (1967년) . . . . 4회 일치
         * [[2012년 5월]] ~ [[2016년 5월]] [[대한민국 제19대 국회|19대 국회의원]](경기도 의왕시·과천시)
         |임기 = [[2012년]] [[5월 30일]] ~ [[2016년]] [[5월 29일]]
  • 슈가(방탄소년단) . . . . 4회 일치
         2017년 5월 21일 빌보드 뮤직 어워드에서 슈가.
         본인의 믹스테이프의 마지막 트랙인 "So Far Away" 피처링으로 참여했던 가수 [[SURAN|수란]]의 디지털 싱글 "오늘 취하면(Feat. [[창모]])"을 작곡 및 프로듀싱하여 2017년 4월 27일 음원이 발매되었다.[* [[빅히트 엔터테인먼트]] 프로듀서인 슬로우 래빗과 공동 작곡, 프로듀싱이다.] [[http://m.sportschosun.com/news.htm?id=201704220100204200014681&ServiceDate=20170421&f_url=#_adtep|기사]] [[방탄소년단]]과 본인이 아닌 타 아티스트의 프로듀싱에는 처음 참여한 곡으로, 슈가와 수란에게는 꽤나 의미가 큰 곡인데, 수란의 경우 언더 가수에서 대중들에게 이름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슈가는 발매 이후 각종 음원 사이트 순위 1-2위를 다투고 멜론 [[http://www.melon.com/chart/month/index.htm#params%5Bidx%5D=1¶ms%5BrankMonth%5D=201705¶ms%5BisFirstDate%5D=false¶ms%5BisLastDate%5D=false|5월 월간 차트 1위]]에 오르는 등 리스너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성적과 함께 뛰어난 곡 퀄리티로 큰 호평을 받으며 본인의 프로듀싱 역량을 인정받았다.[[http://entertain.naver.com/read?oid=112&aid=0002915269|#]] 멜론 [[http://www.melon.com/chart/age/index.htm?chartType=YE&chartGenre=KPOP&chartDate=2017#params%5Bidx%5D=1|2017년 연간 차트 9위]]를 달성하였다.
          * 2016년 5월 8일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화양연화 on stage : Epilogue> 마지막 콘서트에서 부모님이 앉아 계신 좌석을 향해 큰절을 하다 눈물을 터뜨려 한동안 그 자세로 가만히 있었다는 팬들의 제보가 잇달아 올라왔다. 옆에서 [[지민(방탄소년단)|지민]]이 계속 있어 주는 것도 눈에 띈다. [[https://m.youtube.com/watch?v=RD_-dYk6BWA|직캠 영상]]
          * 2018년 9월 10일에 한 [[V LIVE]] 방송에서 악플을 챙겨 보냐는 말에, '''‘악플 걱정하시는데... 죄송한데 잘 안 봐요. 많이 쓰셔도 돼요. [[빅히트 엔터테인먼트|회사]]에서 고소하겠지 그러면. 나는 안 보고 고소는 하고 선처는 없으면, 뭐 모두가 해피한 거 아닙니까?’'''라는 대답을 했다.
  • 양예나 . . . . 4회 일치
         ||<bgcolor=#FF69B4><:>'''{{{#ffffff 출생}}}''' ||<(>[[2000년]][* 데뷔 당시 아주 어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1년 6개월 더 어린 막내 [[이진솔]]에게 이목이 더욱 집중되었다.] [[5월 22일]] ([age(2000-05-22)]세), [[대구광역시]] [[동구(대구)|동구]] ||
          * 2016년 5월 17일 아리랑TV <After School Club>에 채원, 나은, 진솔과 함께 출연했다.
          * 2016년 5월 24일 iMBC 해요TV <박소현의 아이돌TV>에 채원, 나은, 진솔과 함께 출연했다.
          * 2017년 1월 10일 KBS2 <[[1대 100]]>에 채경, 진솔과 함께 출연했다.
  • 에스쿱스 . . . . 4회 일치
         [[2017년]] [[7월 10일]]에 방송된 [[세븐틴(아이돌)/힙합팀|힙합팀]] 눕방에서는 [[버논(세븐틴)|버논]]의 옆 자리에 누워 카메라에 함께 투샷으로 잡히면서도 진짜 [[혼혈]] 멤버인 [[버논(세븐틴)|버논]]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 이국적인 이목구비를 자랑했다.
         마음이 여려 눈물이 많은 편이기도 하다. [[2016년]] [[세븐틴(아이돌)|세븐틴]]이 '예쁘다'로 첫 1위를 했을 때 크게 오열했던 멤버 중 한 명이며, [[2017년]] [[2월 10일]]에 열린 팬미팅 <SEVENTEEN in CARAT LAND>에선 팬이 직접 제작한 VCR을 보고 감정에 북받친 [[에스쿱스]]가 기어이 울음을 터뜨리며 [[https://youtu.be/b3k92UAH2mM|"내가 볼멘소리를 하면 안 되겠구나. 내가 많이 보답받고 있고 갚아야 할 게 많구나]]"라고 당시의 감정을 솔직하게 고백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때 결심한 마음 가짐으로 [[세븐틴(아이돌)/힙합팀|힙합팀]] 유닛 곡 'TRAUMA'의 가사를 적어 내려간 것으로 보인다.
         덧붙여 좌절과 실패를 함께 견뎌낸 멤버들을 가족처럼 생각하는지 멤버들과의 스킨십도 거리낌이 없다. 볼에 하는 뽀뽀까지도 괜찮다는 주의. 안드로메다 방송에서 "멤버들끼리 왜 뽀뽀를 못합니까?"라고 의아해하며 [[승관]]에게 [[https://youtu.be/KP7APVBQJ0o|망설임 없이 뽀뽀]]를 해주었고, 이후 [[2016년]] [[5월 17일]] 자 [[쇼챔피언]] 비하인드 방송에서도 [[성년의 날]]을 기념해 [[도겸(세븐틴)|도겸]]과 [[민규]]에게 [[https://youtu.be/mQSoGu-I9nw?t=23s|볼뽀뽀를 선물]]했다. 근데 또 희한하게 본인이 받는 건 [[https://youtu.be/YzOxTAOSvbo|별로 내켜하지]] 않는 듯하다.
          * [[2017년]] [[5월 25일]] [[Mnet]] <[[KCON]] 2017 JAPAN> MC width [[원우]], [[민규]]
  • 영창대군 . . . . 4회 일치
         결국 광해군 5년(1613 계축 / 명 만력(萬曆) 41년) 5월 4일(신유)에 영창대군의 외조부인 연흥부원군 김제남이 파직, 6월 1일(무자)에 사사되었다. 영창대군 역시 5월 21일(무인)에 봉작이 박탈되었고, 7월 27일에 영창대군은 강화도에 위리안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광해 75권, 6년(1614 갑인 / 명 만력(萬曆) 42년) 2월 10일(임진) 2번째기사
         >효종 6권, 2년(1651 신묘 / 청 순치(順治) 8년) 5월 16일(임진) 1번째기사
  • 우의형 . . . . 4회 일치
         1948년 태어난 우의형은 [[경기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1971년 제13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1977년 [[서울가정법원]] 판사에 임용된 이후 [[서울고등법원]], 서울형사지방법원 등에서 판사를 하다가 법원행정처에서 조사심의관으로 지냈으며 2003년에 서울지방법원 의정부지원장, [[청주지방법원]], [[인천지방법원]], [[서울행정법원]]에서 법원장을 역임하고 퇴직한 2005년에 변호사 우의형 법률사무소를 개업했다. 2009년 7월 22일에 제17대 영남대 재단 이사장,<ref>[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67375.html]</ref> 2011년 11월 10일에 주식회사 화진 사외이사에 선임되었다.<ref>[http://news.mt.co.kr/mtview.php?no=2011111017081381674&outlink=1&ref=https%3A%2F%2Fsearch.naver.com]</ref>
         * 서울형사지방법원 합의24부 재판장으로 재직하던 1994년 5월 17일에 [[상문고등학교]] 교장으로부터 1500만원의 뇌물을 받아 구속된 국립교육평가원장 박병용에게 "유죄는 인정되나 큰 과오없이 30년간 공직생활에 충실했다"며 [[특가법]] 뇌물죄를 적용해 징역2년6월 집행유예3년 추징금1500만원을 선고했다.<ref>경향신문 1994년 5월 18일자</ref> 1994년 6월 10일에 상무대 사업과 관련하여 공사대금 189억여원을 유용한 혐의로 구속된 청우종합건설 전 회장 조기현에게 [[특가법]] 횡령, 사기죄 등을 적용해 징역5년을 선고했다.<ref>매일경제 1994년 6월 11일자</ref> 6월 14일에 접착테이프로 암달러상의 입을 막고 금품을 빼앗으려다 전치2주 상처를 입혀 구속된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했다.<ref>동아일보 1994년 6월 15일자</ref> 7월 15일에 [[범청학련]] 결성식에서 인공기를 게양하여 구속된 [[중앙대학교]] 총학생회장 김영하에게 [[국가보안법]]을 적용해 징역2년 자격정지2년을 선고했다.<ref>한겨레 1994년 7월 16일자</ref>
  • 이만섭 . . . . 4회 일치
         |임기 = [[1997년]] [[10월 10일]] ~ [[1998년]] [[6월 28일]]
         |임기 = [[2000년]] [[6월 5일]] ~ [[2002년]] [[5월 29일]]
         |임기 = [[1981년]] [[4월 11일]] ~ [[1985년]] [[4월 10일]]
         |임기 = [[1985년]] [[4월 11일]] ~ [[1988년]] [[5월 29일]]
  • 이승엽 . . . . 4회 일치
         감독이 그의 아버지와 협상했다가 불발됐고 그는 야구를 시작할 때까지 단식하겠다고 하여 그의 아버지를 설득시켜 야구를 시작했다. 투구와 타격 모두 뛰어난 자질을 보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좌완 투수로 좀 더 이름을 알렸다. 그는 경상중학교 재학 당시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고, 재학 시절 [[청룡기 전국고교야구 선수권대회|1993년 청룡기 대회]]에서는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우수 투수상을 수상했다.<ref>[[스포츠 조선]] - 2010년 5월 기사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5/16/2010051601132.html "최동원, 선동열, 이승엽, 추신수, 봉중근, 이대호, 류현진… 청룡기가 낳은 한국 야구 대들보"]</ref> [[1994년]] 청소년 국가 대표로 선발된 그는 투타에서 고루 활약을 펼치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ref>''[[OSEN]]'' - 2007년 12월 기사 [http://www.osen.co.kr/news/Sports_View.asp?gisano=G0712260021&code=110100 "이승엽-이대호, 모교서 방망이 날세운다"]{{깨진 링크|url=http://www.osen.co.kr/news/Sports_View.asp?gisano=G0712260021&code=110100 }}</ref><ref name="homerun">스포츠 춘추 - 2010년 9월 [[박동희 (기자)|박동희]]의 칼럼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295&aid=0000000463 "이대호로 본 ‘홈런 타자는 어떻게 탄생하나’"]</ref>
         [[2014년]]에는 타격 자세 교정을 받았고, 그 결과 전년도의 부진을 털고 역대 최고령 3할 - 30홈런 - 100타점을 달성하며 국민 타자의 부활을 알렸다. [[2014년]] [[6월 17일]] [[SK 와이번스]]전에서는 3연타석 홈런을 기록하였고, [[7월 24일]] [[롯데 자이언츠]]전에서는 7타점을 기록했다. 또한 [[9월 10일]] [[NC 다이노스]]전에서는 역대 최고령 30홈런을, 한 달 후 [[10월 11일]] [[KIA 타이거즈]]전에서는 연타석 홈런으로 최고령 시즌 100타점을 돌파했다. [[2014년 한국시리즈]]에서는 부진하였지만 2차전에서 홈런을 쳐 내며 [[타이론 우즈]]를 제치고 포스트시즌 역대 통산 최다 홈런 신기록을 수립했다. 시즌 기록은 3할대 타율, 32홈런, 101타점을 기록하며 2년만에 지명타자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이는 1루수로써 7번 받은 것을 포함해 총 9번을 수상하며 역대 골든글러브 최다 수상 신기록을 경신했다.
         그는 시즌 시작 전 이번 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2017년]] [[5월 21일]] [[송창식 (야구 선수)|송창식]]을 상대로 [[KBO 리그]] 첫 450호 홈런을 기록했고<ref>[http://starin.edaily.co.kr/news/NewsRead.edy?SCD=EB21&newsid=01666246615931216&DCD=A20102 '이승엽, 통산 450홈런'삼성, 661일만에 시리즈 스윕(종합)] - 이데일리</ref>, 2달 뒤인 [[7월 29일]]에는 [[김성민 (1994년)|김성민]]을 상대로 [[KBO 리그]] 최초로 4000루타를 달성했다.<ref>[http://www.mydaily.co.kr/new_yk/html/read.php?newsid=201707291933932974&ext=na '라이언킹' 삼성 이승엽, KBO리그 최초 4000루타 돌파] - 마이데일리</ref> 시즌 후반기부터 소속 팀을 제외한 9개 구단에서 그를 위해 은퇴 투어를 진행했고 그 여정이 끝난 [[10월 3일]] [[넥센 히어로즈]]와의 대구를 끝으로 공식 은퇴했다. 그 대구에서 [[한현희]]를 상대로 연타석 홈런을 기록하며 그의 은퇴를 바라보는 이들을 아쉽게 만들었다. 대구 후 팀은 그에 대한 성대한 은퇴식을 열었고, 그의 등번호인 '36번'은 구단 역대 세번째로 영구 결번 처리됐다.<ref>[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1612121051081031 ‘일구대상’ 이승엽 “마지막 1년, 떠날 때 후회없도록”(일구상 시상식)]</ref> 그는 은퇴 후에는 야구 관련 직종에 종사할 것이라는 계획을 밝히며 "야구장 안팎에서 야구 관련 일을 하겠다"고 말했다.<ref>[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01/13/0200000000AKR20170113128700007.HTML?input=1195m 이승엽 "은퇴 이후 일? 야구 관련 아니면 안 한다"]</ref>
         * [[1999년]] [[5월 5일]] : 대구 현대전, 최연소 통산 100 홈런(만 22세 8개월 17일, 상대 투수 3회 [[정명원]])
  • 이시영(배우) . . . . 4회 일치
         2010년 3월 1일 부터 5월 4일까지 방여된 KBS드라마 [[부자의 탄생]]에서, 리얼 무개념 푼수 '부태희' 역을 맡아서 보여주는 연기가 인기를 끌었다.
         2015년 5월, 6월 방영된 [[OCN]]의 미니시리즈 [[아름다운 나의 신부]]의 차윤미 역으로 출연했다.
         2012년 12월 7~11일 제66회 전국아마추어복싱선수권대회 겸 2013 국가대표 1차선발대회 에 여자부 48kg 급에 출전했다. 같은 체급의 출전 선수는 5명인데, 대진 뽑기운은 정말 없는지 부전승 없이 3전을 치룬다. [* 출전 선수가 5명이므로 3명은 부전승으로 바로 준결승행이지만, 나머지 2명은 한 경기 더 치뤄야 하는데 그 2명중 1명에 걸렸다.] 12월 7일 1차전에서 18-16으로 승리했고, 12월 10일 준결승에서는 7-1로 승리했다. 12월 11일 결승전에서는 박초롱 선수에게 4-10으로 판정패 하면서, '''준우승'''을 차지했다. 공식전 첫패배이며 현재까지 공식전적은 9전 8승 1패. 국가 대표 선발은 1차전 1,2위, 2차전 1,2위가 크로스토너먼트를 통해서 이루어지며, 이시영은 2위 자격으로 국가대표 최종 선발전에 진출하게 됐다. [[http://www.yonhapnews.co.kr/sports/2012/12/11/1007000000AKR20121211108251007.HTML|관련기사]]
         2013년 5월 31일 새 영화 제작발표회에서 51kg급으로 체급을 올리고서 7kg 증량을 했다고 밝혔다. 과장이 없다면 48kg급에선 딱히 감량 없이 출전했으나, 51kg급에서 살아남기 위해 [[체중 감량]]을 염두에 둔 증량일 듯하다.
  • 이시종 . . . . 4회 일치
         * 2004년 5월 ~ 2010년 4월: 제17.18대 국회의원(충북 충주시)
         |임기 = 2004년 5월 30일 ~ 2008년 5월 29일
         |임기 = 2008년 5월 30일 ~ 2010년 4월 12일
  • 이장우 (1871년) . . . . 4회 일치
         [[1898년]] [[7월 10일]]부터 [[7월 11일]]까지 봉상사 주사로 근무한 경력이 있다. [[1899년]] [[7월 30일]] 대구지방대에서 대한제국 육군 보병 참위로 근무했으며 [[1903년]] [[3월 21일]] 진위(鎭衛) 제3연대 제1대대에서 복무했다. [[1903년]] [[4월 6일]]부터 [[1907년]] [[9월 3일]] [[대한제국 군대 해산]] 이전까지 육군 보병 부위(副尉)로 복무했다.
         [[1909년]] 경상농공은행 감사역으로 임명되었으며 [[대구은행]] 창립 발기인(1912년 12월)과 대구지주조합 창립위원(1913년 5월), 대구자제단 발기인(1919년 4월 7일)으로 참여했다. 대구은행 감사역(1915년)과 경일은행 감사역(1918년, 1925년 ~ 1927년), 대구주조주식회사 취체역(1919년 10월 3일 ~ 1921년), 대구상업회의소 상무위원(1919년 12월 16일)으로 근무했고 대구부 도시계획 위원회 제6부 위원(1923년 1월 30일)과 대구상업회의소 특별위원(1926년)을 역임했다. [[1918년]] 7월과 [[1920년]] 12월 대구부 협의회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26년]] 10월과 [[1930년]] 7월 대구소년보호소에 5,000원을 기부했다.
         [[1926년]] [[9월 4일]] 경상북도 관선 도평의회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28년]] [[8월 31일]] 일본 정부로부터 쇼와 대례 기념장을 받았다. [[1933년]] 11월 [[고려대학교|보성전문학교]] 창립 30주년 기념사업회 실행위원을 지냈으며 영남명덕회(嶺南明德會) 대구지부 부지부장(1933년), 조선농회 통상의원(1934년, 1938년 5월 18일), 경상북도농회 부회장(1934년 4월 20일, 1938년 4월 13일), 경북미곡통제연합회 부회장(1936년 11월 18일), 조선나예방협회 평의원(1938년)을 역임했다. [[1941년]] [[9월 11일]]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1943년]] [[8월 3일]]부터 [[1944년]] [[1월 16일]]까지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1933년]] 3월 조선나예방협회(朝鮮癩豫防協會)에 기금 6,000원을 기부했으며 [[1933년]] [[10월 19일]] 그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 정부로부터 포상을 받았다. [[1936년]] 5월 대일본무덕회(大日本武德會) 조선지방본부 무덕전(武德殿) 건축비 10,000원을 기부했고 [[1937년]] [[1월 26일]] 일본 정부로부터 감수포장(紺綏褒章)을 받았다. [[1927년]] 3월 당시 경상북도 대구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 설립비 4,816원을 기부한 공로를 인정받아 [[1938년]] [[8월 4일]] 일본 정부로부터 포상을 받았다.
  • 이주호 (1961년) . . . . 4회 일치
         * 2001년 6월 ~ 2004년 5월 한국직업교육학회 이사
         * 2002년 3월 ~ 2004년 5월 한국노동경제학회 이사
         * 2003년 7월 ~ 2004년 5월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육개혁연구소 소장
         * 2004년 5월 ~ 2008년 2월 제17대 한나라당 국회의원
  • 이진주 (1678년) . . . . 4회 일치
         유학(幼學)으로 [[1710년]](숙종 36년) 경인(庚寅) 증광사마시(增廣司馬試) [[진사]]에 3등(三等)으로 입격, 진사가 되고,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1714년]] [[성균관]]학유<ref>안명하, 松窩先生文集卷之九, 遠遊錄 西征記行</ref>, [[1719년]] [[1월 12일]] 전강에서 숙종이 친히 출제한 과제에 우승하여 직부전시의 명을 받았다. [[1721년]](경종 1년) [[과거 제도|식년 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 4위로 급제하였다. 이후 [[병조]][[좌랑]](兵曹佐郞), 겸 [[춘추관][[기주관]], [[1723년]](경종 3) [[3월]] [[성균관]]학유, [[5월]] 학록, 8월 학정이 되고 [[1724년]](경종 4) [[2월]] 양현고직장(養賢庫直長)이 되었다. 그해 [[5월 17일]] 다시 학정, 이후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 등을 지내다.
         [[1726년]](영조 2) [[12월 28일]] [[성균관]]박사, 1727년 3월 양현고직장, 8월 7일 전적,1728년(영조 4) [[2월 3일]] [[양현고]]주부, [[6월]] 직강, [[1729년]] [[11월 25일]] 병조좌랑이 되었으며 겸춘추(兼春秋)직을 겸하여 입직하였다. [[1730년]] [[2월 10일]] 성균관직강, 3월 25일 사예 등을 역임했다. [[1730년]] [[3월]] 진보현감(眞寶縣監)으로 부임하였다. 이후 [[조선 영조|영조]] 조정에서 입시한 신하가 아뢰기를, '이진주는 조용히 자신을 지켜 성균관에서 공부한 10여 년 동안 재신(宰臣)과 명사(名士)가 그의 얼굴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영조가 수령을 선발할 때는 마땅히 조용히 자신을 지키는 자를 취해야 한다 하고, 곧이어 다시 진보현감에 재임명되었으나 얼마 뒤에 사망하였다. 1737년
         1718년 2월 8일 [[순흥향교]] 대축(大祝) 8월 1일 대축, 1719년 8월 7일 종헌관(終獻官), 1720년 2월 10일 대축, 1721년 8월 9일 아헌관(亞獻官), 1722년 2월 2일과 8월 4일 초헌관(初獻官) 등으로 활동했다.<ref>순흥향교 집사안:自丁酉八月 行祭時, 至甲辰八月 釋奠時</ref>
  • 이평 (1572년) . . . . 4회 일치
         유학(儒學)으로 [[1612년]](광해군 4년)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서울로 상경했다. [[1612년]](광해군 4년) [[5월 12일]] [[광해군]]의 즉위를 방해한 [[유영경]](柳永慶)을 강경하게 탄핵하였다. 대동야승과 연려실기술, 광해군일기에 그가 유영경의 죄를 탄핵한 기록이 실려 있다. 유영경(柳永慶) 등을 추형(追刑)하고, [[광해군]]에게 존호(尊號)를 올리고, 공신(功臣)을 녹훈하고, 역당(逆黨)의 흉서(兇書)를 중외에 반포할 것을 요청하는 상소였다.<ref>광해군일기 53권, 1612년(광해군 4년, 명 만력 40년) 5월 2일 을미 1번째기사, 이평이 유영경 등의 추형, 존호를 올리는 일, 공신을 녹훈하는 일 등을 상소하다</ref> 이에 그해 [[5월 29일]] 대신이 백관을 거느리고 존호를 올리는 일을 아뢰었는데 입계하였다. 광해군은 "임금은 부귀하기는 한 나라를 소유하였고 귀하기는 군왕이니, 그 영화와 높게 드러난 것이 그 이상 더할 수 없다. 저 존호를 올려 찬양하는 일은 하늘 끝의 한 점 뜬 구름에 지나지 않는다. 명예에 대해 옛날의 지사(志士)들은 얻고 잃고 가고 오는 것을 역시 개의치 않았으니, 임금에게 헛된 칭호를 가하는 것이 무슨 털끝만한 보탬이라도 있겠는가. 도리어 손상만 시키는 것이다. 나는 감히 과장하지 못하겠으며 명예도 원치 않고, 다만 본분을 지키다 자연을 따라 죽고자 할 뿐이다. 더구나 지금 이평(李坪)의 상소 하나로 인하여 경들이 정청(庭請)을 그치지 않으니, 내가 더욱 통탄스럽게 여긴다. 내가 비록 불초하지만 어찌 한 애숭이 유자의 망언으로 인하여 경솔하게 당치도 않은 큰 칭호를 받겠는가. 만에 하나라도 이럴 리는 없으니, 번잡하게 하지 말고 빨리 물러가도록 하라.<ref>광해군일기 53권, 1612년(광해군 4년, 명 만력 40년) 5월 29일 임술 3번째기사, 대신이 백관을 거느리고 존숭의 일을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다</ref>" 하였다.
  • 장대환 . . . . 4회 일치
         * 1974년 5월 : 로체스터 대학교(미국) 정치학 학사
         * 2008년 5월 ~ 2008년 12월: 건국60주년 기념사업 위원회 위원
         * 2009년 5월 ~: 북한정책 포럼 공동의장
         * 2009년 12월 ~ 2010년 5월: 한국언론진흥재단 이사
  • 장영희 (대학교수) . . . . 4회 일치
         '''장영희''' (張英姬, [[1952년]] [[9월 14일]] ~ [[2009년]] [[5월 9일]])는 [[대한민국]]의 수필가이자, 번역가, 영문학자이다.
         생후 1년 만에 두 다리를 쓰지 못하는 [[소아마비]]에 걸려 1급 장애인<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2653209 열정적인 강의하는 장영희 교수 - 연합뉴스 2009년 5월 11일]</ref> 판정을 받았기 때문에 비장애인들의 차별과 싸워야 했다.
         [[2001년]]에 [[유방암]] 선고를 받고 3번의 수술과 [[방사선]] 치료를 받은 끝에 회복되었으나 [[2004년]]에 다시 [[척추]]에서 [[암]]이 발생하여 [[2006년]]에 회복되었으나, 마지막으로 [[2008년]]에는 [[간암]]까지 발병하여 학교를 휴직하고 치료를 받았으나 2009년 사망하였다. 이렇게 세 차례 암이 발병하였으나 희망을 버리지 않았고, 투병 와중에도 여러 책을 펴내었다.<ref>[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5/10/2009051000732.html 그녀의 삶, 그 자체가 기적이었다 - 조선일보 2009년 5월 11일]</ref> 신실한 로마 가톨릭 교인인 장영희 교수는 자신을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은 다시 일어서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넘어뜨린다고 나는 믿는다"라고 했다.
         [[2009년]] [[5월 9일]]에 지병인 암으로 사망하였다. 그 당시에 그녀는 58세였다.
  • 조소혜 . . . . 4회 일치
         '''조소혜'''([[1956년]] [[12월 28일]] ~ [[2006년]] [[5월 24일]])는 [[대한민국]]의 [[드라마]] [[작가]]이다.
         [[2006년]] [[5월 24일]] 지병인 [[간암]]으로 향년 51세로 별세하였다. 집필중이던 《[[맨발의 청춘 (2005년 드라마)|맨발의 청춘]]》의 시청률 부진에 대해 괴로워했던 것으로 알려졌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1306430 드라마 작가 조소혜 씨 갑작스레 타계] 《연합뉴스》김가희, 2006년 5월 25일 작성, 2010년 5월 19일 읽음.</ref>
  • 최다빈 . . . . 4회 일치
         | 2019년 2월 4일-10일
         | 2016년 1월 8일-10일
         | 2014년 8월 6일-10일
         | 2014년 3월 10일-16일
  • 최동석 . . . . 4회 일치
         * [[KBS1]] 《[[생로병사의 비밀]]》([[2007년]] [[5월 1일]] ~ [[2008년]] [[3월 25일]])
         * [[KBS2]] 《[[연예가중계]]》 리포터 ([[2008년]] [[11월 22일]] ~ [[2010년]] [[5월 8일]])
         * [[KBS2]] 《[[도전! 주부가요스타]]》([[2009년]] [[1월 10일]] ~ [[2009년]] [[4월 18일]]
         * [[KBS1]] 《[[KBS 주말뉴스]] (토요일)》([[2018년]] [[3월 10일]] ~ '''현재''')
  • 태종무열왕 . . . . 4회 일치
         즉위 직후 무열왕은 아버지 [[김용춘]]을 문흥대왕(文興大王)으로, 어머니 [[천명공주]]를 문정태후(文貞太后)로 추봉하여 왕권의 정통성을 확립하였으며, 5월에는 이방부령(理方府令) 양수(良首) 등에게 이방부격(理方府格) 60여 조를 제정하게 하였다.<ref name="신라-654"/> 무열왕 2년([[655년]])에는 문희 소생의 맏아들 법민(法敏)을 태자로 삼고, 나머지 문희 소생의 왕자들에게도 관등을 수여하였다. [[대각간|대각찬]](大角湌) 김유신에게는 딸 [[지소부인|지소공주]]를 시집보내 중첩된 혼인관계를 이루었다.<ref name="신라-655">《삼국사기》 권제5 신라본기 제5 태종 무열왕 2년(655)</ref>
         무열왕 7년([[660년]]) 3월, 신라의 요청을 받아들인 당은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 소정방과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유백영(劉伯英) 등이 인솔한 수륙 13만 군사를 파병하였다. 원병을 요청하러 보낸 김인문은 소정방이 이끄는 신구도행군의 부대총관(副大摠管) 자격으로 귀국하였고, 무열왕에게도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總管)이라는 지위가 더해졌다.<ref name="신라-660"/> 무열왕은 바다를 건너온 당군을 영접하기 위해 [[5월 26일]], 대장군 [[김유신]]과 [[김진주 (신라)|김진주]](金眞珠){{.cw}}김천존(金天存) 등과 함께 5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서라벌을 출발하여 [[6월 18일]]에 남천정(南川停)<ref group="주">신라 10정(十停) 중 하나로, 현재 [[경기도]] [[이천시]]에 있던 부대</ref>에 이르렀고, 21일에 태자 김법민을 보내 병선(兵船) 1백 척을 거느리고 [[덕적도|덕물도]](德物島)에서 소정방을 맞아, [[7월 10일]]에 백제의 [[사비성]](泗沘城) 앞에서 합류하기로 약속을 정했다. 당군과 함께 백제를 공격할 5만 신라군의 지휘는 태자 김법민과 대장군 김유신, 장군 [[김품일|김품일]](金品日)과 [[김흠순|김흠춘]](金欽春) 등이 맡고, 왕은 금돌성(今突城)에서 머물렀다.<ref name="신라-660"/>
         태종 무열왕에 대한 당대 신라인들의 평가는 매우 높았다. 이는 ‘태종(太宗)’이라는 묘호를 올린 것에서도 알 수 있는데, 이는 신라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사례였다.<ref group="주">그러나 고구려의 [[태조왕]]의 경우에는 묘호로 봐야 되는가, 시호로 봐야 되는가에 대한 이견이 있다. 그 밖에 태조의 묘호를 받은 [[태조 성한왕]]이나, 국조의 묘호를 받은 [[박혁거세]]도 존재한다.</ref> 이에 대해 [[당 고종]]<ref group="주">《삼국사기》에는 [[당 중종]]이라 표기됨</ref>이 “당 태종이 위징(魏徵)·이순풍(李淳風) 등을 얻어 천하를 평정하는 대업을 이루었기에 태종이라 하였지만, 너희 신라는 바다 밖에 있는 조그만 나라임에도 태종의 호를 사용하여 천자의 칭호를 참칭하니 그 뜻이 불충하므로” 이를 고칠 것을 요구하자, 신라의 [[신문왕]](神文王)은 “(당 태종처럼) 무열왕도 김유신이라는 성신(聖臣)을 얻어서 삼한을 통일하는 대업을 이루었다”며 완곡하게 거절하는 답서를 보냈다. 이 답서를 받은 고종은 그가 태자로 있을 때 하늘에서 이르기를 “33천(天)의 한 사람이 신라에 내려가 유신이 되었다.”고 한 일이 있어서 이를 기록한 바가 있는데, 이 기록을 찾아 확인해보고서는 놀랍고 두려워서, 태종의 묘호를 허락했다고 한다.<ref name="유사-기이1"/> 훗날 [[조선]](朝鮮)의 성리학자 [[김종직]](金宗直)은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고려]](高麗)의 [[왕건|태조]](太祖) 이래 역대 군주들의 묘호를 시호로 대체하고자 하는 [[조선 성종|성종]](成宗)에게 태종 무열왕의 선례를 들며 굳이 기록된 묘호를 뺄 필요는 없음을 주장하였다.<ref>《성종실록》 성종 18년 정미(1487년) 2월 경진(10일)조</ref>
  • 하기룡 . . . . 4회 일치
         '''하기룡'''(河基龍, [[1955년]] [[5월 8일]] ~ )은 전 [[KBO 리그]] [[MBC 청룡]]의 선수이다. [[배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실업 야구인 상업은행(현 우리은행) 야구단에 입단한다. 1982년 한국 프로 야구의 출범에 따라 MBC 청룡의 원년 선수로 참가하여 프로 야구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1989년 MBC에서 은퇴한 이후, 초창기의 [[LG 트윈스]] 코치, [[삼성 라이온즈]], [[현대 유니콘스]], [[두산 베어스]]의 코치를 지냈다. [[타카피]]의 3집 앨범에 실린 노래 〈MBC 청룡〉에 [[김재박]], [[이종도]], [[유승안]]과 함께 이름이 실리기도 했다.<ref>[http://sports.khan.co.kr/news/sk_index.html?cat=view&art_id=201008061818293&sec_id=540301&pt=nv 타카피, "한국 야구는 축구계의 브라질 급이잖아요!"], [[한국일보]], 2010년 8월 6일.</ref>
         [[부산고등학교]]에서 선발 투수로 활동하다가, [[경주효성고등학교]]를 거쳐 [[배재고등학교]]로 전학하였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2063000209208003&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2-06-30&officeId=00020&pageNo=8&printNo=15612&publishType=00020 황금사자기를 노린다 (8) - 부산], [[동아일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72년 6월 30일.</ref> [[1973년]]에는 배재고등학교의 에이스로 활동하며 한국 고교 야구 국가대표팀 엔트리에 뽑히기도 했으나<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3083000209208004&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3-08-30&officeId=00020&pageNo=8&printNo=15973&publishType=00020 한국 고교야구 대표선수 16명 엔트리 확정], 동아일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73년 8월 30일.</ref>, 같은 해에 "배재고로 전학하는 과정에서 결격 사유가 있었다"는 부정 선수 논란이 일어나는 등 물의에 휩싸여 한동안 잠적을 하기도 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306190020920801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3-06-19&officeId=00020&pageNo=8&printNo=15911&publishType=00020 "부정선수" 낙인도 아리송한채, 배재고 하기룡, 홈런친뒤 잠적], 동아일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73년 6월 19일.</ref> 배재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974년]] [[상업은행]] 실업 야구단에 들어갔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4012300329208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4-01-23&officeId=00032&pageNo=8&printNo=8714&publishType=00020 전열 다시 가다듬은 실업 야구팀, 육·공군 제외 71개 팀…], [[경향신문]]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74년 1월 23일.</ref> [[1976년]]에는 병역을 치르기 위하여 [[김준환]] 등과 함께 육군 야구단에 입단하여<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601090020920801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6-01-09&officeId=00020&pageNo=8&printNo=16697&publishType=00020 하기룡·김준환 등 육군 팀에 입단], 동아일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76년 1월 9일.</ref>, [[1977년]] 육군 팀의 우승 멤버가 되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7072900209208009&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7-07-29&officeId=00020&pageNo=8&printNo=17175&publishType=00020 실업야구, 육군, 롯데 꺾고 우승], 동아일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77년 7월 29일.</ref> 제대 후 상업은행 야구단으로 돌아와, [[1980년]] 백호기에서 상업은행 야구단이 우승할 때 우수 투수로 뽑혔고<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0052000329208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0-05-20&officeId=00032&pageNo=8&printNo=10657&publishType=00020 상은, 16년 만에 정상 복귀], 경향신문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80년 5월 20일.</ref>, [[1981년]] 실업야구에서도 상업은행이 롯데와 공동 우승을 거둘 때 우수 투수로 다시 뽑혔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1052300329208007&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1-05-23&officeId=00032&pageNo=8&printNo=10967&publishType=00020 실업야구 폐막… 롯데·상은 공동 우승], 경향신문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81년 5월 23일.</ref>
         [[1993년]] [[이종도]] 등과 함께 LG의 코치직에서 물러난 하기룡은 같은 해 11월 삼성과 다시 코치 자리를 계약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3111000329118001&editNo=15&printCount=1&publishDate=1993-11-10&officeId=00032&pageNo=18&printNo=14913&publishType=00010 이종도 수석코치 등 일방해임… LG 파행], 경향신문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93년 11월 10일.</ref><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3111800329119016&editNo=15&printCount=1&publishDate=1993-11-18&officeId=00032&pageNo=19&printNo=14920&publishType=00010 프로야구소식], 경향신문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93년 11월 18일.</ref> 그 후 [[현대 유니콘스]]의 투수 코치가 되었으나 1997년 다시 해임당했고<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7110300329114011&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7-11-03&officeId=00032&pageNo=14&printNo=16263&publishType=00010 코치 '혹한기' 방출바람], 경향신문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97년 11월 3일.</ref>, [[OB 베어스|OB]]-[[두산 베어스]]의 투수 코치를 지내다 이후 물러났다. [[2001년]] [[7월 16일]], [[KBO (야구)|KBO]]가 주도한 "프로야구 출범 20주년 기념 올드스타전"에서 같은 MBC 청룡·LG 트윈스 출신의 김용수, 정삼흠 등과 함께 투수로 뽑혔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001&aid=0000081334 최동원-선동열, 14년 만에 그라운드에서 재대결], 연합뉴스, 2001년 6월 19일.</ref> [[배명고등학교]]에서 감독을 지낸 뒤, 현재는 [[원광대학교]] 야구단의 투수 코치를 거쳐 감독으로 지내고 있다.<ref>[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0031201072433008004 프로 안간다했는데, 제안오면 나도 모르겠네], 문화일보, 2010년 3월 12일.</ref><ref>[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0101501033633008002 “김영덕 감독이 혹사시켜 허리 망가졌다?… 완전 오해”], 문화일보, 2010년 10월 15일.</ref>
  • 한상대 (검사) . . . . 4회 일치
         고려대 법대 재학시절인 1980년 5월 ‘1을종 현역병 입영대상’으로 판정을 받았다가 1981년 5월에 대학원 진학을 이유로 입영기일과 징병검사를 연기했으며, 사법시험 합격 뒤인 1982년 5월 ‘수핵탈출증(디스크) 수술’을 이유로 ‘병종 제2국민역’ 판정을 받았다.
         한 후보자의 부인과 두 자녀는 각각 1998년 5월, 2002년 9월에 용산구 서빙고동에서 용산구 이촌동으로 주소지를 옮긴 것으로 나타났다.<ref>[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488181.html 한상대 검찰총장 후보 ‘재산 25억’]《한겨레》2011년 7월 19일 석진환 기자</ref> 위장전입 덕에 큰 딸은 이촌1동에 있는 중학교에 입학했고 이후 모 외고에 진학한 뒤 아버지와 같은 고려대를 나왔다. 둘째 딸은 그러나 성악을 희망, 일반중학교가 아닌 예술계중학교에 진학하는 바람에 위장전입 두 달 만인 같은 해 11월 주소를 다시 서빙고동으로 옮겼다. 한 내정자는 이같은 사실을 시인하며 "딸이 친한 친구와 함께, 같은 이웃학교에 다니고 싶다고 해서 아내가 주소를 이전했던 것"이라고 군색한 변명을 했다. 그는 그러나 "부동산 투기 등 다른 사유는 전혀 없다"며 자녀 진학을 위한 위장전입은 문제될 게 없다는 인식을 드러내면서도 "결과적으로 위장전입을 한 것이 돼 송구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ref>[http://www.viewsnnews.com/article/view.jsp?seq=77147 "딸이 친구와 학교 다니고 싶어해", MB지명 총장 '전원 불법']《뷰스앤뉴스》2011년 7월 18일 김동현 기자</ref>
  • 홍세화 . . . . 4회 일치
         '''홍세화'''(洪世和, [[1947년]] [[12월 10일]] ~ )는 대한민국의 작가이자, 사회운동가, 언론인이다.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학사 학위 이후, [[1979년]] [[남민전 사건]]에 연루되어 프랑스로 망명했다가 [[2002년]] 한국으로 영구 귀국하여 언론인, 작가, 교육인 등으로 활동하였다. 프랑스 망명 생활 중에 쓴 책인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의 저자로 유명하다. [[한겨레신문]] 기획위원, 아웃사이더 편집위원 등을 지냈으며 2013년 계간지 <[[말과활]]>을 창간했다. 2011년 [[진보신당 (대한민국)|진보신당]] ([[노동당 (대한민국)|노동당]]의 전신) 당대표를 역임하기도 했다.
         [[1947년]] [[12월 10일]] [[서울특별시|서울특별자유시]](現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나,<ref>1948년 이후 서울특별시로 명칭이 바뀐다.</ref>[[충청남도]] [[아산군]] [[염치읍|염치면]]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낸 적이 있고 이후 [[서울창경초등학교|창경국민학교]], [[경기중학교]]와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여 [[1966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금속공학과에 입학하였다.
         * [https://www.youtube.com/watch?v=PLr3lCCFfMc (백강문화특강) 나는 내 생각의 주인인가?]. 2010년 5월 26일.
         * [https://www.youtube.com/watch?v=mv4lFckWkP0 '멈추지 말고 진보하라' 홍세화 - 오연호 대담]. 2013년 5월 28일.
  • 황재규 . . . . 4회 일치
         [http://joynews.inews24.com/php/news_view.php?g_menu=702120&g_serial=381205 한화 신인 황재규, '젊은 마운드의 중심이 되고 싶다'] 《조이뉴스》, 2008년 12월 23일</ref> [[2009년]] [[4월 17일]] [[한밭종합운동장 야구장|대전]] [[SK 와이번스|SK]]전에서 프로 첫 출장을 갖는다. [[2009년]] [[5월 8일]] [[잠실야구장|잠실]] [[두산 베어스|두산]]전에서 프로 통산 첫 선발 [[투수]]로 나와 3.2이닝 동안 6피안타 4실점을 허용하면서 통산 첫 패전을 기록하였다.<ref>[http://osen.freechal.com/news/view.asp?code=G0905080245 '첫 선발' 황재규, 아쉬움 속 희망을 쏘다] 《Osen》, 2009년 5월 8일 작성</ref><ref>[http://joynews.inews24.com/php/news_view.php?g_menu=702120&g_serial=413573 한화 황재규, 데뷔 첫 선발 '실책 2개에 울다'] 《조이뉴스》, 2009년 5월 8일 작성</ref> 1군 9경기에 그친 [[2010년]] 시즌 종료 후 [[공익근무요원]]으로 입대하였고, 소집 해제 후 [[2013년]]에 복귀하여 [[2013년]] [[5월 7일]] 마산 NC전에서 데뷔 첫 승을 거두었다. 2015년 4월 개인적인 사유로 임의탈퇴되었고, 사용하던 등번호는 [[넥센 히어로즈]]에서 이적해 온 [[허도환]]이 달았다.<ref>[http://www.sportsseoul.com/?c=v&m=n&i=196506 한화의 충격적인 트레이드 단행, 도대체 왜?] 《스포츠서울》, 2015년 4월 9일 작성</ref>
  • 흥인군 . . . . 4회 일치
         '''이최응'''(李最應, [[1815년]] [[2월 17일]] ~ [[1882년]] [[6월 10일]])은 [[조선]] 후기의 왕족, 정치인으로, 자는 양백(良伯), 호는 산향(山響), 군호는 흥인군(興寅君)이다. [[남연군]] 이구와 여흥군부인 여흥 민씨의 셋째 아들이자 [[흥선대원군]]의 바로 윗 형이었다. 자는 양백(良伯)이고 호는 산향(山響), 시호는 효헌(孝憲) 또는 충익(忠翼), 문충(文忠)이었다. 본관은 [[전주 이씨|전주]]이다.
         [[1829년]](순조 29년) [[1월 1일]] 흥인부정(興寅副正)이 되고 [[1830년]] [[5월 6일]] [[명선대부]]로 승진한 뒤 흥인도정(興寅都正)으로 진봉되고, 다시 군으로 진봉된 뒤 [[돈녕부]]도정에 임명되었다. 이어 [[현록대부]]로 승진하자 형인 [[흥녕군]]보다 작위가 높다는 이유로 스스로 사양하고 받지 않다가, 형 흥녕군이 현록대부로 승진하자 그해 [[10월 20일]] 소의대부로 승진하고, 군의 품계를 받았다. [[1834년]](순조 34년) [[11월]] [[순조]]가 죽자 그의 능침 조성 때 [[수릉관]](守陵官)으로 참여하였다. 헌종 즉위 후 [[1835년]] 연주 도감(練主都監) 수릉관에 임명되었으며, 남연군의 3년 상을 마친 후 헌종 연간에 동지정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고종 즉위 후, [[1863년]] [[12월]] 판[[종정경]]부사에 임명되고, [[조선 철종|철종]]의 빈전에 종척집사(宗戚執事)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1881년]] 흥선대원군의 서자 [[완은군]] [[이재선]]이 흥선대원군의 추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사사되자, 그의 백부가 되는 흥인군 이최응은 이재선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대한제국 고종|고종]]이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1882년]] [[광주부]][[유수]](廣州府留守)로 부임했다가 같은 해 다시 돈령부영사가 되었다. 그해에 안국동 별궁에서 열린 세자 순종과 순명효황후의 가례 때 종실의 원로로서 참석하였다. [[1882년]] [[6월 10일]] [[임오군란]] 때 난군을 피하여 달아나다가 사로잡혀 살해되었다.
         이때 난병이 흥인군 저택 을 포위하자 이최응은 담장을 넘으려다 떨어져 고환이 터져 결국 사망한다.<ref>노용필, 《개화기 서울사람들:우리 역사속의 사람들 2》 (어진이, 2004) 97 페이지</ref> 6월 9일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그는 밤새 잠을 못 자고, 6월 10일 새벽에 겨우 잠이 들었다. 그러나 집 밖에서 별안간 떠들썩하는 바람에 급히 일어나 뒷담을 뛰어 넘으려 하였다.<ref name="yiyi">이현희, 《한국의 역사 16권. 개혁·개방과 외세의 침투》(청아출판사, 2014)</ref> 담에서 떨어진 그는 고환이 터져 신음하다가 난병의 창에 찔렸다.<ref name="yiyi"/> 그는 대원군의 형으로써 민씨 일파를 도와주었다고 하여 대원군이 일으킨 난병에게 무참하게 참살당하였다.<ref name="yiyi"/>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그가 난병을 피해 도망쳐 담을 넘다가 고환이 터져 죽었다 하였고, 이는 [[유주현]]의 [[대원군]] 등의 작품에 인용되었다.
  • 흥친왕 . . . . 4회 일치
         [[1863년]] [[12월]] 동생 [[대한제국 고종|재황]]이 후사없이 죽은 [[조선 철종|철종]]의 뒤를 이어 [[조선]] 왕으로 즉위했다. 그는 바로 승후관부사용(承候官付司勇)에 제수되었다. [[1864년]](고종 1년) [[5월]] [[문과]]에 급제하여 그날로 규장각 대교(待敎)에 임명되었고, 여러 고위 관직을 거쳤다. 그해 [[8월]] 아버지 흥선대원군은 다시 그를 아들 없이 죽은 형 [[흥완군]]의 양자로 보냈다. 그러나 대왕대비 조씨의 특명으로 다른 종친의 자제를 [[흥완군]]의 양자로 하도록 하고, 이재면의 양자 입양은 취소되었다.
         대원군의 구조 요청을 비밀리에 접한 흥친왕은 배편으로 [[1884년]] [[6월]]부터 [[텐진]]의 보정부로 왕래한다. 그해 [[12월]] 그는 [[인천항]]을 출국, [[청나라]]에 유폐중이던 아버지 [[흥선대원군]]을 방문하여 위로하고, [[1883년]] [[3월]]에 일시 귀국하였다. 다시 그해 [[5월]]에 다시 [[청나라]]에 가서 [[흥선대원군]]을 봉양하다 귀국하였다.
         [[1900년]](광무 4년) [[4월]] 완흥군(完興君)에 봉해졌다. 그러나 [[을미사변]]의 관련자로 지목되어 언관들의 탄핵을 받았다. 이재면이 [[을미사변]]에는 직접 참여하거나 동조하지 않았으나, 을미사변으로 생겨난 제1차 [[김홍집]] 내각에서 궁내부 대신을 역임한 것이 비난의 이유였다. 한동안 벼슬이 없던 그는 생활이 곤란한 처지에 놓였다.<ref>"韓國의 名建物 (2) 雲峴宮", 경향신문 1984년 10월 10일자 9면, 생활/문화면</ref>
         [[1920년]] [[양주군]] [[화도면]] 창현리(현,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로 이장되었다. 신도비는 [[1919년]] [[5월]] 세워졌다. 초창기에는 이희공전화 신도비명이라고 세웠지만<ref>초기의 탁본은 서울역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ref>, 훗날 누군가에 의해 훼손되고 [[1948년]] 신도비를 다시 세울 때는 흥친왕신도비로 제목 3글자가 바뀌어져서 세워졌다.
  • 고경표(배우) . . . . 3회 일치
         그리고 2018년 5월 21일에 현역으로 군입대했다. [[23사단]]으로 입대했으며 [[조교(군대)|조교]]로 복무 중인 듯. 제대예정일은 2020년 --2월 20일--1월 15일.
         || 2014년 5월 29일 || KBS || [[해피투게더(KBS 2TV)|해피투게더]]3 348회 '영화 하이힐 특집' || 게스트 ||
         || 2014년 5월 20일 || 김창렬의 올드스쿨 || 게스트 (with [[정인선]]) ||
  • 김기철 . . . . 3회 일치
         [[1917년]] [[5월 30일]] ~ [[1986년]] [[10월 10일]]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충청북도 [[충주시]]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8월부터 1961년 5월까지 농림부(현 [[농림축산식품부]]) 정무[[차관]]을 역임하였다.
  • 김대호(축구선수) . . . . 3회 일치
         || '''생년월일''' || [[1988년]] [[5월 15일]] ([age(1988-05-15)]세) ||
         사실 이는 어느 정도 예견되었던 게, 수비적인 능력이 그리 깔끔하지 못하다. 센터백으로 실패한 게 이 때문. --공격도 그리 매끄럽진 않잖아-- 풀백으로 뛰면서 공격적인 재능이 꽃핀 덕분에 좋은 모습을 보였지만 수비 쪽에서 단점은 여전. 피지컬로 비벼서 뺏어내는 스타일이라 카드수집이 엄청나다. 사실 2013년도 이런 단점 때문에 박희철과 번갈아가며 나오다가 그가 부상으로 빠지는 바람에 --얼떨결에-- 주전이 된 경우. 이전에는 [[황지수]]가 이 부분을 잘 메꾸어줬지만 2014년 초 황지수가 부상으로 빠진 사이 수비에만 치중하지 않는 [[김태수(축구선수)|김태수]], [[김재성(축구선수)|김재성]], [[손준호]] 등이 주전으로 뛰는 바람에 그의 단점이 극대화, 수비가 좋은 [[박희철]]과 5월부터 급성장한 [[박선주(축구선수)|박선주]]에게 밀렸고 2015년에도 초반에 주전으로 출전하다가 7월 이후에는 여름 이적 시장에 이적한 [[최재수]]가 대신하면서 사실상 주전에서 밀려버렸다.
         2016년에도 [[우라와 레드 다이아몬즈]]와의 [[아챔]] 조별 경기에서 여러 차례 실수를 저지르며 포항 팬들의 큰 원성을 샀고 이후로도 자주 나오지 못하는 중... 인데 5월 12일 [[안산 무궁화]]로의 입대가 결정되었다. 사실 김대호가 떠난다 해도 그의 자리에는 다른 풀백 자원들이 있기 때문에 공백은 크지 않을 듯.
  • 김성민 (1994년) . . . . 3회 일치
         이후 [[5월 18일]]에 당시 [[넥센 히어로즈]] 소속이었던 [[김택형]]과의 1:1 트레이드로 [[넥센 히어로즈]]로 이적하였다. 이에 관해 [[고형욱]] 단장은 이전부터 그를 지켜봐 왔다고 밝히면서 즉시 전력감으로 활용할 수 있고 컨디션과 실전 감각이 대학 시절만큼 회복된다면 더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고 평가하였다. <ref>[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529&aid=0000001214 <nowiki>[배지헌의 브러시백]</nowiki> 넥센은 왜 김택형 대신 김성민을 택했나], 《엠스플뉴스》, 2017년 5월 18일.</ref> [[2017년]] [[5월 28일]] [[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에서 데뷔 첫 선발 투수로 등판하여 4이닝 무실점을 기록했다. [[2017년]] [[7월 2일]] [[kt 위즈]]와의 경기에서 5이닝 1실점으로 승리 투수 요건을 갖췄고, 6회에도 올라왔으나 경기가 강우 콜드로 끝나면서 완투승으로 데뷔 첫 승을 기록하였다.<ref>[http://news1.kr/articles/?3036995 '김성민 데뷔 첫 승' 넥센, kt에 6회 강우콜드 승리] 《뉴스1》, 2017년 7월 2일.</ref>
  • 김성현 (1989년) . . . . 3회 일치
         [[2010년]]에 본격적으로 선발진에 들어왔고 [[2010년]] [[5월 2일]] [[잠실야구장|잠실]] [[두산 베어스|두산]]전에서 시즌 첫 선발승을 기록했다.<ref>[http://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baseball&ctg=news&mod=read&office_id=111&article_id=0000186576 첫 선발승 김성현, "부모님께 큰 선물 됐다" 첫 선발승 김성현, "부모님께 큰 선물 됐다"] - 조이뉴스24</ref>
         5월 14일 LG 전에 선발 등판하였다. 그리고 1회에 [[삼자범퇴]]를 잡아냈으나 2회에 무너지면서 4실점을 하고 4이닝 5실점으로 강판된다. 그래도 팀은 5 대 6으로 역전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이 경기 역시 조작 경기로 드러났다. 일부러 1회에 볼넷 하나 주려고 했는데 LG 타자들이 다 휘둘러서 실패한 것이었다.
         2012년 초, 투수 [[박현준 (야구 선수)|박현준]]과 함께 [[2012년 한국프로야구 승부조작 사건|2012년 한국 프로 야구 승부 조작 사건]]의 당사자로 밝혀졌다. 박현준과 마찬가지로 혐의를 부인했지만 검찰 수사 결과 2012년 2월 28일, 국민 체육 진흥법 위반으로 [[대구지방검찰청|대구 지방 검찰청]]에 체포되었고, 3월 1일 범죄 사실이 소명되고 증거를 없애거나 도주할 염려가 있다는 이유에서 구속 영장이 발부되었다. 김성현은 8시간 가량 조사를 받았고, 넥센 시절이던 2011년 시즌 4~5월 브로커와 짜고 두 차례에 걸쳐 일부로 '1회 첫 볼넷'을 던져 승부를 조작하고 이에 따른 사례금 1,000만 원을 챙긴 혐의를 받았다. 2012년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대구 지방 법원]]은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집행 유예]] 2년, 추징금 700만 원을 선고하고 사회 봉사 활동 120시간을 명령했다. 이에 따라 2012년 3월 6일, 박현준과 함께 같이 LG 구단에서 웨이버 공시되고 [[KBO (단체)|한국 야구 위원회]](KBO) 상벌 위원회는 4월 18일자 재판 결과를 근거로 김성현을 영구 제명했다.<ref>http://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baseball&ctg=news&mod=read&office_id=001&article_id=0005588057</ref>
  • 김승대 . . . . 3회 일치
          * 2013년 7월 10일, 성남전에서 프로 선수로는 첫 FA컵 경기를 치뤘다.
          * 2016년 5월 8일, 창춘 야타이전에서 C리그 데뷔골을 기록했다.
         2014년 9월 10일 U-23 대표팀과 [[UAE]]와 비공개 연습경기에서 결승골을 넣으며 2:1 승리에 기여했다.
  • 김옥이 . . . . 3회 일치
          | 복무 기간 = 1970년 ~ 1998년 9월 10일
         * [[2008년]] 5월 ~ [[2012년]] 5월 : 제18대 [[새누리당|한나라당]] 국회의원(비례대표)
  • 로힝야 . . . . 3회 일치
         타이 경찰이 움직여서 인신매매 조직을 단속했는데, 2015년 5월 1일, 타이 경찰은 말레이시아 국경에 가까운 타이 남부 송클라 지역의 밀림에서 인신매매 캠프에 억류되어 있다 숨진 로힝야의 시신 26구를 발견, 그리고 며칠 뒤 해골 몇 개를 더 발견했다. 타이 경찰의 추적에 따르면 인신매매 조직은 타이 남부 지역의 유력자들과 유착되어 있으며, 타이 언론에서는 군 장성이 연류되어 있다는 보도까지 나왔다. 5월 24일에 말레이시아 정부의 발표에 따르면, 타이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말레이시아 북부에서도 로힝야 감금 캠프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집단 매장지가 발견되었다.
         해외 불교계는 물론 이러한 미얀마 불교의 움직임에 비판적이다. 티베트 불교 지도자 [[달라이 라마]]는 2015년 5월 28일 호주언론 '더 오스트레일리안'과 인터뷰에서 로힝야 족의 현황에 슬픔을 느끼고 있다고 하고, 아웅산 수치 여사가 로힝야 족을 돕기를 희망하며, 국제사회가 로힝야 문제를 외면해서는 안된다고 비판했다.
  • 무라하치부 . . . . 3회 일치
         이 당시 이 마을에 거주하던 중학생 소녀 이시카와 사츠키(石川皐月, 1935년 5월11일 생)는 1952년 부정선거의 풍조에 의문을 느껴 학내 신문인 우에노 중학교 신문에 이 사실을 고발하는 글을 개제하였다. 하지만 학교 측에서 모든 학생에게 배포된 신문을 회수하여 소각 처리했다. 1952년 5월 6일 열린 참의원 보궐 선거에서도 비슷한 수법으로 부정이 실행된 것을 알게 된 이시카와(당시 고교생으로 진학)는 아사히 신문에 이를 투고하여 고발하였다. 아사히 신문사의 기자는 5월 8일 이시카와를 방문하였고, 몇일 뒤에는 사건이 기사화 되었으며 사건 관계자 수십명이 경찰에 출두하게 되었다.
  • 문근영 . . . . 3회 일치
         ||<#f08080><:> {{{#ffffff '''출생'''}}} ||<(><#ffe4e1> [[1987년]] [[5월 6일]]([age(1987-05-06)]세), [[일본]] [[도쿄도]] ||
         2013년 11월 1일 [[불의 여신 정이]]에서 같이 연기한 2세 연하의 배우 [[김범]]과 [[유럽]] 여행 중이라는 기사가 나오면서 열애설이 나왔고 양측은 열애를 인정했다. 허나 7개월만인 2014년 5월 결별소식이 들려왔다.(...)
         [[2006년]] [[성균관대학교]] 인문학부에 특별전형 지원으로 합격했다. 입학 전 [[수능]] 성적으로 [[대학]] 가겠다고 호언장담을 했었고 수능 당일날 교실 하나를 혼자 쓰면서 요란하게 수능까지 봤다. 그런데 막상 원서 쓸 때가 되니까 특별전형, 그것도 연예인들이 으레 가는 '''[[연극영화과]]가 아닌 [[국어국문학과]]에 응시했고''' 간단히(?) 합격해 버려서 당시 [[고3]]들에게 엄청난 [[어그로]]를 끌어버렸다. 아무래도 본인 수능성적이 예상 이하였던 모양이다.[* 문근영이 고3이던 당시, 모교인 [[국제고등학교(광주)|국제고등학교]](일반계 고등학교)를 방문한 졸업생의 증언에 따르면 이러하다. 영화 [[댄서의 순정]] 이후 학업에 열중하겠다는 언플이 있었으나, 영화 개봉과 무대인사가 모두 끝난 5월 말까지도 등교가 아닌 외부활동(교사의 말에 따르면 [[칸 영화제]]를 '구경'갔다고 한다.)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어쩌면 이미 특별전형을 고려하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 박주영 . . . . 3회 일치
         ||<:> '''생년월일''' ||<:> [[1985년]] [[7월 10일]] ([age(1985-07-10)]세) ||
         ||<:> 2008년 5월 31일||<:> [[서울]]||[[파일:요르단 국기.png|width=30]] [[요르단]]||<:> 2–2||<:> 2010 FIFA 월드컵 예선||
         ||<:> 2010년 5월 24일||<:> [[사이타마]]||[[파일:일본 국기.png|width=30]] [[일본]]||<:> 2–0||<:> 친선경기||
  • 박진성(시인) . . . . 3회 일치
         3월 26일에 2016년 10월 당시 출판할 예정이었으나 취소한 글과 2016년 10월 이후에 대해 쓴 글을 엮은 [[https://www.tumblbug.com/poetone78|산문집 '이후의 삶'을 출간하기 위한 펀딩]]을 시작했는데, 4월 1일에 [[https://twitter.com/poetone78/status/980338430587449344|후원금이 목표치를 초과]][* 게다가 트페미들의 조롱과 달리, 후원자들의 성비는 '''여성이 60%를 조금 넘는다고 한다.''' [[https://twitter.com/poetone78/status/985487622431653888|#]] 즉 후원자들은 박진성 시인을 헐뜯는 세력과 달리 성별이라는 진영논리에 얽매이지 않고 남녀 모두가 후원을 해주고 있다는 것이다.]했다. 4월 15일, [[https://twitter.com/poetone78/status/985496403689406464|출간비를 제외한 남은 후원금은 성범죄 피해 여성들의 소송을 돕는 작업에 사용할 것]]이라고 밝혔다. 펀딩은 5월 4일까지 진행되었고 책은 24일에 나왔다. 그리고 일반 서점에선 31일부터 판매 중이다.
         그러나 허위로 밝혀졌음에도 여전히 정신 못차리는 인간들이 오프라인과 온라인 가리지 않고 많다. [[아몰랑|조리돌림해놓고 사과 한 마디도 하지 않는 건]] 양반이고, 아직도 허위사실을 유포하고 있다. [[https://twitter.com/poetone78/status/934804441760350208|#1]][[https://archive.is/LXMJh|@1]][* 첫번째 예시에 나온 사람은 트위터와 인스타그램에서 리을과 시옷이라는 닉네임을 쓴 적 있고 김여선 또는 이선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으며, 주점 레스토랑 Cooper Room(카퍼룸)([[https://twitter.com/Copper_Room_|#트위터 계정]][[https://store.naver.com/restaurants/detail?id=37996846|#네이버 플레이스 정보]])에서 일하는 요리사이자 시인 지망생[[https://twitter.com/satoy_0045/status/928626634474663936|#]][[https://archive.is/Nhple|@]]인데, 이 사건에서 [[https://twitter.com/poetone78/status/926453624502284288|박 시인에게 무고죄로 고소당한 2명 중 한 명]]([[https://archive.is/yofTZ|@]])이다. 무고죄로 기소유예를 받은 뒤에 트위터 계정을 완전히 삭제했다가 파란이 사그라들자 다시 계정을 복구하였다. 여러 문학 작품들만 인용하는 식으로 한동안 이 건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가 [[탁수정]]과 박 시인 간의 설전에서 자극을 받았는지 2월에 갑자기 박진성 시인을 공격했었는데, 김여선의 전과를 아는 사람들이 있어서인지 반응은 대체로 싸늘한 편이었는데다 도리어 대중들이 자신의 죄를 역으로 캐묻기 시작하자 수세에 몰린 것을 직감했는지 다시 트윗들을 삭제했고, 사태가 다시 잠잠해지자 자신을 비판했던 이들을 고소할 것을 선언했다. 3월에 또 박 시인을 공격했지만 예전에 비해 호응해주는 사람이 없어서인지 며칠 후부터는 다른 일에만 전념하고 있는 듯했는데, 4월 16일에 [[https://twitter.com/poetone78/status/985887446482042883|'이후의 삶' 펀딩을 망치기 위해 다른 사람인 척해서 거금을 후원하겠다고 했다가 취소하려는 수작이 들켰다]]고 한다.][[https://twitter.com/poetone78/status/923667324225306624|#2]][[http://web.archive.org/web/20171127054338/https://twitter.com/poetone78/status/923667324225306624|@2]][* 유진목이라는 1인 영상 제작사 목년사를 운영하고 있는 작가다. [[http://www.yes24.com/24/AuthorFile/Author/171395|#]]] 심지어 이 중 [[https://twitter.com/poetone78/status/934776705218068482|송승언]]([[https://archive.is/HxWyl|@]])이라는 사람은 [[http://moonji.com/bookauth/9173/|월간 문예지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시인]]인데 2017년 5월 17일 이후로 주로 트위터에서 박진성 시인을 성폭력 가해자로만 단정짓고 이야기했으며, 무혐의 처분 후에도 사과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https://twitter.com/search?f=tweets&vertical=default&q=blanknoose%20박진성&src=typd|#]][[https://archive.is/286Iy|@]] 이후 박진성 시인의 무고가 확실해지면서 자신에게도 비난의 목소리가 이어지자 한동안 [[https://twitter.com/blanknoose|트위터 계정]]을 비공개로 전환하였다가 사태가 잠잠해지면 다시 공개로 전환하는 것을 반복하고 있다.[* 웃긴 것은 2017년 5월 24일부터 자신의 전 연인이자 후배 문학도에게 '문단창녀'라 성희롱한 사실을 숨기기 위해 박진성을 이용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으며, 송승언은 이에 대응하지 않고 자신에게 비판하거나 박진성 편을 드는 자들은 무시당해도 싸다는 정신승리로 침묵하고 있으며 박진성 시인을 모욕했다는 증거를 삭제하고 있다(증거 자체는 예전부터 삭제하고 있었다고 한다.). [[https://twitter.com/poetone78/status/867579611017658372|#1]][[https://archive.is/z5QTN|@1]][[https://twitter.com/blanknoose/status/936928452875186180|#2]][[https://archive.is/IMg8R|@2]][[https://twitter.com/poetone78/status/899014088801386496|#3]][[https://archive.is/IdmMq|@3]]]
  • 서정돈 . . . . 3회 일치
         * 1994년 5월 ~ 1996년 5월 :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학장(교무 담당)
         * 1998년 5월 ~ 2003년 2월 : 삼성생명과학연구소 소장
  • 서훈 (1942년) . . . . 3회 일치
         |임기 = [[1993년]] [[8월 13일]] ~ [[1996년]] [[5월 29일]]
         |임기 = [[1996년]] [[5월 30일]] ~ [[2000년]] [[5월 29일]]
  • 송지효 . . . . 3회 일치
         * [[2007년]] [[11월 11일]] ~ [[2008년]] [[5월 4일]] [[SBS]] 《[[인기가요]]》 MC ([[김희철 (가수)|김희철]]과 함께)
         * [[2008년]] [[8월 10일]] [[SBS]] 《[[야심만만 2|야심만만]]》 51회 (호러퀸특집)
         * [[2018년]] [[4월 10일]] [[온 스타일|on style]] 《[[송지효의 뷰티풀 라이프]]》 MC ([[권혁수 (배우)|권혁수]], [[모모랜드]] [[연우]], [[구재이]]와 함께)
  • 신동호 (아나운서) . . . . 3회 일치
         '''신동호'''([[1965년]] [[1월 10일]] ~ )는 [[대한민국]]의 아나운서이다. [[경희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1992년]] [[문화방송]]에 입사하였다.
         * 2018년 5월 28일 ~ : [[MBC]] 정직6개월 처분(6개월 연장됨)
         * 《[[생방송 오늘아침]]》(2006년 5월 1일 ~ 2012년 10월 5일)
  • 아데랑스 . . . . 3회 일치
         2000년 5월, 아데랑스 코리아 설립.
         2009년 5월, 아데랑스에 투자했던 미국계 투자회사 스틸 파트너스는 사외이사로서 오오츠키 타다오(大槻忠男)를 진출시켰다. 그는 일본 펩시콜라 등에서 활동한 전문경영인이다. 그리고 오오츠키 타다오는 2009년 10월 CEO로서 사장 취임, 다양한 새로운 경영 방침을 발표했다. 2010년 10월에는 사명을 "유니헤어(ユニヘアー)"로 변경, 아데랑스는 남성용 브랜드로 남기고, 가발 이외에 증모, 육모 분야로 사업을 확대한다고 발표했다.[[https://facta.co.jp/article/201109066.html (참조)]]
         2017년 2월 10일, 가발 업계의 경쟁 심화와 수익 악화에 대처하기 위하여 경영진에 의한 인수를 통하여 도쿄증권거래소에서 [[상장폐지]]하고, 비상장화와 사업기반 강화를 하게 되었다.[[http://www.nikkei.com/article/DGXLASFL09HEH_Z00C17A2000000/ (참조)]]
  • 아이린(레드벨벳) . . . . 3회 일치
         || 2015년 5월 1일~2016년 6월 24 || KBS2 || [[뮤직뱅크]] ||<|2> 진행자 || With [[박보검]] ||
         || 2018년 5월 ~ || [[레모나]] || 단독 ||
          * 2015년 5월 1일부터 배우 [[박보검]]과 [[뮤직뱅크]]의 MC를 맡게 되었다. [[레드벨벳]]에서 첫 고정 스케줄을 갖게 된 멤버이기도 하다. 신고식으로 [[투투(가수)|투투]]의 일과 이분의 일을 불렀다. [[https://youtu.be/v3rY6QWl_uc|신고식]] 사적인 대화는 물론 휴대전화 번호도 교환 안 했다는 후문.
  • 안종범 . . . . 3회 일치
         [[성균관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를 지냈다. [[새누리당]] [[비례대표]]로 제19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2012년 대선 당시 박근혜 캠프에서 경제 분야 공약을 만들었다. 2014년 6월 [[박근혜 정부]] 제2대 [[대한민국의 대통령비서실 수석비서관|경제수석비서관]]에 지명되면서 의원직을 사직했다. 2016년 5월 [[박근혜 정부]] 제2대 대통령비서실 수석비서관에 임용되어 일하다가 [[박근혜]]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 선거|대통령]]이 '[[최순실]] 비선 실세 파문'과 관련해 수석비서관들에게 일괄 사표 제출을 지시하면서 2016년 10월 30일 사임하였고 제3대 대한민국의 대통령비서실 수석비서관 [[강석훈]]이 그 직을 임시 대행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81&aid=0002769333 靑 수석비서관들 일괄 사표제출…朴대통령 인적쇄신 가능할까]. 서울신문. 2016년 10월 30일.</ref> <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4&oid=023&aid=0003228904 민정수석·청와대 비서관… 도대체 뭐 하는 자린고?]. 조선일보. 2016년 11월 16일.</ref> <ref>이상배.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8&aid=0003774512 靑 정책조정수석, 강석훈 경제수석이 대행]. 머니투데이. 2016년 11월 16일.</ref>
         |임기 = [[2016년]] [[5월 16일]] ~ [[2016년]] [[10월 30일]]
         |임기 = [[2014년]] [[6월 12일]] ~ [[2016년]] [[5월 15일]]
  • 여정남 . . . . 3회 일치
         '''여정남'''(呂正男, [[1944년]] [[5월 7일]] ~ [[1975년]] [[4월 9일]])은 대한민국의 민주화운동가이다. 유신정권 시기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민청학련 사건]], [[인민혁명당 사건|인혁당 사건]]으로 사형당한 희생자이다.
         * [[1945년]] [[5월 7일]] [[대구 중구]] 전동(현 [[남일동]]) 출생.
         * [[1972년]] [[11월 10일]] 유신반대 포고령 위반으로 구속.
  • 오병희 . . . . 3회 일치
         '''오병희'''(吳秉熙, [[1953년]] [[2월 10일]] ~ )는 [[대한민국]]의 의사이자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이며, [[서울대학교병원|서울대학교병원장]]을 역임하였다.
         2013년 5월 제16대 서울대학교병원 원장으로 취임했다.
         *2013년 5월 ~ : 제16대 서울대학교병원 병원장
  • 요시다 세이지 . . . . 3회 일치
         아사히 신문은 2014년 4~5월에 걸쳐, 제주도에서 70대 후반에서 90대까지 약 40여명을 취재했다. 이 과정에서 요시다 증언의 문제점이 드러나게 되었는데, "건어물 제조 공장에서 수십명의 여성이 사라졌다"고 기록한 제주도 북서부의 마을에서는, 생선을 다루는 공장이 1개 박에 없었고 경영자의 아들은 "통조림 밖에 만들지 않았다. 여자 종업원이 사라진 일은 없다."고 증언했으며, 요시다 세이지가 '초가지붕'이라고 썻던 공장의 지붕은 한국에서 당시 수산산업을 연구했던 리츠메이칸대학 역사지리학 전공 가와하라 노리후마 교수에 따르면 함석판과 기와로 되어 있었다.[* 원래 제주도는 바람이 강하고, 벼농사가 되지 않아 초가집이 적었다.]
         요시다 세이지는 1943년 5월에 서부군의 동원명령으로 제주도에 갔으며, 그 명령서의 내용이 아내의 일기에 남아 있다고 저술했다. 하지만 요시다의 장남은 어머니는 일기를 쓰지 않았다고 밝혔다.
         요시다는 1943년 5월 당시 제주도에 '육군부대본부'가 '군정을 펼치고 있었다'고 설명했으나, 일본근현대사를 전공한 나가이 카즈 교토대 교수는 제주도로 육군 대부대가 집결한 것은 1945년 4월 이후라고 지적하며, 이러한 기술이 사실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 우동균 . . . . 3회 일치
         * [[가가와 올리브 가이너즈]] (2018년 ~ 2018년 5월 1일)
         '''우동균'''(禹東均, [[1989년]] [[12월 3일]] ~ )은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이자, 일본 독립 야구 [[가가와 올리브 가이너즈]]의 [[외야수]]였다.(5월 1일 퇴단하였다.)
         같은 해 5월 1일 퇴단하였다.
  • 윤석용 . . . . 3회 일치
         2010년 5월 장애인체육회 회장실에서 간부들이 보는 앞에서 직원을 지팡이로 때린 공소사실에 대해 1심 유죄가 인정되어 벌금형을 선고받아 문체부로부터 2013년 1월 22일 대한장애인체육회장직을 직무정지당했으나, 법원 가처분 판결을 통해 복직되었다.<ref>{{웹 인용|제목='직원 폭행' 윤석용 장애인체육회장 직무정지(종합)|url=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3/01/22/0200000000AKR20130122199251007.HTML?did=1179m|저자=[[연합뉴스]]|확인날짜=2013-01-22}}</ref>
         |임기 = [[2008년]] [[5월 30일]] ~ [[2012년]] [[5월 29일]]
  • 윤태진(아나운서) . . . . 3회 일치
          * 남성잡지 [[맥심(잡지)|맥심]] 2014년 5월호 표지모델이 되었다.[* 다만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의 여파로 발행이 보류되었다가 4월 30일에 배포되었다. [[http://www.maximkorea.net/board/board_view.php?board_uid=102&code=bbs_notice|#]]]
          * 2018년 5월 28일 과학의 모든것 사이언스올 팟캐스트의 과장창 레이디제인의 후속 진행자로 확정되었다. 여기서 과장창은 한국과학창의재단은 과학 대중화를 위해 기존 과학 지식의 틀을 깨고 새로운 개념의 과학 방송이다. [[http://www.podbbang.com/ch/15206|#]]
          * 2018년 5월 29일 [[배성재의 TEN]] 생방송에서 추억의 탈것중 기차의 먹을거리 업체를 사람 이름의 아저씨으로 말하는 엉뚱한 매력의 흑역사를 표출하였다.. [[홍익회]]
  • 이경실 . . . . 3회 일치
         ||<#595959><:> {{{#FFFFFF ''' 출생 ''' }}} ||<(> [[1966년]] [[2월 10일]][* [[지석진]]과 같은 생년월일이다.]([age(1966-02-10)]세) / [[전라북도]] [[군산시]] ||
         [[문화방송|MBC]] 1기 공채 코미디언. [[1966년]] [[2월 10일]]생으로 [[전라북도]] [[군산]] 출생. 1987년 제 1회 MBC TV 개그 콘테스트에서 금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데뷔한다. 원래 코미디언이 될 생각은 없었고 배우를 지망했는데, 4학년 2학기 등록금이 필요하던 차에 열린 개그 콘테스트의 대상 상금이 100만원이란 얘길 듣고 응시한다. 하지만 상금이 70만원인 금상을 타게 되고, 불로소득세 33%를 떼고 지인들에게 수상 턱을 내고나니 남는 돈이 없어서 그대로 MBC에 입사하게 되었다고.
         2017년 5월 보도에 따르면, 방송인 이경실은 페이스북에 남편이 성추행한 성범죄 피해자를 비방한 글을 작성해서 고소당해 500만원의 벌금형을 받았다.[[http://entertain.naver.com/ranking/read?oid=001&aid=0009261738|기사]]
  • 이경희 (1880년) . . . . 3회 일치
         [[1909년]](융희 3) [[윤치호]], [[안창호]]와 함께 [[청년학우회]]를 결성하고, [[청년학우회]] 경성부지회의 회원이 되었다. [[1910년]] [[5월 13일]] 독립운동가 [[구찬회]]가 [[경성부]] [[서대문형무소]]에서 사망했다. 구찬회와 같은 고향 출신이던 그는 한국통감부와 일본의 눈을 피해 [[구찬회]]의 시신을 [[미역]] 속에 숨겨서 경성에서 대구 무태로 운반하여 [[구찬회]]의 가족들에게 시신을 전달하고 [[경성]]으로 돌아왔다. [[1910년]](융희 4) [[10월]] [[한일합방]] 조약이 체결되자 [[경성]]으로 올라가 청년학우회 한성지회의 일원으로 [[이동녕]](李東寧), [[윤치호]], [[안창호]], [[윤치소]], [[이회영]](李會榮), [[윤기섭]](尹琦燮), [[이승훈]], [[김좌진]](金佐鎭), [[김구]] 등과 함께 [[신민회]](新民會)를 결성하고 회원이 되었다. 이후 [[신민회]]의 비밀회의에 참여, 독립군 기지창건을 목적으로 자금을 마련하는데 동참했고, [[105인 사건]]을 피해 바로 [[서간도]](西間島)로 망명하여 무관학교(훗날의 [[신흥무관학교]]) 설립을 위해 장사와 노동에 종사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 돈을 모았다.
         [[1923년]] [[의열단]] 단원으로 비밀거사를 준비하여 5월의거를 계획, 국내에 잠입하였다. [[1923년]] [[김원봉]] 의 지령아래 [[김지섭]], [[김시현]](金時顯), 유시태(柳時泰), 홍종우(洪鍾佑), 황옥(黃鈺) 등과 모의하여 [[중국]]과 [[만주]]로부터 무역 목적으로 [[안둥현]]에서 [[쌀가마]]에 숨겨서 국내로 반입해온 폭탄 36개, 권총 13정, 폭탄장치용시계 6개와 뇌관 여러정, 수류탄 10발, [[신채호]]가 작성한 [[조선혁명선언서]](革命宣言書)의 인쇄 사본 및 [[조선총독부]] 관공리에 대한 투항권고 격문 사본 2,000매 등을 반입, [[1923년]] [[3월 15일]] 이를 국내에 반입시키는데 성공하였다.
         무기와 폭탄이 들어오자 그는 [[김시현]], [[유석현]] 등으로부터 〈혁명선언서〉와 투항권고 격문 수백 장을 받아 [[경성부]] 시내 곳곳에 살포하고, 전국 각 도의 도지사와 경찰부(警察部)에 발송하였다. [[김시현]], [[유석현]](劉錫鉉) 등 [[의열단]] 단원들이 [[조선총독부]]와 [[동양척식주식회사]], [[조선은행]], [[매일신보사]] 등을 폭파하할 것을 계획하고 준비에 들어갈 때 이경희는 [[조선총독부]] 폭파를 맡았다. 그러나 [[1923년]] [[5월]] [[조선총독부]] 폭파 일보 직전에 이들의 행동을 수상하게 여긴 누군가의 신고로 밀정이 따라붙어, 동지 12명과 [[조선총독부]] 종로 경찰서에 체포되어 테러 미수 혐의로 재판받았다.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되어 1년 넘게 형을 살고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 이석훈 . . . . 3회 일치
         || [[2011년]] [[12월 10일]] || 7080 영화음악 특집 || 눈물로 쓴 편지 (원곡자: 김세화) || 7번 || 0승 ||
         || [[2016년]] [[5월 20일]] || 3번 || 내게로 (원곡자: [[장혜진(가수)|장혜진]]) ||<|2> 이소리 || 3승, 427점[br]'''다시 보고 싶은 듀엣''' ||
         || [[2016년]] [[5월 27일]] || 5번 || 정류장 (원곡자: [[패닉(가수)|패닉]]) || 0승, 421점 ||
  • 이성민 (야구선수) . . . . 3회 일치
         2015 시즌 구원 투수로 나섰으나 [[2015년]] [[5월 1일]] [[NC 다이노스]]전 까지 11경기에 나서 평균자책점 7.82로 인상적인 활약을 펼치진 못하였다. <ref>[http://www.thesportstimes.co.kr/detail.php?number=88218&thread=33r01 kt, 정대현 이성민 용덕한 이대형 등 특별지명 완료] - 스포츠타임스</ref>
         [[2015년]] [[5월 2일]] [[kt 위즈]]와 [[롯데 자이언츠]]의 5:4 트레이드를 통해 [[롯데 자이언츠]]로 이적하였다.<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o&ctg=news&mod=read&office_id=001&article_id=0007569615 롯데-KT, 5대 4 대형 트레이드 단행] - 연합뉴스</ref> 이적하자마자 9경기 연속 평균자책점 0.00대 행진을 하며 [[롯데 시네마]]라는 조롱성 별명을 얻은 [[롯데 자이언츠]] 불펜진에 큰 힘이 되었다. 5월 한달간 14경기에서 2승 1패, 2홀드, 평균자책점 1.80의 뛰어난 활약을 펼쳤으며, 6월에도 역시 7경기에서 1승 1패, 1홀드, 1세이브, 평균자책점 2.08의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불안한 불펜진의 핵심 투수로 떠올랐다. 그러나 7월과 8월 컨디션 난조를 보였고 15경기에서 2승 3패, 1홀드, 2세이브, 평균자책점 9.45를 기록하며 부진에 늪에 빠졌다. 하지만 9월에 다시 컨디션을 되찾으며 12경기에서 3홀드, 1세이브, 평균자책점 2.03을 기록하며 부활했다. 2015 시즌 61경기에 나서 5승 7패, 7홀드, 4세이브, 4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하였다.
  • 이순재(1935년 10월) . . . . 3회 일치
         ||<#878787> '''{{{#EEE156 출생}}}''' ||<(> [[1935년]] [[10월 10일]][* 주민등록상으로는 1935년 10월 10일생인데 실제로는 저 생일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국회의원이던 당시나 현재 [[http://rokps.or.kr/profile/profile_view.asp?idx=169&page=1|대한민국헌정회에서는 1935년으로 표시되어 있다.]] 그런데 최근 2018년자 뭅뭅 인터뷰에서는 (세는나이) 84세로 본인을 소개하였다.]([age(1934-11-16)]세)[* 1934년생일 때 기준.][br][[일본령 조선]] [[전라북도]] [[전주시|덕진구]] ||
         활동 초기에는 텔레비전 외에 [[연극]] 무대에서 열연하기도 했는데, 2010년 12월 10일부터 [[명동예술극장]]에서 상연되었던 [[돈키호테]]에서 오랜만에 연극 배우로 출연했다. 기존에 많이 상연되던 [[뮤지컬]] 버전인 [[맨 오브 라만차]]의 각색이 아닌 [[프랑스]] 극작가 빅토리앵 사르두의 중후한 희곡 버전을 택했고, 여기에 일부 한국식 풍자 요소를 더해 연출했다고 한다. 이순재의 배역은 타이틀 롤인 돈키호테. 다만 단독 캐스팅은 아니고, 후배인 한명구가 번갈아가며 출연했다. 종연 후에도 꽤 인기가 있었는지, 2012년 초순에 같은 극장에서 한 차례 더 공연했다.
  • 이안 (시인) . . . . 3회 일치
         | 출생일 = [[1967년]] [[5월 1일]]
         1967년 충청북도 제천에서 태어나 건국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2010년 5월 격월간 동시 전문지 『동시마중』을 창간하여 현재까지 편집위원으로 있으며, 동시 전문 팟캐스트, 이안의 동시 이야기, 다 같이 돌자 동시 한 바퀴<ref>http://www.podbbang.com/ch/8204</ref>를 진행하고 있다.
         2010년 5월 격월간 동시 전문지 『동시마중』<ref>http://cafe.daum.net/iansi</ref>을 창간하고, 2014년 동시 전문 팟캐스트를 시작했다.
  • 이장섭 . . . . 3회 일치
         '''이장섭'''([[1963년]] ~ )은 [[대한민국]]의 시민사회 운동가 출신 정치인, 공무원이다. [[1986년]] [[민주화운동협의회]] 충북지회 상임위원으로 활동한 뒤 시민단체에서 활동하였다. 이후 국회의원 [[노영민]]의 보좌관, 국회의장 비서실 비서관 등을 역임했고, 18대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자 캠프에서 활동하였다. [[2017년]] [[5월 11일]] [[문재인]]이 [[대한민국 대통령]]에 당선되자 [[청와대]] 경제수석실 산하 산업정책비서관실 선임행정관(2급 [[이사관]]급 상당)에 임명되었다.
         * [[2011년]] [[7월 4일]] ~ [[2012년]] [[5월]] [[대한민국 국회|국회]] 정책연구위원회 위원<ref name="ssss">[http://www.cbi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75898 충북 첫 국회 2급 비서관 탄생:이장섭 노영민 의원 보좌관 국회정책연구위원]</ref>
         * [[2017년]] [[6월 10일]]<ref>[http://news.joins.com/article/21653324 충북 출신 이장섭·유행렬 청와대 비서실 '입성'] 중앙일보 2017.06.10.</ref> ~ [[2017년]] [[11월]] [[문재인 정부]] [[청와대]] 경제수석실 산하 산업정책비서관실 선임행정관([[이사관]]급)
  • 이정호 (독립운동가) . . . . 3회 일치
         '''이정호'''([[1913년]] [[3월 1일]] ~ [[1990년]] [[7월 10일]])는 [[조선민족혁명당]] 조직부장과 화남지부장으로 활동한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다.<ref>[http://www.encyber.com/search_w/ctdetail.php?gs=ws&gd=&cd=&d=&k=&inqr=&indme=&p=1&q=%C0%CC%C1%A4%C8%A3&masterno=783623&contentno=783623 이정호] 엔사이버 두산백과사전</ref>
         1941년 5월 [[조선의용대]]에 입대하여 제1지대 제1전구사령부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1942년 5월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통합됨에 따라 광복군 제1지대에 편입되어 상위로 복무하였다.
  • 이희근 (1929년) . . . . 3회 일치
         * 1970년 공군본부 감찰감(1970년 5월).
         * 1981년 [[대한민국의 공군참모총장|제15대 공군참모총장]] 보임과 동시에 [[대한민국 공군|공군]] [[4성 장군|대장]] 진급(1981년 3월 10일).
         |임기 = 1981년 3월 10일 ~ 1982년 6월 5일
  • 장신애 (연극배우) . . . . 3회 일치
         |[[2010년]] [[5월 1일]] ~ [[11월 28일]]||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사라||
         |[[2010년]] [[12월 3일]] ~ [[2011년]] [[1월 10일]]||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시즌2||사라||
         |[[2013년]] [[4월 17일]] ~ [[5월 19일]]||뉴보잉보잉 1탄 - 수원||혜수||
  • 전상현 (야구선수) . . . . 3회 일치
         |첫 출장 = [[KBO (단체)|KBO]] / [[2016년]] [[5월 21일]]<br>[[광주-기아 챔피언스 필드|광주]] 대 [[SK 와이번스|SK]]전 선발
         2016년 5월 21일, [[SK 와이번스]]와의 경기에서 선발로 등판하며 데뷔 첫 경기를 치렀고, 경기에서 4이닝 5실점(4자책)을 기록하며 패전 투수가 되었다.
         2016년 6월 10일, [[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에서 데뷔 첫 홀드를 기록하였다.
  • 전태규 . . . . 3회 일치
         *[[2002년]] [[5월]] ghemTV 1차 스타리그 4위
         *[[2003년]] [[5월]] 올림푸스배 온게임넷 스타리그 16강
         *[[2015년]] [[5월]] 스베누 스타리그 시즌 2 챌린지 24강
  • 정몽규 . . . . 3회 일치
         1996년 1월부터 1998년 12월까지 [[현대자동차]] 회장을 역임했고, 1999년 3월부터 [[HDC현대산업개발]] 회장, 2018년 5월부터 [[HDC]]그룹 회장으로 재직 중이다.
         HDC현대산업개발은 1976년 설립된 [[종합부동산인프라기업]]이다. 압구정 [[현대아파트]]단지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약 40만여 세대의 주택을 공급했고, 대표사업지로는 ‘[[삼성동 IPARK]]’, ‘[[수원 IPARK CITY]]’, ‘[[해운대 IPARK]]’ 등이 있다. [[주택사업]] 뿐 아니라 [[도시개발사업]]과 [[건축]], [[토목]], [[플랜트]], [[SOC개발사업]] 등 다양한 건설 분야의 사업을 영위하고 있다. 2017년 다양한 [[라이프스타일]]과 문화적 경험을 제공할 것을 목표로 ‘[[풍요로운 삶과 신뢰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든다’는 그룹 철학 선포했다. 현대산업개발은 2018년 5월 투자회사인 HDC와 사업회사인 HDC현대산업개발로 분할하고 정몽규 회장은 HDC 회장으로 취임했다. HDC는 자회사 관리와 부동산 임대사업 등 사업 포트폴리오 고도화에 집중하고, HDC현대산업개발은 사업집중 회사로 주택, 건축, 인프라 부문에서 전문성을 높인다는 계획이다.
         |임기 = [[2018년]] [[5월]] ~
  • 정웅인 . . . . 3회 일치
         * 2014년 5월 4일~ 2015년 1월 18일 [[MBC]] 《[[아빠! 어디가?]] 시즌2》 ... 장녀 정세윤과 함께 출연<ref>{{뉴스 인용
         * 2006년 1월 10일 [[KBS2]] 《상상플러스 - 올드앤뉴》
         * 2000년 5월 28일 [[MBC]] 《2000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 본선 후보자 인터뷰(with [[윤다훈]], [[박상면 (배우)|박상면]])
  • 정종원 . . . . 3회 일치
         |출생일 = [[1896년]] [[5월22일]]
         '''정종원''' (1896년 5월 22일 ~ 1977년 3월12일)은 [[조흥은행]] 5대 행장이다. 동아일보 창간발기인으로 참여했고 대한아이스하키협회 4대 회장도 역임했다. 1960년 불교단체인 [[법시사]]를 창립한뒤 1990년까지 발행된 불교 전문 잡지 [[법시]]의 초대 발행인이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경상남북도에서 공직생활을 거쳐 평안남도에서 군수를 역임했다. 그의 부친은 [[정재학]] 대구은행 - 경상합동은행 행장으로 일제하 27년간 행장 직을 유지했다. 또한 그의 조카인 [[정운용]]은 해방 후 첫 조흥은행 행장으로 선임된 바 있다.
         정종원 행장이 5.16쿠데타 직전 은행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것은 어쩌면 행운인지도 모른다. 박정희 정부는 은행을 정부 경제성장전략의 들러리로 전락시켰기 때문이다. 은행은 대출심사권을 통해 자본을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사회적 역할이 있다. 하지만 과거 우리나라 은행은 그렇지 못했다. 시장은 철저히 통제됐고, 사실상 제대로 된 경영이란 찾아볼 수 없었다.<ref>경향신문 1965년 3월 11일 시은경영태세 대전환 필요</ref><ref>매일경제 1970년 11월 3일 3면 금융은 정상화될까</ref><ref>매일경제 1979년 5월 1일 1면 관치에 밀리는 자율화</ref>
  • 정채진 . . . . 3회 일치
         |임기 = [[1981년]] [[7월 1일]] ~ [[1982년]] [[5월 2일]]
         |임기 = [[1982년]] [[5월 3일]] ~ [[1985년]] [[2월 20일]]
         |임기 = [[1986년]] [[8월 29일]] ~ [[1988년]] [[5월 19일]]
  • 진창현(음악인) . . . . 3회 일치
         [[1929년|1929]][* 정확한 날짜 불명] ~ [[2012년|2012.]] [[5월 13일|5. 13.]]
         80대에 접어들며 아들들에게 가업을 물려준 뒤에도 계속 공방에서 악기 제작을 하면서 노익장을 과시했지만 2012년 2월에 [[대장암]] 말기 판정을 받았고, 투병 중이던 5월 13일에 초후의 자택에서 향년 83세로 타계했다. 장례는 가족장으로 간소하게 치러졌다.
          * [[1970년]]의 한국 방문에서 당한 일이 워낙 충격적이었는지, 자서전에도 그 경위를 상세하게 적어놓고 있다. 일본으로 떠난 이후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어머니]]와 [[여동생]]의 가난했던 삶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고,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대충 조사를 마무리지은 뒤 회식비를 자신에게 모두 떠넘겼다거나 1976년에 모친상을 치르기 위해 다시 귀국했을 때 자신이 만든 악기가 위조품으로 간주되어 반입 불가를 당한 문제까지 언급하고 있어서 당시 한국에 대한 감정은 그다지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후 한국이 [[민주화]]되고 재일 한국인에 대한 이념적 재단 같은 편파적인 잣대가 주춤하기 시작하면서 소원했던 관계를 회복하기 시작했고, [[2008년]]에 국민훈장을 수상하면서 공식적으로도 명예회복을 이루었다. 말년에는 한국 언론들과 자주 인터뷰나 대담 등을 가지기도 했고, 생전에 마지막으로 언론과 접촉한 것도 타계 열흘 전인 5월 3일에 [[서울신문]] 도쿄 특파원이 병상을 찾았을 때였다.
  • 차준환 . . . . 3회 일치
         2012년 5월 19일 1차 승급 심사에서 6급에 합격한다. 국내 대회에서 계속 주니어 선수로 활약한다.
         2013년 5월 24일 1차 승급 시험 7급에 합격해 국내대회 시니어 자격(급수 7.8급)을 획득한다. 8월 24일 2차 승급 시험에서 8급에 합격하여 초등학생 시기에 최고 급수까지 모두 획득한다. 이후 나이 규정을 충족하지 못한 랭킹 대회를 제외하고 시니어 부문에서 경쟁한다.
         이전 시즌 2014 랭킹 대회와 제69회 종합선수권 대회의 결과로 2015년 5월부터 국가대표로 선발된다.
  • 챈슬러 (음악가) . . . . 3회 일치
         | rowspan="2" | [[5월 16일]]
         | [[7월 10일]]
         | [[2월 10일]]
  • 천호선 . . . . 3회 일치
         '''천호선'''(千皓宣, [[1962년]] [[9월 10일]] ~ )은 [[대한민국]]의 전 정무직공무원이다.
         * 2003년 5월 ~ 2003년 5월: 대통령비서실 제도개선팀장 겸임
  • 최성국 (축구선수) . . . . 3회 일치
         [[2011년]] [[1월 10일]], [[수원 삼성 블루윙즈]]가 최성국의 영입을 공식 발표했다.<ref>{{뉴스 인용 |제목=수원, 공격수 최성국 영입 발표 |url=http://www.sportalkorea.com/news/view.php?gisa_uniq=2011011016004047§ion_code=10&key=%C3%D6%BC%BA%B1%B9&field=gisa_title&search_key=y |출판사=스포탈코리아 |date={{날짜한글화|2010-1-10}} }}</ref> 수원에 입단한 후, [[2011년]] [[3월 5일]] [[FC 서울|서울]]과의 [[K리그 2011|2011 시즌]] 개막전에서 데뷔전을 치렀다.<ref>{{뉴스 인용 |제목=‘게인리히 데뷔골’ 수원, K리그 슈퍼매치 완승 |url=http://www.sportalkorea.com/news/view.php?gisa_uniq=2011030614522512§ion_code=10&key=&field= |출판사=스포탈코리아 |저자=이민선 |날짜=2011년 3월 6일 }}</ref> [[2011년]] [[4월 15일]] [[강원 FC|강원]]전에서 데뷔골을 기록하였다.<ref>{{뉴스 인용 |제목=‘마토 4호골’ 수원, 2-0 완승…강원 시즌 6연패 수렁 |url=http://www.sportalkorea.com/news/view.php?gisa_uniq=2011041520291628§ion_code=10&key=&field= |출판사=스포탈코리아 |저자=홍재민 |날짜=2011년 4월 15일 }}</ref>
         [[2011년 5월]] [[K리그 승부조작 사건|승부조작 사건]]이 터진 후 최성국은 승부조작 근절을 위한 [[K리그]] 전 구단 전 선수가 참여하는 워크숍에서 "부끄러움이 있다면 이 자리에 있지 않는다. 솔직히 웃어 넘길 수 있었으나 계속 들으니 지치기도 했다"라며 또 "모르는 전화는 받지도 않는다. 부끄러움 없이 정직하게 살았다"라고 하면서 승부 조작을 극구 부인하였다.<ref>{{뉴스 인용 |제목=최성국∙유병수, “통장, 통화 내역 공개할 수 있다” |url=http://www.sportalkorea.com/news/view.phgisa_uniq=2011053117182513§ion_code=10&key=&field= |출판사=스포탈코리아 |저자=김성진 |날짜=2011년 5월 31일 }}</ref> 그러나 [[2011년]] [[6월 28일]] [[상주 상무 피닉스|광주 상무]] 소속 시절 승부조작에 참여했다고 자진 신고하였다.<ref>{{뉴스 인용 |제목=결백 주장하던 최성국, 승부조작 자진신고 |url=http://www.sportalkorea.com/news/view.php?gisa_uniq=2011062910214013§ion_code=10&key=&field= |출판사=스포탈코리아 |저자=김성진 |날짜=2011년 6월 29일 }}</ref> 게다가 브로커 역할까지 한 것으로 밝혀졌다.<ref>{{뉴스 인용 |제목='혐의 없다던' 최성국, 400만원 수수에 선수 섭외까지 |url=http://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soccer&ctg=news&mod=read&office_id=109&article_id=0002228785 |출판사=OSEN |저자=허종호 |날짜=2011년 7월 7일 }}</ref> 더 이상 축구계에 발을 딛을 수 없게 영구 제명되었으나,<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241&aid=0002054535 승부조작 가담 선수 모두 “선수자격 영구박탈”] 일간 스포츠 김민규 기자 2011-08-25</ref> [[마케도니아]]의 [[FK 라보트니치키]]에 입단하여 축구 선수로서의 생명을 이어가고자 하였다. 그러나 [[2012년]] [[3월 16일]](한국시간), [[국제 축구 연맹|FIFA]]가 최성국의 모든 선수 활동을 세계적으로 정지시키는 영구제명을 결정함으로써<ref>{{뉴스 인용 |제목=FIFA, 최성국에 '선수 활동 정지' 징계 |출판사=OSEN |날짜=2012년 3월 16일 |url=http://sports.media.daum.net/soccer/news/a_match/breaking/view.html?cateid=1172&newsid=20120316073304526&p=poctan }}</ref> 축구 선수로서의 삶은 끝나게 된다.
  • 최창홍 . . . . 3회 일치
         '''최창홍'''(崔昌弘, <small>일본식 이름:</small> 廣田昌弘, [[1903년]] [[5월 7일]] ~ [[1951년]] [[4월 21일]])은 [[일제 강점기]]의 경찰 겸 관료로, 본적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이다.
         [[1925년]] 4월 [[경성제국대학]]에 입학했으며 [[1930년]] [[3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했다. [[1933년]] 11월 [[고등문관시험]] 사법과, [[1934년]] 10월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했고 [[1936년]] [[5월 21일]] [[경기도]] [[장단군|장단]][[군수]]로 임명되었다.
         [[1945년]] [[5월 11일]] [[충청북도]] 참여관 겸 광공부장으로 임명되었으며 1945년 8월 광복 때까지 고등관 3등과 정6위에 서위되었다. [[친일파 708인 명단]]의 경시 부문, 도 참여관 부문, 조선총독부 사무관 부문,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경찰 부문, 관료 부문,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 최희준 (가수) . . . . 3회 일치
         '''최희준'''(崔喜準, [[1936년]] [[5월 30일]] ~ [[2018년]] [[8월 24일]])은 [[대한민국]]의 [[가수]]이며, [[대한민국 제15대 국회|제15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본관은 [[삭녕 최씨|삭녕]]. 개명 前 이름은 '''최성준'''(崔省準)이며, [[호 (이름)|아호]](雅號)는 소헌(小軒)이다.
         |임기 = [[1996년]] [[5월 30일]] ~ [[2000년]] [[5월 29일]]
  • 칼리파 하프타르 . . . . 3회 일치
         하프타르는 [[이집트]]와 [[UAE]]의 후원을 받으며 국민군을 이끌고 이슬람주의자들에게 맞서서 2014년 5월 부터 벵가지와 동부지역의 이슬람주의 민병대를 척결했다.
         2016년 5월에 세라즈는 미스라탄 부대를 중심으로 반-IS 센터를 트리폴리에 창설하였으며, 5월 중순에 미스라탄 부대는 하프타르가 이끄는 리비아 국군과 시르테 남부 질라 지역에서 전투를 벌였다.
  • 태종학 . . . . 3회 일치
         * 1959년 8월 ~ 1960년 5월 제12대 경상북도 [[청도군|청도군 군수]]
         * 1966년 5월 25일 ~ 1969년 10월 24일 제11대 [[대구광역시장|경상북도 대구시장]]
         |임기 = 1966년 5월 25일 ~ 1979년 10월 24일
  • 표창원 . . . . 3회 일치
         || '''생일''' ||<(>[[1966년]] [[5월 3일]] ([age(1966-05-03)]세) ||
         [[TV조선]]의 인기 시사 예능 프로그램인 [[강적들]]의 5월 5일자 방송에 특별 게스트로 출연하였다. 이날 출연한 다음에는 아예 고정 게스트로 계속 출연을 이어오고 있다가 의정 활동에 집중하기 위하여 하차하였다.
          * 2016년 12월 10일 자신이 받을 수 있는 후원금의 한도가 넘쳐서 더 이상 후원을 받을 수 없다고 밝혔다. 대신 천주교인권위원회의 후원을 부탁한다고 밝혔다. [[http://m.lawissue.co.kr/view.php?ud=20161210113241362077801_12|기사]]
  • 하현우 . . . . 3회 일치
          * 현재 방송 중에 나온 최고음은 '''3옥타브 라♯(A♯5)'''[* 2018 인생술집 [[She's Gone(스틸하트)|She's Gone]] [[http://tv.naver.com/v/3599929?openType=nmp|#]]] 콘서트 중에 '''3옥타브 라♯(A♯5)'''[* 2013년 안산 여르미오 공연 '꼬리'[[https://youtu.be/ehRZu6QXa7o|#]], 그리고 [[2015년]] [[5월 1일]]에 부른 '[[She's Gone(스틸하트)|She's Gone]]'. [[https://www.youtube.com/watch?v=x7S9Q3bUm6o|#]]]를 보여준 적 있다. 가성으로는 '''3옥타브 라♯(A♯5)''' [[https://www.youtube.com/watch?v=f2JhDE6__6E|#]], '''3옥타브 시(B5)''' [[https://www.youtube.com/watch?v=ffl9JCKSPDs|#]], '''4옥타브 라(A6)''' [[https://www.youtube.com/watch?v=tDby__0o4Sg|푸에고(2012 Live.ver)]] 를 보여준 적이 있다.[* 다만 샤우팅을 하다 삑사리처럼 찢어지는 비명으로 터져나온 것이라 가창으로서는 별 의미가 없긴 하다..] 또한 [[두성]]으로 '''3옥타브 라♯(A♯5)'''[* 2013년 안산 여르미오 공연 '꼬리'[[https://youtu.be/ehRZu6QXa7o|#]], 그리고 [[2015년]] [[5월 1일]], [[2018년]] [[7월 12일]] [[인생술집]] 방송때 부른 '[[She's Gone(스틸하트)|She's Gone]]'. [[https://www.youtube.com/watch?v=x7S9Q3bUm6o|#]][[http://tv.naver.com/v/3599929?openType=nmp|#]]]까지 발성할 정도로 음역대가 무지막지하다. [[http://www.10years.co.jp/guckkasten/|국카스텐 일본 사이트]]에서는 '''3옥타브 시(B5)'''까지 가능하다고 적혀 있다. 게다가 한 곡 안에서 최저음과 최고음이 3옥타브 이상 차이가 나면 저음이나 고음 둘 중 한 쪽은 흔들리는 것이 보통인데, 하현우는 초저음역대와 초고음역대를 짧은 순간 안으로도 자유자재로 오간다. 일반적인 고음, 저음으로 유명한 보컬들의 음역대가 비교적 하이톤의 고음 특화거나, 로우 톤의 비교적 저음 특화로 생성된다는 것을 감안했을 때, 양쪽이 모두 가능한 하현우의 음역대는 숙고할 만하다. 오죽하면 음역대로 광고를 찍었을까.
          * 한편 아이돌 판이 어느 정도 성숙해지고 실력파 아이돌들이 그 당시에 비해서 많아진 지금도 여전히 저런 생각인지는 따로 밝혀진 적이 없기 때문에 알 수 없다. 일단 하현우가 아이돌을 대하는 태도는 시간이 지나며 많이 누그러진 편으로 보인다. 애초에 짤방 자체가 2011년 5월 이야기다.[* 선술했지만 2000년대 말부터 양산형식으로 마구잡이로 쏟아져 나오던 아이돌에 대한 비판이 거셌었다.] 섹션 TV 연예통신에 나와서 걸그룹을 좋아한다며 가장 좋아하는 걸그룹으로 [[씨스타]]를 꼽기도 했었다. 때문에 복면가왕 때 [[봄처녀 제 오시네]]와 가왕전에서 만나게 되자 정말 좋아했으며, 이후 라디오 스타에서 동반 출연을 했을 때 그 당시 무대를 극찬하였다. 그걸 보면 어쩌면 지금의 본인은 흑역사로 여기고 있을지도... [[감기 조심하세요 성냥팔이 소녀|성냥팔이 소녀]]와는 냅다 포옹까지 했다.[* 다만 이 때는 그녀가 아이돌인 [[EXID]]의 [[하니(EXID)|하니]]라는 것이 밝혀지기 전이긴 했다. 하현우가 듣자마자 알았다기보단 정말로 그녀의 목소리에 반한 것이 컸다는 걸 감안할 필요가 있다.]
  • 한덕수 (1907년) . . . . 3회 일치
         [[경상북도]]에서 태어나 [[1927년]] 성악가가 되려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니혼 대학]] 중퇴후 노동운동에 참가했다. [[1934년]] 조선인 노동자의 파업을 이끌었다가 체포됐다. [[1945년]] [[10월 15일]]에 결성된 재일본조선인련맹(조련)에 참가해 총무부 담당 위원에 선출됐다. [[1955년]] [[5월 25일]]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 결성후 의장단 6명에 포함됐다. [[1958년]] 5월 제4회 전체대회에서 의장단이 해체되고 단일 의장, 부의장제가 도입되자 의장에 선출됐다. 2001년 사망할 때까지 중앙위원회 의장으로 있었다. [[1967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됐다. [[1972년]]에는 [[노력영웅]] 칭호를 받았다. [[1994년]] [[김일성]]이 죽었을 당시 기준으로 서열 4위였다.
         |임기 = [[1958년]] [[5월]] - [[2001년]] [[2월 21일]]
  • 한명회 . . . . 3회 일치
         그가 태어났을 때, 10개월도 안되어 태어나 병으로 위기를 넘기고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몸 전체가 완전치 못하고 병약하여 온 집안이 거두려 하지 않으니 한 늙은 여종이 그를 거두어 솜털 속에 싸서 정성껏 보살폈는데, 점점 자라서 몇 달 만에 웃고 안아 볼 수 있는 아이가 되었다. 또한 그가 태어날 때 배 위에 검은색 별 모양 점이 있었다고 한다.<ref name="hwan1">[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3642700&cloc=rss%7Cnews%7Csociety 한명회, 황보인 사위 될 뻔했다?] 중앙일보 2009년 6월 10일자 </ref> 이후 그의 몸에 북두칠성이 새겨져 있었다는 소문의 근원이 된다. 그러나 그는 일찍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여의고 동생 명진과 함께 고아가 된다. [[한학]]을 수학하였지만, 불행한 가계와 빈한함, 작은 체구로 주변의 멸시와 놀림을 받으며 불우한 소년기를 보냈다. 한명회는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좋고 민첩하였는데, 그의 종조 할아버지 [[한상덕 (조선)|한상덕]](韓尙德)은 그를 가리켜 집안의 천리마가 될 것이라 예견하였다.
         [[1456년]] [[5월]]에는 [[명나라]] 황제가 [[태감]](太監) [[윤봉 (조선)|윤봉]](尹鳳)을 보내서 그에게 특별 선물로 그에게 관복(冠服)을 하사하였다. 그러나 그는 [[사육신]] 에 대한 감시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3642700&cloc=rss%7Cnews%7Csociety 한명회, 황보인 사위 될 뻔했다?] 중앙일보 2009년 6월 10일
  • 한현규 . . . . 3회 일치
         한현규(韓鉉珪, [[1954년]] [[5월 3일]] ~ )는 [[대한민국]]의 정치인, 공무원이다. 제20회 행정고시에 합격하여 대통령비서관, 경기도 정무부지사, 경기개발연구원장 등을 역임했다. 서울 출신.
         * 1993년 4월 10일 건설부 기획예산담당관
         * 2004년 7월 30일 ~ 2005년 11월 10일 경기도개발연구원 원장
  • Darkest Hour: A Hearts of Iron Game . . . . 2회 일치
          1940년 5월 10일, 독일군의 베네룩스 삼국 침공 시점을 기준으로 한 시나리오.
  • MC메타 . . . . 2회 일치
         2016년 5월 8일에 방송된 [[SBS 스페셜]] <헬조선과 게임의 법칙>에서 방송 중간중간에 랩을 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다만, 직접 출연하지는 않고 목소리만 나왔다.
          * 2015년 5월 양팔에 풀슬리브 [[문신]]을 했다.[* 2013년 가슴에 했던 가리온 로고 이후로 2번째 인듯 [[http://ink361.com/app/users/ig-5329142/mc_meta/photos/ig-993261501991140958_5329142|#]]]
  • Y2K 버그 . . . . 2회 일치
         미국의 컴퓨터 관련 기업들은 Y2K에 대해 설명하는 사이트를 공동으로 개설하였으며[*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9051000099107012&edtNo=15&printCount=1&publishDate=1999-05-10&officeId=00009&pageNo=7&printNo=10363&publishType=00010|매일경제 1999년 5월 10일 기사,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국내 컴퓨터 업계 또한 이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하였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8060800329109001&ed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8-06-08&officeId=00032&pageNo=9&printNo=16453&publishType=00010|경향신문 1998년 6월 8일 기사,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 강기웅 . . . . 2회 일치
         2루수 부문 [[한국 프로 야구 골든 글러브 수상자 (2루수)|골든 글러브]]를 세 차례(1989, 1990, 1993) 차지했다. [[유격수]] [[류중일]] - 2루수 강기웅의 키스톤 콤비는 [[KBO 리그]] 역사상 가장 좋았던 콤비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 거꾸로 쳐도 3할이라는 천재적 타격을 자랑했으나, 약한 체력이 단점이었다.<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66872 5연타석 홈런의 천재 2루수 강기웅] - 오마이뉴스</ref> 통산 타율 0.292로 선수 생활을 마감하였다. 실업야구팀 한국화장품에서 선수 생활을 하고 있었던 [[1988년]] [[10월 25일]]에 [[우리은행|상업은행]]과의 경기에서 세계 최초 5연타석 홈런을 기록한 적이 있다. [[1995년]] [[5월 13일]] 대전에서 [[한화 이글스]]와의 대구에서 1루수 [[이승엽]]과 충돌하여 입은 발목부상이 악화되어 내리막길을 걸었고, 부상 등의 이유로 [[백인천]] 감독과 불화를 일으켜 [[백인천]] 감독이 그를 [[1996년]] 시즌 후 외야수 이희성, 투수 최광훈을 상대로 [[현대 유니콘스]]에 트레이드했으나, 그는 삼성이 아닌 다른 팀에서는 뛸 이유가 없다고 의사를 밝혀 트레이드를 전격 거부하고 [[1997년]] 2월에 현역에서 물러났다.<ref>[http://news.hankooki.com/ArticleView/ArticleViewSH.php?url=baseball/201102/sp2011020917031657360.htm&cd=2101&ver=v002 명품 2루수 강기웅] - 한국일보</ref> 은퇴 후 유통업에 종사했다. 은퇴 때 그는 “심장에 푸른 피가 도는데 어떻게 유니콘스 옷을 입을 수 있었겠느냐”라는 말을 남겼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295&aid=0000000356 천재 강기웅의 인생 유전] - 박동희 칼럼</ref> [[2011년]] [[8월 10일]]에 타격코치로 선임되어 친정 팀에 돌아왔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001&aid=0005206016 삼성, 2군 타격코치로 강기웅 씨 영입] - 연합뉴스</ref>
  • 경빈 박씨 (중종) . . . . 2회 일치
         1527년 동궁전 후원에 불에 태워 마치 돼지와 같은 형상을 하게 된 쥐와 방서를 매달아 세자를 저주한, 이른바 '작서(灼鼠)의 변(變)'에 범인으로 지목되었다. 이는 경빈이 세자를 밀어내고 복성군을 저위(儲位)에 앉히고자 하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경빈 자신과 아들인 복성군은 서인(庶人)으로 강등당한 채 고향인 상주로 유배되었으며 경빈의 아버지 박수림 및 박인형(朴仁亨), 박인정(朴仁貞) 또한 파직되었다. 계속해서 복귀의 날만을 소망하였으나 결국 1533년 '목패의 변' 혹은 '가작인두의 변' 이라고 하는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며 사약을 받고 사망했다.<ref>《조선왕조실록》 중종 74권, 28년 1533년 6월 15일 (음력 5월 23일) 2번째기사</ref> 아들 복성군 역시 사사되었으며, 두 옹주도 옹주 작호를 박탈당해 폐서인되었고 맏사위 당천위 김인경은 유배되었다.<ref>《조선왕조실록》 중종 74권, 28년(1533년) 5월 26일 5번째 기사</ref> 이후, 작서의 변괴와 목패의 변이 [[김안로]]와, 그 아들이며 중종의 장녀 [[효혜공주]]의 남편인 연성위(延城尉) [[김희 (조선)|김희]]가 한 짓이 밝혀지며 복권되었다.
  • 곽성문 . . . . 2회 일치
         |임기 = [[2004년]] [[5월 30일]] ~ [[2008년]] [[5월 29일]]
  • 김구현 (프로게이머) . . . . 2회 일치
         | 소속팀 = [[소울 (E스포츠)|STX SOUL]](2006 ~ 2011년 9월 11일)<br/>[[공군 ACE]](2011년 10월 24일 ~ 2013년 10월 23일)<br/> [[프라임 (E스포츠)|프라임]] (2013년 10월 31일 ~ 2014년 4월 10일)
         2013년 10월 31일 [[프라임 (E스포츠)|프라임]]으로 전격 입단했었으나 출전은 거의 하지 않았고, 2014년 4월 10일에 은퇴했다.
  • 김동건 (법조인) . . . . 2회 일치
         * 서울형사지방법원은 1992년 5월 4일에 지하철 구내 화장실에서 여성을 강제추행하여 구속기소된 피고인에 대해 "일반시민이 이용하는 지하철역이 범죄의 온상으로 전락하는 것을 방치할 수 없다"며 전철역 강제추행 사건으로는 처음으로 실형을 선고하면서 징역2년6월을 선고했다.
         * 서울형사지방법원은 1992년 6월 2일에 지하철역 구내에서 행인 2명의 지갑을 열고 자기앞 수표 2장 등 50만원을 훔친 혐의로 공범 1명고 함께 구속기소된 피고인에 대해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을 적용해 징역2년6월에 치료감호를 선고하면서 "피고인이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 의뢰한 정신감정이나 문서감정 비용을 국가가 부담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하면서 피고인의 요청으로 국립서울정신병원에서 정신감정한 비용 182440원을 피고인이 부담하도록 함으로써 형사소송법 제186조의 피고인에 대한 소송비용 부담 규정을 처음으로 적용했다. 판결에 앞서 서울형사지방법원은 5월 25일에 소속 판사 전원이 참석한 '형사소송 비용 부담제도'에 관한 세미나를 하고 피고인이 유죄판결을 받을 경우에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 쓴 소송비용을 부담하게 하는 방안이 논의됐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2060300289114007&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2-06-03&officeId=00028&pageNo=14&printNo=1251&publishType=00010]</ref>
  • 김민서(배우) . . . . 2회 일치
         [[성균관 스캔들|성스]]의 종영 이후 [[2010년]] 11월 [[배용준]]의 기획사인 [[키이스트]]와 계약했으나, [[2014년]] 5월에 [[키이스트]]와 계약이 만료된 후 [[FNC엔터테인먼트|FNC]]로 이적했다. 이적한 이유로는 [[http://entertain.naver.com/read?oid=014&aid=0003259596|"같은 크리스천과 일을 하고 싶어서"]]라고.... 알려져 있다.
         2018년 5월 17일에 결혼했다. 남편이 일하는 [[미국]]에서 당분간 있을 거라고 한다.
  • 김선재 (아나운서) . . . . 2회 일치
         '''김선재'''([[1992년]] [[5월 2일]] ~ )는 [[대한민국]]의 [[SBS (대한민국의 방송사)|SBS]] 아나운서다.
         * [[SBS (대한민국의 방송사)|SBS]] 《[[맨 인 블랙박스]]》(2016년 9월 6일 ~ 2017년 9월 10일)
  • 김운용 . . . . 2회 일치
         * 2000년 5월 ~ 2004년 5월 : [[대한민국 제16대 국회]] [[새천년민주당]] 전국구 6번 의원을 역임함.
  • 김원주(가수) . . . . 2회 일치
         [[2013년]] [[5월 13일]] 컴백한 음반의 타이틀곡인 '지우고싶다' 에서 주인공으로 열연을 했는데 대사가 없어서 꽤 [[http://osen.mt.co.kr/article/G1109852598/|편했다고 한다.]]
          * 2015년 11월 10일에 군에 입대해서 육군 군악대에서 자대생활을 마치고 2017년 8월 9일 전역했다.[* 원래는 9월 쯤에 입대하려 했으나 영장이 발부되지 않아 연기됐다.]
  • 김윤아(1974) . . . . 2회 일치
         2017년 3월 10일 [[박근혜 대통령 탄핵 심판]] 결과, 탄핵이 인용되자 [[https://twitter.com/love_yuna/status/840027515599040516|하하하쏭이 연상되는 트윗]]을 올렸다.
          * 마담 B의 살롱 시즌2 : 2009년 5월 15일~2009년 8월 21일
  • 김일엽 (야구선수) . . . . 2회 일치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연고 팀 [[삼성 라이온즈]]의 고졸우선지명<ref>[http://osen.mt.co.kr/news/view.html?gid=G1107260007 해외파들, 어떤 절차로 한국 팀에 입단했나?] - OSEN</ref> 을 받았으나 [[단국대학교]] (1998학번)에 진학했고 [[투수]] [[이승학]]과 함께 [[2001년]] 3월 [[필라델피아 필리스]]와 85만 달러에 입단 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2001년]] 외에는 제대로 뛰지 못했고 어깨 회전근 부상으로 [[2003년]] 5월에 방출당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38&aid=0000189169 김일엽 메이저 리그 꿈과 좌절] - 한국일보</ref>
         귀국 이후 수술을 반복하여 재활하였고 방위산업체에서 산업기능요원으로 일하며 군 복무를 마쳤다. 복무하던 중에 [[KBO 리그]] 복귀 유예 기간 규정이 지나 [[대한민국]]에서 활동이 가능해졌고 방위산업체 근무를 마친 후 [[2007년]] [[1월 4일]]에 [[롯데 자이언츠]]에 [[신고선수]]로 입단<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003&aid=0000278662 롯데, 마이너 리그 출신 김일엽과 계약] - 뉴시스</ref> 하였으며, 주로 중간계투로 등판했다. 1군에는 [[2008년]]부터 올라오기 시작하여 [[2008년]]에는 2승 1패 1세이브 5홀드, 평균자책 3.21을 기록했다. 그러나 [[2009년]] 시즌에 들어서는 선발 투수들의 잇단 부상으로 [[2009년]] [[5월]]부터 한시적으로 선발 보직도 겸하였다. 그러나 성적은 매우 좋지 않아 [[2009년]]에는 승리 없이 5패, 평균자책 7.36을 기록하였으며, 특히 [[2009년]] [[6월 21일]]에 있었던 [[KIA 타이거즈|KIA]]와의 경기에서는 선발로 출장했음에도 단 1이닝도 버티지 못하고 5실점하여 강판되었다.<ref>[http://www.donga.com/fbin/output?n=200906210116 ‘데뷔 첫 그랜드 슬램’ 김현수 “만루포 처음이야!”], 《동아일보》 [[2009년]] [[6월 21일]]</ref> [[2012년]]에는 1군 1경기에 그쳤고 그마저도 대량 실점하여 평균자책 40.50을 기록한 후 방출되었다.
  • 김태우(god) . . . . 2회 일치
         ||<#878787> '''{{{#EEE156 출생}}}''' ||<(> [[1981년]] [[5월 12일]] ([age(1981-05-12)]세), [[경상북도]] [[구미시]] ||
         [[불후의 명곡 2]]에는 반고정으로 나와 총 7번 우승했으며 2018년 5월 19일부터 [[불후의 명곡 2]] 대기실 고정 mc로 활동하고 있다.
  • 김태희 . . . . 2회 일치
         2014년 5월 29일, 김태희는 중국 사극 드라마 《[[서성왕희지]]》 제작발표회에 참석하며 중국 데뷔를 알렸다. 그녀는 극중 왕희지의 아내 씨루이 역할을 맡아 연기했다.<ref>{{뉴스 인용 |제목=김태희, 중국 드라마 출연..'서성왕희지' 제작발표회 참석|url=http://starin.edaily.co.kr/news/NewsRead.edy?SCD=EA31&newsid=01453046606094168&DCD=A10102|출판사=이데일리|저자=고규대|날짜=2014-05-30|확인날짜=2015-08-05}}</ref> 김태희는 자신의 역할 씨루이에 대해 "뻔한 여성상이 아닌, 순수하고 정의로운 캐릭터"였기 때문에 더욱 매력을 느꼈다고 말했다.<ref>{{뉴스 인용 |제목=김태희 "中드라마 '서성 왕희지', 유학 동경해 선택한 작품"[TD포토]|url=http://tvdaily.asiae.co.kr/read.php3?aid=1426553404869440017|출판사=티브이데일리|저자=고규대|날짜=2015-03-17|확인날짜=2015-08-05}}</ref> 이듬해 2015년에는 한국 브라운관으로 복귀해, [[SBS TV|SBS]] 드라마 《[[용팔이 (드라마)|용팔이]]》에 한여진 역할로 출연했다. 김태희에게는 2년만에 안방극장으로 복귀작으로 최고 시청률 20.4%를 기록하며 시청자들에 큰 인기를 얻었다. 그녀는 이 작품으로 [[코리아드라마페스티벌]] 최우수연기상, [[SBS 연기대상]] 미니시리즈부문 최우수연기상을 수상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SAF 연기대상] 김태희, 최우수연기상 수상 "'용팔이' 덕에 행복한 한 해"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416&aid=0000174514|출판사 =SBS funE |저자 =김재윤|날짜 = 2016-01-01|확인날짜 =2017-09-09}}</ref>
         2004년 김태희는 헤럴드경제 기업사랑 캠페인 홍보대사로 활동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16&aid=0000148878 'I Love Companies'`기업사랑 캠페인` 본궤도 올랐다] ''헤럴드경제'' 입력일자 2004-09-21</ref> 2005년에는 남편 [[이완 (1984년)|이완]]과 함께 수호천사로 위촉돼 [[독도]] 사랑 캠페인을 벌였고, 같은 해 5월 [[스위스]]에서 친선문화대사로 선정 돼 "독도 우리땅"이라는 문구를 새긴 티셔츠와 리메이크 앨범 등을 나눠주는 활동을 했다.<ref name="광주일보"/><ref>[http://www.myswitzerland.co.kr/etc/entertainer/friends/main.html SWISS FRIENDS 2005] {{웨이백|url=http://www.myswitzerland.co.kr/etc/entertainer/friends/main.html |date=20110813103724 }} 스위스관광청 홈페이지</ref><ref>[http://media.daum.net/society/others/view.html?cateid=1067&newsid=20050217085145988&p=yonhap 김태희, 스위스친선문화대사 선정] 연합뉴스 입력일자 2005.02.17</ref> 이후 2007년 유방암의 위험성을 알리는 핑크리본 홍보대사로 활동을 했고, 7월 22일 부산 [[해운대]]에서 열린 핑크리본 사랑 마라톤 대회에 참여했다.<ref>[http://media.daum.net/entertain/broadcast/view.html?cateid=1032&newsid=20070419123412761&p=SpoChosun 김태희, 유방암 조심하세요 핑크리본 홍보대사] 스포츠조선 입력일자 2007.04.19</ref> 또한 12월에는 [[BC카드]]의 후원을 받아 서울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밥차 배식 봉사활동을 했다.<ref>{{뉴스 인용 |제목=김태희, 밥차 배식 봉사활동 펼쳐|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73&aid=0000027316|저자=탁진현|출판사=[[네이버]]|날짜=2007-12-05|확인날짜=2011-09-15}}</ref> 김태희는 2005년부터 메이크어위시 재단의 홍보대사로 활동하기 시작했으며, 2006년에도 난치병 어린이들과 함께 자선 활동을 계속 했다.<ref>{{뉴스 인용 |제목=김태희, 난치병 어린이들과 따뜻한 만남|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1846672|저자=김가희|출판사=[[네이버]]|날짜=2006-05-16|확인날짜=2011-09-15}}</ref> 뿐만 아니라 2011년에는 난치병 아동들로 이루어진 메이크어위시 합창단 앨범에 참여했는데, "Make-A-Wish"를 녹음했다.<ref>조성훈 [http://www.gaonchart.co.kr/main/section/hotnews/kpop/view.gaon?idx=527 배우 김태희, ‘메이크어위시 합창단’ 음원 참여] {{웨이백|url=http://www.gaonchart.co.kr/main/section/hotnews/kpop/view.gaon?idx=527 |date=20120316165433 }}, 《[[가온 차트]]》, 2011-09-15 작성. 2011-09-15 확인.</ref>
  • 김형기 (법조인) . . . . 2회 일치
         * 서울형사지방법원 합의7부 재판장으로 재직하던 1972년 9월 27일에 필화사건으로 기소된 동아일보 의정부 주재기자 장봉진에게 공갈죄를 적용해 징역9월 집행유예1년을 선고하면서 [[반공법]]위반에 대해서는 "송고 시간이 급박했고 오보된 기사의 정정을 위해 노력한 점으로 보아 이적 목적을 인정할 수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ref>경향신문 1972년 9월 27일자</ref> 10월 4일 폭력행위 처벌에 관한 법률과 [[도로교통법]]위반으로 기소된 영화배우 [[박노식]]에 대해 "실형을 선고해야 마땅하나 연예계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나 반공극에 공헌한 점을 참작했다"며 징역10월 집행유예2년을 선고했다.<ref>동아일보 1972년 10월 4일자</ref> 12월 21일에 북한에서 의약업자를 하다가 귀순하여 국가보건원 직원들에게 국가시험 정답지를 20만원~100만원을 주고 빼낸 피고인 20명 중에서 1명만 무죄를 선고하고 징역1년~벌금5만원을 선고했다.<ref>경향신문 1972년 12월 21일자</ref> 1973년 5월 16일에 [[대한민국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 동대문 선거구 공화당 후보에게 사전 투표를 하여 구속된 피고인에게 징역1년6월~10월을 각각 선고했다.<ref>경향신문 1973년 5월 16일자</ref> 7월 24일에 일본에서 지내던 중에 북한 공작원에게 포섭되어 2차례 평양에서 밀봉교육을 받고 합작투자로 위장하여 국내 경제계, 군부 등에 침투하려 했던 재일교포 사와모도 산지(한국명 한삼차)에게 "사형을 선고해야 마땅하나 피고인이 일본에 귀화했고 인생의 황혼기에서 범죄사실을 모두 자백한 점 등을 참작했다"며 [[국가보안법]], [[반공법]], 간첩죄를 적용해 무기징역을 선고했다.<ref>경향신문 1973년 7월 24일자</ref><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3072400209207006&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3-07-24&officeId=00020&pageNo=7&printNo=15941&publishType=00020 동아일보 1973년 7월 24일자]</ref>
  • 남일해 . . . . 2회 일치
         |[[1990년 5월]]||남일해 히트모음||
         |[[2013년]] [[5월 1일]]||남일해 골든베스트 (참 좋다)||
  • 로버트 켈리 . . . . 2회 일치
         [[도널드 트럼프]]에 대해서 반대하는 입장이며, 수업중에 흥분하여 비판 발언을 날리고 트럼프가 대통령 당선된 날에는 수업을 잠시 중단시킬 정도였다고 한다. 3월 10일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인용 결정이 내려오자, "박근혜 탄핵으로 브렉시트, 트럼프 현사응로 인한 세계적인 민주주의 쇠퇴 현상이 멈춰졌다. 이제 프랑스 극우정당 국민전선의 [[마린 르펜]] 후보가 대통령이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트위터]]에서 발언했다.[[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3/14/2017031402097.html (참조)]]
         2017년 3월 10일 [[박근혜]] 대통령 탄핵 선고 이후 [[BBC]]와 자택에서 [[스카이프]]로 인터뷰를 가졌는데, 인터뷰 도중에 아이들 2명이 방 안에 들어오는 [[방송사고]]가 터졌다. 처음에는 한 명이 들어와서 스카이프 캠 앞으로 다가오길래 교수가 손으로 가로막았는데, 뒤에서 보행기를 탄 동생까지 들어왔다. 곧이어서 아내가 급히 들어와서 아이들을 데리고 방에서 나갔다.[[http://www.etnews.com/20170311000021 (참조)]][[http://time.com/money/4697929/kids-interrupt-live-skype-interview-bbc-funny/ (타임지)]]
  • 로베르 기스카르 . . . . 2회 일치
         결국 1081년 5월말에 함대가 출항했다. 함대에는 1300명의 노르만 기사와 사라센, 그리스, 그외 수많은 민족의 병사들의 보병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라구사의 지원군까지 합류한 군대는 해안을 따라 천천히 가서 코르푸에 닿았고, 그곳의 수비대는 즉시 투항했다. 코르푸의 함락은 기스카르에게 상당히 중요했는데, 이로써 발칸 침략을 위한 교두보가 확보되고, 이탈리아의 증원군을 그곳을 통해 좀더 빨리 투입시킬 수 있었기에 그가 침략에 매진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기스카르는 즉각 이탈리아로 돌아와 1083년 한여름 안에 아벨라르와 그의 형제인 에르망의 난을 진압하고, 산탄젤로성에서 외롭게 저항하고 있는 교황을 구원하기 위해 새로운 군대를 모집했고, 이듬해 초여름에 로마로 향했다. 그러나 하인리히 4세는 기스카르와 직접 싸움을 걸정도의 바보는 아니었다. 그가 로마성문으로 들이닥치기 사흘전에 군대의 대부분을 거느리고 롬바르디아로 숨어버린것이다. 한편, 기스카르는 5월 27일 밤에 병력을 거느리고 조용히 도시의 북쪽으로 돌아가,섀벽에 공격을 개시했고, 순식간에 돌격대의 선봉이 플라미니우스 성문을 뜷고 도시로 진입했다. 로마 시민들은 노르만군에게게 격렬히 저항했지만 그들을 막을 수는 없었고, 마르티우스 광장 전역이 불타는 지역으로 변했다. 이후 노르만 병사들은 로마를 약탈하고, 말그대로 개판으로 만들어버렸다. 격분한 로마 시민들은 폭동을 일으켰고, 한때 군중들이 기스카르를 포위해 그대로 끔살시킬뻔하기까지 했다(...) ~~아깝게도~~ 그에게는 다행히도 그의 차남인 로제르 보르사가 병력 1천명을 이끌고 그를 구원해 겨우 목숨을 건진 기스카르는 노르만군들에게 도시를 모조리 불태우라고 명령한뒤, 교황을 데리고 남이탈리아로 돌아가 비잔티움에 대한 후속 원정을 준비한다.[* 참고로 이때 기스카르의 나이는 예순 여덟이었다!! 그것도 서양식이니 한국식이면 칠순(....) 대단한 집념이라 할 수 밖에 없다.]
  • 류명선(야구선수) . . . . 2회 일치
         프로 첫해인 1989년 4월 12일에는 첫 완투승을, 5월 24일에는 첫 완봉승을 거두는 등 14승 8패 1세이브의 성적을 기록하며 당시 [[김시진]]의 이적으로 자칫 약화될 수도 있었던 삼성 투수진을 [[김성길]]과 함께 같이 지켰다. 타격 2위를 차지한 강기웅과 함께 그해 삼성의 대표적인 유력 신인이었지만, 신인왕은 19승을 거두며 맹활약한 [[태평양 돌핀스]]의 [[박정현(야구선수)|박정현]]이 차지했다. 이듬해 [[이태일]]이 입단하며, 김성길 등과 함께 1990년대 초 삼성 선발진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물론 이 시기에는 [[김상엽]]도 있었지만 1990년을 제외하면 기대 이하의 성적이었다.] 입단 동기였던 [[정윤수]]가 1990년 선발과 중무리를 오가며 혹사 당한 끝에 1991년 이후에는 위력이 크게 저하된 것을, 생각하면 내구성도 좋았던 편.
         이후 부진을 면치 못하다 결국 1995년 5월 [[김현욱(야구)|김현욱]]과 같이 쌍방울로 트레이드되었다.(류명선+김현욱↔[[최한림]]+윤혁) 쌍방울에서도 재기에 실패해 1996년 은퇴했다.
  • 문문 . . . . 2회 일치
         디스패치 취재 결과 지난 2016년 8월 몰카 촬영으로 처벌받은 전력이 확인되었다. 강남의 한 공용 화장실에서 여성을 몰래 촬영하다 적발 되었으며, 혐의를 일부 인정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또한 하우스오브뮤직과의 전속 계약 당시 이 사실을 숨기고 계약을 맺었으며, 소속사는 2018년 5월 24일 문문과의 전속 계약을 해지했음을 밝혔다. [[https://www.dispatch.co.kr/1314350|기사]]
         ||<-3><rowbgcolor=white> 총 18분 18초 ||<-3> 2016년 11월 10일 발매 ||
  • 문연주 . . . . 2회 일치
         |[[2009년]] [[5월 1일]]||잡지마 / 웃으며 삽시다 / 둘이서||정규
         |[[2015년]] [[5월 12일]]||문연주 명작 트로트 (트로트 / 디스코)||정규
  • 문호근 . . . . 2회 일치
         '''문호근'''(文昊瑾, [[1946년]] [[11월 17일]] ~ [[2001년]] [[5월 17일]])은 [[대한민국]]의 [[연극]]연출가 겸 [[오페라]] 연출가이다.
         [[1967년]] [[피아노 연주자|피아니스트]] 첫 데뷔를 한 그는 이후 피아니스트 활동을 접고 1970년대 이래 각종 오페라를 연출하였으며, 진보적인 예술인단체인 민예총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이후 [[1997년]]부터 [[예술의 전당|서울 예술의 전당]] 공연예술감독관으로 재직하던 중, [[2001년]] [[5월 17일]] 56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ref>{{뉴스 인용|성1=연합뉴스 |제목=오페라 연출가 문호근씨 타계 |url=http://legacy.www.hani.co.kr/section-009000000/2001/05/009000000200105171428773.html |날짜=2001-05-17 |확인날짜=2018-09-05 |뉴스=한겨레신문}}</ref>
  • 박근영 (야구인) . . . . 2회 일치
         [[2015년]] [[5월 12일]] [[한화 이글스]]와 [[삼성 라이온즈]]의 경기에서 9회초 2사 3루 한화 이글스의 공격 상황에서 타자 [[김회성]]이 친 3루 땅볼을 3루수 [[박석민]]이 잡아 홈으로 송구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주자 [[강경학]]의 발이 홈을 먼저 태그했음에도 아웃으로 판정하여 또다시 논란이 되고 있다.
         [[2015년]] [[5월 31일]] [[LG 트윈스]]와 [[삼성 라이온즈]]의 경기에서 5회말 2사 1루, 3루의 [[LG 트윈스]] 공격 상황에서 4번 타자 [[잭 한나한]]이 3볼 2스트라이크에서 6구째 헛스윙을 하지 않은 것을 스윙으로 판정하여, 또다시 논란이 되고 있다.
  • 박부남 (1931년) . . . . 2회 일치
         * 할아버지 : [[박중양]](朴重陽, [[1872년]] [[5월 3일]] ~ [[1959년]] [[4월 23일]])
         * 할머니 : 이주열(李主悅, 본관은 전주(全州), [[1870년]] [[3월 4일]] - [[1961년]] [[5월 20일]])
  • 박세웅(1996) . . . . 2회 일치
         ||<:> '''생년월일''' || [[1996년]] [[5월 10일]] ||
  • 박세직 . . . . 2회 일치
         그러나 곧 다시 [[전두환]]에게 중용되어 1982년 [[한국전력공사]] 부사장을 지냈다. 그러다가 1983년 [[국가안전기획부]] 제2차장에 임명되어 [[노신영]] 국가안전기획부장을 보좌하였다. 그러면서 노신영과 함께 그 해 5월에 일어난 [[중공 여객기 불시착 사건]]을 해결하였다.
         본의 아니게 2017년 10월 10일, 다시 큰 관심을 끌게 되었는데 박세직의 손녀와 수영선수 [[박태환]]의 교제 사실이 인스타그램을 통해 알려졌기 때문. 축하한다는 반응도 많지만 교제 상대의 조부가 [[하나회]] 출신 주요인사라는 것이 주목받으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도 있다.
  • 박주아(1942년) . . . . 2회 일치
         '''박주아'''(<small>본명</small>: '''박경자''', [[1942년]] [[9월 20일]] ~ [[2011년]] [[5월 16일]])는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1962년]]에 [[한국방송공사|KBS]] 1기 공채 탤런트로 데뷔했으며,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신우암 초기 판정을 받고 [[2011년]] [[4월 17일]] 수술한 후 중환자실에서 회복 중, [[5월 14일]] 급작스런 다발성 장기 부전에 빠져 투병하다가 16일 오전 향년 68세로 별세했다.
  • 박준규(1925) . . . . 2회 일치
         [[1925년]] [[9월 12일]] ~ [[2014년]] [[5월 3일]]
         15대 국회 임기가 끝남과 동시에 정계은퇴를 선언했고, [[2014년]] [[5월 3일]] [[http://dkbnews.donga.com/3/all/20140503/63238866/2|세상을 떠났다.]]
  • 박홍우 . . . . 2회 일치
         * [[2011년]] [[5월 25일]]~ [[2012년]] [[9월 4일]] 의정부지방법원 법원장
         * [[2010년]] [[2월 2일]]~[[2011년]] [[5월 14일]] 서울중앙지법 형사수석부장판사
  • 방우정 (방송인) . . . . 2회 일치
         |출생일= [[1961년]] [[5월 9일]]
         '''방우정'''([[1961년]] [[5월 9일]] ~ )은 [[대한민국]]의 방송인이다. 현재 MC 리더스의 대표를 역임하고 있다.
  • 백기만 . . . . 2회 일치
         '''백기만'''(白基萬, [[1902년]] [[5월 12일]] ~ [[1966년]] [[8월 7일]])은 [[대한민국]]의 [[시 (문학)|시인]], [[문학 평론|문학평론가]]이다. 본관은 [[수원 백씨|수원(水原)]]이고 [[호 (이름)|아호(雅號)]]는 목우(牧牛), 흰곰이며 [[필명|필명(筆名)]]은 '''백웅'''(白熊)이다.
         * [[시 (문학)|시인]] [[이상화 (시인)|이상화]](李相和, [[1901년]] [[5월 9일]] 출생 ~ [[1943년]] [[4월 25일]] 사망. 아호는 상화(尙火, 想華), 무량(無量), 백아(白啞). [[소설|소설가]], [[수필|수필가]], [[번역|번역문학가]], [[문학 평론|문학평론가]]로도 활동하였다.)
  • 백대현 . . . . 2회 일치
         |출생일 = [[1978년]] [[5월 15일]]
         '''백대현'''(白大鉉, [[1978년]] [[5월 15일]] ~ )은 [[대한민국]]의 [[바둑 기사]]이다.
  • 뱌체슬라브 몰로토프 . . . . 2회 일치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인 1939년 5월에 외무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939년 10월에 '''[[독소불가침조약]]'''을 체결했다.
         1941년 5월 스탈린은 몰로토프를 대신하여 각료회의(이전의 인민위원회) 의장이 되었고, 몰로토프는 제1부의장 지위로 내려갔다.
  • 봉준호 . . . . 2회 일치
         2009년 5월 4번째 장편 《[[마더 (2009년 영화)|마더]]》를 개봉했다. 살인 사건에 연루된 아들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엄마의 이야기이며, [[김혜자]]의 파격적인 연기 변신으로도 화제가 되었다. 일상적이고 평범한 장소를 배경으로 비현실적이고, 이질적인 느낌이 드는 장면을 포착하고, 영화 속 주인공들의 난감한 행동에 웃음을 터뜨리도록 유도하면서도 우스꽝스러운 상황에 서늘한 풍자를 심어 놓는 특유의 영화 감각을 가지고 있다.<ref>[http://www.mydaily.co.kr/news/read.html?newsid=200805071055411120 봉준호 감독 '무(無)평에 상처받은 적 있다'], 마이 데일리, 2008년 5월</ref>
  • 서수민 . . . . 2회 일치
         [[어서옵SHOW]]를 담당하던 도중, 2016년 8월 10일에 KBS 사표를 낸 다음 몬스터 유니온에 합류했다. [[http://entertain.naver.com/read?oid=144&aid=0000446208|#]]
          *[[프로듀사]] (2015년 5월 15일~6월 20일)
  • 소냐(가수) . . . . 2회 일치
         [[김천시|김천]]에서 태어났으나 태어난 지 일주일 만에 아버지가 [[미국]]으로 떠나고 어머니를 8세 때 잃는 아픔을 겪었다. 이후 [[김천시|김천]]에 있는 외할머니 슬하에서 성장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공장에서 일하며 고학을 했고, 1998년 5월 <박상원의 아름다운 TV-얼굴>을 통해 사연이 소개된 뒤 1999년 5월에 가수로 데뷔했다.
  • 송창현 . . . . 2회 일치
         2014 시즌 이후 마무리 훈련에 참가했지만 부상으로 도중에 낙마했다. 이후 11월 19일 요코하마의 한 병원에서 진단을 받은 결과 좌측 어깨 전관절 와순 부분 파열로 접합 수술을 받았다. 26일에 퇴원해서 귀국한 이후 서산에서 재활훈련에 들어간다고 한다. 단계적으로 내년 2월쯤에 캐치볼을, 5월달쯤에 실전 피칭에 들어간다고 한다.
         5월 25일 넥센전 이후로 2군에서 시즌을 마감했다. 퓨처스 리그에서의 성적은 썩 좋은 편은 아니다. 7경기에 4경기 선발, 3경기 구원등판해 2승 2패 1세이브 평균자책 6.75의 성적을 기록했다.
  • 신혜성 . . . . 2회 일치
         ** [[5월 26일]] [[M.net]] [[엠카운트다운]] 1위
         ** [[5월 28일]] [[MBC]] [[생방송 음악캠프|음악캠프]] 1위
  • 신화용 . . . . 2회 일치
         그리고 시즌이 시작하자 감독은 바뀌었고 [[손준호]]가 시즌아웃을 당하자 미드필더진이 무너졌고 수비진에는 과부하가 걸리다 보니 감독은 그냥 3백에 수비위주 전술을 썼다 그래서'''신화용에게는 지옥같은 시즌이 펼쳐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점률은 5월 현재 0.89로 작년과 별 차이가 없다는게 함정...~~15시즌 초반에도 지옥이었으니까~~] 게다가 15시즌 말미에 당한 부상여파가 남았는지 16시즌 들어서는 부상으로 경기 출장을 못하는 날이 늘어나고 있는데, 그 틈을 비집고 후배인 [[김진영(축구선수)|김진영]]이 무서운 선방을 보이며 신화용의 자리를 위협하고 있지만 이는 부상으로 신화용이 경기에 못 나올 경우 한정이며 컨디션이 좋을때는 여전히 신화용이 No.1이다. 그리고 ACL, FA컵에서 조기 탈락하며 리그에만 집중하면 되는지라 부상만 아니라면 신화용이 시즌 내내 포항의 뒷문을 책임질 것 같았으나...
         이런 모습은 5월5일 [[FC서울]]과의 슈퍼매치 에서도 나왔는데 이번엔 상대 공격수 [[에반드로]]가 공을 몰고 오는데 공은 안보고 바로 바디체크를 했지만 PK가 선언되지는 않았다. FC 서울이 이겨서 큰 논란은 없었지만 이 장면 역시 문제였다.
  • 안영준 . . . . 2회 일치
         2017년 11월 10일 LG전과 12일 현대모비스전에서는 엔트리에는 들었으나 아예 출전하지 못했다.
         기사가 나온 하루 뒤인 3월 10일 모비스전에서 보란 듯이 인유어페이스덩크를 성공시키고 DB전에서는 20득점을 올리면서 팀의 승리를 견인했다. 유재학 감독의 발언이 자극이 된 듯 하다.
  • 영천시 . . . . 2회 일치
         2015년 5월 [[보잉]]의 항공전자 MRO 센터가 영천에 준공되어 대한민국 공군의 주력 전투기인 F-15K 관련 항공전자 부품 테스트 및 정비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16&aid=0000740517|관련 기사]]
         시장통에 있는 말죽거리터에는 육군 공병대와 함께 [[6.25 전쟁]] 초반인 1950년 7월 미 25사단 산하 포로수용소가 설치되기도 했었다. 이곳에서는 친공포로와 반공포로를 수용했었지만 전쟁 중후반 친공포로와 반공포로의 대립이 절정에 달하자 문제를 인식한 미군이 친공포로와 반공포로를 분리수용하기 시작하면서 주로 반공포로와 민간인 포로를 수용하는 역할을 담당했었다. 이곳은 이승만 대통령이 시찰차 방문한 적이 있었고 훗날 반공포로 환영식도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되었었을 만큼 규모가 큰 수용소였는데 규모가 있는 수용소였던 만큼 탈도 많았는지 1952년 5월 29일에는 포로들의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었고 그 후에도 포로들의 시위가 간간히 있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미군들이 공산당의 사주를 받아 폭동을 모의했다며 경북도의원을 무단 체포, 납치하는 사건도 발생해 지역민들의 빈축을 샀었다고. 그 외에도 격전지였던 영천전투에서 발생한 인민군 포로를 수용하기 위해서 현재의 영남대학교 영천병원 부지 근처에 임시수용소를 설치하기도 했었다고 한다.
  • 용덕한 . . . . 2회 일치
         2008년에 복귀했다. [[2009년]] 시즌에 [[최승환]]의 부상으로 인해 79경기를 출장한 것이 최다 출장한 기록이 되었다. [[2010년]] 포스트 시즌에서 주전 포수 [[양의지]]를 대신한 특급 백업 요원으로 자리매김하였고, 상대적으로 경험이 적었던 [[양의지]] 대신 노련한 모습을 선보이며 좋은 활약을 펼쳤다.<ref>[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0100601032233169006 준비된 백업 용덕한 준PO 시리즈 MVP로] 문화일보</ref> 그러나 [[2011년]] [[5월 27일]] 잠실 한화전에서 낫아웃 상황에서 파울이라고 항의하다가 [[오선진]]이 3루까지 뛰는 상황을 자초하여, 이후 2군행을 통보받았다.<ref>[http://osen.mt.co.kr/news/view.html?gid=G1105280001 낫아웃에 3루까지...어떻게 된 건가?] - OSEN</ref> 이는 [[1997년]] [[8월 23일]] 대구에서 열렸던 [[삼성 라이온즈|삼성]]과 [[쌍방울 레이더스|쌍방울]]과의 연속 경기 1차전의 낫아웃 해프닝 이후 낫아웃 상황의 착오가 발생한 사건이었다(이 사건의 원인을 제공한 포수 [[김영진 (야구 선수)|김영진]]은 이후 [[한화 이글스]]에 트레이드되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109&aid=0000065870 김영진의 ‘희대의 해프닝’ 낫아웃 오판] - OSEN</ref>
         [[2014년]] [[11월 28일]] [[kt 위즈|kt]]의 신생팀 특별지명을 받아 [[kt 위즈]]로 이적했다. [[2015년]] [[5월 6일]] [[한밭종합운동장 야구장|대전]] [[한화 이글스]]와의 경기에서 5회초 1사 만루 송창식을 상대로 시즌 첫 홈런, 생애 첫 [[만루홈런]]을 기록하였다.
  • 우효광 . . . . 2회 일치
         ||<#b88568> {{{#FFFFFF '''출생''' }}} ||<(> [[1981년]] [[5월 16일]]([age(1981-05-16)]세), [[대구광역시]] [[달서구]]
          * [[2017년]] [[7월 10일]]부터 동상이몽 시즌 2격인 [[동상이몽, 너는 내 운명]]에 아내 [[추자현]]과 함께 출연하고 있다. 추자현과 함께 귀여운 부부의 모습을 보여주며 인기를 끌며, 우블리라는 별명을 얻었다. [[동상이몽, 너는 내 운명]]이 정식으로 편성받는 데에 많은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 부부의 스페셜 방송이 편성될 정도로 활약이 대단하다. 동시간대 1위를 첫방송부터 계속 수성하고 있다.
  • 유미(가수) . . . . 2회 일치
         2012년 12월 10일 녹화한 [[불후의 명곡 전설을 노래하다]] [[엄정화]] 편[* 무대의 방영은 2013년 1월 12일.] 2부 무대에 서게 되면서 그녀의 사연이 알려졌고[* 당시 함께 출연한 [[손호영]]은 방송에서 "실력이 좋은데 무대에 서지 못하는 게 안타깝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배반의 장미'를 강렬한 사운드로 편곡해 폭발적인 가창력과 무대를 그리워하는 애틋함으로 시청자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첫 출전으로 우승은 못 했지만 그녀를 향한 관심은 방송이 끝나도 식을 줄 몰랐고, 데뷔 이래 가장 많은 기사들이 쏟아졌으며 하루종일 주요 포털 사이트의 검색어 순위 1위에 오르고 불후의 명곡 시청자 게시판이 폭주할 정도로 그녀의 재출연 요청이 쇄도하였다. 그리고 2월 16일 방영된 불후의 명곡 [[김민종]] 편에서 다시 그녀의 모습이 전파를 타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녀의 가수 활동 영역은 점차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그 후 불후의 명곡 [[임재범]] 편, [[들국화(밴드)|들국화]] 편, [[설운도]] 편, [[장미화]]&임희숙 편, [[최진희]] 편에 출연하였고, 그 이후에도 종종 출연 중이다. 또한 '눈물나는 얘기(나인 OST)', 'Last One([[주군의 태양]] OST)' 그리고 2013년 10월에는 디지털 싱글 '싸구려 반지'를 발표하면서 가수로서의 입지를 다지게 되었다.
         2016년 5월 18일에는 싱글 '이 노래 좀 들어주라'를 내놓았다.
  • 유병수 . . . . 2회 일치
         [[K리그 2011|2011 시즌]]에는 3월 한 달까지 골이 없었지만 유병수는 4월 달이 되면 좋은 모습을 보여줄 것이라 했다.<ref>{{뉴스 인용|url=http://www.sportalkorea.com/news/view.php?gisa_uniq=2011033015114813§ion_code=10&key=&field= |제목=유병수, “잔인한 4월? 내겐 기분 좋은 4월 될 것이다” |출판사=스포탈코리아 |날짜=2011-03-30}}</ref> 얼마후 곧바로 4라운드 [[경남 FC|경남]]전에서 리그 첫 골을 터뜨렸고,<ref>{{뉴스 인용|url=http://sports.chosun.com/news/ntype2.htm?id=201104030100032850001980&ServiceDate=20110403 |제목='뜨거운 감자' 유병수, K-리그 첫 골에도 감독들 의견은 분분 |출판사=스포츠조선 |저자=이건 |날짜=2011-04-03}}</ref> 다음 라운드 [[포항 스틸러스]]와의 경기에서 연속 골을 터뜨렸다.<ref>{{뉴스 인용|url=http://osen.mt.co.kr/news/view.html?gid=G1104090104 |제목='유병수 극적 동점골' 인천, 포항과 2-2 |출판사=OSEN |날짜=2011-04-09}}</ref> 2011년 5월 발목 골절로 2주 간 출전하지 못하게 되었다.<ref>{{뉴스 인용|url=http://sports.chosun.com/news/ntype2.htm?id=201105090100072070005718&ServiceDate=20110508 |제목=인천 유병수, 발목 피로골절로 2주 아웃 |출판사=스포츠조선 |날짜=2011-05-08}}</ref> 예상과는 다르게 유병수는 2달 동안 출전하지 못하였고, 2011년 6월 25일 [[FC 서울|서울]]과의 원정 경기에서 복귀전을 치렀다.<ref>{{뉴스 인용|제목=유병수, FC서울전서 2개월 여만에 1군 복귀 |url=http://sports.media.daum.net/soccer/news/k_league/breaking/view.html?cateid=1171&newsid=20110625200613306&p=SpoChosun |출판사=스포츠조선 |저자=김진회 |날짜=2011년 6월 25일| 확인날짜=2011년 6월 25일}}</ref>
         [[2013년]] [[2월 10일]] 기준
  • 윤덕홍 . . . . 2회 일치
         서울교육감 민주진보 후보 단일화를 추진했던 '서울 좋은 교육감 시민추진위'는 "시민경선에 참가하시길 권유했음에도 참가하지 않았는데, 지금와서 자신에게 유리하게 단일화 경선을 요구하는 게 민주주의 원칙과 상식에 맞는 진보적 행동인가? 자라나는 세대의 교육을 책임지는 수장을 뽑는 선거인데, 이렇게 규칙을 어기고서라도 자신이 어떤 지위를 차지하겠다고 나서는 행동은 교육적이지 않다"고 비판하였다.<ref>[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74285 "윤덕홍 탈당 시점은?"] 참세상 2014년 5월 9일</ref>
         또한 윤덕홍은 2014년 4월 말까지도 새정치민주연합 경북도당 공천관리심사위원장을 맡는 등 예비후보 등록 시점까지 실질적으로는 당원으로서 활동하였으며, 국회 교육위 소속 국회의원들을 찾아가 "교육감 선거 후보 조건으로 당적 1년 미보유 조항을 없애 달라", "최근 당적을 지난해 4월로 소급해 말소해 달라"고 요청하였다.<ref>[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202838 윤덕홍은 시한폭탄] 뉴데일리 2014년 5월 13일</ref>
  • 은지원 . . . . 2회 일치
         2016년 9월 10일 YELLOW NOTE CONCERT에서 공연중인 은지원
         등장 이후 H.O.T.의 라이벌다운 화려한 흥행을 기록하였으나, 2000년 5월에 젝스키스가 해체되면서 모든 멤버들이 뿔뿔이 흩어졌고 그 와중에 은지원은 홀로 꾸준히 준비하여 2000년 10월에 솔로로 데뷔하게 된다.[* 이 후에 이재진과 강성훈도 솔로로 활동했고, 김재덕과 장수원은 [[제이워크]]로 그룹 활동을 하게 된다.] 솔로로 전향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힙합을 배우기 시작했으나 당시에는 아이돌 출신이라는 편견이 강해 힙합 리스너들에게 많이 공격받았다. 그 영향인지 당시의 노래 중에도 자학 가사가 많다. 하지만 그 당시 '''[[문희준|넘사벽급의 광역 도발러]]'''가 있었으니 저 분에 비하면야 악플로 입은 피해는 미미한 수준. 게다가 은지원은 [[무브먼트(크루)|무브먼트]] 크루 소속이다 보니 무브먼트 빠들에게 옹호를 받은 편이다.[* 무브먼트 크루가 가지고 있는 한국 힙합계의 입지와 인기를 생각해보면, 무시할 수 없는 옹호를 받았다.] 또 음악성에 있어서도 드렁큰타이거의 마이너 카피 정도라는 평을 받긴 했지만, 심한 비판을 받은 것은 없다. --애초에 은지원은 타이거JK에게 랩을 배웠다.-- 아군 하나 없이 악플에 시달려야 했던 문희준과는 비교도 안 된다(...). 본인도 이에 대해서는 방송을 통해 몇 차례 언급한 바 있다.
  • 은혼/632화 . . . . 2회 일치
         어린이날 기념 페이지는 [[사카타 긴토키]]의 개드립으로 시작. [[가구라]]가 놀고 있으려니 어린이날이 있으니 어른의 날도 있어야 한다고 드립친다. [[시무라 신파치]]가 "근로의 날이 있다"고 대꾸하자 "세상엔 근로를 안 하는 성인도 있다"고 응수. 그래서 2월 10일로 어른의 날을 정하고 5월 인형 비슷한 [[하세가와 다이조]]를 장식한다던가 하는 날로 정하자고 한다. 신파치는 그건 어른의 날이 아니라 "니트의 날"이고 인형이 아니라 산송장일 뿐이라 꼬집는다.
  • 이관섭 (1961년) . . . . 2회 일치
         * 2003년 5월 ~ 2005년 1월 : [[산업자원부]] 방사성폐기물팀장
         * 2010년 1월 ~ 2011년 5월 : [[지식경제부]] 에너지산업정책관
  • 이기택 . . . . 2회 일치
         그러나 1978년 신도환 계보에서 이탈하였고, 1979년 5월 [[전당대회]] 때에는 따르는 의원 1명도 없이 원외인사들로만 독자 계보를 형성하여 1차 대회에서 신도환을 뛰어넘는 92표를 획득했다. 그리고 전당대회 2차 투표를 앞둔 시점에서 사퇴하여 자신의 표들을 김영삼에게 몰아 주어서 김영삼이 이철승을 꺾고 신민당 총재로 선출되는 데 기여하였다.[* 이때 신민당 내에서는 중도통합론을 내걸고 사실상 독재정권과 야합하던 이철승에 대한 반감이 광범위하게 퍼져있었다. 그래서 2차 투표를 앞두고 [[선명야당]]을 내걸고 박정희 정권과 정면대결을 공언하고 있던 김영삼으로 반이철승 세력들이 결집한 것이다. 이기택의 후보사퇴는 이런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당시 가택연금 중이던 [[김대중]]도 자신의 측근들을 불러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말고 이철승을 떨어뜨리고, 김영삼을 총재로 당선시키라"고 지시하였다. 그리고 김영삼은 이들의 표를 모두 모아서 [[중앙정보부]]의 정치공작 속에서도 총재경선에서 승리하였다.]이 때 박정희 정권은 이기택이 이철승이 아닌 김영삼을 지지하려 하자 자형 이임용이 운영하는 태광그룹의 장부를 압수하기까지 하였다.
         이후 김영삼, [[김대중]]과 거리를 두고 1987년 5월의 [[통일민주당]] 창당에 바로 따라가지 않다가 [[제13대 대통령 선거]]가 임박해서 통일민주당에 입당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계보 중 [[평화민주당]]에 입당한 사람들이 꽤 있어서 계보가 사실상 해체되었다.
  • 이동찬(기업인) . . . . 2회 일치
         이 무렵, 이동찬은 코오롱그룹을 기업공개(주식회사로 전환하고 주식을 판매)하는 과정에서 코오롱그룹의 주주가 된 장영자와 친분을 맺게 되었다. 그리하여 장영자와 식사도 자주 하고 골동품 구경도 하였다. 참고로 이동찬의 취미는 골동품 수집이었다. 장영자와 친해지면서 1982년 5월경 이동찬은 장영자에게 코오롱그룹의 계열사 중 하나인 코오롱건설을 팔려고 하였다. 그런데 팔기 직전 장영자가 검찰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는 바람에 다행히 이동찬은 [[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 사건]]으로 기소되는 화를 면하였다.
          * 생전에 [[재벌]][[회장]]임에도 [[짜장면]], [[칼국수]]를 즐겨 먹었다고 한다.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7/1977670_13449.html|1997년 5월 17일 MBC 뉴스데스크]] 아들인 이웅열 현 코오롱 회장도 이런 식성을 물려받았는지 짜장면을 즐긴다고.
  • 이동훈 (1996년) . . . . 2회 일치
         |첫 출장 = [[KBO (야구)|KBO]] / [[2016년]] [[7월 10일]]<br />[[한밭종합운동장 야구장|대전]] 대 [[삼성 라이온즈|삼성]]전 대주자
         [[2016년]]에 입단하였다. [[2017년]] [[5월 5일]] [[kt 위즈|KT]]전에서 [[배제성]]을 상대로 데뷔 첫 안타를 기록하였다.<ref>[http://www.spotvnews.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131953 프로 첫 안타 한화 이동훈 "이제야 웃네요"] - 스포티비뉴스</ref> [[2018년]] [[8월 9일]] [[넥센 히어로즈|넥센]]전에서 [[신재영 (야구 선수)|신재영]]을 상대로 데뷔 첫 홈런을 기록하였다.<ref>[http://www.sportsseoul.com/news/read/668077 한화 이동훈, 데뷔 첫 홈런 신고] - 스포츠서울</ref>
  • 이상정 (1897년) . . . . 2회 일치
         '''이상정'''(李相定, [[1897년]] [[6월 10일]] ~ [[1947년]] [[10월 27일]])은 [[일제 강점기|일제 강점기 조선]]의 [[한국의 독립 운동|독립운동가]] 겸 [[군인]]이다. 본관은 [[경주 이씨|경주]](慶州)이고 아호(雅號)는 청남(晴南), 산은(汕隱)이며 일명(一名)은 '''이연호'''(李然晧)이다. [[대구광역시|대구]] 출생이다.
         그는 시인 [[이상화 (시인)|이상화]](李相和), 사학자 [[이상백 (사학자)|이상백]](李相佰), 수렵가 [[이상오]](李相旿)의 형이다. 호적상에 등재된 부인은 2년 연상의 한문이(韓文伊, 1895년 5월 7일 ~ 1941년) 여사인데, 우리나라 여성 [[비행사]] 1세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일컬어지는 [[한국의 독립 운동|독립운동가]] 겸 항공비행사였던 4년 연하의 [[권기옥]](權基玉, 1901년 1월 11일 ~ 1988년 4월 19일) 여사와 [[1928년]], [[내몽골 자치구|중화민국 네이멍구 자치구]] [[후허하오터 시|후허하오터]]에서 다시 결혼하였다.
  • 이상훈 (1987년) . . . . 2회 일치
         '''이상훈'''(李相勳<ref>한국야구위원회, 2012 가이드북</ref>, [[1987년]] [[5월 4일]] ~ )은 전 [[KBO 리그]] [[kt 위즈]]의 [[외야수]]이자, 현재 [[KBO 리그]] [[한화 이글스]]의 전력분석원이다.
         2013년에 입단하였다. 2017년 5월 9일에 [[신용운]]과 함께 방출되었다.
  • 이수민(야구선수) . . . . 2회 일치
         프로필상 180cm, 82kg의 투수치고는 다소 작은 체격에, 탈삼진 신기록을 세운 10이닝 완투 경기 이외에도 경기가 있을 때마다 선발 투수로 나서서 거의 모든 경기를 책임지며 2013년 5월 21일 당시 7경기에 나서서 평균 139개의 공을 던지는 등 혹사에 대한 우려도 적지 않았으나, 경기를 마치고 난 이후 '''[[삼성 라이온즈]]의 지정 병원'''인 세명 병원에서 마사지 및 회복 치료를 받는 등[[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o&ctg=news&mod=read&office_id=109&article_id=0002539640|#]], 상원고 및 삼성에서도 관리를 해 주고 있는 점으로 볼 때, 삼성이 이수민에 대한 관심과 기대가 얼마나 큰 지 잘 알 수 있는 부분일 것이며, 많은 삼성팬 역시 [[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o&ctg=news&mod=read&office_id=109&article_id=0002566981|지명 이후 인터뷰]]를 통해 알 수 있는 이수민의 각오를 보고 난 이후 많은 관심과 활약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는 중이다.--뭐 그래도 불안하면 우리에겐 [[삼성 트레이닝 센터]]가 있잖아?--
         상무에서 시즌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계투로 시즌을 시작했으나, 5월 15일 2일 휴식 후 삼성전에 갑자기 선발로 나서 7이닝 135구를 소화한 뒤부터 부진에 빠졌다. 14년 말에 팔 스윙을 수정한 뒤로 제구력이 안정화되지 않았는지 볼넷이 급증한 상태였는데, 이 갑작스런 선발 등판 이후 삼진이 급감하고 볼넷이 늘면서 실점 또한 많이 늘었다. 거기에 설상가상으로 피홈런까지 늘어난 상황인데, 들리는 바로는 투구폼의 교정을 진행중이라고 하니 이로 인한 과도기라고 참작할 수는 있다.
  • 이시영 (1882년) . . . . 2회 일치
         '''이시영'''(李始榮, [[1882년]] [[1월 10일]] ~ [[1919년]] [[7월 9일]])은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다. [[대구광역시|대구]] 출생. 본관은 [[경주시|경주]](慶州). 본명은 이중현(李仲賢), 호는 우재(又齋). 친족 관계에 있는 동명이인인 [[이시영 (1868년)|이시영]](李始榮, 성재 이시영)과의 구별을 위해 '우재 이시영'으로도 부른다. [[성리학]]자 이관준의 차남으로 [[대한민국]]의 제1대 [[대한민국의 법무부 장관|법무부 장관]] [[이인]](李仁)의 숙부이다.
         이시영은 [[1882년]] [[1월 10일]] [[경상북도]] [[대구광역시|대구부]]에서 성리학자 만당(晩堂) [[이관준]](李寬俊)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 [[이관준]]으로부터 한학을 수학하였으며, 몸이 건장하여 무인(武人)의 기상이 있었으며 그러면서도 시(詩)과 글씨(書), 그림(畵)에 모두 능하였고 말보다 실천이 앞서는 그런 성격이었다. 이러한 그의 성격과 과단성 있는 추진력 때문에 도산 안창호(島山 安昌浩)는 그를 '''날개 달린 호랑이'''라고 칭찬하였다.<ref name=autogenerated1>[http://www.koreastory.co.kr/daegustory/human/leesiyoung.htm 대구의 인물<!-- 봇이 붙인 제목 -->]</ref>
  • 이영훈 (경제학자) . . . . 2회 일치
         '''이영훈'''(李榮薰, [[1951년]] [[9월 10일]] ~ )은 [[대한민국]]의 [[경제학자]]이다. [[대구광역시|대구]] 출신으로,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조선후기 토지소유와 농업경영'이란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안병직]] 교수의 수제자로, 뉴라이트 진영에서 [[식민지 근대화론]]을 이끌며 여러 논란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2007년]] [[5월 25일]]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의 내용이 난해하다는 지적에 따라 이를 쉽게 풀어 쓴 《대한민국 이야기》를 출간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1651421 쉽게 풀어쓴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뉴데일리</ref>
  • 이장희 (시인) . . . . 2회 일치
         * [[시 (문학)|시인]] [[이상화 (시인)|이상화]](李相和, [[1901년]] [[5월 9일]] 출생 ~ [[1943년]] [[4월 25일]] 사망. 아호는 상화(尙火, 想華), 무량(無量), 백아(白啞). [[소설|소설가]], [[수필|수필가]], [[번역]][[문학가]], [[문학평론|문학평론가]]로도 활동하였다.)
         * [[시 (문학)|시인]] [[백기만]](白基萬, [[1902년]] [[5월 12일]] 출생 ~ [[1967년]] [[8월 7일]] 사망. 아호는 목우(牧牛). [[문학]][[평론가]]로도 활동하였다.)
  • 이재황(배우) . . . . 2회 일치
         || '''이름''' ||<(> 이재황(李在煌[* <MBC 가이드 인물 2001년 5월호, 루키 2001 | 탤런트 이재황>에 명시되어 있다. 중화권에서는 '李在皇'으로 통한다],Lee Jae Hwang) ||
         ||<|3> [[2011년]] || 02월 10일 || [[문화방송|MBC]] || [[일밤]] [[뜨거운 형제들]] [[아바타]] || 게스트 || 1098회 ||
  • 이준승 . . . . 2회 일치
         * 대법원 판사로 재직하던 1987년 5월 8일에 택시회사가 교통사고를 낸 운전기사를 상대로 청구한 손해배상청구소송 상고심에서 "단체협약은 근로자의 권익보호와 복리증진을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근로자에게 불리하게 해석돼서는 안된다"며 "이 사고는 근로자의 잘잘못을 따질 것이 없이 업무수행 중 발생한 사고이므로 회사측이 책임져야 한다"는 이유로 원심을 파기하고 대전지방법원 합의부로 환송했다.<ref>매일경제신문 1987년 5월 9일자</ref>
  • 이지아(배우) . . . . 2회 일치
         HB엔터테인먼트와의 계약 만료 이후 2016년 5월 13일 이병헌의 소속사인 BH엔터테인먼트와 전속계약을 체결했다.
         Cosmopolitan 2008년 3월호 / 2009년 5월호 / 2015년 7월호 / 2016년 3월호
  • 이케다 초등학교 사건 . . . . 2회 일치
         2003년 5월에 검찰은 "이 사건의 피해 참상과 많은 가족의 비통한 모습을 볼 때, 사형폐지론이 피해자나 유족의 입장과 심정을 무시하는 공허한 것인지 실감할 수 밖에 없다."고 사형을 구형했다. 변호인단은 정신이상과 심신미약을 주장했으나, 타쿠마는 최종변론 후에는 "죽는들 전혀 겁먹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실컷 불쾌한 경험을 겪었습니다.","어쩔 수 없는 가난뱅이 인생이었으니, 이런 패턴 쪽이 더 좋았을지도 모릅니다."라고 말했다.
         8월 28일에 판결이 내려왔고, 타쿠마는 "사형이 되잖아. 마지막으로 말하게 해줘."라고 호소하고, 재판장은 그것을 무시. 그러자 타쿠마는 "3장 정도잖아! 빨리 끝내! 마지막으로 말하게 해줘! 이떄까지, 나, 얌전하게 있었잖아. 어차피, 사형당하잖아"라고 소리쳤다. 재판장이 퇴정명령을 내리고 타쿠마는 끌려갔다. 이후 재판장은 사형을 선고했다. 9월 10일에 변호인단이 오사카 고등법원에 항소하였으나, 26일 타쿠마가 철회하여 사형은 확정되었다.
  • 이한응 (1849년) . . . . 2회 일치
         [[1870년]](고종 7년) 봄 무과(武科)에 급제, 영의정 [[김병학]](金炳學)의 건의로 특별히 가설 내승(內乘)에 임명되었다.<ref name="dager1">고종실록 7권, 1870년(고종 7년, 개국 479년) 5월 20일 을유 1번째기사, 조선 개국(開國) 479년 문희묘, 의소묘, 육상궁, 연호궁, 선희궁에 전배하다</ref> [[김병학]]은 '(故) 충장공(忠壯公) 이복남(李福男)이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절개와 의리에 대해서는 열성조(列聖朝)로부터 여러 번에 걸쳐 보답하는 은전(恩典)을 받았습니다. 이번에 그의 봉사손(奉祀孫)이 과거에 합격하였으니, 마땅히 조정에서 뜻을 보여주는 거조(擧措)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종전에는 이러한 사람들에 대하여 선전관(宣傳官)과 내승(內乘) 중에 가설(加設)하여 단부(單付)한 전례(前例)가 이미 많았다'며 그에게도 선전관이나 내승을 가설하여 임명해줄 것을 청하였다.<ref name="dager1"/>
         [[1873년]] [[8월 8일]] 훈련주부, 그해 [[10월 10일]] 훈련판관, [[1874년]] [[7월 12일]] 도총경력, [[1875년]] [[1월 21일]] 도총경력, 그해 [[12월 22일]] 무겸 등을 역임했다.
  • 임수정(탤런트) . . . . 2회 일치
         2012년 5월 17일에 개봉한 영화 《[[내 아내의 모든것]]》에 여주인공인 '정인' 역을 연기했다. 어떻게 보면 무거울 수도 있는 주제인 결혼 후 [[권태기]]를 코믹하게 잘 풀어낸 영화. 같이 연기한 [[이선균]], [[류승룡]]과의 호흡이 돋보이며 특히 [[류승룡]]의 코믹 연기가 일품이다. 그리고 여기서 수위가 매우 높은 연기를 보여준다. 흡연은 물론 집에서 '''[[티셔츠]]와 [[팬티]]'''만 입고 있다거나, 남편 [[이선균]] 앞에서 옷을 훌렁훌렁 벗어던진다든가 --YEAAAAAAAAH!--, [[검열삭제]] 직전까지 간다거나 --[[이선균]] 이 나쁜 놈--...
         2010년 5월 4일 [[SBS]] [[강심장]] 27회에서 [[비(연예인)|비]]가 미니 이상형 월드컵에서 최종선택했다. 그런데 [[정주리]]가 "임수정 씨랑 내가 뭐가 달라?"라는 애드리브를 날렸다. [[지못미]](...)
  • 임효준 . . . . 2회 일치
         '''임효준'''([[1996년]] [[5월 29일]] ~ )은 [[대한민국]]의 [[쇼트트랙]] 선수이다. [[2018년 동계 올림픽]] 쇼트트랙 남자 1500m에서 생애 첫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이것은 평창올림픽에서의 대한민국 첫 금메달로서 더욱더 의미가 크다. 임효준은 순발력을 바탕으로 한 폭발적인 스피드와 뛰어난 기술이 장점으로, 전성기 시절 ‘제2의 [[안현수]]’라는 호칭을 얻은 바 있다.<ref name="대구일보"/>
         [[2018년]] [[2월 10일]]에 열린 [[2018년 동계 올림픽 쇼트트랙 남자 1500m|쇼트트랙 남자 1500m]] 예선과 준결승에서 무난히 통과했고, 결승에서는 2분 10초 485의 [[올림픽 기록]]으로 1위를 차지하였다. 이는 [[2018년 동계 올림픽 대한민국 선수단|대한민국 선수단]]의 첫 메달이자 금메달이기도 했다.<ref>http://www.hani.co.kr/arti/sports/sports_general/831734.html#csidxc20cd80bba1b97989951bed5ea919c0</ref> 또한 이번 기록으로 [[2010년 동계 올림픽|2010년 밴쿠버 동계 올림픽]]에서 [[이정수]]가 세웠던 2:10.949의 기록도 경신하게 되었다.<ref name="2018olympics-final">{{웹 인용|title=Short Track Speed Skating Results - Men's 1,500m Final A|url=https://www.pyeongchang2018.com/en/game-time/results/OWG2018/en/short-track-speed-skating/results-men-s-1500m-fnl-a00100-.htm|website=[[2018년 동계 올림픽|2018평창올림픽 공식사이트]]|publisher=[[국제올림픽위원회]]|accessdate=10 February 2018|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80210130015/https://www.pyeongchang2018.com/en/game-time/results/OWG2018/en/short-track-speed-skating/results-men-s-1500m-fnl-a00100-.htm|archivedate=10 February 2018|language=en|date=10 February 2018}}</ref>
  • 장도 (1876년) . . . . 2회 일치
         '''장도'''(張燾, 음력 [[1876년]] [[음력 5월 7일|윤 5월 7일]]/양력 1876년 [[6월 28일]] ~ ?)는 [[대한제국]]과 [[일제 강점기]]의 법조인으로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본관은 [[덕수 장씨|덕수]]이다.
  • 장우혁 . . . . 2회 일치
         '''장우혁'''(張祐赫,[[1978년]] [[5월 8일]] ~ )은 [[대한민국]] [[보이 그룹]] [[H.O.T.]]의 멤버이다.[[H.O.T.]]의 멤버로써 활동하다가, 해체 이후 [[jtL]]을 거쳐 솔로 활동 중이며, WH CREATIVE 대표, 댄스스쿨 뉴웨스트를 운영하고 있다. [[2005년]] 9월에 솔로 1집 《No More Drama》를 발표했으며, 대표 곡으로 '지지 않는 태양', 'Flip Reverse', '폭풍 속으로' 등이 있다.
         * [[1996년]] ~ [[2001년]] 05월 : 그룹 [[H.O.T.]] 멤버
  • 장윤희 (미스코리아) . . . . 2회 일치
         |배우자= 김정균<ref>[http://www.iheadline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733 김정균 보령그룹 3세, 지난 5월 ‘미코’ 장윤희씨와 결혼]</ref> ([[2014년]] ~ 현재)
         '''장윤희'''([[1987년]] [[5월 6일]] ~ )는 [[대한민국]]의 [[2008년 미스코리아]] 미(美)이다.
  • 장은숙 (가수) . . . . 2회 일치
         '''장은숙'''(張恩淑, 1957년 5월 2일 ~ )은 [[대한민국]]과 [[일본]]에서 활동하는 [[가수]]이다. 일본에서는 주로 [[엔카]]와 [[발라드]] 분야에서 활동 중이다.
         1990년대 초반까지 한국에서 활동 후 1995년 일본 [[토라스레코드]] 회사의 스카우트 제의로 일본 무대로 진출하였고, 그 후부터 '장수(チャン・スー)'라는 예명을 사용하였다. 일본에서 활동을 시작한 첫해 일본 유선 방송 신인상을 받았고, 2000년 발표한 '[[운명의 주인공]]' 으로 방송 및 각종 차트에서 12주 이상 1위를 차지하며 총 25만장의 앨범 판매 기록도 세우기도 했다. 지금까지 20장의 음반을 발표했으며 2015년 5월에 발표한 "눈물의 공항 대합실"을 포함해 총 14곡이 유선방송 1위에 랭크되었다.
  • 장익 (1933년) . . . . 2회 일치
         ** 형 : [[장진 (1927년)|장진]] (張震, 요셉, [[1927년]] [[2월 10일]] ~ [[2011년]] [[9월 30일]], [[서강대학교]] 생물학과 명예교수)
         ** 누나 : 장명숙 (張明淑, 안나, [[1918년]] [[8월 10일]] ~ [[1919년]] [[8월 2일]])
  • 장진남 . . . . 2회 일치
         | 출생 = [[1981년]] [[5월 15일]] ({{만나이|1981|5|15}}세)
         '''장진남'''([[1981년]] [[5월 15일]] ~ )은 [[대한민국]]의 전직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이다. JinNam이라는 아이디였고, 종족은 [[저그]]였다.
  • 장진수 (프로게이머) . . . . 2회 일치
         | 출생 = [[1981년]] [[5월 15일]] ({{만나이|1981|5|15}}세)
         '''장진수'''([[1981년]] [[5월 15일]] ~ )은 [[대한민국]]의 전직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이다. SoO라는 아이디를 사용하며, 종족은 [[저그]]이다.
  • 저스디스 . . . . 2회 일치
         '''저스디스''' ('''JUSTHIS''', {{본명|허승}}, 1991년 5월 7일 ~ )는 [[대한민국]]의 [[래퍼]]이다. 2010년, '''[[시로스카이]]'''의 EP "The Orbit"에 당시 활동명 '''TiMeWiNe'''으로 피쳐링하여 활동을 시작했다.<ref>[http://www.melon.com/song/detail.htm?songId=3030666 곡 정보>멜론]. 멜론.</ref> 2011년, 같은 이름으로 [[믹스테이프]] "A Little Bird Told Me"를 무료로 배포하고,<ref>[http://www.hiphopplaya.com/magazine/article/view.html?category=&category2=&mode=&page=1&sort=&num=7890&keyfield=&key=%ED%8B%B0%EB%AF%B8%EC%9C%84%EB%8B%88 'A Little Bird Told Me' 무료 공개]. 힙합플레이야.</ref> '''[[오케이션]]'''의 믹스테이프 "Preseason #2"에 비트와 랩 피쳐링으로 참여했으며,<ref>[http://hiphopplaya.com/magazine/article/view.html?category=&category2=&mode=&page=2&sort=&num=7305&keyfield=&key=okasian 오케이샨(Okasian), 하이라이트 레코즈 입단 및 믹스테이프 공개]. 힙합플레이야.</ref> 2012년, 이름을 저스디스(JUSTHIS)로 바꾸고 믹스테이프 "QUAL N TITY : True Up"을 무료로 배포 후,<ref>[http://www.hiphopplaya.com/magazine/article/view.html?category=&category2=&mode=&page=1&sort=&num=9627&keyfield=&key=%EC%A0%80%EC%8A%A4%EB%94%94%EC%8A%A4 'QUAL N TITY : True Up' 공개]. 힙합플레이야.</ref> 2013년, '''[[매드 클라운]]'''과 '''커먼콜드'''라는 팀을 결성하였다.<ref>[http://www.hiphopplaya.com/magazine/article/view.html?category=&category2=&mode=&page=1&sort=&num=10421&keyfield=&key=%EC%BB%A4%EB%A8%BC%EC%BD%9C%EB%93%9C 매드클라운과 저스디스, 커먼콜드 결성]. 힙합플레이야.</ref> 믹스테이프 "_ u c k!"를 준비중에 있다가<ref>[http://www.hiphopplaya.com/magazine/article/view.html?category=&category2=&mode=&page=1&sort=&num=10482&keyfield=&key=%EC%BB%A4%EB%A8%BC%EC%BD%9C%EB%93%9C 커먼콜드(Mad Clown & justhis) '_ u c k!' 수록곡 선 공개]. 힙합플레이야.</ref> 2014년 5월 7일, 본인의 텀블러를 통해 믹스테이프 "[[Money Vs. Love: Dream (MVLD)]]"를 공개했다.<ref>[http://justhiseung.tumblr.com/post/85002465677 {{웨이백|url=http://justhiseung.tumblr.com/post/85002465677 |date=20140508113407 }} JUSTHIS - Money Vs. Love: Dream (MVLD) [Mixtape]]. Tumblr.</ref> 그 이후에는 크루 '''불한당'''의 프로젝트 앨범 "A Tribe Called Next"와<ref>[http://www.melon.com/album/detail.htm?albumId=2295768 앨범 정보>멜론]. 멜론.</ref> '''매드 클라운'''의 미니 앨범 "Piece Of Mind" 등에서의 피쳐링으로 활동을 이어가고 있으며,<ref>[http://www.melon.com/album/detail.htm?albumId=2298221 앨범 정보>멜론]. 멜론.</ref> 현재 프로듀서 [[디프라이]](Deepfry), 자코(Jaqo)와 함께 준비 중인<ref>[http://www.hiphopplaya.com/magazine/article/view.html?category=&category2=&mode=&page=1&sort=&num=16028&keyfield=&key=justhis 저스디스(JUSTHIS) | 그런 말장난들론 여기 시스템 못 바꿔]. 힙합플레이야.</ref> 본인의 첫 번째 앨범 [[2 Many Homes 4 1 Kid]]<ref>[https://twitter.com/JUSTHISeung/status/596326033197924352 저스디스의 트윗]. 트위터.</ref>
  • 전경협 . . . . 2회 일치
         |시성일 = [[1984년]] [[5월 6일]]
         }}</ref> [[1984년]] [[5월 6일]]에 [[서울특별시]] [[여의도]]에서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집전한 [[미사]] 중에 이뤄진 103위 [[시성|시성식]]을 통해 [[성인]] 품에 올랐다.
  • 전광우 . . . . 2회 일치
         '''전광우'''(全光宇, [[1949년]] [[5월 7일]] ~ , [[서울특별시|서울]])는 [[대한민국]]의 [[경제학자]]이자 금융인이고 전 정무직 공무원이다.
         미국 [[미시간 주립 대학교]] 교수, [[세계은행]] 수석연구위원, [[국제금융센터 (대한민국)|국제금융센터]] 원장, [[우리금융그룹]] 부회장, [[딜로이트]] 코리아 회장, [[포스코]] 이사회 의장, 대한민국 국제금융대사 등을 거쳐, 2008년부터 2009년까지 초대 [[금융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고 2009년부터 2013년 4월까지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으로 재직하였다. 2013년 5월 이후 현재 [[연세대학교]] 경제대학원 석좌교수로 재임 중이다.
  • 전락원 . . . . 2회 일치
         '''전락원'''(田樂園, [[1927년]] [[5월 16일]] ~ [[2004년]] [[11월 3일]])는 [[대한민국]]의 기업인 겸 교육가, 관광업자이다. '카지노의 대부'라는 별칭도 있다.<ref>[http://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31451.html ‘카지노 대부’ 전락원씨 유족, 증여 · 상속세 430억원 신고 : 경제일반 : 경제 : 뉴스 : 한겨레<!-- 봇이 따온 제목 -->]</ref>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장로교]] 목사 [[전주부 (목회자)|전주부]]의 아들이며, 수필가 [[전숙희]]의 남동생이었다. [[파라다이스그룹|파라다이스 그룹]]의 창업주이며, 카지노업과 교육 사업을 하였다. 본관은 [[담양 전씨|담양]]. 호는 우경(宇耕)이며 [[서울특별시]] 출신. 종교는 [[개신교]]([[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예장통합]])이다.<ref>[http://news.joins.com/article/2028144 '파라디이스 그룹 창업주' 전락원 회장 별세], [[중앙일보]], 2004년 11월 3일.</ref>
         1927년 5월 16일 서울특별시 종로구(鍾路區) 계동에서 장로교 목사 [[전주부 (목회자)|전주부]](田周富) 와 계성옥(桂成玉)의 2남 5녀 중 넷째이자, 수필가 [[전숙희]](田叔禧) 의 남동생이었다. 아버지 전주부는 생애중 14곳의 개척 교회를 설립한 목회자이자 기독교 운동가였다.
  • 전상욱 (프로게이머) . . . . 2회 일치
         * [[2006년 5월]] 2006 신한은행 스타리그 시즌 1 24강
         * [[2007년 5월]] 곰TV MSL 시즌 2 32강
  • 전장운 . . . . 2회 일치
         |시성일 = [[1984년]] [[5월 6일]]
         }}</ref> [[1984년]] [[5월 6일]]에 [[서울특별시]] [[여의도]]에서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집전한 [[미사]] 중에 이뤄진 103위 [[시성|시성식]]을 통해 [[성인]] 품에 올랐다.
  • 전재국 . . . . 2회 일치
         * [[2018년]] [[2008년 5월|5월]]: [[시공사]] 퇴임
  • 정경식 . . . . 2회 일치
         1937년에 경상북도 고령에서 태어난 정경식은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이건개 전 대전고검장, 송종의 전 대검 차장 등과 함께 제1회 [[사법시험]]에 합격해 [[박정희 정부]]와 [[5공화국]]에서 <신국가보안법>이라는 책을 저술할 정도로 공안검사로서 최고의 평가를 받다가 서울지검 공안부에서 재직하던 1979년 10월 27일에 [[10.26 사건]]으로 서울지검 특수부와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에 파견되어<ref>경향신문 1979년 10월 27일자</ref> [[12.12 사태]]로 연행된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을 조사하는 등 [[5공화국]] 출범 때인 서울지검 특수2부장으로 있던 1980년 5월말 [[국보위]] 사회정화위원회에서 공무원을 정화하는 사회정화위원을 했다. 1983년 8월 12일에 서울지검 3차장 검사를 거쳐 부산지검장에 재직하던 1992년에는 지역감정 조장과 국가기관의 선거 개입 논란을 부른 [[초원복집 사건]]에 연루될 뿐만 아니라 대통령 선거 직후에 "송종의, 최명부 검사와 함께 [[민청학련 사건]]에서 가혹행위를 했다"며 "검찰 요직에 임명해서는 안된다"는 야당인 [[민주당 (대한민국, 1991년)]]의 주장<ref>매일경제 1993년 9월 18일자</ref>에 의해 대검찰청 공판송무부장, 법무연수원 기획부장으로 전보되는 등 인사상 불이익을 받았으나 서울지검 특수부장, 대검찰청 공안부장, 청주지검장, 대구고검장 등을 역임하다 검찰 출신으로서 [[김영삼]] 대통령에 의해 [[헌법재판관]]에 임명되었다.<ref>[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07569.html]</ref> 하지만 [[대한변호사협회]]로부터 1994년 9월 16일에 "유신체제 아래에서 공안검사로 있으면서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1979년 7월 23일 국회 본회의 발언을 [[신민당]] 기관지 <민주전선>에 게재한 민주전선 주간인 [[문부식]]<ref>동아일보 1979년 7월 31일자경향신문 1979년 7월 31일자 8월 18일자</ref>과 <어떤 조사>를 쓴 [[한승헌]] 변호사<ref>동아일보 1975년 8월 28일자</ref>, 우도 간첩 사건<ref>동아일보 1973년 7월 3일자</ref>, 교포학생 김승효, 삼천포 간첩단 사건, 예비역 장교 등에 의한 내란음모사건<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501310020920101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5-01-31&officeId=00020&pageNo=1&printNo=16410&publishType=00020 동아일보 1975년 1월 31일자</ref>, [[통일혁명당 사건]], [[남민전 사건]] 등을 수사하면서 [[민주화운동]]과 인권회복을 위해 노력한 많은 시민과 학생을 [[긴급조치]] 위반 등으로 구속하고 [[신군부]]의 국보위 산하 사회정화위원회에서 공무원을 정화하는 등의 민권억압을 한 전력이 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8102000329201009&editNo=3&printCount=1&publishDate=1988-10-20&officeId=00032&pageNo=1&printNo=13253&publishType=00020 경향신문 1988년 10월 20일자]</ref>며 "자진 사퇴하라"는 비판을 받았다.<ref>한겨레 1994년 9월 17일자 경향신문 1995년 11월 28일자</ref> [[박정희 정부]]에서 시국사건으로 재판을 받는 구속자 가족들이 정경식 검사를 향해 야유를 보내면 검사석에서 벌떡 일어나 매서운 눈초리로 방청석을 노려보곤 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3061400289105001&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3-06-14&officeId=00028&pageNo=5&printNo=1589&publishType=00010 한겨레 1993년 6월 14일자]</ref> 1999년 2월 공직자 재산 공개에서 전년 대비 "8천902만원이 늘었다"고 신고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4418788]</ref> 1980년 [[5·16민족상]] 안전보장 부문 후보자로 선정됐다.<ref>동아일보 1980년 5월 9일자</ref>
  • 정민아 (아나운서) . . . . 2회 일치
         * [[좋은아침 (라디오 프로그램)|좋은아침 정민아입니다]] ([[2010년]] [[5월 10일]] ~ [[2010년]] [[10월 9일]])
  • 정상교 . . . . 2회 일치
         |첫 출장 = [[KBO (야구)|KBO]] / [[2011년]] [[8월 10일]]<br>[[광주무등경기장 야구장|광주]] 대 [[LG 트윈스|LG]]전
         |마지막 경기 = [[KBO (야구)|KBO]] / [[2012년]] [[5월 6일]]<br>[[광주무등경기장 야구장|광주]] 대 [[넥센 히어로즈|넥센]]전
  • 정재호 (1964년) . . . . 2회 일치
         |임기 = [[2016년]] [[5월 30일]] ~ [[2020년]] [[5월 29일]]
  • 정충원 . . . . 2회 일치
         '''정충원'''(鄭忠源, <small>일본식 이름:</small> 烏川忠源, [[1896년]] [[5월 22일]] ~ [[1977년]] [[3월 12일]]<ref>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간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에는 정충원의 출생일이 [[1893년]] [[5월 22일]]로 표기되어 있으며 사망일은 미상으로 표기되어 있다.</ref>)은 [[일제 강점기]]의 [[경찰]] 겸 [[관료]]이자 [[대한민국]]의 금융인으로 본관은 연일이며 다른 이름으로 '''정종원'''(鄭宗源, 1949년 10월 개명한 이후부터 사용한 이름)이 있다.
  • 조원진 . . . . 2회 일치
         투표 당일인 5월 9일에는 박 전 대통령과 찍은 사진을 넣은 현수막이 등장했다.
         여담이지만 5월 7일 [[eUnited]] 팀의 팬미팅 때 옆에서 유세를 하고 있었는데 [[해리슨 폰드]]를 보러온 학생들이 자신들을 도우러 온 것이라며 [[김칫국]] 원샷을 하였다.
  • 존 딜린저 . . . . 2회 일치
         1933년 5월 10일, 8년 가까이 빵에서 썩은 딜린저는 오하이오 주립 교도서에서 가석방된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서 오하이오 주에 있는 은행을 털었다가 9월 22일 체포되었다. 딜린저는 재판에 앞서 오하이오 주 리마에 있는 감옥으로 보내진다. 그러자 피어폰트를 포함한 4명의 동료들[* 해리 피어폰트, 러셀 클라크(Russell Clark), 찰스 마클리(Charles Makley), 헨리 코프랜드(Harry Copeland)]은 감옥을 지키던 보안관을 속여[* 가석방 기간 도중 범죄를 저지른 딜린저를 인계받기 위해 오하이오 주립 교도소에서 왔다고 속인 다음 문을 열어준 보안관을 쏴죽였다.] 딜린저를 탈옥시킨다.
  • 진헌식 . . . . 2회 일치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후보로 충청남도 연기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국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다가 무소속 이긍종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1년 12월부터 1952년 8월까지 관선 [[충청남도지사]]를 지냈다. 충청남도지사 임기 중이던 1952년 5월부터 1952년 8월까지 [[충남대학교]] [[총장]] [[서리]]를 [[충남대학교/역사|겸직하였다]]. 이어서 1952년 8월부터 1953년 5월까지 내무부(현 [[행정자치부]]) [[장관]]을 지냈다가 [[곡물]] 관리상의 문제로 경질되고 구속되었다가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자유당]] [[류지원]]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 차금봉 . . . . 2회 일치
         '''차금봉'''(車今奉, [[1898년]] [[12월 8일]] ~ [[1929년]] [[3월 10일]])은 [[일제강점기]] 한국의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노동운동가이다. 서울 출신.<ref name="역대">{{웹 인용|성1=김|이름1=혜영|제목=차금봉(車今奉)|url=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7HIL_A1898_1_0025739|웹사이트=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출판사=한국학중앙연구원|확인날짜=2015-12-15}}</ref>
         서울 미동보통학교(渼洞普通學校)를 졸업한 뒤 [[1917년]] 용산(龍山) 기관차 화부 견습공으로 일하던 중,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노동자들의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는 식민지 현실의 노동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이면서 1920년 2월 조선노동문제연구회 발기인으로 참가했고, 같은해 3월 [[김명식 (1890년)|김명식]]·[[오상근]] 등과 함께 조선노동공제회(朝鮮勞動共濟會)를 조직하여 교양부 간사를 맡았다. [[1922년]]에는 최상덕 등과 함께 지식인들이 주도하는 조선노동공제회의 쇄신운동을 폈으며, 동년 9월 조선노동공제회 중앙집행위원장이 되었다. 조선금물직공조합·경성신문배달조합 창립을 지도했으며, 1923년 9월에는 조선노농대회 발기인으로 활약했다. 1924년 5월 [[조선노농총동맹]] 결성에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여 중앙집행위원이 되었으며, 각지의 공장 노동자를 조직하기 위해 활동했다. 1926년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노동운동 단체와 농민운동 단체를 분리하는 정책을 실행시키기 위해 힘썼다.<ref name="역대"/>
  • 채기영 . . . . 2회 일치
         |첫 출장 = [[KBO (야구)|KBO]] / [[2015년]] [[5월 10일]]<br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잠실]] 대 [[두산 베어스|두산]]전
  • 최광식 . . . . 2회 일치
         '''최광식'''(崔光植, [[1953년]] [[5월 5일]] ~ )은 대한민국의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이며, [[이명박 정부]]에서 [[대한민국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지냈다.
         |임기 = [[2008년]] [[3월 10일]] ~ [[2011년]] [[2월 7일]]
  • 최대원(정치인,국회의원) . . . . 2회 일치
         || '''출생일''' ||<(> [[1956년]] [[3월 10일]] ([age(1956-03-10)]세) ||
         1956년 3월 10일, [[경상북도]] [[김천시]] 에서 태어났다. 김천중학교를 졸업하고 [[검정고시]]를 거쳐 [[영남대학교]] 법정대학을 졸업했다. 고려장학회 이사장 등을 지낸 경력이 있다.
  • 최덕희 . . . . 2회 일치
         '''최덕희'''(崔德喜, [[1966년]] [[7월 27일]]([[음력 6월 10일]]) ~ )는 [[대한민국]]의 [[성우]]이다.
         팬클럽 덕희다솜은 2014년 6월 10일에 공식 팬클럽을 다음에서 네이버로 이사를 하였고 10월 12일 팬미팅 '토크콘서트'를 개최하였다. 팬미팅에서 12년 만에 공식적으로 복귀를 선언한다고 팬들에게 직접 이야기 하였고 12월 1일부터 복귀를 발표하였다. 복귀작은 라디오 드라마이며, 12월 19일 라디오 극장 '오즈의 의류수거함' 1회 녹음으로 공식적인 성우 활동을 재개하였다.
  • 최두선 . . . . 2회 일치
         |임기 = 1963년 12월 17일 ~ 1964년 5월 9일
         |임기 = [[1963년]] [[12월 17일]] ~ [[1964년]] [[5월 9일]]
  • 최두호 . . . . 2회 일치
         '''최두호'''([[1991년]] [[4월 10일]] ~ )는 [[대한민국]] [[대구광역시]] [[달서구]] 출생의 [[종합격투기]] 선수다. 현재 [[UFC]] 페더급에서 활약하고 있다. 총 전적 15승 3패
         | 2016년 12월 10일
  • 최문식 . . . . 2회 일치
         [[2015년]] [[5월 27일]] 올림픽대표팀 코치직에서 물러나 [[조진호 (축구인)|조진호]] 감독의 후임으로 [[대전 시티즌]]의 감독으로 선임되었으나, 전득배 사장 혼자서 일방적으로 영입 한것으로 밝혀져 논란이 일었다.
         |임기 = [[2015년]] [[5월 28일]] - [[2016년]] [[10월 30일]]
  • 최순달 . . . . 2회 일치
         * [[1982년]] [[5월 21일]] - [[1983년]] [[10월 14일]] 제32대 [[대한민국 정보통신부|체신부]] 장관
         |임기 = [[1982년]] [[5월 21일]] ~ [[1983년]] [[10월 14일]]
  • 최영이 (종교인) . . . . 2회 일치
         |시성일 = [[1984년]] [[5월 6일]]
         }}</ref> [[1984년]] [[5월 6일]]에 [[서울특별시]] [[여의도]]에서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집전한 [[미사]] 중에 이뤄진 103위 [[시성|시성식]]을 통해 [[성인]] 품에 올랐다.
  • 최원태 . . . . 2회 일치
         |첫 출장 = [[KBO (야구)|KBO]] / [[2016년]] [[5월 27일]] <br/> [[수원야구장|수원]] 대 [[kt 위즈|kt]]전 구원
         [[2016년]] [[5월 27일]] 선발 투수 [[양훈 (야구 선수)|양훈]]이 다실점을 한 뒤 두번째 투수로 구원 등판하며 데뷔 첫 경기를 치렀고, 경기에서 3.1이닝 무실점을 기록했다. [[2016년]] [[6월 14일]] [[롯데 자이언츠|롯데]]전에서 부진한 성적을 보였던 [[양훈 (야구 선수)|양훈]]의 공백을 메꾸는데 [[금민철]]이 실패하여 빈 자리를 메꿀 두 번째 선발 투수로서 첫 등판을 가졌다. 이 경기에서 {{분수|4|2|3}}이닝 동안 5실점을 기록하였다. [[2016년]] [[7월 1일]] [[KIA 타이거즈|KIA]]전에서 선발로 등판하여 타선의 지원에 힙입어 {{분수|5|2|3}}이닝 2실점으로 데뷔 이후 첫 승리 투수가 되었다.<ref>[http://sports.khan.co.kr/sports/sk_index.html?cat=view&art_id=201607012208003&sec_id=510201&pt=nv ‘첫승’ 넥센 최원태 “초심 잃지 않겠다] - 스포츠경향 </ref> 2017 시즌부터는 선발진에 합류하였는데, 지난 시즌에 비해 등판하는 경기에서 많은 이닝을 소화하며 불펜의 부담을 덜어주고 있다. [[2017년]] [[4월 9일]] [[두산 베어스|두산]]전에서 1군 경기 첫 퀄리티스타트 플러스를 기록하며 승리 투수가 되었다.<ref>[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04/09/0200000000AKR20170409045000007.HTML?input=1195m '7이닝 2실점' 넥센 최원태 "데뷔 후 가장 만족한 투구"] -연합뉴스</ref> [[2017년]] [[4월 27일]] [[두산 베어스|두산]]전에서 개인 최다 이닝인 8이닝을 소화하며 앞으로의 발전 가능성을 보여주면서 승리 투수가 되었다.<ref>[http://sports.mk.co.kr/view.php?&year=2017&no=287720 ‘시즌 3승’ 최원태, 값졌던 최다 이닝-투구수 경신] -MK스포츠</ref> [[2017년]] [[8월 13일]] [[한화 이글스|한화]]전에서 7이닝 1실점으로 승리 투수가 되며 데뷔 첫 두 자릿수 승리를 달성하였다.<ref>[http://osen.mt.co.kr/article/G1110709388 ‘7이닝 1실점’ 최원태, 생애 첫 10승 요건] -OSEN</ref>
  • 최준석 . . . . 2회 일치
         2006년 5월 [[트레이드]]를 통해 [[김진수(야구)|김진수]]와 함께 [[두산 베어스]]로 이적했다. 대신 [[최경환(야구)|최경환]], 이승준이 [[롯데 자이언츠]]로 이적하였다.
         부상이 예상외로 빨리 회복되었는지 시즌 초부터 1군에서 출장하기 시작했다. 4월엔 조금 부진했지만 5월 들어 방망이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FA를 앞둔 상황이라 그런지 3할대의 타율에 홈런도 쳐주며 쏠쏠히 활약하고 있지만, 좌투 선발 상대가 아닌한 거의 출전하지 못하고 있다. 이 상태라면 [[FA 제도|FA]] 선언 후 타팀으로 떠나지 않을까 팬들은 우려하고 있다.
  • 최창흡 . . . . 2회 일치
         |시성일 = [[1984년]] [[5월 6일]]
         }}</ref> [[1984년]] [[5월 6일]]에 [[서울특별시]] [[여의도]]에서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집전한 [[미사]] 중에 이뤄진 103위 [[시성|시성식]]을 통해 [[성인]] 품에 올랐다.
  • 최채흥 . . . . 2회 일치
         퓨쳐스 호투에 힘입어 5월 19일 토요일 넥센전에서 1군 데뷔전을 치뤘다. 이날 선발로 등판했고 3⅔이닝 8피안타 2실점(1자책) 81구를 기록했다. 수비 도움도 받지 못했고, 겉으로 보이는 기록은 신인 치고는 기대 이상이였으나 최대 구속이 140으로 대학 시절보다 떨어진 모습이었다. 게다가 이날 선발명단을 보면 알겠지만, 주전급 대부분이 빠져있었다.[* [[이정후]], [[서건창]], [[김하성]], [[박병호]] 대신에 들어와있는 상황.] 2:2 동점 상황에서 강판되어 승패는 기록되지 않았고 팀은 3:6으로 패배했다. 21일 1군에서 제외됐다.
         6월 2일 1군에 등록돼 당일 [[NC 다이노스]] 원정전에서 5이닝 동안 87개의 공을 던지며, 3탈삼진 2자책(2피홈런)으로 호투를 펼치며 데뷔 승을 거두었다. 시즌 초 포심구속이 나오지 않았던 것에 비해, 이날 경기에는 140대 중반에 형성이 되었다는 것은 긍정적인 상황. 비록 실투가 가운데로 몰리는 경우가 많았고, 이는 2피홈런으로 이어졌지만, 삼성은 [[양창섭]]과 함께 미래를 이끌 좋은 선발 자원을 얻었고, 2018시즌 [[백정현]]-[[장원삼]]-[[최채흥]]으로 이어지는 좌완 선발 라인업을 갖추게 되면서 상당한 경쟁력이 있는 마운드를 갖출수 있게 되었다. 장원삼이 노쇠화가 오며 10일 로테나 계투 강등이 필요해진만큼 양창섭까지 돌아온다면 선발진은 정말 무적일 듯.
  • 최태원 (야구인) . . . . 2회 일치
         |첫 출장 = [[KBO (야구)|KBO]] / [[1993년]] [[4월 10일]] <br />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대구]] 대 [[삼성 라이온즈|삼성]]전
         이로 인해 [[2002년]]부터 [[삼성 라이온즈]]에서 트레이드된 [[2루수]] [[정경배]]에 밀려 벤치 멤버로 전락하고, 끈질기게 이어오던 연속 경기 출장 기록도 당시 [[SK 와이번스]] 초대 감독이었던 [[강병철 (야구인)|강병철]]에 의해 [[2002년]] [[9월 10일]] [[두산 베어스|두산]]전을 결장하면서 종지부를 찍었다. 이 후 [[쌍방울 레이더스|쌍방울]] 시절의 은사인 [[조범현]]의 감독 부임 이후 재기를 위해 노력했으나 끝내 주전 자리를 탈환하지 못하고 33경기 출장에 그쳤다. [[2003년]] [[10월 5일]] [[삼성 라이온즈]]과의 준 플레이오프 2차전을 마지막으로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 최효진 (축구선수) . . . . 2회 일치
         [[2010년]], [[FC 서울]]로 이적하였다. [[FC 서울]]로 이적한 후 주전으로 활약하며 이적 첫 해 [[K리그 2010|2010 K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데 공헌하였다. 시즌이 끝난 후, 병역 문제 해결을 위해 [[상주 상무 피닉스|상무]]에 입단하였다. 상무에서 주전 라이트 백으로 활약하며 [[2012년]] [[9월 10일]] 전역할 때까지 53경기에 출전하였다. 전역 후 FC 서울에 복귀하였으나, [[2013년]] [[차두리]]의 입단 이후 주전 경쟁에서 밀리는 듯한 모양새를 보였다.
         [[2008년]] [[6월 14일]], [[2010년 FIFA 월드컵]] 예선에서 [[투르크메니스탄 축구 국가대표팀|투르크메니스탄]]과의 경기로 [[A매치]] 데뷔전을 치렀고, [[2010년]] [[8월 10일]]에 열린 [[나이지리아 축구 국가대표팀|나이지리아]]와의 평가전에서 자신의 A매치 첫 골을 기록하였다.
  • 충완 . . . . 2회 일치
         '''충완'''(충완, Chungwan, 홍충완, 1990년 12월 14일(1990-12-14) ~ )는 [[대한민국]]의 싱어송라이터이다. 2013년에 아이돌 보이그룹 [[언더독]]에서 싱글음반 [[Can't Stop]]으로 데뷔하였으나, 이듬해 탈퇴를 선언, 솔로 가수로 전향했다. 이후 2015년 05월12일 솔로 데뷔앨범 [[분홍길]]을 발매, 솔로 활동을 시작했다.
         * 2015년 5월 12일 〈분홍길〉
  • 타루 . . . . 2회 일치
         '''타루'''(墮淚, {{본명|김민영}}, [[1982년]] [[7월 10일]] ~ )는 [[대한민국]]의 여성 [[가수]]이다.
         * 《조금씩 가까이 너에게(파스텔뮤직 에세이북)》. 북클라우드. 2012년 10월 10일. {{ISBN|978-89-93357-88-2}}.
  • 피우진 . . . . 2회 일치
         2006년 건강검진에서 [[유방암]] 수술로 인한 유방 절제를 이유로 장애 판정을 받고 전역 조치되자,[* 참고로 유방절제로는 장애인복지법 기준으로는 장애인으로 분류되지 않는다. 피우진 중령이 받은 장애 판정은 군 내부 규정에 따른 것.] 복직 소송을 진행하여 승소 후 2008년 5월에 복직하였다. 암 수술을 받았다지만 군 생활은 물론 일상생활에도 전혀 문제가 없는 건강한 군인을 강제로 장애 판정을 받게 하고 전역시킨 군 내부의 문제가 이때 알려진다. 강제 전역당했던 기간인 2008년 4월 [[18대 총선]]에서 [[진보신당]]의 비례대표 3번으로 출마하기도 했다.[* 당시 1심에서 승소했고 2심이 진행 중이었다. 어쨌건 강제로 민간인이 된 상태라서 출마가 가능했다.] 당시 진보신당의 비례대표 득표율이 2.9%에 머물러 비례대표 당선자를 내지는 못했다. 피 보훈처장이 비례대표로 당선되려면 진보신당의 득표율이 약 5.56%를 넘었어야 하는데, 그건 둘째치고 애초에 비례대표 당선자를 배출할 수 있는 조건인 정당득표율 3%에 0.1% 차이로 아깝게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1명도 나오지 못 한 것.
         2008년 5월에 복직한 뒤 육군항공학교 교리발전처장이라는 보직을 받고, 복무하다가 2009년 9월 29일에 육군항공학교에서 만기전역하였다.[* 참고로 구글링해 보면 관련 사진이 나온다. 거기서 어떤 [[준장]]이 피 중령에게 감사장 같은 것을 수여하는데, 그 준장은 [[육군사관학교]] 34기 배명헌 장군이다. 배 장군은 당시 육군항공학교장이었고, 그 후 영전하여 육군항공작전사령관을 거쳐 소장으로 전역한다. 현재 그는 성우회 소속 안보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중령]]의 [[연령정년]](53세)이 됐기 때문이다.
  • 하동부대부인 . . . . 2회 일치
         |사망일 = [[1567년]] [[음력]] [[5월 18일]]
         하동부대부인은 영의정 하동부원군 [[정인지]]의 증손녀이며, 판중추부사 [[증직|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 [[정세호]]의 딸로 1522년(중종 17) [[9월 23일(음력 9월 4일)]]에 태어났다. [[조선 중종|중종]]의 서자<ref>창빈 안씨 소생으로 중종의 서9남</ref> [[덕흥대원군|덕흥군]]과 가례를 올리고 하동군부인(河東郡夫人)으로 제수되었다. 자녀로는 3남 1녀를 두었고, [[1567년]](명종 22) [[6월 24일(음력 5월 18일)]] 향년 46세 일기로 별세하니 [[왕비]] 부모를 장사지내는 예로 장사지냈으며, 같은 해 [[8월 9일]] 신주를 대원군 옆 이실(異室)에 모셨다.
  • 하시다 스가코 . . . . 2회 일치
         '''하시다 스가코'''({{lang|ja|橋田 壽賀子}}, 1925년 5월 10일 -)는 일본의 [[각본가]]이자 [[극작가]]이다. [[경성부]](현: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나 [[오사카부]] [[사카이 시 (오사카 부)|사카이 시]] [[니시 구 (사카이 시)|니시 구]]에서 자랐다. 본명은 이와사키 스가코({{lang|ja|岩崎 壽賀子}})로, 하시다는 결혼 전 성이다.
  • 하일권 . . . . 2회 일치
         '''하일권'''(1982년 1월 10일 ~ )은 [[대한민국]]의 [[만화가]]이다.
         2006년 파란 웹툰에서 연재하여 총 조회수 1천만 회를 넘기며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외모에 심각한 콤플렉스를 가진 사람들이 자괴감에 빠져 ‘외모 바이러스’에 걸려 발작을 일으키고, 이발사 ‘삼봉’이 저마다의 상처를 안은 사람들의 트라우마를 치료해준다는 이야기이다. 하일권의 작품들 중 첫 연극화가 되어 2011년 11월 24일부터 12월 19일까지 공연하였다. 2012년 5월 2일부터 연극이 다시 열린다. 2012년 3월 네이버에서 재연재되고 있다.
  • 하정우(영화감독) . . . . 2회 일치
         [[소재원]]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터널(영화)|터널]]》에서는 불의의 사고로 터널 속에 갇힌 38세 자동차 딜러 [[이정수(터널)|이정수]] 역을 맡아 열연했다. 2016년 8월 10일 개봉되어, 개봉 12일 만에 500만 관객을 돌파하여 손익분기점을 넘겼다. 최종관객은 712만 명으로 흥행 대성공.
         [[2011년]] 연말, 말 한마디 잘못 했다가 국토대장정을 떠났다. [[2011년]] [[5월]]에 열린 제47회 [[백상예술대상]]에서 작년도 수상자로서 남우주연상 시상자로 나와서 2년 연속으로 수상하게 되면 국토대장정을 떠나겠다는 공약을 내세웠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황해(영화)|황해]]> 하정우.'''' 라고 발표하며 어색하게 웃었고 '''진짜로 갔다.'''[* 이 당시 그와 함께 시상자로 참가했던 [[하지원]]은 그 이후로 공약에 대해서 묻지 않는단다. ~~하정우처럼 했다 또 그러면?? 그 땐 하지원도 가야지.~~] 그리고 다른 배우들과 같이 국토대장정 하는 소재로 --반쯤 다큐인 영화-- '577 프로젝트'가 [[2012년]] [[8월 30일]]에 개봉했다. 제목이 지어진 배경은 이 프로젝트를 --작당-- 계획한 장소가 압구정의 '577술집'[* [[영화]]에서도 회의 장소로 나온다. 하정우의 단골집이기도 하다.]이기 때문.--577km 아니었어?--
  • 한동근 . . . . 2회 일치
         '''한동근'''([[1993년]] [[5월 9일]] ~ )은 [[대한민국]]의 가수로, [[위대한 탄생 시즌3]]의 우승자이다.
         [[1993년]] [[5월 9일]] 경북 구미에서 태어났다. 데뷔하기 전까지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4년 동안 공부했다.<ref>{{뉴스 인용 |저자=손수영 |제목=한동근, 데뷔 전 무슨 일 했나? "평범한 유학생이었다" |url=http://news.heraldcorp.com/culture/view.php?ud=201609092113433115096_1 |뉴스=헤럴드경제 |출판사= |위치= |날짜=2016-09-09 |확인날짜= }}</ref> 한동근은 미국 유학 도중 성가대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합창을 하면서 희열을 느꼈고 피아노로 노래를 하기도 했는데 그는 이때의 경험으로 가수를 꿈꾸게 되었다고 말했다.<ref>{{뉴스 인용 |저자=김민서 |제목=‘가요광장’ 한동근 “美 유학 중 성가대 활동, 가수 된 계기” |url=http://isplus.liv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20545114&cloc=rss%7Cisplus%7Centertainment |뉴스=일간스포츠 |출판사= |위치= |날짜=2016-09-03 |확인날짜= }}</ref> [[2014년]] [[8월]] 데뷔 앨범을 준비하며 앨범에 들어갈 노래를 선정하는 자리에서 그는 《이 소설의 끝을 써보려 해》를 부르게 되었다. 데뷔 곡을 정하기 위해서 시험 삼아 노래를 부르는 자리였던 만큼 힘을 빼고 편안하게 노래했다고 그는 증언했다. 이를 "자연스럽다"며 마음에 들어한 소속사 사장의 권유에 《이 소설의 끝을 써보려 해》는 그 다음 달 발표되었다.<ref>{{뉴스 인용 |저자=양승준 |제목=카메라 없어도 노래 자처…열정이 만든 ‘역주행 신화’ |url=http://www.hankookilbo.com/v/31eb3a7aa65e4987a1b22f33592d79a6 |뉴스=한국일보 |출판사= |위치= |날짜=2016-09-01 |확인날짜= }}</ref>
  • 한영이 . . . . 2회 일치
         |시성일 = [[1984년]] [[5월 6일]]
         }}</ref> [[1984년]] [[5월 6일]]에 [[서울특별시]] [[여의도]]에서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집전한 [[미사]] 중에 이뤄진 103위 [[시성|시성식]]을 통해 [[성인]] 품에 올랐다.
  • 한재권 (응원단장) . . . . 2회 일치
         '''한재권'''(1978년 10월 10일 ~ , [[서울특별시]])은 [[대한민국]]의 [[응원]]단장이다. 현재 [[KBO 리그]] [[두산 베어스]], [[V리그]] [[안산 OK저축은행 러시앤캐시]], [[WKBL]] [[아산 우리은행 위비]]의 응원단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한스타일 (한스타일 모피, 한스포츠)의 사장이다.
         * 1978년 10월 10일 서울특별시 출생
  • 한호문 . . . . 2회 일치
         [[음서 제도|음보]](蔭補)로 관직에 올라 여러 관직을 거쳐 [[1598년]](선조 31년) 선전관(宣傳官)<ref>황여일 (黃汝一), 《해월집 권9》, 사신일기, 1598년 무술 11월 13일 갑오(甲午) </ref>, [[1599년]](선조 32년) 하양 현감(河陽縣監)으로 부임하였다.<ref>선조실록 113권, 1599년(선조 32년, 명 만력 27년) 5월 3일 경술 6번째기사, "조정·조희보·변이중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ref> [[1602년]] [[9월 14일]] 군기판관(軍器判官)을 거쳐<ref>竹溪日記卷之六, 九月初十日戊辰</ref>, [[12월 16일]] 영흥판관으로 나갔다.<ref>竹溪日記卷之六, 十二月十六日</ref> [[1603년]](선조 36년) [[11월 29일]] 서산(瑞山)으로 부임하였고<ref>조익(趙翊), 《가휴선생문집권 10》, 공산일기(公山日記), 계묘 1603년 11월 29일자</ref>, 그가 서산군수로 부임한 내용은 서산군읍지(충청남도)(瑞山郡邑誌(忠淸南道))의 선생안에도 수록되었다. [[1607년]] [[9월 4일]] 도총경력에 임명되었다.<ref>竹溪日記卷之十, 九月初四日</ref> [[1615년]](광해군 7년) [[화기도감]]에 낭청으로 참여한 공로로, 그해 [[12월 29일]] 화기도감 도제조 이하 관원을 시상할 때 승급되었다.<ref> 광해군일기 98권, 1615년(광해군 7년, 명 만력 43년) 12월 29일 신미 3번째기사 1615년 명 만력(萬曆) 43년 화기 도감 도제조·제조 유근 등에게 포상하다</ref>
         * 부인 : 남양홍씨(南陽洪氏, ? ~ ?년 5월 2일), 부사 홍여성(洪汝誠) 의 딸
  • 한확 . . . . 2회 일치
         그뒤 창성(昌盛)과 윤봉(尹鳳)이 또 한영정의 막내딸이 얼굴이 아름답다고 [[명나라]]에 고하자 그의 막내 누이도 명나라로 뽑혀 가게 되었다.<ref name="han01">세종실록 36권, 세종 9년(1427 정미 / 명 선덕(宣德) 2년) 5월 1일(무자) 4번째기사 "진헌할 처녀로 간택된 한영정의 막내딸이 혼수로 준비했던 재물을 나눠주다"</ref> 병이 나게 되어 한확이 약을 주니, 한씨가 먹지 않고 말하기를,
         임기=[[1453년]] [[11월 10일]] ~ [[1455년]] [[12월 1일]]
  • 함두영 . . . . 2회 일치
         |임기 = [[1954년]] [[5월 31일]] - [[1958년]] [[5월 30일]]
  • 함중아 . . . . 2회 일치
         '''함중아'''(咸重兒, '''존슨 함'''(Johnson Hahm), [[1952년]] [[5월 13일]] ~ )는 [[대한민국]]의 [[싱어송라이터]]이다.
         *1991년 05월 함중아와 무서운아이들 2집 《나는 의사 / 여자의 얼굴》
  • 허건엽 . . . . 2회 일치
         드디어, 2014년 7월 10일에 부진했던 [[엄정욱]]을 대신해 시즌 처음으로 1군에 등록되었다. 1군에 올라와서는 단 5이닝만 던지고 실점은 하지 않은 채 엔트리에서 말소됐다.
         5월 9일, [[임치영]]과 함께 1군에 콜업되었다.
  • 허협 . . . . 2회 일치
         |시성일 = [[1984년]] [[5월 6일]]
         }}</ref> [[1984년]] [[5월 6일]]에 [[서울특별시]] [[여의도]]에서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집전한 [[미사]] 중에 이뤄진 103위 [[시성|시성식]]을 통해 [[성인]] 품에 올랐다.
  • 현경련 . . . . 2회 일치
         |시성일 = [[1984년]] [[5월 6일]]
         }}</ref> [[1984년]] [[5월 6일]]에 [[서울특별시]] [[여의도]]에서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집전한 [[미사]] 중에 이뤄진 103위 [[시성|시성식]]을 통해 [[성인]] 품에 올랐다.
  • 현석문 . . . . 2회 일치
         |시성일 = [[1984년]] [[5월 6일]]
         }}</ref> [[1984년]] [[5월 6일]]에 [[서울특별시]] [[여의도]]에서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집전한 [[미사]] 중에 이뤄진 103위 [[시성|시성식]]을 통해 [[성인]] 품에 올랐다.
  • 현홍주 . . . . 2회 일치
         '''현홍주'''(玄鴻柱, [[1940년]] [[8월 19일]] ~ [[2017년]] [[5월 26일]])는 [[대한민국]]의 국회의원, 외교관, 정치인, 법조인이다. 본관은 [[연주 현씨|연주]].
         * 1985년 2월 ~ 1988년 5월 : 제12대 전국구 국회의원(소속정당: [[민주정의당]])
  • 홍금주 . . . . 2회 일치
         |시성일 = [[1984년]] [[5월 6일]]
         }}</ref> [[1984년]] [[5월 6일]]에 [[서울특별시]] [[여의도]]에서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집전한 [[미사]] 중에 이뤄진 103위 [[시성|시성식]]을 통해 [[성인]] 품에 올랐다.
  • 홍병주 . . . . 2회 일치
         |시성일 = [[1984년]] [[5월 6일]]
         }}</ref> [[1984년]] [[5월 6일]]에 [[서울특별시]] [[여의도]]에서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집전한 [[미사]] 중에 이뤄진 103위 [[시성|시성식]]을 통해 [[성인]] 품에 올랐다.
  • 홍영주 . . . . 2회 일치
         |시성일 = [[1984년]] [[5월 6일]]
         }}</ref> [[1984년]] [[5월 6일]]에 [[서울특별시]] [[여의도]]에서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집전한 [[미사]] 중에 이뤄진 103위 [[시성|시성식]]을 통해 [[성인]] 품에 올랐다.
  • 홍유경 . . . . 2회 일치
         * [[2011년]] [[4월 19일]] ~ [[2013년]] [[5월]] 소속사 '[[플랜에이 엔터테인먼트]]' 소속
         * 《에이핑크 뉴스 시즌2》 (2011년 11월 25일 ~ 2012년 2월 10일)
  • 홍정욱 . . . . 2회 일치
         |임기 = [[2008년]] [[5월 30일]] ~ [[2012년]] [[5월 29일]]
  • 홍현희 . . . . 2회 일치
         '''홍현희'''(洪賢熙, [[1982년]] [[5월 10일]] ~ )는 [[대한민국]]의 [[희극 배우]]로 [[SBS (대한민국의 방송사)|SBS]] 9기 공채 [[희극 배우|개그맨]]으로 정식 데뷔하였다. 그리고 그녀의 대표 작품에는 《더 레드》 등이 있다.
  • 홍효의 . . . . 2회 일치
         2013년 팀에 복귀, 신고선수가 아니라 정식선수로 등록되었다. 그러나 군복무 전과 달리 계투로 시즌을 시작했다. 5월 18일 LG 2군전에서 시즌 처음 선발로 등판했지만 1⅓이닝 동안 5실점을 하면서 강판되었고, 팀도 5대22로 대패했다. 결국 부진한 성적 탓인지 5월 이후로는 나오지 못했다.
  • 황병기 . . . . 2회 일치
         '''황병기'''(黃秉冀, [[1936년]] [[5월 31일]] ~ [[2018년]] [[1월 31일]])는 국악 [[작곡가]]이자 [[가야금]] 연주가이다. 본관은 [[우주 황씨|우주]](紆州)이다.
         1965년 4월 22일-5월 2일에 [[미국]] [[하와이주]] [[호놀룰루]]에서 열린 '금세기 음악 예술제(Festival of Music and Art of This Century)에 초청되어 작곡 발표 및 가야금 연주를 했다. 최초의 독집 음반(LP) Music From Korea: The Kayagum』(East-West Center Press) 취입하기도 했으며, 6월-8월 [[워싱턴 대학교]]에서 하계 학기 강사로 한국음악을 강의했다. 샌프랜시스코, 로스앤젤리스, 시애틀에서 가야금 독주회를 열었고, 샌프랜시스코 하계음악제에서 Lou Harrison 작곡의 「Pacific Rondo」를 연주했다. '미국의 소리' 방송에 출연하기도 했다.
  • 황석두 . . . . 2회 일치
         |시성일 = [[1984년]] [[5월 6일]]
         }}</ref> [[1984년]] [[5월 6일]]에 [[서울특별시]] [[여의도]]에서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집전한 [[미사]] 중에 이뤄진 103위 [[시성|시성식]]을 통해 [[성인]] 품에 올랐다.
  • 황수범 . . . . 2회 일치
         |첫 출장 = [[KBO (야구)|KBO]] / [[2017년]] [[5월 18일]]<br>[[문학야구장|문학]] 대 [[SK 와이번스|SK]]전 구원
         [[2011년]]에 입단하였다. [[2017년]] [[5월 18일]] [[SK 와이번스|SK]]전에서 구원 등판하며 데뷔 첫 경기를 치렀고, 경기에서 1이닝 무실점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2017년]] [[9월 2일]] [[두산 베어스|두산]]전에서 첫 선발 승을 기록했다.<ref>[http://joynews.inews24.com/php/news_view.php?g_menu=702100&g_serial=1046010&rrf=nv '데뷔 첫 승' 황수범 "너무 오래 걸린 것 같다"] - 조이뉴스24</ref>
  • 효령대군 . . . . 2회 일치
         '''효령대군'''(孝寧大君, [[1396년]] [[1월 6일]] ([[음력]] [[1395년]] [[12월 11일]]) ~ [[1486년]] [[6월 12일]]([[음력 5월 11일]]))은 [[조선]]시대 전기의 [[왕자]], [[왕족]], [[서예|서예가]], [[정치가]]이다.
         [[1395년]] [[음력 12월 11일]]에 태어나 92세의 천수를 다하고 [[1486년]](성종 17, 丙午年) [[음력 5월 11일]]에 세상을 떠났다. 현재의 [[서울특별시]] [[서초구]] 방배동에 예장되었다. 묘소는 [[1972년]]에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되었다. 현 사당은 [[1736년]](영조 12)에 왕명으로 효령대군 묘 앞에 처음 세우면서 '청권사'라고 하였다.
  • 2013 K리그 심판매수 . . . . 1회 일치
         2016년 5월 23일, 검찰의 추가 수사결과 [[전북 현대]]도 이 시기에 [[http://sports.news.naver.com/kfootball/news/read.nhn?oid=001&aid=0008421435|심판에게 경기당 100만원을 건내며 판정을 유리하게 받으려 시도]]하였음을 발표한다.
  • Crusader Kings 2/DLC . . . . 1회 일치
          * 2013년 5월 28일 발매
  • Darkest Hour: A Hearts of Iron Game/디시전 . . . . 1회 일치
          * 발동 조건: 노르웨이가 소련 및 영국과 동맹 관계가 아님. 독일이 "단치히냐 전쟁이냐-평화를 위한 마지막 기회-" 디시전을 발동시킨지 210일이 지나지 않음. 보급품 300.
  • JOY축제 . . . . 1회 일치
         2003년 5월 18일, JOY 라는 여성은 남편 HIDE와 동생 부부와 함께 [[술집]]에 가서 저녁 식사를 했다. 이 때 아이들도 같이 데리고 갔으며, 아이들은 술집 안을 뛰어다니면서 즐겁게 놀았다(…)고 한다. 그걸 가게의 어떤 사람이 "부모의 훈육이 나쁘다."고 발언하고, 딸이 그 사실을 JOY와 HIDE 부부에게 말하자 분노한 HIDE가 누가 그런 말을 했는지 점원들을 추궁하고, 색출해내서 점원에게 [[폭력]]을 휘두른 다음 가게 점장에게도 소리를 쳤다…라는 내용의 일기를 올렸다.
  • NII 스탈리 . . . . 1회 일치
         소련 시절인 1942년 5월, 전차 장갑을 연구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 That 70's show . . . . 1회 일치
         시즌 1 에피소드 1은 1976년 5월 17일로 되어 있다. 1시즌에서 [[제럴드 포드]]가 재선을 위해서 공화당원들을 모아서 선거 운동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로 보아서 1시즌은 미국 대통령 선거가 있었던 1976년으로 보인다. 1시즌 후반부에는 [[스타워즈]](1977년작)가 개봉되어 보러 가는 에피소드가 있다. 그리고 최종회는 1970년대의 마지막 밤을 지나서, 1980년대가 밝아오면서 끝난다.
  • USS 뷰캐넌 . . . . 1회 일치
         취역한지 1년도 안 된 뷰캐넌은 대서양을 떠나 태평양에서 활동한다. 이후 뷰캐넌은 퇴역과 재취역을 반복했다. 1922년 7월 7일 퇴역했지만 1930년 4월 10일 USS 소머즈(USS Somers)가 퇴역하며 재취역했다. 이렇게 태평양에서 활동하던 뷰캐넌은 1937년 4월 9일 다시 퇴역한다. 1939년 9월 1일,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함에 따라 미 해군은 해군력을 불리기 시작한다. 1939년 9월 9일, 뷰캐넌은 3번째 취역을 맞는다. 이후 뷰캐넌은 대서양에서 활동하다 1940년 9월 9일, 미국과 영국이 맺은 조약[* Destroyer for Bases Deal. 영국이 미국에게 기지를 대여해주는 대신 미국은 영국에게 구축함을 지원하는 조약.]에 의해 영국 해군에게 넘겨진다.
  • 가희 . . . . 1회 일치
         * 발매일: [[2013년]] [[10월 10일]]
  • 강구열 . . . . 1회 일치
         정작 이슈를 불러일으킨 이후엔 1년 가까이 부진한 모습으로 이렇다할 성적을 내지 못했으나, 최근 [[BATOO 스타리그 08-09]] 오프라인 예선에서 [[변형태]](CJ 엔투스)를 꺾는 이변을 일으키며 36강 본선에 진출했으나 조기탈락했다. 여담으로, 그무렵에 [[신한은행 프로리그 09-10]]을 벼르고 있다고 인터뷰를 하기도 했으나, 정작 그렇게는 못 됐다. 그 후, 프로리그와 개인리그에서 이렇다할 성적을 크게 내지 못한 채로 [[2009년]] [[9월 10일]] 소위 '날일' 에 날카롭게 은퇴를 선언했다.
  • 강남역 묻지마 살인사건 . . . . 1회 일치
         2016년 5월 17일 서울 서초구 강남역 인근에서 일어난 살인사건. 이날 새벽 서초구의 한 노래방 화장실을 이용하던 23세 여성이 34세 남성 피의자 김모씨에 의해 흉기에 찔려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피해자는 남자친구에 의해 발견되어 오전 1시 25분 경에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숨졌다. 같은 날 오전 10시 김모씨는 긴급 체포되었으며 자백을 받아냈다.
  • 강석경 . . . . 1회 일치
         '''강석경'''(姜石景, [[1951년]] [[1월 10일]] ~ )은 [[대한민국]]의 [[소설가]]이다.
  • 강원 FC . . . . 1회 일치
         2008년 11월 10일에 창단한 구단으로 2009시즌부터 [[K리그]]에 참가하고 있는 프로구단이다. 구단의 법인지배구조는 [[시민구단]]이고, 연고지는 도 전체를 포괄하기 때문에 언론에서는 야구의 사례와 빗대어 광역연고구단으로 보고 있다.[* 한국프로축구연맹에서는 딱히 광역연고와 도시연고를 구분하고 있지 않다. 연고지는 "구단과 협약을 맺은 지자체의 행정지역과 그 범위"로 보고 있기 때문에 딱히 이런 구분은 무의미하다.] 연고지 협약을 맺은 지역이 강원도 전체를 대표하는 강원도청이기 때문에 강원FC의 전체 이름은 "강원도민프로축구단"으로 정한 바 있다.
  • 강유미(코미디언) . . . . 1회 일치
         || '''출생일''' ||<(> [[1983년]] [[5월 17일]]([age(1983-05-17)]세) ||
  • 강재형 (아나운서) . . . . 1회 일치
         * [[2018년]] [[5월 17일]] : 《강재형의 말글살이》
  • 강정길 . . . . 1회 일치
         [[1985년]] [[삼성 라이온즈]]의 1차 1순위 지명을 받았으나 지명권 양도로 [[이강돈]]과 함께 [[한화 이글스|빙그레 이글스]]의 창단 멤버로 입단했다. 주 포지션은 [[1루수]]였고, 정교한 타격을 선보이는 중거리형 타자였다. [[이정훈 (1963년)|이정훈]], [[이강돈]] 선수와 함께 [[한화 이글스|빙그레 이글스]] 타선의 중심 역할을 하였다.<ref>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109&aid=0001995565 강정길, "삼성만 만나면 펄펄 날았다"] 《Osen》, 2008년 12월 10일</ref> [[2008년]]부터 [[2013년]]까지 모교인 [[경북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을 지냈다.
  • 건포인트/도전과제 . . . . 1회 일치
         나열 순서는 2017년 1월 10일 기준 전체 달성률.
  • 경대수 . . . . 1회 일치
         [[2017년]] [[8월 10일]]에는 [[문재인 정부]]의 군복무기간 단축 정책에 대응하여 대통령이 군 복무기간을 조정할 때에는 [[국회]] 상임위에서 공론화를 거치도록 하는 법안을 대표 발의했다. 위의 내용과 대비해서 보면 묘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 경산시 . . . . 1회 일치
         * [[김이슬 (1990년 5월)|김이슬]] - 미스코리아
  • 고소영 . . . . 1회 일치
         1993년 [[엄마의 바다]]에서 톡톡튀는 매력으로 스타덤에 올랐고, 1997년 '''영화 [[비트(한국 영화)|비트]]에서 여자주인공 '로미'역을 맡아 당대 남성들의 이상형이 되었으며''' 이 영화는 개봉 후 2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후인 현재까지도 고소영의 거의 유일한 대표작이다. 이런 과정 등을 거쳐 1990년대 최고의 여배우로 군림했으나 2000년대 들어 광고 모델로만 활약하고 그 외의 연기활동이 거의 없어 지명도가 떨어지던 중 2010년 5월 2일 [[장동건]]과 결혼, 인생의 승리자가 되었다.[* 장동건-고소영 결혼설이 뜨자 장동건은 알고 고소영은 몰랐던 장동건의 10대 팬들에게 [[듣보잡]] 취급 당하기도 했는데 이에 앞서 [[임창정]]과의 열애설이 있었으며 결국 1998년 MBC [[추억]]을 끝으로 드라마 출연이 한동안 뜸했었다.][* 오히려 중년층 이상에서 장동건에게 잘 어울리는 상대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90년대에는 정말로 지금의 장동건에 전혀 꿀리지 않는, 인기의 정점에 있었기 때문. 어쩐지 결혼 후에 남편과 인기, 인지도가 역전 되어버린 [[쿠도 시즈카]]나 [[빅토리아 베컴]]이 연상되는 면도 있다.] 이 때문에 여자 [[연정훈]]이 되는가 싶었지만 고소영 역시 내로라하는 최고의 미녀스타였기 때문에 여자들의 주적 취급은 받지 않았다.
  • 고아성 . . . . 1회 일치
         '''고아성'''(高我星<ref>{{뉴스 인용|저자=김지윤|제목=고아성 “영화 ‘여행자’ 찍으면서 다리가 굵어졌어요~” (인터뷰 ②)|url=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0910211709321003|날짜=2009-10-22|확인날짜=2016-01-09|뉴스=뉴스엔}}</ref>, [[1992년]] [[8월 10일]] ~ )은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 곽승준 . . . . 1회 일치
         1960년 10월 10일 ~
  • 곽월 . . . . 1회 일치
         ***** 삼남 : [[곽재우]](郭再祐, [[1552년]] [[8월 28일]] ~ [[1617년]] [[4월 10일]])
  • 광주 FC . . . . 1회 일치
         이에 따라 2010년 5월에 법인을 설립하는 한편, 6월부터 9월까지 시민주 공모를 통해 창단자금을 마련하여 동년 12월에 창단식을 갖음으로써 2012시즌에 참가하는 신생구단 광주 FC가 탄생하게 된다.
  • 구본욱 . . . . 1회 일치
         '''구본욱'''(張東雄 [[1990년]] [[5월 5일]] ~ )는 전 [[KBO 리그]] [[NC 다이노스]]의 내야수이다.
  • 구자욱 . . . . 1회 일치
         스프링캠프와 시범 경기 때 맹활약하며 기대를 받았으나, 외야의 [[최형우 (야구 선수)|최형우]], [[박해민]], [[박한이]], 내야의 [[채태인]], [[박석민]]을 제치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시범 경기 때 부상을 당한 [[채태인]]을 대신해 개막전 엔트리에 들어갔으며, 3월 28일 [[SK 와이번스]]와의 개막전에 선발 출전하게 되었다. 데뷔 첫 타석에선 유격수 땅볼로 물러났으나, 두 번째 타석에서 우측 펜스를 직격하는 2루타를 쳐, 데뷔 첫 안타와 타점을 기록하였다. [[4월 1일]] [[kt 위즈|kt]]전에서 [[정대현 (1991년)|정대현]]을 상대로 솔로 홈런을 기록하며 데뷔 첫 홈런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시즌 초반 아쉬운 1루 수비를 보여주었다. 두 번째 홈런을 기록한 [[4월 3일]]을 기점으로 타격감이 안좋아지자, [[강봉규]]가 한동안 1루수로 출전하게 되었다. [[4월 9일]] [[롯데 자이언츠|롯데]]전에서 [[강봉규]]의 대타로 타석에 나와 [[김승회]]를 상대로 끝내기 안타를 기록하며 데뷔 첫 끝내기 안타를 기록하였다. 다음날 경기에서 부상당한 [[채태인]]이 1군에 올라와 시즌 첫 선발 출장을 했으나, 한 타석만에 그와 교체되었고, 그는 홈런 포함 3타수 2안타로 맹활약하였다. [[채태인]]이 다시 2군으로 내려가며 주전 자리를 이틀만에 꿰찼지만, 다시 타격감이 안 좋아져 [[김정혁 (야구 선수)|김정혁]]이 주전으로 나섰다. 그러나 [[김정혁 (야구 선수)|김정혁]]도 기대 이하의 실력을 보여주었고, [[4월 29일]]에 그는 다시 선발 라인업에 이름을 올리면서 데뷔 첫 3안타를 기록하게 되었다. 그 뒤로 꾸준히 타격감을 끌어올린 그는 [[채태인]]이 부상에서 돌아오자, 타격 부진에 빠진 [[박해민]]을 대신해 중견수로도 출장하며 꾸준히 경기에 나섰다. [[5월 21일]] [[두산 베어스|두산]]전에서 [[윤명준]]을 상대로 홈런을 기록하였고, 이 홈런은 [[삼성 라이온즈]]의 4000번째 홈런이 되었다. [[6월 3일]] [[롯데 자이언츠|롯데]]전에서 [[이승엽]]의 [[KBO (야구)|KBO]] 최초 400호 홈런이 터지던 날, 대수비로 출전한 그도 나란히 홈런을 기록하며 자신이 포스트 [[이승엽]]의 자격이 있다는걸 증명했다. 꾸준히 타격감을 올린 그는 [[6월 18일]] 경기에서 3타수 2안타를 치며 3할고지를 돌파하였고, 시즌 끝에는 3할 4푼 9리의 좋은 성적을 보여주었다. 그 뒤 그는 부상으로 빠진 [[박석민]]과 [[박한이]]를 대신하여 3루 수비와 우익수 수비도 소화하며 수비에서의 재능도 보여줬다. 그는 전반기 0.329의 타율과 9개의 홈런으로 [[2015년]] [[올스타전]] 드림 올스타의 1루수로 뽑히게 되었다. 그는 [[8월 4일]] [[kt 위즈|kt]]전에서 [[저스틴 저마노|저마노]]를 상대로 안타를 기록하며 신인 최다 경기 연속 안타인 22경기 연속 안타를 기록하였고, 다음 날 경기에서도 안타를 기록하며 23G 연속 안타로 기록을 늘렸다. [[8월 22일]] [[롯데 자이언츠|롯데]]전에서 5타수 5안타 5득점 1홈런으로 맹활약하며 생애 첫 5안타, 5득점에 두 자릿수 홈런까지 달성하였다. [[9월 20일]] [[롯데 자이언츠|롯데]]전에서 타격 후 옆구리 통증으로 시즌을 아쉽게 마감하게 되었다. 그러나 역대 신인 최고 타율을 갱신하였다. 최종 성적은 11홈런, 17도루, 57타점, 97득점이었다. 이는 타율 3위, 득점 10위, 출루율 10위의 대단한 성적이였다. 비록 [[2015년 KBO 한국시리즈|한국시리즈]]에서는 0.286의 타율로 아쉬운 모습을 보여주며 팀은 준우승을 하였으나, [[김하성]]과 [[조무근]]을 제치고 신인왕에 오르게 되었다.<ref>[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5/11/24/0200000000AKR20151124125600007.HTML?input=1195m '타격 3위' 삼성 구자욱, 2015 신인왕 수상] - 연합뉴스</ref>
  • 구재서 . . . . 1회 일치
         '''구재서'''(具載書<ref>프로야구 金始眞(김시진) 6연승…올2완봉승, 동아일보, 1985년 5월 2일자.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5050200209209012&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85-05-02&officeId=00020&pageNo=9&printNo=19562&publishType=00020</ref>, [[1963년]] [[8월 15일]] ~ )는 전 [[KBO 리그]] [[두산 베어스|OB 베어스]]의 외야수이다.
  • 권성욱 . . . . 1회 일치
         [[대구광역시]] 출신으로 [[1998년]] [[2월]] [[부산광역시]]와 [[경상남도]]의 지역방송국인 PSB 부산방송(현재 [[KNN]])으로 입사하여 아나운서로서의 활동을 시작하였다. 당시 주로 프로야구 중계를 많이 담당하였다. [[2001년]]부터는 스포츠 전문 케이블방송인 [[KBS N 스포츠]]로 소속을 옮겨 [[2013년]]까지 [[KBO 리그]], [[KBL 리그]] 농구 중계를 담당하였다. [[2011년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2011 대구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때는 일부 필드경기 및 시상식 장내해설을 맡은 바 있다. [[2014년]] 팀장으로 승진하면서 마이크를 내려놓았는데, 2015년 5월 2일과 10월 21일 2경기 마이크를 잡았으며, 2016년 4월 1일, [[KT 위즈]]와 [[SK 와이번스]]와의 경기에서 마이크를 잡았다.
  • 권영준 (1952년) . . . . 1회 일치
         '''권영준'''([[1952년]] [[5월 15일]]~ , [[대구광역시]])은 [[대한민국]]의 경영학자인 대학교수이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경제정의연구소 소장과 한국재무학회 이사를 맡고 있다.
  • 김경식 (1960년) . . . . 1회 일치
         |임기 = [[2014년]] [[2월 27일]] ~ [[2015년]] [[5월 25일]]
  • 김경준(축구선수) . . . . 1회 일치
         5월 6일 토요일 [[전북 현대]]와의 [[K리그 클래식]] 10라운드 [[http://www.daegufc.co.kr/board_story_clubnews01/view.php?tn=board_story_clubnews01&list_count_s=6&G_state=Y&pm=4.2.1&part_part_s=&subject_s=&content_s=Y&name_s=&writedate_s=&search_word_s=%EA%B9%80%EA%B2%BD%EC%A4%80&sid=2981&gid=&cpage=1&spage=1|홈 경기에 교체 출장]]했다. 전반 15분에 에반드로의 부상으로 최전방 공격수로 교체되어 들어갔다. 최전방 공격수로서 활발히 움직이며 슛을 날리고, 돌파를 시도했지만, 골은 기록하지 못하고 0:3으로 패배했다.
  • 김기섭 (1939년) . . . . 1회 일치
         * [[1983년]] [[5월 8일]] [[신라호텔]] 판촉담당 이사(이사대우)
  • 김덕 . . . . 1회 일치
         1935년 5월 25일 ~
  • 김동호 (야구선수) . . . . 1회 일치
         '''김동호'''(金東昊<ref> 한국야구위원회, 2015 가이드북 </ref>, [[1985년]] [[9월 10일]] ~ )는 [[KBO 리그]] [[삼성 라이온즈]]의 [[투수]]이다.
  • 김문오 . . . . 1회 일치
         '''김문오'''(金文澳, [[1949년]] [[5월 4일]] ~ )은 [[대한민국]]의 언론인 출신 정치인이다. 현재 대구광역시 달성군수이다.
  • 김문집 . . . . 1회 일치
         * 대산문화재단, [http://www.daesan.or.kr/news/2007/100.htm 탄생 100주년 문학인 기념문화제 개최] (2007년 5월)
  • 김미숙(1959) . . . . 1회 일치
         || '''출생''' ||<(> [[1959년]] [[5월 3일]] ([age(1959-05-03)]세), [[전라북도]] [[순창군]] ||
  • 김민교 (가수) . . . . 1회 일치
         * [[1994년]] [[5월 27일]] [[KBS]] 《[[퀴즈탐험 신비의 세계]]》
  • 김민아 (아나운서) . . . . 1회 일치
         * 2014년 5월 투르 드 코리아 홍보대사
  • 김민제 (프로게이머) . . . . 1회 일치
         * [[2005년 5월]] 제11회 커리지 매치 입상
  • 김병윤 . . . . 1회 일치
         1922년 5월 19일 ~ 2013년 9월 15일
  • 김봉수(1953) . . . . 1회 일치
         2007년 5월 [[키움증권]]으로 사명이 변경된 후, 2009년에는 [[코스피]]에 상장되었다. 그 당시 키움증권의 시가총액은 1조 원을 넘었으며, 1일 거래대금은 4조 원을 넘고 있었다.[* 키움증권은 2005년 이후 11년 연속 주식시장 점유율 1위를 달리고 있다.]
  • 김상엽 (야구인) . . . . 1회 일치
         '''김상엽'''(金相燁, [[1970년]] [[5월 11일]] ~ ) 은 전 [[KBO 리그]] [[LG 트윈스]]의 [[투수]]이자, 현재 [[KBO 리그]] [[NC 다이노스]]의 재활군 투수코치이다. 부상 이전 촉망받던 고졸 강속구 투수였다. 최고구속 150km대에 근접한 강속구를 뿌렸으며, 당시에는 희귀한 낙차 큰 파워 커브로 타자들을 상대했다. 1990년대에는 당시 보기 드물게 야구 선수로서 [[삼성물산]]의 패션 사업부인 [[삼성물산|에스에스패션]]의 신사복 빌트모아 TV CF에 출연하였을 정도로 큰 인기를 얻었다.
  • 김상조 . . . . 1회 일치
         공정위에 따르면 17년 5월 기준 31개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자산규모 10조 원 이상)이 보유한 93개의 순환출자 고리가 18년 4월 확인 결과 10개로 줄어들었다. 자산규모 5조 원 이상 10조 원 미만인 공시대상기업집단도 17년 9월 1일 지정 당시 26개 집단이 보유한 189개의 순환출자 고리가 18년 4월 31개로 축소됐다. 이를 종합하면 자산규모 5조 원 이상의 57개 대기집집단의 순환출자 고리가 282개에서 41개로, 약 85%가 해소된 셈이다.
  • 김상중(배우) . . . . 1회 일치
          * 혼사와 관련된 [[흑역사]]가 있다.[* 이전에 한번 [[결혼]]을 해서 아들을 두었었는데 [[2000년]]에 [[http://www.donga.com/docs/magazine/woman_donga/200002/wd2000020120.html|이혼을 했었다]]. 이쪽도 이혼이라는 흑역사가 있다.] 2003년에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1&aid=0000049827|결혼 발표]]를 했었으나 [[신부]]가 [[파라다이스 그룹]] 재벌 2세 행세를 한 사기결혼으로 드러나 [[결혼식]]을 보름 앞두고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03&aid=0000004595|파혼했다]]. 진행을 맡고 있는 그것이 알고싶다에서도 종종 사기 결혼에 대해 다루곤 하는데[* [[2013년]] [[8월 10일]] 방영된 「내 아내는 누구인가」편과 [[2014년]] [[7월 5일]]에 방영된 「사라진 '신데렐라' 예비신부 실종 미스터리」도 이 내용을 다루고 있다.] 과연 어떤 심정일지.
  • 김석형 (역사학자) . . . . 1회 일치
         * 1961년 5월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중앙위원
  • 김선길(국회의원) . . . . 1회 일치
         1934년 01월 08일 ~ 2008년 05월 15일
  • 김성겸(탤런트) . . . . 1회 일치
         || '''출생''' ||[[1941년]] [[5월 13일]] (77세)||
  • 김성주 (기업인) . . . . 1회 일치
         MCM은 2008년 아시아 시장에 진출한 이래 클래식한 유명 명품 브랜드들에 못지 않는 유니크한 브랜딩을 성공한 것을 시작으로, 유럽 시장에 역진출하는 등 공격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2013년 5월 김성주는 [[권상우]], [[피오나 헤프티]] 등과 함께 [[스위스]] [[취리히]]의 매장 오픈을 하거나 <ref>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13&no=357509</ref>, CNBC, 르 피가로, 가디언 지 등에서 세계인들의 주목을 받는 MCM의 인기로 대서특필 되는 등 국내보다 해외에서 유명세를 떨치는 중이다. 개성있고 트렌디한 마케팅으로 유명한 주력 브랜드 MCM은 중국인들의 큰 사랑에 기인하는 글로벌 성장세에 힘입어 전 세계 35개국에 300여개의 매장을 운영중이다.
  • 김소희 (2000년) . . . . 1회 일치
         '''김소희'''([[2000년]] [[1월 10일]] ~ )는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ref>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33XXX2001159 김소희-다음인물정보]</ref>
  • 김숙자 (1389년) . . . . 1회 일치
         [[1422년]](세종 4) [[5월]] 종사랑으로 승진, 성균관학록이 되었다. 아들 김종직에 의하면 [[1423년]] 김주가 한성으로 간 뒤, 장인 한변(韓變)을 불러서 [[사헌부]]에 소송을 제기하였다고 한다. [[사헌부]]에 소환된 그는 대질심문을 받았으며 낙직(落職)당하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한다.<ref name="ginyon"/> 고령현감을 거쳐, [[1423년]](세종 5) [[7월]] 성균 직학(成均直學)이 되었을때, [[사헌부]]가 [[세종대왕]]에게 그가 자식이 있는 조강지처를 망령되이 서얼(庶孽)이라 일컬어 아무 까닭도 없이 버려 이별하였으니, 형률에 의거하면 곤장 80대를 치라는 계를 올렸다.<ref>세종실록 21권, 1423년(세종 5년, 명 영락 21년) 7월 4일 임오 3번째기사, "성균 직학 김숙자를 처벌하다"</ref> [[1431년]] [[7월]] 모친 유씨가 죽어 밀양에서 분상했는데, 8월 아버지도 사망하였다. 그는 할머니 김씨부인 묘소 하에 빈소를 마련하였다. 이후 3년간 복상하였다. [[1433년]] 가을 상복을 벗고 [[밀양]]으로 돌아왔다.<ref name="ginyon"/>
  • 김양 (1953년) . . . . 1회 일치
         * 아버지 : [[김신 (1922년)|김신]](金信, [[1922년]] [[9월 21일]] ~ [[2016년]] [[5월 19일]])
  • 김영인(탤런트) . . . . 1회 일치
         2010년 5월 28일 케이블채널 [[K STAR|Y-STAR]]에서 방송된 문희준 MC인 케이블 프로그램인 디시인사이드 쇼 1회에 특별출연 하였다. 심영 합성물들을 소개시켜주시면서...
  • 김재엽 . . . . 1회 일치
         '''김재엽'''(金載燁, [[1964년]] [[5월 17일]] - )은 전 [[대한민국]] [[유도]] 선수이자, 현재 대학 [[교수]]이다. [[종교]]는 [[불교]]다.
  • 김재홍 (1958년) . . . . 1회 일치
         '''김재홍'''(金宰弘, [[1958년]] [[5월 23일]] ~ , [[대구광역시|대구]])은 [[대한민국]]의 전직 공무원이다. 2015년 1월 부터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사장 직을 수행하고 있다.
  • 김정우(1990) . . . . 1회 일치
         || '''출생''' ||<(> [[1990년]] [[5월 9일]] ([age(1990-05-09)]세). [[대구광역시]] [[달성군]] ||
  • 김정재 . . . . 1회 일치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누리당]] 후보로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포항)|북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전직 포항시장 출신인 친여 [[무소속]] [[박승호(정치인)|박승호]] 후보를 꺾고 당선되어 경북 최초의 여성 국회의원이 되었다.[* 심지어 20대 총선 기준 영남권의 유일한 여성 국회의원이다.] 같은 해 5월 8일 [[김명연]]([[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갑)과 새누리당 원내대변인에 임명되었다. [[정우택]] 원내대표 체제 하에서도 유임되었다.
  • 김종덕 (야구선수) . . . . 1회 일치
         '''김종덕'''([[1993년]] [[5월 12일]] ~ )은 [[KBO 리그]] [[넥센 히어로즈]]의 [[포수]]이다.
  • 김준영 (프로게이머) . . . . 1회 일치
         [[2009년 8월]] 손목 터널 증후군으로 인한 건강 악화로 은퇴의 뜻을 밝혔으며, 팀의 프로리그 09~10 시즌 첫 경기가 열린 [[2009년]] [[10월 10일]] 용산 e스포츠 스타디움에서 은퇴식을 가졌다.<ref>{{뉴스 인용
  • 김준희 (1960년) . . . . 1회 일치
         '''김준희'''(金濬禧<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3111500329208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3-11-15&officeId=00032&pageNo=8&printNo=11733&publishType=00020 "겨울放學 프로野球 場外훈련"] 경향신문. 1983년 11월 15일.</ref>, [[1960년]] [[5월 16일]] ~ )는 전 [[KBO 리그]] [[삼성 라이온즈]]의 선수이다.
  • 김지훈 (영화감독) . . . . 1회 일치
         1998년 단편영화 《온실》로 제2회 [[세계 필름 페스티벌]]에 초청되었으며, 제46회 [[독립영화제]]에서 우수작품상을 수상했다. 이후 《[[목포는 항구다]]》, 《[[화려한 휴가]]》를 제작하였다. [[5.18]]을 다룬 《[[화려한 휴가]]》는 [[전라도]] 사투리 연구에 많은 공을 들였고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둔 작품이다.<ref>[http://entertain.naver.com/read?oid=022&aid=0000227432 김지훈 감독 "대구출신이라 3년 간 전라도 사투리 연구"] 세계일보. 2007년 05월 17일</ref> [[2011년]] [[8월]] 개봉한 한국 최초 3D 블록버스터인 《[[7광구]]》를 제작하였다. <ref>{{뉴스 인용|제목 = 김지훈: 영화정보-씨네21|url =http://www.cine21.com/Movies/Mov_Person/person_info.php?id=6724|출판사 = 씨네21|확인날짜=2011-05-19}}</ref>
  • 김지훈(배우) . . . . 1회 일치
         || '''출생''' ||<(> [[1981년]] [[5월 9일]] ([age(1981-05-09)]세), [[경상북도]] [[포항시]] 득량동 (이동로) ||
  • 김진웅 . . . . 1회 일치
         |1999 ||30 ||11 ||13 ||0 ||171 2/3 ||173 ||89 ||144 ||115 ||103||5.40 ||<ref name="era">마이 데일리 - 2009년 5월 기사 [http://www.mydaily.co.kr/news/read.html?newsid=200905071222422223 "공 하나에 웃고 울고… 승리 투수, 행운과 불운 사이"]</ref>
  • 김형태(정치인) . . . . 1회 일치
         1952년 12월 10일 ~
  • 김혜옥 . . . . 1회 일치
         '''김혜옥'''(金惠鈺, [[1958년]] [[5월 9일]] ~ )은 [[대한민국]]의 [[배우|연기자]]이다. 1978년 [[연극]][[배우]]로 첫 데뷔하였고 1980년 [[문화방송|MBC 문화방송]] 특채 탤런트로 정식 데뷔를 하였다. 대표작으로 [[시트콤]] 《[[올드미스 다이어리]]》가 있다.
  • 김호근 . . . . 1회 일치
         '''김호근'''(金虎根, [[1951년]] [[5월 5일]] ~ )은 [[한국검정교과서]] 이사장이었다. 1971년부터 교육공직생활을 하셨고 2세 교육발전하였다.
  • 김효진 (배우) . . . . 1회 일치
         '''김효진'''([[1984년]] [[2월 10일]] ~ )은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100화 . . . . 1회 일치
          * 따라서 이날부터 10일 남짓 남은 여름방학은 개성을 기르면서 필살기를 짜내는 초 압축 커리큘럼.
  • 남궁민(배우) . . . . 1회 일치
         2018년 5월에 sbs드라마 훈남정음에 훈남역을 맡게 되었다.
  • 남능미 . . . . 1회 일치
         출생 [[1946년]] [[12월 10일]]
  • 남동훈 . . . . 1회 일치
         '''남동훈'''(1984년 5월 1일 ~ )은 [[대한민국]]의 [[근대5종]] 선수이다.
  • 노행하 . . . . 1회 일치
         '''노행하'''([[1990년]] [[4월 10일]] ~ )는 [[대한민국]]의 [[배우]]이다.<ref>[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33XXXX465665 노행하-다음영화정보]</ref>
  • 랄프 알거 배그놀드 . . . . 1회 일치
         전쟁이 끝난 후, 그는 그의 전문 분야인 모래 이동에 대한 연구로 돌아간다. 그는 1990년 5월 31일 [[런던]]에서 사망한다.
  • 러브라이버 . . . . 1회 일치
         애칭으로 럽폭도 또는 럽쿠자라고 불린다. 참고로 2015년 5월 1일 기준으로 구글 검색 결과 "러브라이버"는 359,000 건, "럽폭도"는 348,000 건, "럽쿠자"는 9,850건이다.--힘내라 럽폭도.--
  • 류영수 . . . . 1회 일치
         '''류영수'''(柳永洙, [[1945년]] [[5월 25일]] ~ )은 현재 [[넥센 히어로즈]]의 육성군 재활코치이다.
  • 마니교 . . . . 1회 일치
         마니교는 일시적으로 위구르-중국에서 흥성하지만, 840년 위구르 인이 키르키즈 인의 공격을 받아 쇠퇴, 당나라에서도 마니교를 공격할 수 있게 되어 [[당무종]] 시기에 회창의 폐불로부터 2년 전인 843년 5월에는 반 마니교 탄압 칙령이 내려와, 마니교도는 머리를 깍고 처형하도록 하였다. 72명의 여성 성직자가 살해되고, 중국의 마니교는 다시 치명타를 받는다. 하지만 천산 지역으로 피한 위구르 인은 여전히 마니교를 숭상하여 서위구르 왕국에서 마니교는 다시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다.
  • 마법병 . . . . 1회 일치
          * 2013년 5월 22일 아사히 신문 기사 : 「魔法瓶の名、勘違い? 教授の思い込み独り歩きか」
  • 마철준 . . . . 1회 일치
         2006 시즌을 마치고 군 복무를 위해서 [[상주 상무|광주 상무]]에 입대하였고 2년간의 군 복무를 마치고 2008년 11월 10일 팀에 복귀하였다.
  • 마츠자카소 . . . . 1회 일치
          * 2010년 5월 12일 발표에 따르면, 2006년에 마츠자카소 연락협의회는 마츠자카육(松阪肉), 마츠자카소(松阪牛) 등으로 중국에서 상표 출원을 하였으나, 중국 국가상표국에서는 '이미 2001년 9월 마츠자카 문자와 소의 얼굴 일러스트로 상표가 등록되어 있음', '마츠자카소는 일반적인 식재료 명칭', '마츠자카는 외국의 지명'이라는 3가지 이유로 출원을 기각하였다.
  • 매카시즘은 이제 매카시워즘이다 . . . . 1회 일치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이 자신의 친구 해리 불리스에게 1953년 5월 26일에 했던 발언으로 알려져 있다.
  • 모레아 전제국 . . . . 1회 일치
         이러한 상황을 놓치지 않고 메흐메트 2세는 모레아에 친정하여, 1460년 5월 29일 콘스탄티노플 함락 후 7년 만에 수도 미스토라스가 점령되고, 그 해 여름까지 반도의 거의 전역이 오스만 제국에 병합되어 모레아 전제군주국은 멸망한다. 드미트리는 오스만 제국에 복속하였고, 토마스는 이탈리아로 망명하였다. 모레아의 그리스인은 산악 지역이나 해안 지역에서 저항하거나, 이 당시 모레아 각지에 거점을 가지고 있던 [[베네치아 공화국]]에 투항하였고 베네치아 공화국은 그리스 인 군단을 편성하여 오스만에 저항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거점들 마저도 오스만-베네치아 전쟁에서 궤멸하면서 그리스는 베네치아의 마지막 거점이었던 코르푸를 제외한 모든 지방이 오스만의 지배하에 들어서게 됀다.
  • 못난 나를 사랑해주세요 . . . . 1회 일치
         나카하라 아야(中原アヤ) 원작 만화, 2013년 4월 15일 [[슈에이사]]의 월간 YOU 5월호에 연재되기 시작했다. [[TBS]]에서 드라마화 되었다. 약칭 다메코이(ダメ恋).
  • 몽키 D. 루피 . . . . 1회 일치
         ||<:>생일||<:>[[5월 5일]]([[황소자리]])||
  • 문성주 . . . . 1회 일치
         시즌후 상무에 지원했으나 떨어지고 [[2019년]] [[1월 10일]] 현역 입대가 확정되었다.
  • 문지애 . . . . 1회 일치
         * [[MBC]] 《[[생방송 오늘 아침]]》(2011년 5월 30일 ~ 2012년 10월 5일)
  • 문창진 . . . . 1회 일치
         다만 올대에서의 활약과 달리 포항에서의 활약은 미미한 편인데 일단 [[손준호]]가 시즌아웃을 당해버리고, 5월까지 조수철이 복귀하지 못하다 보니 사실상 공미자원은 문창진 혼자 밖에 남지 않았는데, 아무리 문창진이 지난 시즌보다 실력이 좋아지고 올대에서 많은 경험을 쌓았다고는 하지만 아직 나이가 어린데다 험하기로 소문난(...) 포항의 중원을 손준호와 같은 믿을만한 미드필더의 지원없이 혼자 맡기는 건 무리였고, 실제로도 최진철이 그나마 남은 포항의 다른 미드필더 자원들을 가지고 조합을 해보았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최진철이 전술 자체라 3-4-3으로 바꾸면서 기존의 4-2-3-1 스타일에 맞춰져 있던 문창진의 자리가 붕 떠버린 상황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포항에서의 출전 기회마저 줄어들었는데 그나마 이런 와중에도 중간중간 불려나가는 올림픽 대표팀에서는 꾸준한 활약을 보여주며 2016 리우 올림픽 최종엔트리에 포함되었다.[* 그냥 포함된 것도 아니고 어쩌다 보니 문창진이 없으면 올림픽 팀 중원 자체가 안 돌아갈 정도로(...) 핵심 자원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최진철도 3-4-3에서 해법을 찾아내었는데 그냥 '''원래''' 자리였던 측면 2선자원으로 문창진을 돌려버리면서 중원을 맡아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벗어나게 해주자 양동현, 심동운과 호흡을 맞춰가며 다시 공격력이 살아나는가 했으나...리우 올림픽에서 잠재되어 있던 문제점들을 모두 드러내며 아시아를 벗어난 세계무대에서 별다른 활약을 펼지지 못했고, 포항 복귀 이후에도 별 다른 활약을 하지 못하고 시즌을 마무리 하였다.
  • 민효린 . . . . 1회 일치
         2007년 5월 가수로 데뷔하여 싱글 앨범을 발매했으며, '''Rinz''' 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대표곡으로는 Stars와 기다려 늑대가 있으며 특히 Stars는 [[나카시마 미카]]의 원곡으로도 유명하다. 2가지의 앨범 형태로 발매됐으며 각기 다른 분위기를 가진 'Stars 버전'과 '기다려 늑대 버전'이 있어 사용자들의 취향에 따라 구입할 수 있다.
  • 박경석 (1960년) . . . . 1회 일치
         * [[2002년]] 장애인 리프트 추락사고와 관련하여 [[서울지하철]] 철로를 점거하고 농성을 벌이다가 500만원 벌금형을 선고받은 사건이 있었다.<ref name=pressian>[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16845 자본주의를 거부하는 몸…당신은 자유로운가], 《[[프레시안]]》, 2014년 5월 4일</ref>
  • 박동진 (1922년) . . . . 1회 일치
         1951년 외무부에 들어와, 의전국장, 주 영국 참사관, 외무부차관, 주 월남 대사, 주 브라질 대사(1962년 10월~1968 2월)<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2082100329201006&editNo=6&printCount=1&publishDate=1962-08-21&officeId=00032&pageNo=1&printNo=5173&publishType=00020 브라질 大使에 朴東鎭氏] 《경향신문》1962년 8월 21일, 1면. <!--“最高會議 第63次 常任委員會는 21日 越南共和國駐箚大使 朴東鎭氏를 「브라질」合衆國特命全權大使로,...”--></ref><ref>{{서적 인용 |저자 = 외교통상부 |제목 = 한국 외교 60년 |url = http://www.mofat.go.kr/state/publication/history60/20100201/11369_file_2009%20dip60_appendix.pdf |장 = 부록 |확인날짜 = 2015년 2월 21일 |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160303211841/http://www.mofat.go.kr/state/publication/history60/20100201/11369_file_2009%20dip60_appendix.pdf |보존날짜 = 2016년 3월 3일 |깨진링크 = 예 }}</ref>{{Rp|496}}, 페루 겸임대사<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4042900209201015&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4-04-29&officeId=00020&pageNo=1&printNo=13079&publishType=00020 朴東鎭브라질大使 駐『페루』大使兼任]〉 《동아일보》(1964년 4월 29일) 1면 <!--“政府는 駐「브라질」大使朴東鎭씨를 駐「페루」大使도 겸임토록 28일하오 國務會議에서 議決했다.”--></ref>, 주 제네바 대사, 주 유엔 대사, 1975년부터 1980년까지 외무부 장관, 국회의원(11대.12대), [[대한민국 통일부|국토통일원]] 장관을 역임했다. 외무부장관으로서, 1976년 3월 말레이시아를 방문하여, 리타우딘 말레이시아 외무부 장관과 양국간의 경제무역관계를 더욱 강화하기로 합의했다.<ref>{{뉴스 인용 |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6031900329201017&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6-03-19&officeId=00032&pageNo=1&printNo=9377&publishType=00020 |제목= 貿易強化에 합의...韓․말聯 공동성명 |출판사 = 경향신문 | 날짜 = 1976-03-19 |인용문=<!--朴東鎭외무부장관과 리타우딘 말레이시아외상은 19일 공동성명을 발표, 평화․자유․번영이라는 공동목표를 추진하기 위해 아시아 제국간의 협력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양국간의 경제무역관계를 더욱 강화하기로 합의했다. 朴장관은 지난 17일부터 3일간 말레이시아를 공식 방문한 후 발표한 이 성명에서...--> }}</ref> 1988년 4월 22일 한국 정부는 박동진을 주미대사에 임명하였다.<ref>{{뉴스 인용 |url =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8042200209201007&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8-04-22&officeId=00020&pageNo=1&printNo=20477&publishType=00020| 제목 = 駐美大使 朴東鎭씨| 날짜 = 1988-04-22| 출판사 = 동아일보}}</ref> 박동진은 당시 민정당의 전국구 국회의원이었으나, 주미대사로 부임함에 따라 의원직을 사퇴하였고, 민정당 전국구 예비후보 11번인 김종열이 5월 13일자로 의원직을 승계하였다.
  • 박상원(배우) . . . . 1회 일치
          * 댄싱 위드 더 스타 3 (MBC) ([[2013년]] [[3월 8일]] ~ 2013년 [[5월 31일]])
  • 박성환 (야구선수) . . . . 1회 일치
         '''박성환'''(朴成桓, [[1998년]] [[5월 18일]] ~ )은 [[KBO 리그]] [[두산 베어스]]의 투수이며 좌완 투수로 2017년에 2차 10라운드(전체 100순위)로 입단하여 현재 육성선수이다.
  • 박세웅(1995) . . . . 1회 일치
         약점으로 지적되는 건 제구력이 급격하게 흔들리는 상황이 종종 나온다는 점이다. 그리고 다소 힘이 들어가는 투구폼이라 힘을 빼고 던지든가, 혹은 팀에서 세심하게 관리할 필요가 있다. 하체보단 상체를 많이 쓰는 투구폼이다. [[염종석]]과 비슷한 계열. 자칫 잘못하면 팔꿈치에 심각한 부상이 생길 수도 있다. 또한 오프스피드 피치를 주무기로 사용하는 투수가 제구력이 떨어지면 생기는 문제인 피홈런 역시 개선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점은 2017년 상당히 개선되어서 2017년 5월 25일 기준 55 2/3이닝 동안 피홈런이 혼자 0개였다.
  • 박승효 . . . . 1회 일치
         * [[1978년]] [[5월 22일]] [[선경머린]]요트 대표이사 사장<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8082900099206006&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78-08-29&officeId=00009&pageNo=6&printNo=3840&publishType=00020 ]</ref>
  • 박신혜 . . . . 1회 일치
         박신혜는 이후 단막극 《[[드라마시티]] - 첫차를 기다리며》(2004), 《[[MBC 베스트극장|베스트극장]] - 베리 메리 크리스마스》(2004), 《새 아빠는 스물 아홉》(2005)와 《한뼘 드라마》(2004), 《베스트극장 - 어느 멋진 날》(2005), 《드라마시티 - 키다리 아저씨》(2005)와 시트콤 《[[혼자가 아니야]]》(2004-05), 《[[귀엽거나 미치거나]]》(2005)에 출연하며 배우로서 연기력을 다져나갔다. 2004년부터 2005년까지 박신혜는 사전 제작 된 퓨전 사극 드라마 《[[비천무]]》에 캐스팅 되어 중국 로케 촬영하였다. 그리고 2006년 2월, 첫 방영한 드라마 《[[천국의 나무]]》에서 여주인공 하나 역에 캐스팅 되었고, ‘천국의 계단’에서 그녀를 발탁했던 이장수 감독은 여주인공으로 고등학생이었던 박신혜를 또다시 발탁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인터뷰> 드라마 '천국의 나무' 여주인공 박신혜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001&aid=0001197151|출판사 =연합뉴스 |저자 =정열 |날짜 = 2006-01-16 |확인날짜 =2013-09-01 }}</ref> 같은 해 4월, 영화 《[[도마뱀 (영화)|도마뱀]]》으로 첫 스크린 데뷔를 하였다. 이듬해, 2007년 황인뢰 감독은 드라마 《[[비천무]]》의 제작 현장에서 눈여겨본 박신혜에게 드라마 《[[궁S]]》의 귀족 소녀 신세령 역으로 캐스팅했으나 이 드라마는 전작과 달리 진부한 내용과 설정으로 흥행에는 크게 실패하였다.<ref>{{뉴스 인용 |제목 =박신혜 잘 자라줘서 고마워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312&aid=0000002569|출판사 =텐아시아 |저자 =최지은 |날짜 = 2009-10-28 |확인날짜 =2015-04-18 }}</ref> 같은 해 5월 개봉 된 호러 영화 《[[전설의 고향 (2007년 영화)|전설의 고향]]》과 드라마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몇 가지 질문]]》에 출연했다. 7월부터 방영 된 드라마 《[[깍두기 (MBC)|깍두기]]》에서는 절에서 자란 여주인공 장사야 역을 맡아 지금까지 고수해왔던 긴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는 등 파격 변신을 하였다.<ref>{{뉴스 인용 |제목 =박신혜, '문희' 후속 드라마 '깍두기' 주인공 확정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109&aid=0000081490|출판사 =OSEN |저자 =김지연 |날짜 = 2007-07-19 |확인날짜 =2013-09-01 }}</ref> 박신혜는 2007년부터 2008년까지 예능 프로그램 《[[환상의 짝꿍]]》의 진행을 맡아 [[MBC 방송연예대상]] 쇼버라이어티부문 여자신인상을 수상했다.
  • 박재정(배우) . . . . 1회 일치
         2009년 11월 27일부터 자정에 방송되는 조선추리활극 정약용의 주연으로 '''[[정약용]]''' 역을 맡아서 조금이나마 나아진 연기력을 선보였다. 2010년 5월에는 SBS 월화드라마 커피 하우스에 조연으로 출연했는데... '''대사가 단 한마디도 없다'''. 디시에서는 평생에 가장 잘 맞는 역할이라며 열심히 까이는 중. 그런데 말 안하는 연기인데도 어색한 이유는 뭘까. 이후 이 캐릭의 비밀이 심각한 경상도 사투리에 있음이 밝혀진다. 그런데 네이티브임에도 불구하고 사투리 연기도 어색하다.(서울말 연기보다는 조금 낫다) 이래저래 눈물이 앞을 가린다.
  • 박정수(정치인) . . . . 1회 일치
         1998년 3월 [[김대중]] 정부의 초대 외교통상부(현 [[외교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 해 5월의 기자회견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일본 문화 개방 및 '''천황'''의 방한을 원하신다"라는 발언으로 물의를 빚었다. 그리고 그 해 7월에는 모스크바 주재 한국대사관원의 강제추방 사건에 맞대응해 서울 주재 러시아대사관원인 올레그 아브람킨 참사관을 강제추방한 것이 화근이 되어 5개월 만에 장관직에서 경질된다. 이후 1998년 9월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에 복귀했다.
  • 박종준 . . . . 1회 일치
         1964년 11월 10일
  • 박준홍 . . . . 1회 일치
         그는 이후 [[국가재건친박연합]]의 대표가 되었는데 공천 헌금을 받아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8&aid=0000186590]] 그리고 2011년 5월 13일 상고 기각 ( 2011도2844 )
  • 박진옥 . . . . 1회 일치
         || 생년월일 || [[1982년]] [[5월 28일]] ([age(1982-05-28)]세) ||
  • 박창달 . . . . 1회 일치
         15대 총선에서 전국구 26번으로 출마하였지만 너무 순번이 뒤쪽에 있어서 당연히 낙선...했는데 임기 다 끝나가는 2000년 3월에 현역 [[윤원중]] 전국구 의원이 탈당하면서 의원직을 승계, 3달짜리 국회의원직을 수행했다. 물론 15대 국회 막바지여서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이 문제는 16대 국회에서 새천년민주당 전국구 의원이 '''2004년 5월'''에 사퇴하여 '''임기가 1달도 안되는 의원'''이 탄생하여 다시 문제제기되었고, 이후 잔여임기가 얼마 안남은 비례대표 의원이 자격을 상실 혹은 사퇴할 경우에는 승계하지 않도록 법이 바뀐다.] 대신 16대 총선에서 안정권인 15번을 받고 당선되었다.
  • 박태호 (야구인) . . . . 1회 일치
         '''박태호''' (朴泰浩, [[1963년]] [[5월 13일]] - )은 전 [[KBO 리그]] [[롯데 자이언츠]]의 내야수였다.
  • 박현진 (음악가) . . . . 1회 일치
         '''박현진'''([[2005년]] [[5월 24일]] ~ )은 대한민국의 남자 가수이자 래퍼이다. 2016년 《[[K팝스타 6]]》에 참가하였으며, [[김종섭]]과 함께 보이프렌드라는 이름으로 듀오를 결성하여 우승하였다.
  • 박화요비 . . . . 1회 일치
         절친인 [[거미(가수)|거미]]의 2014년 6월 10일 자정 공개된 새 미니 앨범에 [[휘성]]과 함께 자작곡을 선물했다. 자세한 것은 [[/작사 목록, 작곡 목록]] 항목 참조.
  • 배기철(정치인) . . . . 1회 일치
         8월 10일 동구의 한 음식점에서 금연구역임에도 불구하고 담배를 피우려고 해 논란이 일었다. 심지어 기자의 불을 꺼달라는 요구에 마지못해 끄면서
  • 배장원 . . . . 1회 일치
         '''배장원'''(裵章元<ref>한국야구위원회, 2013 가이드북</ref>, [[1990년]] [[5월 17일]] ~ ) 은 전 [[KBO 리그]] [[KIA 타이거즈]]의 [[외야수]]이다.
  • 배지환 (야구선수) . . . . 1회 일치
         2018년 3월 10일 [[피츠버그 파이리츠]]와 계약하였다.<ref>[http://hei.hankyung.com/hub01/201803103243I 배지환, 국제미아 위기에서 ML피츠버그와 계약] - 한국경제</ref>
  • 백낙청 . . . . 1회 일치
         '''백낙청'''(白樂晴, [[1938년]] [[1월 10일]] ~ )은 [[한국]]의 대학교수, 영문학자, 문학평론가, 사회운동가이다. 친일관료 백붕제의 아들로 [[대구]] 출신이다.
  • 백일섭 . . . . 1회 일치
         '''백일섭'''(白一燮, [[1944년]] [[6월 10일]] ~ )은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 백춘희 . . . . 1회 일치
         * [[2006년]] [[5월]] 무릎연골 파열로 대전 세우리병원 입원<ref>[http://www.cc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57792 ]</ref>
  • 벼랑개 링링 . . . . 1회 일치
         2008년 5월 12일에 포획되어 또 다시 도쿠시마 현 동물애호관리센터에서 보호하게 된다.
  • 병 속의 악마 . . . . 1회 일치
         1891년에 발표되었다. 뉴욕 헤럴드(New York Herald)에서 2월-5월, 블랙 앤 화이트 런던(Black and White London)에서 3월에서 4월에 걸쳐서 연재되었다. 1893년 발표된 단편집 Island Nights' Entertainments에 수록되었다.
  • 보나 . . . . 1회 일치
          * 2018년 5월 6일, [[K.WILL]]의 신곡 '''너란 별''' 뮤직비디오의 여자 주인공으로 등장하며 티저가 공개되었다. [[https://youtu.be/Q4dv6K0OhjE|티저]]
  • 봉석주 . . . . 1회 일치
         그해 [[12월]] 사헌부가 거듭 탄핵하였으나 세조는 듣지 않았고, [[1462년]] [[1월]] 초 [[사헌부]]가 계속해서 탄핵받고 파직당하였다. 그 뒤 [[사헌부]]가 그를 계속 탄핵하였으나 세조가 듣지 않았고, 그해 [[5월]] 다시 강성군(江城君)에 봉작되었다.
  • 서귀포시 . . . . 1회 일치
         ! 행정동 ! ! 한자 ! ! 인구<ref>단위 명, 2018년 5월 기준</ref> ! ! 면적
  • 서든어택 2/무기 . . . . 1회 일치
         [[대한민국]]의 [[FPS]] 게임 [[서든어택 2]]의 무기를 소개하는 페이지. 2016년 7월 10일 이후 별다른 갱신이 없을걸로 보인다.
  • 서유리 . . . . 1회 일치
         그리고 5월 2일 [[Azubu the Champions Spring 2012]] [[MiG]] Frost vs [[Xenics Storm]] 경기를 참관해 본인이 연기한 챔피언들의 대사를 라이브 연기로 선보였다. 그런데 첫경기에서 제닉스 스톰이 '''그녀가 연기한 챔피언인 [[잔나]]를 밴해버렸다!!'''[* 물론 [[홍민기|매라]] 저격밴. 그래도 다음 경기에서는 그녀가 담당한 다른 캐릭터인 [[시비르]]를 픽했지만.] 그것이 저주가 되어 결국 제닉스 스톰은 3:2로 패배하여 결승 진출이 좌절되었다.
  • 서지영(가수배우) . . . . 1회 일치
          * 2011년 11월 10일, 지인의 소개로 약 1년간 교제해온 5세 연상의 금융계 종사자와 [[결혼]]하여 2014년 딸을 출산했다. 이후 2017년에는 아들을 출산했다.
  • 서효인 (야구인) . . . . 1회 일치
         |마지막 경기 = [[KBO (야구)|KBO]] / [[1995년]] [[5월 13일]] <br /> [[광주무등경기장 야구장|광주]] 대 [[해태 타이거즈|해태]]전
  • 소진은 . . . . 1회 일치
         [[1921년]] 조선총독부 경상북도 경부에 임명되었으며, 왜관경찰서 경부로 발령받은 뒤부터 경찰 간부로 이동했다. 상주경찰서(1922년 ~ 1923년), 포항경찰서(1925년 ~ 1929년)를 거쳐 경상북도 경찰부 보안과 경부(1930년 ~ 1931년)로 근무하면서 정치범에 관한 업무를 담당했다. [[1932년]]부터 1933년까지 경상북도 경찰관교습소 교관으로 활동했고, [[1933년]] [[5월 12일]]에는 도경시로 승진하면서 전라북도 경무과에서 근무하게 된다. 이 때부터 전라북도 순사교습소장, 순사징계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다.
  • 송언석 . . . . 1회 일치
         ||<bgcolor=#C9151E> '''{{{#FFFFFF 출생일}}}''' ||<(> [[1963년]] [[5월 16일]]([age(1963-05-16)]세)[* 여담으로 [[더불어민주당]]의 [[맹성규]] 의원과 생일이 똑같다.] ||
  • 송정현 . . . . 1회 일치
         '''송정현'''([[1976년]] [[5월 28일]] ~ )은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로서 포지션은 [[중앙 미드필더]]이다.
  • 스틸오션/독일 . . . . 1회 일치
         >필라우는 러시아 제국의 주문으로 단치히에서 건조중인 경순양함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 이후, 이 순양함을 독일에 의해 몰수되어 독일 해군에 의해 사용되었다. 전시에 필라우는 제2 정찰대에 배속되어 북해와 발트해에서 활동했다. 1915년 리가 만 해전에 참가해 러시아 해군을 상대로 전투를 치뤘다. 1916년 5월, 필라우는 유틀란트 해전에 참가해 대구경탄에 맞아 큰 손상을 입었다. 전투가 끝난 후에는 심각한 피해를 입은 전투순양함 자이들리츠(Seydlitz)가 항구까지 도달하는걸 도왔다. 1917년 헬리골란트 바이트 해전에도 참가했다. 종전후 전쟁보상함으로 이탈리아에 양도, 바리(Bari)로 개명되었다. 바리는 제2차 세계대전 초반에 미군의 공습으로 격침되었다.
  • 스틸오션/미국 . . . . 1회 일치
         >독일 U보트로부터 항로를 지키기 위해 많은 C3형 화물선 선체가 호위항모로 만들어졌다. 그중 몇몇은 왕립 해군에게 공여되었다. 보그급 호위항모 중에는 두척의 잠수함(1943년에 U-220, 1944년에 U-1059)을 격침시킨 블록 아일랜드(Block Island)도 있었다. 이 함선은 네척의 유보트를 구축함과 함께 격침시키기도 했다. 블록 아일랜드는 1944년 5월 29일, U-549의 뇌격으로 격침된다.
  • 식극의 소마/219화 . . . . 1회 일치
          * 쿠가가 츠카사에 가진 반감은 1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패배". 그 패배가 있은 뒤 쿠가는 넋 나간 상태로 뒹굴거렸다. 10일이 넘도록 그 상태가 이어지자 동급생인 [[에이잔 에츠야]]가 빈정거렸다. 애초에 1석한테 식극을 거는 거 자체가 무리였다는 것. "건방떨지 마라 꼬맹이"라고 까지 도발했는데 쿠가가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 이렇게 되자 에이잔도, 옆에 있던 네네도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한다.
  • 실즈 . . . . 1회 일치
         1990년대 출생의 대학생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2015년 5월 3일 결성되어, 2016년 해산 선언을 했다.
  • 아사쿠마 . . . . 1회 일치
         1948년 12월 10일 창업, 1979년에 관동에 진출했다.
  • 안동준 . . . . 1회 일치
         1919년 05월 15일 ~ 2010년 11월 16일
  • 안지만 . . . . 1회 일치
         5월 24일, KBO는 안지만에게 유기 실격 1년의 징계를 내렸다. 따라서 1년 동안은 어떻게 팀을 구해서 복귀하더라도 활동이 불가능하다.
  • 안홍진(배우) . . . . 1회 일치
         '''안홍진'''([[1974년]] [[10월 10일]] ~ )은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 양일환 . . . . 1회 일치
         '''양일환'''(梁日煥, [[1961년]] [[6월 10일]] ~ )은 전 [[KBO 리그]] [[삼성 라이온즈]]의 [[투수]]이자, 전 [[KBO 리그]] [[삼성 라이온즈]]의 2군 투수코치이다. [[1990년]]부터 잠깐의 휴식기였던 [[1999년]] ~ [[2000년]]과 [[2009년]]을 제외하고 단 한 번의 팀 이동 없이 [[삼성 라이온즈]]에서 [[투수]]코치로 재임 중이다. [[2011년]] 시즌 중 암으로 입원하여 시즌을 마감한 [[장효조]] 2군 감독을 대신해 후반기 [[한국 야구 퓨처스리그|퓨처스 리그]]를 이끌었다.
  • 어머니의 날 . . . . 1회 일치
         일본에서는 1949년 부터 미국의 Mother's Day를 모방하여, 5월의 두번째 일요일을 어머니의 날로 삼는다. 아버지 날(父の日)은 6월의 세번째 일요일이다.
  • 여태조 . . . . 1회 일치
         생몰년도: 1385년 9월 10일 – 1433년 10월 5일
  • 여회현 . . . . 1회 일치
         '''여회현'''(呂會鉉, [[1994년]] [[5월 9일]] ~ )은 [[대한민국]]의 [[배우]] 겸 [[모델]]이다.<ref>[http://people.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nexearch&query=%EC%97%AC%ED%9A%8C%ED%98%84&sm=tab_etc&ie=utf8&key=PeopleService&os=2666123 여회현-네이버인물정보]</ref>
  • 연분홍 . . . . 1회 일치
         '''연분홍'''({{본명|곽지은}}, [[1992년]] [[8월 11일]] ~ )은 [[대한민국]]의 [[가수]]이다. 2015년 5월에 녹화되어 7월5일에 방송된 전국노래자랑 용인시편에서 장윤정의 애가 타를 불러 최우수상을 수상하였고 당일 심사위원이자 초대가수였던 정의송의 눈에 띄어 3개월만인 8월4일 가수로 데뷔하게 되었다.
  • 영덕군 . . . . 1회 일치
         영덕[[대게]]가 가장 유명하다. 주로 영덕군 앞바다에서 서식하고 있으며 게껍질이 얇고 게살이 많은 것이 특징이어서 지역주민을 비롯해 외지에서도 영덕대게를 먹으러 원정방문을 하기도 한다. 철은 11월~5월 사이이고,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시기가 가장 맛있다. 이 시기를 맞춰 3월 초에 영덕에서는 대게축제를 개최한다. [[그대 그리고 나]]를 촬영한 강구항이 가장 유명하고, 대게축제도 이곳을 중심으로 개최한다. 대게집도 이쪽에 가장 많이 몰려있다. 강구항을 시작으로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면 보이는 작은 포구에도 대게집이 종종 있는 편이고, 북쪽의 축산항도 작지만 유명한 편. 1998년부터 현재까지 영덕군청 주최로 영덕대게축제가 열려지기도 한다. --그리고 대게축제시기에는 강구항쪽 교통에는 [[헬게이트]]가 열린다[* 실제 한번 밀리기시작하면 걸어가야할정도로 교통체증이 심해진다]--
  • 예재형 . . . . 1회 일치
         '''예재형'''([[1981년]] [[5월 9일]] ~ )은 [[대한민국]]의 [[희극인]]이다.
  • 예천군 . . . . 1회 일치
         2014년 재선에 성공한 이현준 군수 주도로 1981년 건립된 현 군청 청사 대신 신예천군청을 건립하고 이전하였다. 신부지는 예천읍 대심리 353번지, 구 엽연초생산조합 부지이다.[[http://www.ycg.kr/open.content/ko/administrative/news/headline/?id=986407f875b54364aa54a89bda326e86|#]] 2015년 말 착공, 2018년 2월 5일 준공되었다. 2015년 5월 설계 공모작을 선정했다.[[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5/05/29/0200000000AKR20150529063100053.HTML|당선작 조감도]] 하지만 현 군청 청사가 위치한 노상리와 인근 노하리, 서본리, 동본리, 백전리 주민들은 '''군청 이전 후 해당 지역 경제 위축'''을, 그외 지역 주민들은 '''부채 증가, 도청 이전과 연계한 각종 사업의 선행 추진 등'''을 이유로 반대하고 있다. [[http://www.kbsm.net/default/index_view_page.php?part_idx=306&idx=118103|#]] 한편, 현 군청 청사가 위치한 예천읍내는 배산인 흑응산과 임수인 한천 간 폭이 좁은터라 더이상 확장가능한 공간이 없어서 예전부터 쭉 이전의 필요성이 강하게 피력됐다. 그러나 공공기관이 이전하게 되면 으레 [[도심 공동화]] 현상이 발생하기 때문에 구 군청 청사 인근 지역 경제가 위축되지 않게끔 정책을 마련해야할 것으로 보인다.
  • 오경훈 . . . . 1회 일치
         |임기 = [[2003년]] [[4월 24일]] ~ [[2004년]] [[5월 29일]]
  • 오승희 . . . . 1회 일치
         '''오승희'''(吳承姬<ref name="hanja">[https://www.facebook.com/Umusic.JKPOP/photos/a.260040747449.141783.251736272449/10154571559607450/?type=3 모닝구 무스메 한자 자필]</ref><ref>[http://thestar.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8/21/2017082102498.html [더스타프로필] 오승희 "모닝구 무스메만의 리얼리티 찍고 싶다…빅재미 드릴 것"] {{웨이백|url=http://thestar.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8/21/2017082102498.html |date=20170912003602 }} 2017-08-25</ref>, [[1995년]] [[10월 10일]] ~ )는 일본의 가수로, [[모닝구 무스메]]의 서브보컬이다.<ref>{{웹 인용|url=https://www.youtube.com/watch?v=aWRTsHtA9zY|title=Debut Greeting at 모닝구 무스메 SHOWCASE|first=|last=보따리 bottari|date=2015-03-25|publisher=|accessdate=2017-08-12|via=YouTube}}</ref><ref>{{웹 인용|url=http://entertain.naver.com/now/read?oid=311&aid=0000587211|title=[XP★SHOT] 모닝구 무스메가 궁금해? 안전담당부터 보호본능까지③|publisher=xportsnews|date=2016-03-15|accessdate=2017-08-12}}</ref><ref>{{웹 인용|url=https://www.youtube.com/watch?v=y0Rau6SssxE|title=칯트키 Live - “PRODUSORN” EP02: LIFE AS A GIRL GROUP|first=|last=Cube Ent|date=2017-04-25|publisher=|accessdate=2015-03-18|via=YouTube}}</ref><ref>{{웹 인용|url=https://m.facebook.com/모닝구 무스메.UnitedCube/photos/a.1511382879116331.1073741828.1489401217981164/1558678227720129/?type=3&source=54|title=CLC Facebook:Seunghee|date=2017-03-14}}</ref><ref name=supertv>2018-04-06,XtvN,SUPER TV EP11,「메인래퍼、은지」「센터、은지」「리드보컬、모닝구 무스메」「리더、모닝구 무스메」。</ref>
  • 오중기 . . . . 1회 일치
          * 2012년 5월~: 민주통합당 경북도당위원장 [*A]
  • 요괴:냉장고 . . . . 1회 일치
         2016년 5월 3일. 김포고에 재학 중인 심□□ 양. ||
  • 요코타 메구미 . . . . 1회 일치
         2014년 11월 07일, 동아일보는 1994년 4월 10일 요코타 메구미가 약물투여로 사망했다는 보도를 했다.[[http://news.donga.com/3/02/20141107/67719661/1 (참조)]] 일본 정부는 이를 부인했다. [[http://sp.m.reuters.co.jp/news/newsBodyPI.php?url=http://jp.reuters.com/article/topNews/idJPKBN0IR05920141107 (참조)]]
  • 울진군 . . . . 1회 일치
         2013년 5월 한국수력원자력의 비리와 관련하여 울진군와 영광군에서 발전소 명칭 변경을 요청함을 받아들여 울진 원자력 발전소는 한울 원자력 발전소로, 영광 원자력 발전소는 한빛 원자력 발전소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 유승민(정치인) . . . . 1회 일치
         >— 2017년 5월 3일 19대 대선 토론 中[* 이날 토론의 이 발언은 유승민을 지지하는지 아닌지에 상관없이 모두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던 대목.] [[https://youtu.be/e3MnyYdMCVA|#]]
  • 유인촌 . . . . 1회 일치
         2018년 5월 20일까지 [[OBS]]의 명불허전도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6935757|진행하였다]].
  • 유지연(탤런트) . . . . 1회 일치
         '''유지연'''([[1976년]] [[5월 9일]] ~ )은 [[대한민국]]의 여자 [[배우]]이다.<ref>[http://people.search.naver.com/search.naver?sm=tab_txc&where=people_profile&ie=utf8&query=%EC%9C%A0%EC%A7%80%EC%97%B0&os=168938 네이버 인물 정보]</ref><ref>[http://search.nate.com/search/all.html?q=%C0%AF%C1%F6%BF%AC&hi=PR6954&ht=h_pf&csn=12&dsn=4&asn=001200294 네이트 인물 정보]</ref>
  • 윤상현(배우) . . . . 1회 일치
         ||<|5> 2009년 ||<|2> MBC || [[무한도전]] || 우정출연[* 2009년 5월 30일 《내조의 여왕, 손에 손잡고》편. 무한도전 멤버들이 《내조의 여왕》 마지막회에 까메오 출연하는 에피소드가 방영되면서 윤상현이 깜짝 출연하게 되었다. 드라마 상에서도 무한도전 멤버들을 잠깐 스치듯이 만난다.] ||
  • 윤찬수 . . . . 1회 일치
         '''윤찬수'''는 [[KBO 리그]] 전 [[LG 트윈스]]의 선수이다. [[2009년]] 4분기 [[상무 야구단]]에 합격하여 2년간 병역의무를 이행한 후 원 소속팀인 [[LG 트윈스]]로 복귀하였고 [[2011년]] 가을 방출되었다. [[2012년]] [[5월 26일]] 새벽 [[국군체육부대]] 소속 시절 친분을 쌓은 승부조작의 장본인이자 전 프로 축구 선수인 [[김동현 (1984년)|김동현]]과 함께 [[서울특별시|서울]] [[강남구]] 청담동의 한 빌라 주차장에서 귀가하던 부녀자를 납치한 혐의로 구속되었다. 현재 윤찬수는 공범인 [[김동현 (1984년)|김동현]]과 [[국민참여재판]]을 받을 예정이다. [[2013년]] [[1월 17일]], 징역 2년 6월에 집행유예 3년이 선고됐다. 같은 날 김동현도 징역 3년이 선고됐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6045507 `특수강도' 前국가대표 축구선수 김동현 법정구속]</ref>
  • 윤철종 . . . . 1회 일치
         그 후 2010년 5월 민트 페이퍼 프로젝트 3집 앨범 <Life>의 수록곡인 <오늘 밤은 어둠이 무서워요>로 참여. 이 곡이 그럭저럭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다가, 2010년 8월 발매한 디지털 싱글 ''''아메리카노''''가 제대로 대박을 터뜨려서[* 2010년 [[GMF]]에서는 관중들이 이 곡을 [[떼창]]했다.] 여자들이 이름만 들어도 열광하는 가수로 급부상하게 된다.[* 사실 공연에서만 들을 수 있는, 앨범화가 되지 않은 노래들이 많다. '''녹음하기 귀찮아서.'''] 이때 아메리카노로 [[뮤직뱅크]] 최고 순위 7위에 든 적도 있다.
  • 윤태동 . . . . 1회 일치
         [[1900년]] 5월 13일 [[충청북도]] [[충주시|충주]]에서 출생하였다. [[경기고등학교|경성제일고보]]를 거쳐 [[1925년]] [[일본]] [[도쿄대학|동경제국대학]] 문학부 철학과를 졸업한 후, [[서울대학교/학부/농업생명과학대학|수원고등농림학교]], [[보성전문학교]], [[중동고등학교|중동학교]] 등에서 강사로, [[경성제국대학]]에서 조수로 근무하였다. [[1934년]] 7월에는 [[경성제대]] 예과 [[교수]]로 임명되어 그해 11월까지 근무하였다. 조선인이 [[경성제국대학]] 교수로 임명된 것은 윤태동이 3번째이며, 전 기간을 통틀어 4명에 불과하다.
  • 윤휘 . . . . 1회 일치
         [[1618년]](광해군 11년) [[5월]] [[명나라]]에 파견되는 동지 겸 진주사(冬至兼陳奏使)로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여 체차되었으나 다시 성절사로 임명되어 [[명나라]]를 다녀왔다. 이 기간 중 [[누르하치]]와 [[여진족]]의 움직임을 수시로 장계를 올려 조선 조정에 보고하였고, 염초(焰硝)를 구해서 [[조선]]조정으로 보냈다. 그 뒤 [[공조]][[참판]]·[[예조]][[참판]]을 역임했다.
  • 이강철 (1947년) . . . . 1회 일치
         '''이강철'''(李康哲, [[1947년]] [[5월 6일]] [[대구]] - )은 [[대한민국]] [[참여정부]]에서 대통령 정무특별보좌관을 지낸 정치인이다.
  • 이광호 . . . . 1회 일치
         | 출생일 = [[1963년]] [[5월 23일]]
  • 이광훈 (축구선수) . . . . 1회 일치
         |국가대표팀 최신 업데이트 날짜= [[2013년]] [[8월 10일]]
  • 이국철 . . . . 1회 일치
         2012년 5월 23일, 징역 8년이 구형됐다. 2012년 6월 4일엔 전 차관 [[신재민]]과 징역 3년 6월이 확정되었으나 2012년 11월 30일, 항소심에서 보석으로 석방됐으나<ref>《노컷뉴스》(2012.12.03) [http://www.nocutnews.co.kr/Show.asp?IDX=2333935 이국철 보석으로 석방, 신재민도 풀려날 가능성 커신재민 항소심 재판 연기되면서 이국철 구속만기 중 선고 불가능]</ref> 재수감됐고 2013년 1월 31일, 항소심에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되고서<ref>《아시아투데이》(2013.01.31) [http://www.asiatoday.co.kr/news/view.asp?seq=761723 이국철 SLS그룹 회장, 항소심서 징역 2년6월로 감형]</ref> 2013년 6월 13일, 징역 2년 6월을 선고한 원심이 확정됐다.<ref>《연합뉴스》(2013.06.13)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01&aid=0006313553 대법, 이국철 SLS 회장 징역 2년6월 확정(종합)]</ref>
  • 이근직 . . . . 1회 일치
         [[8.15 광복]] 이후에도 1949년까지 강원도청 공무원으로 근무하였다. 1950년 [[서울특별시청]] 산업국장, 1952년 심계원(현 감사원) 심계 제2국장, 1952년 [[함태영]] [[대한민국 부통령|부통령]] 비서실 [[수석비서관]]을 역임했다. 1955년 2월부터 1957년 9월까지 [[경상북도지사]]를 지냈다. 경상북도지사 재임 중이던 1957년 8월 [[가짜 이강석 사건]]이 일어났다. 1957년 9월부터 내무부(현 [[행정안전부]]) [[행정안전부 장관|장관]]을 지내다가 1958년 6월 [[제4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에 따른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이후 [[자유당]] 당무위원으로 있다가 1959년 3월부터 1960년 5월까지 농림부(현 [[농림축산식품부]])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장관]]을 지냈다. 농림부 장관 재임 중 [[3.15 부정선거]]에 관여하였다. 이로 인하여 구속 기소되었다.
  • 이동흡 . . . . 1회 일치
         * [[대전고등법원]] 특별부 재판장으로 재직하던 1999년 12월 13일에 시영아파트를 분양받고 3년이 넘도록 소유권 이전 등기를 하지 않아 과징금을 부과받은 이모씨 사건에서 1995년 7월 1일부터 시행된 부동산 실명제법 제10조 제1항에 대해 "법률은 탈세 행위를 막아 부동산 거래를 정상화한다는 취지로 제정되었음에도 탈법의 의도가 전혀 없는 사람들에게 까지 과중한 금전적 부담을 주고 있다"며 [[헌법재판소]]에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9121400329126006&editNo=40&printCount=1&publishDate=1999-12-14&officeId=00032&pageNo=26&printNo=16930&publishType=00010 경향신문 1999년 12월 14일자</ref> 이에 대해 [[헌법재판소]]는 2001년 5월 31일에 합헌 결정했다.(99헌가18)
  • 이명규(국회의원) . . . . 1회 일치
         1956년 1월 10일(음력 1955년 11월 28일)
  • 이명주 (축구선수) . . . . 1회 일치
         2014년 12월 22일 발표된 [[2015년 AFC 아시안컵|2015 AFC 아시안컵]] 최종 명단에 포함되었다.<ref>{{뉴스 인용 |제목 = 이정협 깜짝 발탁…슈틸리케호 아시안컵 명단 확정 |url =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4/12/22/0200000000AKR20141222048300007.HTML?input=1195m |출판사 = 연합뉴스 |저자 = 김동찬, 장재은 |날짜 = 2014-12-22 }}</ref>이후 인연이 없다가 2017년 5월 22일 재승선 되었다
  • 이민호(1987) . . . . 1회 일치
         2017년 5월 12일부터 [[포항시]]청에서 [[사회복무요원]]으로 군 복무에 들어간다. 선복무 후입소 제도를 적용하여 [[포항시]]청에서 일하는 중간에 병무청이 정해 준 날짜에 입소하여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퇴소한 후 잔여기간 동안 복무를 재개한다고 한다.[* 비슷한 사례로는 [[김필]]이 있다. [[장근석]]도 바로 기초군사훈련을 받지 않은 것으로 보아, 선복무 후입소를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 첫날 [[포항시]]청으로 출근한 뒤, 구청 산하의 복지시설로 발령됐다. [[2018년]] [[3월 15일]]에 [[육군훈련소]]에 입소하여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4월 12일에 수료한 후, 복무를 재개했다.[[http://entertain.naver.com/read?oid=109&aid=0003737235|#]]
  • 이상훈 (1971년생 우완 투수) . . . . 1회 일치
         |첫 출장 = [[KBO (야구)|KBO]] / [[1990년]] [[5월 19일]] <br />[[대구시민야구장|대구]] 대 LG 전 (DH2)<br />1이닝 6타자 2피안타 1피홈런 0볼넷 0탈삼진 2실점 1자책점
  • 이서진(배우) . . . . 1회 일치
         2014년 5월 30일 방영된 [[나 혼자 산다]]에서는 [[김광규(배우)|김광규]]의 [[집들이]]에 찾아가서는 깐깐하게 이것저것 요구하며 트집잡는 모습으로 시청자들에게 웃음을 선사했다. 김광규 曰, "[[이순재|어]][[신구(배우)|르]][[박근형|신]][[백일섭|분]]들에게 당한 걸 나한테 푸는거냐?!" 그래도 김광규는 [[츤데레|겉으로는 툭툭대지만 속으로는 상대를 신경써주는]] 좋은 친구라고 평했다. 여담으로 이때 [[집들이]] 선물로 가지고 간 것은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 '별이 빛나는 밤에' 액자.
  • 이선미 (소설가) . . . . 1회 일치
         * <10일간의 계약>
  • 이수진(치어리더) . . . . 1회 일치
         2014년 야구 매니지먼트 게임인, [[프로야구매니저]]에서 2주 가량 진행한 '가장 예쁜 한국프로야구 치어리더' 설문조사에서 박기량, 김연정, [[강윤이]]에 이어 '''4위'''에 이름을 올렸다.[* 총 7,682명이 설문에 응했으며, '''1위'''인 박기량은 2,518명(32.78%), '''2위'''인 김연정은 1,925명(25.06%), '''3위'''인 강윤이는 1,075명(13.9%).] 해가 바뀌닌 2015년 [[프로야구매니저]]에서 7월 1일부터 10일까지 진행한 '2015 프로야구 대표 여신 치어리더는?'라는 설문조사에서 박기량[* 2013년, 2014년에 이어 3연패 달성], 김연정에 이어 '''3위'''에 뽑혔다.[* '''1위'''인 박기량은 33.70%, '''2위'''인 김연정은 27.10% 득표][* 참고로, '''4위'''는 [[KIA 타이거즈]]의 엄지, '''5위'''는 [[한화 이글스]]의 임수연, '''6위'''는 [[LG 트윈스]]의 이애수.]
  • 이숭인 . . . . 1회 일치
         '''이숭인'''(李崇仁, [[1347년]]~[[1392년]] [[9월 10일]]([[음력 8월 23일]]))은 [[고려]] 말의 시인, 대학자이다. 호는 도은(陶隱), 자는 자안(子安), 본관은 성주이며, [[길재]] 대신 [[삼은]]으로 꼽히기도 한다.<ref name="역대"> [http://people.aks.ac.kr/front/srchservice/viewSearchPPL.jsp?pItemId=PPL&type=L&pType=P&pSearchSetId=8514&pTotalSearchCount=1&pPosition=0&pRecordId=00500050004C005F00350043004F0063005F00410031003300340037005F0031005F0030003000300039003900300032&pName=C774C22DC7780028674E5D074EC10029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ref> [[포은 정몽주]]의 문하생이었다. 권신 [[이인임]]의 5촌 조카였다.
  • 이승효(탤런트) . . . . 1회 일치
         출생 [[1980년]] [[5월 5일]]([[전라북도]] [[김제시]])
  • 이영 (1492년) . . . . 1회 일치
         이영(李榮, [[1492년]] [[2월 10일]] ~ [[1583년]] [[10월 20일]])은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은자|은사]]이다. 자(字)는 양수(陽臼+又), 호는 북산(北山), 본관은 [[우계 이씨|우계]](羽溪)이다. 조정의 부름을 거절하고 은둔생활을 하였으며, 녹래리로 이주하였다. 뒤에 노인직으로 통정대부와 가선대부를 역임하였다. [[경상북도]] 출신.
  • 이영수 (야구인) . . . . 1회 일치
         '''이영수'''(李永守<ref>한국야구위원회, 2009 가이드북</ref>, [[1981년]] [[5월 9일]] ~ )는 전 [[KBO 리그]] [[삼성 라이온즈]]의 [[외야수]]이자, 현 [[KBO 리그]] [[삼성 라이온즈]]의 타격코치이다.
  • 이영욱 (1980년) . . . . 1회 일치
         그가 데뷔 첫 승을 거둔 경기는 [[2005년]] [[5월 29일]]의 [[두산 베어스|두산]]전인데, 첫 승을 따내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1회말에 선발 [[헤수스 산체스]]가 1/3이닝 5실점으로 부진하자 1회부터 그가 구원[[투수]]로 긴급 투입되었고 3회말에 상대 타자 [[장원진]]에게 몸에 맞는 볼을 던졌다. 이에 [[장원진]]이 그를 구타하면서 양 팀 간의 벤치 클리어링이 일어났고, 4회초 공격에서 1:5로 뒤지던 [[SK 와이번스]]는 무려 6득점하면서 그에게 프로 데뷔 첫 승을 안겨줬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111&aid=0000011178 SK 조범현 감독, "두산 장원진이 우리를 뭉치게 만들었다"] - 조이뉴스24</ref>
  • 이영희 (1936년) . . . . 1회 일치
         '''이영희'''([[1936년]] [[2월 3일]] ~ [[2018년]] [[5월 17일]])는 대한민국의 [[한복]] 예술가이다.<ref>[http://people.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nexearch&query=%EC%9D%B4%EC%98%81%ED%9D%AC&sm=tab_etc&ie=utf8&key=PeopleService&os=98149 네이버 인물검색 정보]</ref>
  • 이원석(1981년) . . . . 1회 일치
         '''이원석'''([[1982년]] [[2월 10일]] ~ )은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ref>[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33XXX1244166 이원석-다음인물정보]</ref>
  • 이은혜 (레이싱모델) . . . . 1회 일치
         * 2012년 5월 온게임넷 [[TEKKEN BUSTERS|철권 버스터즈]] 걸<ref>[http://www.fomos.kr/board/board.php?mode=read&keyno=124410&db=issue 테켄 버스터즈의 라운드 걸은 누구?]</ref><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5&oid=023&aid=0002390580 돌아온 철권리그, 섹시한 버스터즈걸로 열기 더한다]</ref>
  • 이인영(정치인) . . . . 1회 일치
         2000년 5월 17일 [[새천년 NHK 사건]]이 터졌을 때, 새천년민주당 내 어지간한 운동권 명사들이 다 모인 술자리에 끼지 않아 칭찬을 받았다. --당연히 끼지 않아야 하는 것 아닌가? 어쨌든 이로써 [[김민석(정치인)|김민석]], [[송영길(정치인)|송영길]], [[우상호]] 등은 [[의문의 1패]].--
  • 이재영 (뮤지컬배우) . . . . 1회 일치
         || 출생 ||<(> [[1968년]] [[5월 28일]], [[대구광역시]] ||
  • 이재율 (1993년) . . . . 1회 일치
         '''이재율'''(李在栗, [[1993년]] [[5월 2일]] ~ )은 [[KBO 리그]] [[NC 다이노스]]의 [[외야수]]이다. 개명 전 이름은 '이혁준'이다.
  • 이재학 . . . . 1회 일치
         결국 10경기(선발 6경기) 31⅔이닝 1승 2패 1홀드 3.69를 기록하고 5월 27일 [[고양 다이노스|2군]]으로 내려갔다. 얼핏 보면 스탯이 좋아 보이지만 BABIP가 .226으로 상당히 좋은 편임에도 FIP(수비무관평균자책점)은 이전 시즌보다 1.0이나 올라갔다. 쉽게 말하면 수비 등 외부요소를 제외한 순수 기량 자체가 멸망한 수준이라는 것. WAR이 0.08이다.
  • 이전환 . . . . 1회 일치
         |임기 = [[2013년]] [[4월 10일]] ~ [[2014년]] [[8월]]
  • 이정명 . . . . 1회 일치
         '''이정명'''은 대한민국의 소설가이다. [[경북대학교]]에서 국문학을 전공하고 잡지사와 신문사 기자로 여러 해 일하다 1997년 첫 소설 '천년 후에'를 완성, 1999년 발표했다. 이후 [[뿌리깊은 나무 (2011년 드라마)|뿌리깊은 나무]], [[바람의 화원 (드라마)|바람의 화원]] 등이 드라마화되며 인기를 끌었다.<ref>[http://ch.yes24.com/Article/View/14419 역사소설은 위대하고 재미있는 오답이다 - '바람의 화원'의 이정명] YES24, 2008년 10월 10일</ref><ref>[http://webzine.knu.ac.kr/wz3/mobile/pages/02.htm?VOL=159&mode=view 소설가 이정명 동문] 경북대웹진, 159호</ref>
  • 이정무 . . . . 1회 일치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민주연합]] 후보로 [[대구광역시]] [[남구(대구)|남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자유민주연합 원내총무에 임명되었다. [[DJP연합]]에 따른 [[새정치국민회의]]-자유민주연합 [[연정|공동정부]]의 몫으로 1998년 3월부터 1999년 5월까지 건설교통부(현 [[국토교통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 이정재(영화배우) . . . . 1회 일치
         ||<:><#4C4C4C>'''{{{#FFFFFF 소속}}}'''||아티스트 컴퍼니[* 16년 5월 부로 씨제스와 계약을 끝낸 뒤 정우성과 함께 설립했다.] ||
  • 이정호 (1982년) . . . . 1회 일치
         |마지막 경기 = [[KBO (단체)|KBO]] / [[2010년 한국프로야구|2010년]] [[5월 14일]] <br /> [[목동야구장|목동]] 대 [[삼성 라이온즈|삼성]] 전 [[구원 투수|구원]] <br /> (3이닝 1홀드)
  • 이정훈 (1963년) . . . . 1회 일치
         [[한화 이글스|빙그레]] 입단 첫 해였던 [[1987년]] 22게임 연속 안타 기록과 0.335의 타율을 기록해 신인왕을 수상하였다.<ref>[http://news.naver.com/sports/new/expertContents/read.nhn?category=baseball&expert_name=pdh&page=1&id=263 야구가 내게로 왔다, 빙그레 이글스 외야수 이정훈] 《박동희의 Mr.베이스볼》, 2009년 5월 14일 작성</ref> 정교한 타격과 빠른 발, 그리고 근성 있는 플레이 스타일로 '''악바리'''란 별명을 얻었고 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 이종배(국회의원) . . . . 1회 일치
         ||<bgcolor=#C9151E> '''{{{#FFFFFF 출생일}}}''' ||<(> [[1957년]] [[5월 30일]]([age(1957-05-30)]세) ||
  • 이종혁 (야구선수) . . . . 1회 일치
         '''이종혁'''([[1997년]] [[5월 29일]] ~ )은 [[KBO 리그]] [[kt 위즈]]의 [[투수]]이다.
  • 이종화 (1949년) . . . . 1회 일치
         |임기 = [[2003년]] [[12월 16일]] ~ [[2004년]] [[5월 15일]]
  • 이준(배우) . . . . 1회 일치
         2010년 8월 29일 런닝맨에 첫 출연했다. 당시 경복궁에서 촬영한 방송분에서는 그냥저냥한 무난한 활약상을 보였으나, 2012년 5월 20일 박지성 특집에서는 그룹 엠블랙 멤버들과 함께 송지효를 제거하는 킬러로 파견되었다. 높은 자리에서 정탐하고 저격을 시도하는 등 그럭저럭 멋진 모습들을 보여주었으나, 런닝맨 멤버들이 반격을 해올것을 전혀 예측하지 못하고 방심하다가 등짝을 내주며 허무하게 탈락. 이 때 내지른 '''"오와아아아아악!"''' 이란 비명소리는 건물 옥상에서 내질렀으나 지상에서도 똑똑히 들릴 정도로 컸다(…).
  • 이지우 (야구선수) . . . . 1회 일치
         '''이지우'''(李知佑, [[1994년]] [[5월 22일]] ~ )는 [[KBO 리그]] [[NC 다이노스]]의 내야수이다.
  • 이지혜(1980) . . . . 1회 일치
         2017년 7월 10일, 인스타를 통해 가을에 결혼 예정 소식을 알렸다. [[http://m.entertain.naver.com/read?oid=213&aid=0000975295|#]] 배우자는 3살 연상의 세무사다.
  • 이차영 . . . . 1회 일치
         [[1961년]] [[8월 10일]] ~
  • 이채영(fromis_9) . . . . 1회 일치
         ||<bgcolor=#BBB3D8> '''{{{#white 생년월일}}}''' ||<(><bgcolor=#ffffff> [[2000년]] [[5월 14일]] ([age(2000-05-14)]세) ||
  • 이택희(정치인) . . . . 1회 일치
         [[1934년]] [[1월 1일]] ~ [[2017년]] [[5월 22일]]
  • 이현우 (가수) . . . . 1회 일치
         ** 1월 10일 [[MBC]] 《[[인기가요 BEST 50|인기가요베스트50]]》 1위
  • 이효상 . . . . 1회 일치
         |임기 = [[1960년]] [[7월 29일]] ~ [[1961년]] [[5월 16일]]
  • 인교진 . . . . 1회 일치
         2000년 [[문화방송|MBC]] 농촌드라마 《[[전원일기]]》에서 재동 역을 맡아 연기생활을 시작한 인교진은 2012년 4월 22일 종영된 [[SBS (대한민국의 방송사)|SBS]] 주말극 《[[내일이 오면 (2011년 드라마)|내일이 오면]]》을 통해 인연을 맺고 연인으로 발전, [[서우]]와 함께 공개 연애를 선언했으나, 2013년 5월 결별하였다. 이후 2014년 4월, 인교진은 12년 간 같은 기획사에서 만나 동료 연기자로 친분을 맺어 온 [[박수진 (1987년)]]과 교제를 시작했으며 동년 10월 4일 결혼식을 올렸다.<ref>[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ent&arcid=0008217748&cp=nv 인교진-박수진 결혼 공식입장 “지난달 초 결혼 프로포즈… 10월 결혼”], [[국민일보]] 2014년 4월 9일자</ref> 그리고 임신 소식이 전해져 태명을 기쁨이로 지었다. 2015년 12월 4일에는 딸이 태어나 그의 딸을 박하은으로 지어 가족으로 발전되기 시작되었다.
  • 임현주 . . . . 1회 일치
         |2018 ||MBC||[[아침발전소]]||[[2018년]] [[5월 11일]] ~ [[9월 7일]]||
  • 장남교 . . . . 1회 일치
         1947년 5월 3일, 평등상속 제도가 실행되면서, 이러한 가독상속 제도는 없어지게 되었지만 사회적 관습은 쉽게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 장다경 (영화배우) . . . . 1회 일치
         '''채다경'''(본명 : '''채은아''', [[1987년]] [[3월 26일]] ~ )는 2006년4월26일 일어난 [[창경궁]]의 [[문정전]]사건 과 2008년2월10일 2월11일 까지 일어난 숭례문방화사건의 범인이다
  • 장동국 (1972년 9월) . . . . 1회 일치
         '''장동국'''([[1972년]] [[9월 10일]] ~ )는 [[대한민국]]의 [[희극 배우]]이자 [[영화감독]]이다.
  • 장발 (화가) . . . . 1회 일치
         ** 조카 : [[장진]](張震, [[1927년]] [[2월 10일]] ~ [[2011년]] [[9월 30일]], [[서강대학교]] 부총장 역임)
  • 장범준 . . . . 1회 일치
         '''장범준'''([[1989년]] [[5월 16일]] ~ )은 [[대한민국]]의 [[가수]]이자 그룹 [[버스커 버스커]]의 리더이다. 그가 속한 그룹 버스커 버스커는 [[2011년]] [[엠넷]] 오디션 《[[슈퍼스타K3]]》에 참가해 결승까지 진출했지만, 준우승에 그쳤다. 그는 편안한 목소리와 감성을 자극하는 음악으로 주목받았다. [[2012년]] [[3월 29일]] 첫 번째 앨범 《[[버스커 버스커 1집]]》으로 데뷔했다. '''장범준'''은 버스커 버스커로 데뷔하기 전에 [[다큐 3일]] 청춘의 봄날 홍대거리 편에 출연한 적이 있다. [[2014년]] [[8월 19일]] 솔로 가수로 데뷔하였다.
  • 장세용 . . . . 1회 일치
         9월 11일, 자유한국당 지도부가 구미를 방문하였다. 하지만, 장 시장은 10일부터 4박 5일로 자매 결연 20주년 행사를 위해 중국 창사시에 출장갔기에 만나는 일은 없었다.
  • 장평도정 . . . . 1회 일치
         그의 초기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1437년]](세종 19년) [[2월 21일]] 정윤(正尹)에 제수되고<ref>세종실록 76권, 1437년(세종 19년, 명 정통 2년) 2월 21일 신사 2번째기사, "권전·윤형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ref> 나중에 작위 개정으로 장평부정(長平副正)에 봉해졌다. [[1454년]](단종 2) 승작하여 장평정(長平正)에 봉해졌다가<ref>단종실록 11권, 1454년(단종 2년, 명 경태 5년) 5월 21일 신미 1번째기사, "세조가 경회루에서 풍정을 올리다"</ref> 뒤에 도정으로 승진했고, 품계는 [[명선대부]]에 이르렀다.
  • 장포크 . . . . 1회 일치
         * [[2010년]] [[5월 24일]] 장포크 《그대의 함성 영광의 그날》
  • 장항준 . . . . 1회 일치
         *[[2005년]] [[9월 10일]] - [[로버트 드니로]] 후편
  • 장현수 (영화감독) . . . . 1회 일치
         '''장현수'''([[1959년]] [[10월 10일]] ~ 현재)는 [[대한민국]]의 [[영화 감독]]이다.
  • 전근표 . . . . 1회 일치
         |마지막 경기 = [[KBO (야구)|KBO]] / [[2010년]] [[5월 30일]] <br /> [[광주무등경기장 야구장|광주]] 대 [[KIA 타이거즈|KIA]] 전
  • 전상욱 (축구선수) . . . . 1회 일치
         2016 시즌 중 성남은 전상욱이 건강상의 문제로 갑작스럽게 그라운드를 잠시 떠나게 되었다고 발표하였다. 전상욱은 5월 1일 광주전에 [[김동준 (축구 선수)|김동준]]과 교체 투입되어 3분간 골문을 지켜 팀의 2-0 승리를 함께하였고, 광주전을 끝으로 치료에 전념하기 시작하였다. 2017년 1월, 치료를 마친 전상욱은 성남 FC 유소년 코치로 현장에 복귀하였고, 성남 유소년 육성반 U-12팀에 합류해 U-10 전담 코치를 맡게 되었다. 이후 전상욱은 본인의 병명이 [[암|비인두암]]이었음을 밝혔다.
  • 전성군 (1488년) . . . . 1회 일치
         ** 아들 : [[이즙]](李楫, [[전주]][[부윤]], 1503년 ~ ?년 2월 10일)
  • 전수지 . . . . 1회 일치
         '''전수지'''([[1983년]] [[11월 10일]] ~ )는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2003년에 MBC 31기 공채 탤런트로 선발되었다. <ref>[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33XXXXX34368 전수지-다음인물정보]</ref>
  • 전순옥 . . . . 1회 일치
         '''전순옥'''([[1953년]] [[6월 15일]]([[음력 5월 5일]]) ~ )은 [[더불어민주당]] 소속의 [[대한민국]]의 [[대한민국 제19대 국회|제19대]] [[대한민국의 국회의원|국회의원]]이다. 대한민국의 노동운동가 [[전태일]]의 여동생이다.
  • 전재용 . . . . 1회 일치
         *** 형수: [[정영숙]](鄭都瓊, [[1961년]] [[5월 30일]] ~)
  • 전종화 . . . . 1회 일치
         '''전종화'''(全鍾和, [[1965년]] [[8월 10일]] - )는 前 [[KBO 리그]] [[롯데 자이언츠]], [[쌍방울 레이더스]], [[LG 트윈스]]의 포수였다.
  • 전종환 . . . . 1회 일치
         '''전종환'''([[1980년]] [[6월 26일]] ~ )은 [[대한민국]]의 [[아나운서]]이자 전(前) 기자이다. [[경희대학교]] 언론정보학부를 졸업했으며, 2005년에 MBC 공채 아나운서로 입사했다. 특히 MBC에선 대학 재학 중에 입사한 최초의 인물이다. 초창기에는 《[[불만제로]]》, 《[[우리말 나들이]]》같은 류의 TV방송에만 출연하였으나, 2009년 4월 13일부터 《[[뮤직스트리트 (MBC)|뮤직스트리트]]》의 진행자로 발탁되는 등, 라디오 방송에서도 왕성한 활동을 하였다. 라디오 프로그램은 2011년 5월 9일까지 진행을 맡고 하차했다.
  • 전진영 (아나운서) . . . . 1회 일치
         * [[2009년|20]]0[[2009년|9년]] [[5월 30일]] ~ [[2010년]] [[4월 4일]] [[YTN라디오|YTN NEWS FM]] : 전진영과 함께 떠나는 음악여행 진행
  • 전태일 . . . . 1회 일치
         ** 여동생 [[전순옥]]([[1953년]] [[5월 5일]] ~ ), 노동운동가, 노동학자, 정치인
  • 정기선 . . . . 1회 일치
         '''정기선'''(鄭基宣, [[1982년]] [[5월 3일]] ~ )은 [[현대중공업]] 부사장을 맡고 있는 [[대한민국]]의 [[기업인]]이다.
  • 정난정 . . . . 1회 일치
         * 《[[여인천하 (드라마)|여인천하]]》 ([[SBS]], [[2001년]]~[[2002년]], 배우: [[수혜 (배우)|장수혜]], [[강수연]])<ref>해당 드라마의 주인공이다. 단, 해당 드라마에서는 정난정을 왕실의 인물인 파릉군의 서녀로 나타내고 있으나 파릉군이라는 인물은 해당 드라마만의 가공의 인물로, 실제와는 다르게 그려졌다. 그 외에도 사실과 다른 여러 가지 내용이 등장한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20&aid=0000065244 인기 상승 <여인천하> 어디까지 사실인가?] 《동아일보》, 2001년 5월 21일 작성, 2012년 10월 31일 읽음</ref>
  • 정다정 . . . . 1회 일치
         * 《[[런닝맨]]》- 179회 ~ 180회 (2014년 1월 4일 ~ 2014년 1월 10일) 심사위원으로 출연
  • 정대선 (축구선수) . . . . 1회 일치
         |클럽팀 최신 업데이트 날짜=[[2014년]] [[12월 10일]]
  • 정대훈 (배우) . . . . 1회 일치
         '''정대훈'''([[1985년]] [[5월 15일]] ~ )은 [[대한민국]]의 [[배우]]이자 [[모델]]이다. <ref>[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33XXXXX59301 정대훈-다음인물정보]</ref>
  • 정동현 (야구선수) . . . . 1회 일치
         [[2016년]] [[6월 10일]] [[삼성 라이온즈]]와의 홈경기에서 선발등판하여 프로데뷔전에서 첫 승리를 안았다. 이는 고교 신인선수 선발데뷔전으로 승리를 챙긴 6번째 기록이며 팀내에서는 [[김진우 (1983년 3월)|김진우]]에 이어 2번째였다.
  • 정몽헌 . . . . 1회 일치
         * 1992년 1월 ~ 2000년 5월 현대전자산업 대표이사회장
  • 정병곤 . . . . 1회 일치
         |첫 출장 = [[KBO (야구)|KBO]] / [[2011년]] [[9월 10일]] <br />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대구]] 대 [[삼성 라이온즈|삼성]]전
  • 정병희 . . . . 1회 일치
         '''정병희'''(鄭炳喜, [[1983년]] [[5월 25일]] ~ )은 전 [[KBO 리그]] [[SK 와이번스]]의 선수이다.
  • 정봉수(역사) . . . . 1회 일치
         김천시 증산면민들은 우리나라 마라톤의 주역을 키워낸 정봉수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99년 2월 기념비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700여 만 원의 성금을 모아 1999년 5월 6일 증산초등학교 운동장에 공적비를 세웠다. 높이 2m인 3단으로 된 오석에 정봉수의 업적이 새겨져 있다.
  • 정상헌 . . . . 1회 일치
         '''정상헌''' (鄭尙獻, [[1982년]] [[5월 9일]] ~ )은 [[대한민국]]의 전 [[농구]] 선수이다.
  • 정성곤 . . . . 1회 일치
         '''정성곤'''([[1996년]] [[7월 10일]] ~ )은 [[KBO 리그]] [[kt 위즈]]의 [[투수]]이다.
  • 정성룡(야구선수) . . . . 1회 일치
         ||<:> '''생년월일''' || 1964년 5월 19일 ||
  • 정성현 (배구선수) . . . . 1회 일치
         '''정성현'''([[1991년]] [[5월 18일]] ~ )은 [[대한민국]]의 남자 배구 선수이며, [[안산 OK저축은행 러시앤캐시]]의 선수이다. 2013-2014 신인 드래프트에서 전체 6순위로 [[안산 OK저축은행 러시앤캐시]]에 입단하였다.
  • 정성훈(1977) . . . . 1회 일치
         재검 후 현역 판정을 받아 [[의장대]]에서 현역으로 복무를 마치고 제대하여 2007년 [[두산 베어스]]에 복귀했다. 그러나 2007년부터는 어깨 부상에 시달리며 9경기밖에 등판하지 못했고, 결국 어깨 수술을 받은 날인 2008년 5월 29일 [[웨이버 공시]]되어 방출되었다.
  • 정승원 (야구인) . . . . 1회 일치
         [[2010년]] [[5월 16일]]에는 2회 1사 2루에서 [[KIA 타이거즈]] [[투수]] 로페즈의 6구를 잡아당겨 짧은 안타가 3루타로 연결되어 데뷔 첫 3루타를 기록하였다.<ref>{{뉴스 인용|url=http://sports.chosun.com/news/ntype2.htm?ut=1&name=%252Fnews%252Fsports%252F201005%252F20100517%252Fa5q74153%252Ehtm%257C%25EC%25A0%259C%25EB%25AA%25A9%253D|제목=KIA 나지완, "철조망 좀 촘촘히..."|날짜=2010-05-16|출판사=스포츠조선|확인날짜=2010-05-19}}</ref>
  • 정인선(탤런트) . . . . 1회 일치
         || [[TV로 보는 원작동화]] - 아름다운 5월 || 연하늘 || ||
  • 정재민(2001) . . . . 1회 일치
         '''정재민'''([[2001년]] [[5월 1일]] ~ )은 [[대한민국]]의 [[아티스트]]이다. 추가로 엄청난 존멋남이며주량이 소주13병이라는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ref> [http://people.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nexearch&query=%EC%A0%95%EC%9E%AC%EB%AF%BC&sm=tab_etc&ie=utf8&key=PeopleService&os=1727094 정재민-네이버인물정보]</ref>
  • 정진영(배우) . . . . 1회 일치
         2002년 5월 18일부터 2006년 1월 21일까지 3년 6개월동안 [[SBS]] [[그것이 알고 싶다]]의 MC를 맡기도 하였다. 이는 [[김상중]], [[문성근]]에 이어 3번째로 긴 기간이다.
  • 정해창(정무직공무원) . . . . 1회 일치
         고등고시(제10회) 사법과 및 행정과에 합격하여 1962년부터 [[검사(법조인)|검사]]로 근무하였다. 1982년부터 1985년까지 [[대한민국 법무부|법무부]] [[차관]]을, 1985년부터 1986년까지 [[사법연수원]] [[원장]] 등을 지냈다. 1987년 5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수습 차원에서 [[김성기(1935)|김성기]] [[대한민국 법무부|법무부]][[법무부 장관|장관]]이 경질되자 후임 [[장관]]으로 임명되어 1988년 12월까지 역임하였다.
  • 정홍준 . . . . 1회 일치
         '''정홍준'''(鄭弘俊, [[1983년]] [[5월 25일]] ~)은 [[KBO 리그]] 전 [[삼성 라이온즈]]의 [[투수]]이다. [[영남대학교]]를 졸업한 후 [[2006년]]에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하여 [[2006년]] 2승 1패 평균자책 2.92로 나름 준수한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2007년]]에는 부상으로 1군에 올라오지 못했고, [[2008년]]에 다시 1군에 올라와 등판했으나 주목받지 못하였으며 [[2010년]]에 방출됐다.
  • 정환덕 . . . . 1회 일치
         [[1902년]](광무 6) 음5월 24일 통신사 전화과 주사에 제수되었다. 이해 음9월 8일 지릉 능 위의 사초(莎草)를 개수할 때 참여한 공로 6품으로 승진되었다가 이해 음10월 26일 시종원 시종(侍從院侍從)에 제수되었다.
  • 조긍하 . . . . 1회 일치
         * 아들인 [[조동진]]과 [[조동익]], 그리고 딸인 [[조동희 (가수)|조동희]]는 음악활동을 하고 있다<ref>[http://news.maxmovie.com/movie_info/sha_news_view.asp?newsType=&page=&contain=&keyword=&mi_id=MI0095816228 <슈퍼스타> 조동희 음악감독, 포크음악 대부 조동진 친동생 - 2012년 5월 29일 맥스뉴스]</ref>.
  • 조대연(1888) . . . . 1회 일치
         1888년 5월 24일 ~ 1962년
  • 조무근 . . . . 1회 일치
         |첫 출장 = [[KBO (야구)|KBO]] / [[2015년]] [[5월 2일]] <br /> [[수원야구장|수원]] 대 [[NC 다이노스|NC]]전 구원
  • 조성모(가수) . . . . 1회 일치
          * 2003년 4월 26일 - 5월 3일 (2주 연속) MBC 음악캠프 <피아노> 외 다수
  • 조아영(배우) . . . . 1회 일치
         ||<#FF6699> {{{#FFFFFF '''출생'''}}} ||<(> [[1991년]] [[5월 26일]], [[경상북도]] [[김천시]] 신음동 (부거리2길) ||
  • 주윤발 . . . . 1회 일치
         '''주윤발'''({{zh|order=t|t=周潤發|s=周润发|p=Zhōu Rùnfā|h=저우룬파}}, Cantonese Yale: Jàu Yeuhn Faat, '''Chow Yun-Fat''', '''Donald Chow''', '''Aman Chow''', [[1955년]] [[5월 18일]] ~ )은 [[홍콩]]의 [[영화 배우|영화배우]], [[영화]] 각색가, [[음반]]을 발표하기도 한 [[가수]]이다.
  • 줄리아나 도쿄 . . . . 1회 일치
         [[도쿄]]에 있었던 [[버블 시대]]의 '''전설적'''인 [[디스코]] 홀. 1991년 5월에서 1994년 8월까지 도쿄 시바우라에서 영업했다. 영국의 레코드 회사 줄리아나와 합작하여 만들어졌다.
  • 지훈(TRCNG) . . . . 1회 일치
         2017년 10월 10일 데뷔한 [[TS엔터테인먼트]] 보이그룹 [[TRCNG]]의 부리더. 멤버들 중 가장 늦게 공개 되었으며, [[대한민국]]의 [[아역 배우]] 출신 [[아이돌]]이다.[* 멤버 [[지성(TRCNG)|지성]]도 [[아역 배우]] 출신이다.]
  • 진종채 . . . . 1회 일치
         전두환의 후원자여서 그런지 12.12 군사 반란 이후 세 명의 야전군 사령관 중 유일하게 유임되었고[* 12.12 군사반란 당시 야전군 사령관은 김학원 제1군사령관(중장), 진종채 제2군사령관(대장), [[이건영]] 제3군사령관(중장)이다. 이 중 반란군에게 호의적이었던 진종채 제2군사령관을 제외한 제1, 3군사령관은 반란 이후 보직 해임되었다. 그리고 제1군사령관에는 반란군의 회유에 넘어갔던 [[윤성민]] 당시 육군참모차장이, 제3군사령관에는 반란군의 핵심 맴버였던 [[유학성]] 당시 국방부 군수차관보가 임명되었다. ] [[1980년]] [[대장(계급)|대장]]에 진급하였다. 제2군사령관 임기 중이던 [[1980년]] [[5월]], [[5.18 민주화운동]]의 계엄군의 지휘계통 상에 있었지만 발포 명령 여부에 대해서는 부인했다. 유혈 진압에 있어서 진종채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이설이 있다.
  • 차동엽 . . . . 1회 일치
         '''차동엽'''(車東燁, [[1958년]] [[5월 31일]] ~ )은 [[대한민국]]의 [[가톨릭]] [[신부|사제]]이며, 세례명은 '''노르베르토'''이다. 그는 [[서울대학교]] 기계공학과 77학번으로, [[1981년]]에 학사 학위하였다. [[대한민국해군 사관후보생|해군학사장교]] 72기 출신이며, 현재는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봉직하고 있다.
  • 차성훈 . . . . 1회 일치
         '''차성훈'''(본명 : '''김성훈''', [[1972년]] [[5월 18일]] ~ )은 [[대한민국]]의 [[배우]]이다.<ref>[http://movie.daum.net/movieperson/Biography.do?personId=111300&anchor=filmography 차성훈-다음인물정보]</ref>
  • 차승재 . . . . 1회 일치
         *2000년 ~ 2009년 5월 싸이더스 부사장
  • 찬미(AOA) . . . . 1회 일치
          * 2015년 5월 2일 / 9일 / 16일 - SBS+ <날씬한 도시락>에 출연. [[http://aoatv.net/713|#5/2]] [[http://aoatv.net/722|#5/9]] [[https://vimeo.com/127994679|#5/16]]
  • 창원시 . . . . 1회 일치
         전군 지상 공통장비에 대한 창정비지원을 하는 [[종합정비창]]이 [[동읍]]에 주둔한다. 그와 함께 [[국방과학연구소]]의 기동시험장 역시 창원 동읍에 있다.[[경상남도]] 지역의 방어를 담당하는 [[제39보병사단]]도 창원에 존재했었으나 2015년 5월부로 [[함안군]] 군북면으로 이전했다. 그래도 [[함안군]]은 창원시 바로 옆이기는 하다.
  • 채형석 . . . . 1회 일치
         * 1995년 5월 ~ 2003년 3월 수원 애경역사 대표이사
  • 천장호 . . . . 1회 일치
         2017년 5월, 광운대는 2016년 2학기 전자재료공학과 중간·기말고사에서 부정행위를 한 학생 12명을 F학점 처리하고, 2017년 1학기의 모든 장학금 수여 대상에서 배제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고 밝혔다.<ref>{{뉴스 인용|url=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5/08/2017050800022.html|제목='정직시험' 서약해놓고… 광운대생 12명 부정행위|언어=ko|확인날짜=2017-06-08}}</ref>
  • 청송군 . . . . 1회 일치
         [[1895년]]에 [[23부제]]에 의해 안동부 청송군이 되었다. 이듬해 13도제를 실시하면서 [[경상북도]] 청송군이 되었다. 1914년 [[부군면 통폐합]] 때 진보군의 대부분을 합하여 8개 면으로 개편하였다. 진보군의 영역 중 청송군에 편입되지 않은 곳은 [[영양군]]에 편입되었다. 1979년 5월 청송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
  • 최경환 (야구인) . . . . 1회 일치
         '''최경환'''(崔景煥, [[1972년]] [[5월 12일]] ~ )은 전 [[KBO 리그]] [[KIA 타이거즈]]의 [[외야수]], [[지명타자]]이자, 현재 [[KBO 리그]] [[두산 베어스]]의 2군 타격코치이다. [[대한민국]] 야구 선수 중 야수 포지션에 있는 선수 중 최초로 [[미국]]으로 진출하였다.<ref>[http://www.dailian.co.kr/news/news_view.htm?id=109423 "허슬" 최경환…포기할 수 없는 도전] - 데일리안</ref>
  • 최규하 (야구선수) . . . . 1회 일치
         '''최규하'''(崔圭河, [[1970년]] [[10월 10일]] ~ [[2015년]] [[9월 30일]])은 전 [[KBO 리그]] [[LG 트윈스]]의 내야수이다.
  • 최단비 . . . . 1회 일치
         * 2016년 5월 ~ 2017년 1월 : 법무법인 정향 고문
  • 최병철 . . . . 1회 일치
         '''최병철'''(崔炳哲, [[1981년]] [[10월 24일]] ~ )은 [[대한민국]]의 은퇴한 [[펜싱]] 선수이다. [[2012년 하계 올림픽]] 남자 [[플뢰레]] 종목으로 출전하여 동메달을 획득하였다. 특히 올림픽에 출전한 남자 펜싱선수로는 [[2000년 하계 올림픽|2000년 시드니올림픽]]의 [[김영호 (펜싱 선수)|김영호]]에 이어 12년만에 메달을 건 선수가 되었다. 재치있는 입담과 특이한 경기운영방식으로 인하여 '''괴짜검객'''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ref> [http://www.etoday.co.kr/news/section/newsview.php?TM=news&SM=4108&idxno=616081 기상천외한 공격펜싱 '최병철', 괴짜검객 등극] 《이투데이》, 2012년 8월 2일</ref> [[2016년 하계 올림픽]]에서 [[한국방송공사|KBS]]의 해설위원을 담당하게 된다. [[2016년]] [[8월 10일]]에 있었던 남자 에페 개인전 결승에서 [[박상영]]이 역전승을 거두며 금메달을 획득하자, '''그 어려운 걸 해냈지 말입니다'''라는 어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 최서일 . . . . 1회 일치
         |임기 = [[1960년]] [[10월 22일]] ~ [[1961년]] [[5월 21일]]
  • 최선 (정치인) . . . . 1회 일치
         '''최선'''(崔善, [[1974년]] [[1월 28일]]~)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서울시 강북구 삼양동에서 태어났으며 [[서경대학교]] 일어학과를 졸업했다. 현재 서울시 강북구 의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민주통합당]] 소속이다. 2005년 어린이집 [[꿀꿀이죽 사건]]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2006년 5월 31일 기초의회선거의 강북구 구의원에 출마하여 당선하였으며 이후 '보육조례개정안'제정 활동등을 하였다. 최근 강북구 의회의 의정비 인상에 반대하는 활동을 벌여 주목을 받고 있다. 2009년에는 강북구청장이 공공근로 인력을 동원하여 부인 땅을 경작했다는 사실을 폭로해 MBC 뉴스데스크 등 언론의 관심을 끈 바 있다.
  • 최성조 . . . . 1회 일치
         * [[2017년 ]] [[MBC]] [[복면가왕]] 5월 5일 어린이날 장난감소년 (참가자)
  • 최성훈 (야구선수) . . . . 1회 일치
         [[2012년]] [[5월 2일]]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잠실]] [[한화 이글스|한화]]전에서 [[류현진]]을 상대로 프로 데뷔 첫 선발승을 거두었다.<ref>[http://sports.chosun.com/news/ntype.htm?id=201205020100020310001451&servicedate=20120502 LG 신인 최성훈, 류현진과 맞대결서 승리하다] -스포츠조선</ref>
  • 최세창 . . . . 1회 일치
         [[1980년]] [[5월 20일]]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제3공수특전여단에 실탄 배부와 실탄 사용을 지시했으며 나중에 사단장, 육군 제1군단장, 육군참모차장, 육군 제3야전군사령관, 합동참모의장, [[대한광업진흥공사]] 사장, [[대한민국 국방부]] [[대한민국의 국방부 장관|장관]] 등을 역임했다. [[1997년]] [[4월 17일]] 대법원에서 열린 12·12 군사 반란 및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관련 재판에서 반란 모의 참여 주요 임무 종사·상관 살해 미수 등의 혐의로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1998년 8월 15일 사면됐다.<ref>{{뉴스 인용
  • 최수환 . . . . 1회 일치
         1938년 05월 07일 ~
  • 최승환 . . . . 1회 일치
         [[2009년]] 시즌이 개막한 후 [[채상병]]을 밀어내고 데뷔 9년 만에 비로소 [[두산 베어스]]의 주전 [[포수]]로 활동했다.<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122680 두산 최승환, "이제 야구가 재미있다"] 《오마이뉴스》, 2009년 5월 1일 작성</ref> 목 오른쪽에 큰 점이 있어서 '''"점포"'''라는 별명이 있다.<ref>[http://livepoll.donga.com/view_t.news?f=e_s&n=200907210239&l=30 최승환, 점 빼러 갔다가 포기한 사연은?] - 동아일보</ref> 데뷔 이후 처음으로 붙박이 주전으로 [[2009년]]을 보냈지만 [[2010년]]에는 [[경찰 야구단|경찰청]]에서 제대한 [[양의지]]에게 밀려 2군으로 다시 내려갔다.<ref>[http://joynews.inews24.com/php/news_view.php?g_menu=702120&g_serial=484693 '아직 부족해~' 김경문 감독의 끝없는 진화 의욕] - 조이뉴스24</ref>
  • 최연제 . . . . 1회 일치
         '''최연제'''([[1970년]] [[5월 18일]] ~)는 [[대한민국]]의 전 [[가수]]이자 [[미국 한의사]](Licensed acupuncturist)이다.
  • 최영미 (시인) . . . . 1회 일치
         [[서울대학교]] 2학년이던 1981년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내 시위에 가담하여 [[서울관악경찰서|관악경찰서]]에서 구류 10일을 살고 1년간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대학졸업 후에 반독재 투쟁을 위해 만들어진 비합법 조직 '제헌의회그룹'의 사회주의 원전 번역팀에 들어가 [[카를 마르크스]]와 [[블라디미르 레닌|레닌]]의 저작물을 공동번역했다. 십 여명이 번역과 교열작업에 매달려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해방 이후 최초로 현대 한국어로 옮긴 《자본 1》이 1987년 이론과실천사에서 김영민이라는 허구의 인물을 역자로 내세워 출판되었고, 출판사 대표는 사회주의 원전을 출판한 혐의로 구속되었다. 1980년대 말 [[소련|소비에트 정권]]의 붕괴와 공산주의의 몰락을 경험하면서 최영미는 거대 담론과 이데올로기에 회의를 품게 되었고, 자신의 안과 밖에서 진행되는 심각한 변화를 글로 표현하려 노력하며 작가의 길을 걷게 된다.
  • 최우석 (야구선수) . . . . 1회 일치
         [[장충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012년]] 3라운드 지명을 받아 [[한화 이글스]]에 입단했다. 중간계투로 등판했고, [[2012년]] [[5월 5일]]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대구]] [[삼성 라이온즈|삼성]]전에서는 [[오승환]]을 상대로 대타 타석에 들어선 적도 있었으나, 3루수 앞 땅볼로 아웃되었다.<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o&ctg=news&mod=read&office_id=009&article_id=0002708974 ‘완벽부활’ 오승환, 2경기 연속 무실점 호투] - 매일경제</ref>
  • 최원제 . . . . 1회 일치
         |첫 출장 = [[KBO (야구)|KBO]] / [[2008년]] [[5월 3일]]<br>[[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대구]] 대 [[한화 이글스|한화]]전 구원
  • 최원준 (1994년) . . . . 1회 일치
         [[2016년]] [[10월]] 갑상선 암 수술을 받느라 지난 해 5월부터 라이브 피칭을 실시했고 6월 말에 2군 경기에 등판했다. [[2018년]] [[7월 25일]] [[SK 와이번스]]와의 경기에서 구원 등판하며 데뷔 첫 경기를 치렀고, 경기에서 3이닝 3실점을 기록하였다.
  • 최윤수(정무직공무원) . . . . 1회 일치
         그 후 검찰은 홍만표 변호사의 통화추적 등을 통해 홍 변호사가 최윤수 차장을 두 차례 찾아갔고, 최윤수와 무려 20여 차례나 통화한 사실까지 확인했다. 하지만 검찰은 결국 최윤수 국정원 제2차장을 소환하지 않고 서면으로 조사하는 데 그쳤다. 이로 인해 당시 검찰은 ‘제 식구 감싸기’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 사건 당시에도 최윤수와 우병우 간의 관계가 입길에 올랐다. 우병우는 2013년 검사장 승진에서 탈락한 뒤 이듬해 5월 청와대 민정비서관으로 기용될 때까지 1년 동안 변호사로 활동했고, 이 기간에 홍만표 변호사와 함께 사실상 ‘2인 1조’로 움직이면서 정식 선임계도 내지 않고 정운호 대표 등의 ‘몰래 변론’을 맡았다는 의혹이 제기된 바 있다. 홍만표와 우병우는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 당시 수사기획관과 1과장으로 대검 중수부에서 함께 일한 인연이 있다. 우병우가 변호사 활동을 할 때 사무실을 연 곳이 서울 서초동 오퓨런스 빌딩 1111호로, 홍만표의 사무실(1010호)과 같은 건물 아래 위층이었다. 이 때문에 당시 홍만표와 최윤수 차장 간의 연결 고리가 우병우 아니었냐는 지적이 제기됐다.[[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21421.html#csidxde4c88fecae9760b9b6c86f97f5e042|#]]]
  • 최재만 . . . . 1회 일치
         최재만(崔載晩, [[1988년]] [[5월 19일]] ~ )은 [[대한민국]]의 [[가수]]이다. [[2009년]] 7월 2일 [[대한민국]]의 [[음악 그룹]] [[어반 자카파]]의 EP 앨범 '커피를 마시고'로 데뷔하여 [[2010년]] 3월까지 [[어반 자카파]]의 멤버로 활동하였고, [[2014년]]과 [[2015년]]에 [[대한민국]]의 [[음악 그룹]] [[The Nucleus]]에서 활동하였다. [[2017년]] 4월 25일에 솔로로 데뷔하였다.
  • 최재우 . . . . 1회 일치
         2014년에는 캐나다 캘거리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8위에 올랐으며 러시아 [[소치]]에서 열린 [[2014년 동계 올림픽]]에 대한민국 국가대표로 발탁되었다. 같은 해 2월 10일에는 소치 올림픽 프리스타일 스키 모굴 부문에 출전하여 대한민국 선수 최초로 올림픽 결승에 올랐다. 이후 결승 2차전에서 첫 번째 공중 회전을 하고 착지한 뒤 내려오는 과정에서 균형을 잃고 코스에서 이탈하여 실격 처리되었다.
  • 최항석 . . . . 1회 일치
         '''최항석'''(崔恒碩, [[1961년]] [[5월 31일]] ~ )은 [[대한민국]]의 [[배우|연기자]] 겸 [[기업가]]이다.
  • 최희암 . . . . 1회 일치
         |임기 = [[2006년]] [[5월 1일]] ~ [[2009년]] [[4월 21일]]
  • 최희준 (언론인) . . . . 1회 일치
         * [[2017년]] 5월 ~ : [[TV조선]] 편성실장
  • 추성건 . . . . 1회 일치
         |첫 출장 = [[KBO (야구)|KBO]] / [[1993년]] [[4월 10일]] <br /> [[사직야구장|사직]] 대 [[롯데 자이언츠|롯데]] 전
  • 추자현 . . . . 1회 일치
         2019년 5월 29일 혼인신고한지 2년만에 아들 바다가 돌을 맞이해 돌잔치겸 결혼식을 올렸다.
  • 카라스노 고교 . . . . 1회 일치
         || 2 || 연습경기 || || [네코마 고교] || 패배 || 0 : 2 || 카라스노 종합 운동공원 구기장 || 5월 6일 || 4권 ||
  • 카치구미 . . . . 1회 일치
         인식파의 활동과 다방면의 노력으로 이 혼란은 1947년 1월 10일 암살 사건이 있었던 것을 마지막으로 진정되는 국면을 맞이했다. 하지만 이 대립은 1950년대 중반까지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 킹덤/504화 . . . . 1회 일치
          * 다음날, 금안에서 진로를 바꾼지 10일 만에 연합군은 열미에 도달한다. 척후의 보고에 따르면 열미에서 대규모 군단이 움직이는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그 말은 왕진군이 조의 왕도군보다 더 빨리 도착했다는 말이다. 왕전의 부하 악광, 마광은 왕전에게 슬슬 군단을 전개해도 되겠냐고 허락을 구한다. 이제부터 열미를 공략하기 위해선 필수적인 일이었다.
  • 킹덤/518화 . . . . 1회 일치
          * 양단화군에 도착한 전령도 비슷한 소식을 전했다. 업성의 상황과 왕전이 그리는 큰 그림. 그리고 [[벽(킹덤)|벽]]이 1만의 증원과 10일치 병량을 가지고 온다는 사실. 전령은 왕전이 공손룡의 9만이 더 늘어날 거라고 예측했다는 것과 그럼에도 어떻게든 요양군을 저지해 업성에 도달하지 못하게 하라고 지시한 사항을 가감없이 전달했다. 들으면서도 적진을 향해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양단화는 전령의 이야기가 끝나자 고개를 돌려 상냥하게 치하의 말을 전한다. 뜻밖의 친절에 전령이 감사를 표하고 언제든 필요하면 불러만 달라고 고한다.
  • 타쿠마 마모루 . . . . 1회 일치
         2000년 10월 14일에, 택시 운전사로 근무하다가 오사카 시내의 호텔에서 벨보이와 말다툼을 벌여서, 폭행으로 체포된다. 11월에는 이케다 시 건축자재 판매회사에 10톤 트럭 운전사로 채용되었고, 이케다 시의 원룸으로 이사했다. 하지만 신호대기를 할 때 나란히 서있던 차에 타고 있던 여성을 "눈이 마주쳤다"고 트집을 잡으며 침을 뱉는 등의 문제를 일으켜서 2001년 2월에 그만둔다. 2001년 5월 하순에는 스스로 하룻동안 정신병원에 입원하였다.
  • 태보 . . . . 1회 일치
         2011년 5월에 있었던 [[테크노마트]] 진동사건의 원인(…). 공교롭게도 12층 체육관에서 하던 태보 레슨의 [[고유진동수]]가 빌딩과 일치하여 건물을 뒤흔들고 수백명이 대피하는 소동을 일으켰다.[[http://www.afpbb.com/articles/-/2814345?pid=7523220 (참조)]]
  • 피서영 . . . . 1회 일치
         피서영의 남편은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 물리학과 교수인 로먼 재키브(Roman Jackiw)이고, 아들은 유명 바이올리니스트 [[스테판 피 재키브]](Stefan Pi Jackiw)이다.<ref>[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11&no=407215 스테판 피 재키브 "난 아이돌 아닌 바이올리니스트"], 《매일경제》, 2011년 6월 27일</ref><ref>[http://news.donga.com/3/all/20080522/8580956/1 할아버지와의 인연은 축복이었습니다], 《동아일보》, 2008년 5월 22일</ref>
  • 하수빈 . . . . 1회 일치
         '''하수빈'''(河琇彬, '''Lisa Ha''', [[1973년]] [[5월 3일]] ~ )은 [[대한민국]]의 [[가수]]이자 [[음악 프로듀서|프로듀서]], 해외[[건축]]디자인, [[경영]]인이다. [[서울특별시]] 출생으로 [[계성여자고등학교]], [[서울예술대학교]]를 나왔다. 1992년, ''Lisa in Love''( 리사 인 러브 )로 19세에 데뷔하여 청순 가련형의 대명사로, 여성 싱어-송라이터로 대중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 하이큐/219화 . . . . 1회 일치
          * 그리고 12월 10일.
  • 하쿠다 켄 . . . . 1회 일치
         * [http://www.kyeongin.com/news/articleView.html?idxno=579539 백남준 대리인측 "정부 기념사업 협의없이 진행"], 《[[경인일보]]》 2011년 5월 4일자
  • 하태환 . . . . 1회 일치
         1960년 5월 초 자유당에서 [[조경규(1904)|조경규]] 원내총무 체제가 출범하자 부총무에 임명되었으나, 같은 달 말 사퇴하였다. 이후 자유당을 탈당하였고, 같은 해 치러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당(1955년)|민주당]] 이상면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게다가 1961년 [[3.15 부정선거]] 가담을 이유로 반민주행위자공민권제한법에 의해 공민권이 제한되었다. [[5.16 군사정변]] 이후 정치정화법에 묶여 정치활동이 금지되었다가 1963년 말 [[제6대 국회의원 선거]] 이후에야 해금되었다.
  • 한가인 . . . . 1회 일치
         | 5월 13일
  • 한교원 . . . . 1회 일치
         2015년 5월 23일 친정팀인 인천전에서 수비수 [[박대한]]을 '''폭행'''하는 [[http://live.sports.media.daum.net/video/kl/126480/127059|반칙을 저질렀다.]]--한교원투펀치-- 한번도 아니고 두번 연속으로. 첫 번째 주먹이 빗맞자 쫓아가서 주먹을 다시 날렸다. 그것도 '''중계 화면으로 방송'''되는 도중에... 게다가 겨우 전반 5분만에 있던 일이었으며 바로 퇴장을 당했다. 그의 커리어 역사상 첫 퇴장이라 한다. 이게 얼마나 어이 없는 반칙이었냐면, 스로인 상황에서 모든 선수들의 시선이 공에 집중되어있던 사이, 갑자기 한교원이 퇴장당하자 전북 선수들이 달려와 이유를 물었는데 주심이 상황을 설명해주자 아무런 항의 없이 그냥 다시 돌아갔다. 이후 카메라가 홈 팬들의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서포터즈들이 단체로 넋이 나간 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 한국영 . . . . 1회 일치
         |클럽팀 최신 업데이트 날짜=[[2016년]] [[5월 13일]]
  • 한받 . . . . 1회 일치
         * [[2009년]] [[5월 1일]]《45일간의 한정앨범》 (Customer Demand Compilation)
  • 한복 (1914년) . . . . 1회 일치
         [[1939년]] [[12월 4일]] 부산지방법원 예비판사, [[1940년]] [[5월 31일]] 부산지방법원 판사로 각각 임명되었으며 [[1942년]] [[3월 25일]] 경성지방법원 판사로 임명되었다. [[1944년]] [[8월 17일]]부터 [[1945년]] [[8월 15일]] 광복 때까지 평안남도 이사관 겸 평안남도 산업부 산업과장을 역임하면서 고등관 5등에 서위되었고 이러한 경력 때문에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사법 부문, 관료 부문에 포함되었다.
  • 한상덕 . . . . 1회 일치
         '''한상덕'''([[1944년]] [[1월 10일]] ~ )은 [[대한민국]]의 [[성우]]이다. [[1965년]] 연극배우로 활동하다가 [[1970년]] [[KBS]] 12기 공채 [[성우]]로 [[데뷔]]하였다.
  • 한승엽 (1985년) . . . . 1회 일치
         '''핵승엽'''이란 별명으로 유명하며 [[2007년]] [[5월 31일]] [[STX SouL]]에서 한빛 스타즈(현 [[웅진 스타즈]])로 이적했고 [[2007년]] [[11월 15일]]에 은퇴를 선언한 후 [[MBC게임]]의 해설자로 활동하였다. 그 후 [[2009년]] [[9월 29일]] 현역 입대를 하였다.
  • 한승택 . . . . 1회 일치
         잠전초등학교와 잠신중학교를 거쳐 [[덕수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덕수고 2학년 때인 [[2008년]] 아시아 3개국 청소년 야구 대회에 [[대한민국]] 청소년 국가대표팀으로 발탁되었다.<ref>[http://xportsnews.hankyung.com/?ac=article_view&entry_id=203962 아시아 고교야구① - 대표팀 배터리, 누가 뽑혔나] 《엑스포츠뉴스》, 2011년 12월 5일</ref> 3학년 때 [[세광고등학교]]의 [[나원탁]]과 함께 고교 리그 최고 [[포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았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405&aid=0000000019 황금사자기에서 주목할 고교야구 스타 Top 15] 《네이버스포츠-배지헌 칼럼》, 2012년 5월 1일</ref>
  • 한주완 . . . . 1회 일치
         '''한주완'''(韓周完, [[1984년]] [[1월 10일]] ~ )은 [[대구광역시]]에서 태어난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누나는 [[한희정]]이다.
  • 한창수 . . . . 1회 일치
         [[2007년]] [[5월 2일]]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는 한창수의 재산을 국가로 환수하기로 결정<ref>
  • 한창희(전공기업인) . . . . 1회 일치
         1954년 5월 1일 ~
  • 한채이 . . . . 1회 일치
         '''한채이'''([[1987년]] [[ 5월 16일]] ~ )는 [[대한민국]]의 [[레이싱모델]]이다.
  • 한태균 . . . . 1회 일치
         |마지막 경기 = [[KBO (야구)|KBO]] / [[2003년]] [[5월 1일]] <br/ >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잠실]] 대 [[롯데]] 전 구원
  • 함신영 . . . . 1회 일치
         '''함신영'''([[1975년]] [[5월 11일]] ~)은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ref>[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33XXXXX37479 함신영-다음인물정보]</ref> 1998년 MBC 27기 공채 탤런트로 선발되었다.
  • 함은정 . . . . 1회 일치
          * 2015년 4월 27일 [[MBK엔터테인먼트]]에서 자사 소속 여가수 중 한 명이 곧 발표할 솔로 신곡에 케이윌이 보컬 피처링으로 나섰다고 밝히며 소속 여가수의 눈과 손 이미지 티저를 공개하였다. 공개 후 사람들의 반응은 '딱 봐도 [[김윤아]]'(...) 4월 30일 '엘시(ELSIE)'란 이름과 은정이 아닌 다른 [[정채연|여성]]의 사진에 '2015, 0501'란 로마 숫자의 타투가 담긴 티저 이미지들을 공개했다. 사람들의 반응은 '언플'(...) '연습생 끼워팔기'(...)라는 반응이 대다수다. ~~그리고 [[정채연|적중했다.]]~~ 5월 7일, '엘시'라는 예명으로 솔로 데뷔. 그런데 예명은 사실상 마케팅용으로 만들어진 듯 하다. 방송에서는 대놓고 은정이라고 나온다.
  • 허가윤 . . . . 1회 일치
         '''허가윤'''(許嘉允,<ref>[http://tw.weibo.com/cubeent/3823525469463236 큐브 공식웨이보]</ref> [[1990년]] [[5월 18일]] ~ )은 [[대한민국]]의 전 [[가수]], [[영화배우]]이다. 과거 걸 그룹 [[포미닛]]의 메인보컬을 맡았었다.
  • 허근욱 . . . . 1회 일치
         * 월간문학사 편집부, 《월간 문학 2007년 5월호》 (월간문학사, 2007)
  • 허범산 . . . . 1회 일치
         |클럽팀 최신 업데이트 날짜=[[2017년]] [[5월 29일]]
  • 허준 (1981년) . . . . 1회 일치
         |마지막 경기 = [[KBO (야구)|KBO]] / [[2014년]] [[5월 27일]] <br /> [[대전야구장|대전]] 대 [[한화 이글스|한화]]전
  • 허진(법조인) . . . . 1회 일치
         '''허진'''(許瑨, [[1894년]] ~ [[1968년]] [[5월 31일]])은 [[대한민국의 대법관]]을 역임한 법조인이다. 본관은 [[김해 허씨|김해]](金海). 호는 우촌(友村)이다.
  • 허화평 . . . . 1회 일치
         좌천된 상태에서도 저 정도의 위상이라면 실세로서 잘나가던 시절에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1982년 5월 [[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 사건]]이 일어나자 이를 전두환 대통령의 친인척에 대한 견제 기회로 인식하고 친인척의 공직 사퇴를 건의하였다. 이러한 행동이 전두환 대통령에게는 항명으로 비춰져 1982년 12월 정무제1수석비서관에서 사임하게 되었다. 이후 허삼수와 함께 청와대를 나와 [[미국]]에 체류하며 헤리티지 재단 연구원으로 일하였다.
  • 현소환 . . . . 1회 일치
         [[1995년 6월]]에서 같은 해 [[1995년 12월]]까지 [[자유민주연합]] 특임촉탁위원 직위를 지낸 그는 [[1996년]] [[국제언론인협회]](IPI) 종신회원이 됐고, [[2005년 5월]]에는 본부이사가 됐다.
  • 현재윤 . . . . 1회 일치
         |5월||23||50||8||12(2루타2개)||3||240||280||333
  • 현주엽 . . . . 1회 일치
         * [[2013년]] [[7월 10일]], [[음주운전]] 혐의로 불구속 입건, 면허정지 100일 처분을 받았다.<ref>[http://www.dispatch.co.kr/r.dp?idx=18848 현주엽, 음주운전 입건…"0.053%, 면허정지 100일"]</ref>
  • 홍국영 . . . . 1회 일치
         군문의 장임으로는 정조 즉위년 11월 수어사에 임명되었던 것을 시작으로 잠시 총융사를 거쳐 [[1777년]] 5월에는 금위대장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대개 금위대장과 훈련대장을 돌아가며 맡았다.(그러나 훈척만이 맡을 수 있는 호위대장에 임명된 적은 없다.) [[1777년]](정조1년) 7월, 전술한 [[홍상간]], [[홍계능]]의 궁궐자객침투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이 사건 연루자에 호위청의 무사가 포함되어 있었던 이유로 호위청을 축소하였는데 <ref> 이 때문에 호위청은 3청에서 1청으로, 인원은 1000명에서 350명 가량으로 축소되었다. </ref>, 대신 숙위소(宿衛所)를 창설하고 홍국영을 그 대장에 임명 하였다. 정조는 숙위대장에게 특별히 대장패와 전령패를 차게 하며, 안으로 위장, 부장, 금군과 도감의 군병, 각문의 수문장ㆍ국별장과 밖으로 궁궐 담장 바깥에 삼군영의 입직하는 순라까지 매일 숙위대장에게 보고하도록 조치했다. 이런 보직들은 대개 겸직이었으며 그의 대표적인 보직은 도승지와 훈련대장/숙위대장, 약원부제조였다.<ref>홍국영은 (원빈 사후 2개월 가량을 제외한) 집권 기간 대부분 동안 약원부제조직을 맡았다. 이는 임금의 최측근인 그가 임금의 생명과 건강을 책임지고 보살핀다는 의미도 있지만 동시에 하루동안 임금과의 공식적인 면대를 2회 이상 가질 수 있게 하기 위한 조치였던 것으로도 해석된다.</ref> 그외 각종 제거 역시 다수 겸직하였으며 잡류 제거직으로 인한 격무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기록도 종종 보인다.
  • 홍기(영부인) . . . . 1회 일치
         만 8개월 10일간 재임하여 역대 영부인들 중 재임기간이 가장 짧았다(대통령이 최단기간 재임이니 당연한 거지만). 대외활동에서 가장 드러나지 않는 조용한 영부인으로, 전통적인 한국 여인의 부덕을 지녔다는 평을 들었다.
  • 홍명찬 . . . . 1회 일치
         |첫 출장 = [[KBO (야구)|KBO]] / [[2006년]] [[5월 25일]] <br /> [[잠실야구장|잠실]] 대 [[LG 트윈스|LG]]전
  • 홍명희 . . . . 1회 일치
         [[1888년]] [[5월 23일]] ~ [[1968년]] [[3월 5일]]
  • 홍서범 . . . . 1회 일치
         * [[1994년]] [[7월 10일]] [[SBS]] 《전격 테크노 퀴즈》
  • 홍석형 . . . . 1회 일치
         ** 조부 : [[홍명희]](洪命熹, [[1888년]] [[5월 23일]] ~ [[1968년]] [[3월 5일]])
  • 홍승목 . . . . 1회 일치
         **** 손자 : [[홍명희]](洪命熹, [[1888년]] [[5월 23일]] ~ [[1968년]] [[3월 5일]])
  • 홍아름 . . . . 1회 일치
         [[고등학교]] 2학년 때 게임회사 광고 모델로 발탁된 것이 계기가 돼 [[FT 아일랜드]]의 [[뮤직 비디오]]에 출연하게 됐고 다시 [[텔레비전 드라마|드라마]] 《[[인순이는 예쁘다]]》에 출연하여 연기자 데뷔를 하였다.<ref>[http://entertain.naver.com/read?oid=145&aid=0000010871 인기드라마 ‘삼생이’ 의 주역, 경쾌한 스물다섯 홍아름] 레이디경향. 2013년 05월 06일</ref>
  • 홍양호 (1955년) . . . . 1회 일치
         '''홍양호'''(洪良浩. [[1955년]] [[5월 25일]] ~ , [[대구광역시|대구]])는 대한민국의 공무원이다.
  • 홍영식 . . . . 1회 일치
         '''홍영식'''(洪英植, [[1856년]] [[2월 5일]]([[1855년]] [[음력 12월 29일]]) ~ [[1884년]] [[12월 7일]]([[1884년]] [[음력 10월 20일]]))은 [[조선]] 말기의 문신, 외교관, 시인이다. 구한말 [[개화파]] [[정치인]]이며 [[갑신정변]]의 주역<ref>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895776 '프라하의 연인'과 김옥균, 북촌을 걷다] - 오마이뉴스. </ref>으로, 자는 중육(仲育), 호는 금석(琴石), 본관은 [[남양 홍씨|남양]](南陽)이며, 서울 출신이다. 한국 [[우편]], [[우표]] 제도의 선각자이기도 하다.<ref name="뉴스메이커"> [http://newsmaker.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5&artid=17600&pt=nv <nowiki>[우정이야기]</nowiki>우초(우표)를 아십니까] - 뉴스메이커 776호([[2008년]] [[5월 27일]]자) </ref><ref name="노컷"> [http://www.cbs.co.kr/Nocut/Show.asp?IDX=214016 근대 우편은 언제 시작됐나 : '우편, 우표, 우체국 이야기'] - 노컷뉴스, [[2006년]] [[4월 21일]]자(김선경 기자). </ref> 개화파의 중진으로서 신설된 우정총국의 총판(總辦)이 되어 낙성식을 기회로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 홍영현 . . . . 1회 일치
         |첫 출장 = [[KBO (야구)|KBO]] / [[2016년]] [[5월 14일]]<br />[[고척스카이돔|고척]] 대 [[넥센 히어로즈|넥센]]전 구원
  • 홍예슬 . . . . 1회 일치
         '''홍예슬'''([[1990년]] [[10월 10일]] ~ )은 대한민국의 희극인이다.
  • 홍정호 (핸드볼선수) . . . . 1회 일치
         '''홍정호'''([[1974년]] [[5월 6일]] ~ )는 [[대한민국]]의 [[핸드볼]] 선수이다.
  • 홍주찬 . . . . 1회 일치
         |2월 10일
  • 홍진기 . . . . 1회 일치
         | 차녀 || [[홍라영]] || [[1960년]] [[1월 10일]] || || 삼성문화재단 상무
  • 홍창선 . . . . 1회 일치
         |임기 = [[2001년]] [[6월 9일]] - [[2004년]] [[5월 30일]]
  • 황광희 . . . . 1회 일치
         | [[2015년]] [[5월 9일]] ~ [[2017년]] [[3월 25일]]
  • 황보관 . . . . 1회 일치
         [[2008년]] [[3월 25일]] [[슈에이샤]]에서 발매된 [[비즈니스 점프]]의 증간지 <BJ혼> ([[5월 1일]])에서 연재되는 '[[오이타 트리니타]] 이야기・제로부터 스타트'(원작:기무라 모토히코,작화:미야기 신지)가 [[오이타 트리니타]] 설립에 분주하였던 前 자치성 동료 [[미조하타 히로시]]와 황보관의 교류를 그리고 있다.<ref>[http://www.sportsseoul.com/news2/soccer/world/worldnews/2008/0423/20080423101020202000000_5454151980.html 황보관 오이타 총괄 본부장, 일본 만화잡지 주인공 화제]</ref>
  • 황성준 . . . . 1회 일치
         '''황성준'''([[1983년]] [[5월 1일]] ~ )은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ref>[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33XXX1302149 황성준-다음인물정보]</ref>
  • 황옥 (1885년) . . . . 1회 일치
         황옥은 재판정에서 자신이 일본 경찰의 지시를 받고 의열단에 [[프락치]]로 잠입한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유죄를 선고받고 1924년 징역 12년형에 처해졌다([[황옥 경부 폭탄사건]]). 1924년 [[김지섭]]이 [[도쿄 어소 투폭사건]] 때 사용한 폭탄도 황옥이 총독부 물건이라는 소인을 붙여 세관을 통과시킨 것이다. 이후 [[결핵]]으로 형집행정지 처분을 받고 1925년 12월 가출옥하였다가 1928년 5월 재수감, 1929년 다시 가출옥한 이후 해방될 때까지 행적은 불분명하다. [[일본 제국]]이 패망한 뒤 [[반민특위]], [[조선독립운동사편찬발기인회]]에서 활동하다가 [[1950년]] [[한국 전쟁]] 때 납북되어 이후 생사를 알 수 없다.
  • 황용식 . . . . 1회 일치
         '''황용식'''(黃龍植, [[1944년]] [[5월 28일]] ~ )<ref name="사전">{{서적 인용|title=한국인명사전 (연합연감 1999년판 별책) |publisher=[[연합뉴스]] |page=840 |date=1999-04-30}}</ref>은 [[대한민국]]의 외무공무원이다.
  • 황은진 . . . . 1회 일치
         * [[1997년]] [[5월 7일]], [[부산방송]] 부이사장 직위에서 퇴임.
  • 황의종 . . . . 1회 일치
         [[1973년]]에 〈대금과 아쟁을 위한 실내악〉 제1번을 발표한 이래 많은 창작 국악을 작곡해 왔다. [[1984년]] [[5월 18일]]에 첫 작곡 발표회를 열었다. [[1992년]]에 첫 작곡집 음반을 낸 뒤, [[2001년]] 5집까지 발매했다.
  • 황태연 . . . . 1회 일치
         |등단시기 = 2018년 5월<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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